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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인생의 고비 때마다 은총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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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크리스천인가] 지은숙 장로(경동교회, 광운대 자연과학대학장)

내가 주님을 접하게 된 것은 대학 졸업반 때였다. 당시 교육학을 전공하던 남자 대학원생 5명이 통계학 공부가 필요하다고 해 수학을 전공한 내가 두어 달 그들의 그룹스터디를 도와주게 되었다.

아직 대학생인 내가 나이 많은 대학원생들의 과외선생님 노릇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 나는 졸업을 앞두고 교제하는 이성친구도 없어 마음이 싱숭생숭하던 차여서 한 ‘아저씨’에게 마음이 끌렸다. 두 달 내내 나에게 사적인 얘기 한마디도 건네지 않을 정도로 과묵한 그의 성격을 좋게 보았던 것 같다.

어느덧 모임의 끝은 다가오고 있었고, 어느날 스터디가 끝난 후의 뒤풀이였다. 그가 동료와 나누던 대화 중 ‘교회’와 ‘주님’이라는 단어가 귀에 쏙 들어왔다.

사실 그때까지 나는 교회와 크리스천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교회라는 것은 신앙이란 이름 아래 어수룩한 사람들을 속여 헌금이란 걸 바치게 하는 조직이라는 대단히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또 소위 ‘예수쟁이’들이란 싫다는 사람을 졸졸 따라다니며 교회에 끌고 가려고 안달이 난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치부하고 있었다.

그런 내가 그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교회’니 ‘주님’이니 하는 단어에 귀가 솔깃해졌던 건 두 달 내내 그와 가까워질 방법을 고민하던 내게 그가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은 정말 유익한 정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도 교회에 나가보고 싶은데 데려가 줄 수 있느냐”고 하면 거절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날이 내 인생을 바꾸기 시작한 시발점이었다.

나는 그와 함께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그와 결혼하게 됐고, 세례도 받게 됐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믿음도 없이 그저 주말 나들이 삼아 남편과 함께 교회를 나가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남편이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나는 두 아이의 엄마로 중학교 수학교사를 계속하면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남편도 없는 시댁에서 ‘시’자 붙은 다섯 식구와 함께 살면서 두 아이를 키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힘들 바에야 남편 옆에서 힘든 게 훨씬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도 공부를 더하고 오겠다는 명분으로 두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 유학길이 알고보니 믿음 없이 ‘무늬만 크리스천’이었던 나를 위한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였던 모양이다.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통계학’을 공부하며, 살림하며, 아이들을 돌보며, 남편 뒷바라지까지 한다는 것은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엄청난 고통이었다. 그 힘든 이국생활을 견뎌낼 수 있게 해준 것이 그곳의 한인교회였다. 특히 교인들의 따뜻함과 자상한 배려는 내가 그동안 가졌던 크리스천에 대한 편견이 얼마나 엉터리였던가를 절절히 깨닫게 했다.

제대로 된 성경공부를 시작하면서 ‘내가 얼마나 못난 죄인인가’ ‘얼마나 교만하게 살아왔었나’ ‘나로 인해 주님이 얼마나 애를 태우셨을까’하는 것들을 깨달을 때마다 나는 울었고, 통곡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나는 바라던 교수가 되었다. 그 후 간간이 맞닥뜨렸던 인생의 힘든 고비는 주님이 주시는 용기와 위로로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었다. 특히 7년 전 유방암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을 때 ‘고난도 유익이라’는 말씀으로 붙잡아 주셨던 은혜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에 그토록 부정적이었던 내가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 중에서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이 가장 소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 주님이 내게 역사하신 가장 큰 기적이라고 말하겠다.

지금 봉직하고 있는 광운대에는 350명 가량의 외국인 학생이 있다. 이 중에는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종교의 자유가 없는 나라에서 온 학생들도 다수 있다. 지금 나는 유학시절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타국에서 외로움과 고통을 느낄 외국인 학생들을 보살피고 돕는 일에 열심이다. 이들이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 지역교회와 연합한 광운선교회를 중심으로 즐겁게 활동하고 있다. 또한 부족하지만 기독교수회 회장직을 맡아 봉사를 하는 기쁨도 누리고 있다.

내 작은 몸짓이나 말투가 주님의 신실한 제자로서 손색없게 되는 것이 이제 나의 가장 큰 소망이다. 모태 신앙인인 남편은 내 신앙의 든든한 백이다. 처녀시절 남편과 어떻게 해보려는 ‘불순한 마음’으로 교회를 따라나가 주님을 만났던 내가 올 5월에 섬기고 있는 경동교회에서 장로로 임직됐다. 두렵고 떨렸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꽉 잡으시려나보다’라고 생각하며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60세가 되는 해에 젊은 엄마들을 위한 성경공부반을 만들 계획을 갖고 있다. 세상을 먼저 산 선배로서 그들에게 신앙적 도움을 주는 것이 퍽 재미있고 보람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성경도 더 많이 보고, 심방도 많이 다니고, 봉사에도 더 열심히 앞장서려고 한다. 주님께서 “네가 어디에 있느냐? 라고 물으실 때 ”예, 저 여기 있습니다”라고 또렷이 답할 수 있도록 말이다.


<누구인가>

1951년 출생으로 1·4후퇴 때 피란지인 연평도에서 태어나 서울대 사범대학 수학과, 미국 마퀘트 대학교 대학원 통계학 석사를 거쳐 서울대에서 통계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림여자중학교 수학교사와 광운대학교 수학과 교수, 연구처장을 역임했다. 현재 광운대 자연과학대학장, 경동교회 시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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