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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북한에서 1% 상류층 생활 포기하고 탈북한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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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니스트 김철웅 집사

“각종 특혜와 부유한 생활 버린 채 내가 목숨 걸고 탈북한 이유”

대부분 탈북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남한에 오는 것은 ‘단지 굶주림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북한에서의 보장된 특혜와 부유한 삶을 포기하고 목숨 걸고 남한으로 온 탈북자도 분명 있다.
김철웅씨가 바로 그런 사람에 해당한다.

피아노를 위해 탈북했지만 손이 굳어버리다

김철웅집사는 흔히‘기쁨조’라고 하는 왕제산 경음악단의 공연을 즐길 수 있는 상위 1%의 평양 시민이었다. 당 간부였던 아버지와 대학 교수였던 어머니 밑에서 ‘곱게’, 자란 그는 부족한 게 없었다. 외국인에게만 개방하는 수영장이나 사우나에도 드나들었고, 그의 주머니에는 늘 달러가 넘쳐났다.

“1980년대 초부터 북한에서 예술인이 대접을 받기 시작했어요. 부모님 권유로 음악을 시작했는데 69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평양음악무용대학의 피아노 부문에 입학해서 정말 열심히 피아노를 치고 인정받는 행복한 생활을 누렸죠.”

성적이 우수해 러시아의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국립음악원으로 유학을 갈 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가 없었다. 문제는 그곳에서 20세기 현대음악들을 접하게 된 것이다. 특히 리처드 클라이더만의 곡을 들었을 때는 ‘이런 음악이 있구나’ 싶어 온몸에 전율이 느껴지기도 했다. 배우고 싶고 연주하고 싶은 음악들을 잔뜩 접한 채 북한에 돌아오자 그는 특별 관리 대상자가 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유로운 문물을 접하고 온 유학생들은 국내파에 비해 연주곡에 대한 제한이나 감시가 심한 편인데, 그는 대놓고 금지된 현대음악들을 연주하다 보니 보위부에 불려가서 시말서를 10장씩 쓰기도 했다. 이전에는 자연스럽게 김일성 어록을 읽기도 하고 자아비판도 했지만, 러시아에 다녀온 후로는 모든 걸 참아내기 힘들어졌다.

“열심히 클래식을 배워왔는데 모든 자리에서 김정일 찬가만 연주해야 했어요. 이대로는 ‘연주하는 기계’로 남은 인생을 보낼 거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북한에서의 내 지위와 특권을 모두 버리고 탈출하고픈 용기가 생기더라고요.”

하지만 그의 탈출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너 연변으로 도망쳤지만 피아노는커녕 생계조차 유지하기 힘들었다. 처음으로 배고픔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며 그는 흑룡강성 벌목장에서 길이 18m의 나무를 운반하는 일을 시작했다. 피아노를 위해 목숨 걸고 탈출했지만 상황이 어려워지자 목숨이 피아노보다 먼저였다. 손을 많이 쓰는 거친 일을 하다 보니 벌목장에서 부상을 입는 사람도 생겼고, 그럴 때마다 손을 못 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자살을 꿈꾸기도 했다.

“그렇게 7개월을 일하다가 교회에 가면 피아노를 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서 바로 교회로 달려갔어요. 피아노는 없었지만 성경공부를 하면 밥을 주고 재워주더라고요. 그러다가 부흥회가 있어서 다른 교회에 갔는데 피아노가 있는 거예요. 1년 만에 보는 피아노 앞에서 ‘살아 있길 잘했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어느새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하고 있는 저를 발견했어요.”

그때부터 교회 반주자가 되어 중국 각지를 떠돌던 김씨는 자유로운 음악을 위해서 다시 한 번 목숨을 걸고 한국행을 시도했다. 도중에 붙잡히는 바람에 결국 북한으로 호송되기도 했지만 그 과정에서 지인이 스스로를 희생하며 도움을 준 덕택에 결국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

“한국에 와서도 피아노에 관련된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어요. 라이브 카페에서 밤새워 연주하기도 했고, 피아노학원 강사로도 일했어요. 다른 탈북자들과 함께 ‘평양예술단’을 만들어 전국을 돌아다니며 공연도 했고요.”

그러다 2004년 9월 한세대학교에서 음대 교수로 일하게 되면서 비로소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제 미친 듯 피아노에 빠질 수 있게 되었지만, 탈북 후 한국에 오기까지 2년의 공백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며 쓴웃음을 짓는다.

“이렇게 인터뷰도 하고 학생들도 가르치면서 대충 연습해서는 그때 손에 받은 충격을 평생 회복하지 못할 것 같아요. 피아노를 메고 산에 들어가 한 2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연주만 해야 될 것 같아요.”

김철웅씨는 북한을 떠날 때 가족과 친구, 어느 누구에게도 탈북에 대해 의논하지 않았다. 탈북한 후 한 번도 그들의 소식을 전해 듣지도 못했다. 애인에게는 자연스럽게 헤어지자고 말한 후 ‘내가 보이지 않아도 잘 살길 바란다’는 편지를 건넸다. 행복하게 사는 가족들이 자신의 탈북에 연루되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고,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결정에 영향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

외로움 속에서도 피아노로 인연을 맺다

한국에 와서 가족 대신 서로 의지하는 탈북자들과도 쉽게 어울리지 못했다. 극심한 가난을 견디다 못해 목숨을 걸고 뛰쳐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라서 그에게 대놓고 적개심을 표현하기도 했다. “지금 북한이 이렇게 된 건 당신 같은 사람 때문이다”라는 사고가 자연스럽게 김씨를 외롭게 만든 것이다. 남한 사람들에게도 마음을 열기가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북한 사람들은 좋다는 말은 쉽게 못해도 싫으면 딱 잘라서 말하거든요. 그런데 남한 사람들은 좋으면 흔쾌히 표현하는데 싫어도 절대 드러내지 않는 느낌이에요. 좋다고 해도 정말 좋아서 그러는지 예의상 그러는지 알 수가 없어요.”

아직은 남한 사람들의 세련된 방식에 익숙해지기 힘들지만 언젠가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김씨. 하지만 쉽게 사람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라서 더욱 소중한 인연이 생기기도 했다. 그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오는 데 큰 도움을 주었던 목사는 지금도 그에게 형 같은 존재다. 그저 중국을 떠돌며 교회 반주자로 일하기에 그의 재능이 아깝다고 느낀 배영주목사는 그를 한국으로 오는 데 필요한 비용을 마련해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국에 들어온 이후로 삼일교회 개척 멤버가 되어 예배반주자로 봉사 하고있다.

“한국에 아무 연고도 없는 제가 중국에서 2년 만에 이곳으로 올 수 있었던 건 다 피아노 덕분입니다. 지금도 피아노 덕분에 남한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있어요. 피아노를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죠.”

김철웅집사는 피아노가 그를 남한으로 이끌었다면, 지금부터는 피아노로 북한과 연결되고 싶다고 말한다. ‘남북음악교류재단’의 회원 중 유일한 탈북자인 그는 앞으로 남한과 북한의 문화차를 줄이는 다리 역할을 하고 싶어 한다. 남북한 초등학생을 위한 공동 콩쿠르도 열고, 자신의 모교인 평양무용음악학교에 구하기 어려운 악보도 보내고 싶다고.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그가 오랫동안 갈구해온 자신의 길을 드디어 찾은 것 같아 보는 사람도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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