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칼럼 나의 사랑 나의 아버지

첨부 1


나의 사랑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 만드신 최고의 걸작품이자 축복의 샘인 ‘가정’의 중심엔 아버지가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권위가 점점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이로 인해 교회가 힘을 잃어가고 사회가 흔들리고 세상은 점점 더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아버지란 이름이 그 의미를 상실하고 아버지의 형상이 훼손되면서 가정의 질서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가정의 회복, 특별히 우리 아버지의 형상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되찾아야 한다. 그것이 가정은 물론, 교회를 일으키는 첫걸음이며 하나님의 나라 회복의 첩경이기 때문이다. 4명의 유명인이 행복한 가정, 밝은 사회, 건강한 세상을 꿈꾸며 아버지께 편지를 올렸다.


<안요한 새빛맹인교회 목사>

눈이 멀고서야 당신의 참 뜻 깨달았습니다

안진삼 목사. 2003년 94세를 일기로 하늘나라로 가신 선친의 존함입니다. 선친은 제게 신학교를 가라고 권유하셨습니다. 저는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삶이 탄탄대로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혼 후 미국행을 준비하던 어느 날, 모든 것이 어둠으로 변하였습니다. 37세에 시각장애인이 된 것입니다. 지독한 절망감을 맛보며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때 그토록 부인하던 그분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분은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는 여호수아 1장 5∼9절 말씀을 주셨습니다. 시각장애인이 돼 신학교 입학 허가를 받았을 때 감격적인 소식을 부모님께 전해드리고자 시골집을 찾아갔습니다. 당시 어머니는 한번도 대문을 잠그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아들이 돌아올 것이라 믿고 ‘아들이 집에 왔다가 문이 잠긴 것을 알면 문을 두드릴 용기가 없어 그냥 돌아갈 것이다’라고 여겨 언제라도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부모님께서 제가 찾아올 것을 미리 알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전날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아들이 내일 올 것”이라고 말씀해 주무시지 않고 기다리셨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따뜻한 아랫목에 저를 앉게 하신 후 제가 평소 좋아하던 삶은 계란을 주시며 세 가지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없다던 아들이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만을 위해 살던 이 아들이 하나님 일을 위해 살겠다고 하니 사용하여 주옵소서. 이 아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넓혀지는 쓸모 있는 아들로 삼아 주옵소서.”

시각장애인 사역을 시작한 지 벌써 32주년이 됐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70이 넘어서야 철이 드나 봅니다.


<김명혁 강변교회 원로목사>

옥고·순교 통해 믿고 섬기는 삶 가르쳐주셔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김관주 목사는 북한에서 목회를 하시다가 45세(1950년 6월 23일)에 순교하신 분이다.

어렸을 때 나는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했다. 목회 일에 바쁘셨을 뿐 아니라 주로 감옥에 계셨기 때문이다. 감옥에 계신 아버지를 뵙기 위해 다른 가족들과 함께 감옥을 찾곤 했다. 하지만 아버지를 직접 뵙진 못했고 담 밖에 서서 목소리를 돋우어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를 부르거나 “아버지”라고 소리쳐 부르곤 했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뵌 것은 48년 7월 사동 탄광에서였다. 그리고 다음달 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해 11세 나이에 38선을 넘어 혼자 월남했다. 이북에서 순교하신 아버지를 그리며 감사와 사랑의 글을 띄운다.

“존경하는 아버지. 오늘의 나의 나 된 것은 물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지만 그 다음으로 신앙의 씨앗을 심어주신 아버지 때문임을 고백합니다. 아버지를 이 세상 누구보다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아버지는 주님을 믿고 섬기는 삶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셨습니다.

아버지는 제 이름을 ‘명혁(明赫)’으로, ‘밝고 빛나는’ 사람이 되라고 지어 주셨습니다. 부족하지만 조금은 밝고 빛나는 한 평생을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일본 도쿄에서부터 유학생들 모임 ‘총무’의 일을 하셔서 그런지 저도 학생 때부터 ‘총무’의 일을 자주 하면서 심부름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또 강직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 고통스런 이웃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베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어린 아들이 먼저 가 있는 천국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이런 중얼거림까지 했습니다. ‘아버지, 저 좀 도와주세요. 조만간 천국에서 만나 반갑게 품에 안기겠습니다. 사랑하고 또 사랑합니다.’”


<박원희 하버드대 교육혁신정책실험실 연구원>

15년간 휴가 한번 가지 못한 ‘천생 의사’

유학생활이 어렵고 외로울 때 아버지가 보내주신 메일은 늘 힘이 됐다. 별 내용은 없었다. “식사 거르지 마라, 건강 챙기며 공부해라, 자주 소식 다오…” 정도다. 왜 하시고 싶은 말이 없으실까? 아버지는 그냥 나를 믿으신다. 그저 고맙고 혼자 해나가는 것이 대견하다 말씀하신다.

하버드대에서 전공을 바꿀 때도 “충분히 생각했느냐, 네 판단을 믿는다”고 하셨다. 또 3학년을 마치고 1년 휴학을 할 때도 역시 아버지는 흔쾌히 내 결정을 존중해 주셨다.

일본 와세다대 1년 어학연수와 선교 활동을 통해 내 신앙은 크게 성장했다, 휴식을 통해 충전했기에 하버드대 4학년으로 다시 돌아갔을 때 새로운 목표와 자신감이 생겼다.

그때 아버지는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게 사는 것인가를 가슴속 깊이 새기라”고 조언하셨다. 일본 생활은 녹록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말씀을 가슴에 새겼기에 견뎌낼 수 있었다. 하버드대 4년 동안 아버지는 한번도 나를 보러 오지 않으셨다. 미안하셨는지 내 졸업식엔 꼭 오시겠다고 4년 내내 약속하셨다. 그러나 졸업식에도 오시질 않았다. 그 이유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직업 철학이 스며 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돈 좀 벌었다고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휴가다’ ‘여행이다’ 하며 진료를 빼는 것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면서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자신과 약속하셨다고 털어놓으셨다. 그래서 개업한 지 15년이 넘었지만 한번도 휴가를 가지 않으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평소 기도를 많이 하신다. 수술을 할 때 자신의 의술 위에 하나님의 능력을 더해 수술이 더 잘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신다.

그렇다. 나도 아버지처럼 향기 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아버지의 철학을 가슴에 새기려 한다. 그 울림까지.


<가수 자두>

누구보다 살갑게 “자두야”라고 불러준 분

2001년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가수로 데뷔했고, 첫 방송을 보신 아빠와 엄마의 반응은 최고였다. 좋은 의미로 최고가 아니라 실망감이 최고였다. 당시 ‘엽기’라는 수식어로 대표되던 자두의 콘셉트가 충격적이셨던 모양이다. 딸이 ‘자두’가 된 것을 특히 부끄럽게 생각하시던 아빠가 못마땅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가수활동으로 바쁘던 어느 날 아빠로부터 한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아빠의 전화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어∼ 자두냐? 아빠다.”

내 본명은 자두가 아니다. 그래서 아빠는 나를 “자두야”라고 한번도 부른 적이 없었고, 부를 일도 없는 게 맞다. 그런 아빠가 “자두야∼ 여기 마트인데, 자두 너 뭐 먹고 싶냐? 아빠가 자두 네가 먹고 싶은 거 사가려고 하는데…. 자두야!”라고 큰 소리로 말했으니(호호).

햇수로 데뷔 10년차에 접어든 나는 여태까지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휴식의 시간을 갖고 있다. 덕분에 아빠와 소소한 일상을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아빠에게 옷이 잘 어울린다는 칭찬도, 맛있는 거 같이 먹게 일찍 들어오라는 표현도, 아빠가 대신 운전해 데려달라는 부탁도 열심히 하고 있다. 자연스레 아빠와 좀 더 많은 대화들이 오가게 되고, 아빠를 축복하는 기도를 더욱 많이 하게 된다.

지금도 아빠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르는 우리 아빠는 내 옆에서 “내가 살이 쪄서 얼굴이 자두가 아니라 감자 같다”고 껄껄 웃으며 농담을 건네고 계시다. 가장이 회복될 때 가정이 회복됨을 느낀다. 또 가정이 회복될 때 가족 개개인이 회복됨을 느낀다. 아빠를 일으키자! 아빠의 형상이 회복되며, 나아가 진정한 아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돼 친밀함에 잠기기를 축복하며 기도드린다. 올해 목표는 아빠에게 “아빠, 사랑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 출처 : 국민일보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