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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맨손으로 시작한 사업 나날이 키워주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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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크리스천인가] 박경진 진흥문화사 회장

"권사님! 오늘은 저를 따라가십시다."
"예? 어디를 가실 건데요?"
"글쎄, 가보면 압니다."
"목사님! 사실은 오늘 꼭 물건을 배달해주고 수금하기로 약속한 곳이 있어서 참 곤란한데요."
"권사님 글쎄 오늘 할 일 내일로 미루고라도 꼭 함께 가셔야 합니다. 빨리 준비하고 나오세요."

1978년 3월5일, 봄을 앞당기듯 바람도 없는 유난히 따뜻한 아침이었다. 목사님의 억지에 못 이겨 따라나서기는 했으나 두고 온 일이 마음에 걸려서인지 날씨와는 달리 내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목사님이 몰고 온 낡은 봉고차 엔진소리는 그날따라 더 요란했고, 서대문을 지나 꼬불꼬불한 언덕길을 오르는 동안 차에서 내뿜는 매연냄새는 앞자리까지 심하게 코를 찔렀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감리교총회신학교였다.

그날 그렇게 나를 강권하신 분은 유신교회의 창립자인 유인상 목사님으로, 내가 상경하던 날 목사님 댁 마루에 짐을 풀고 서울생활을 시작한 인연이 있다. 그때 유신교회는 가정집에서 예배 드리는 개척교회 초기였다. 당시 유인상 전도사님은 사택을 교인들의 생활터전으로 개방하고 예배실로 사용하기도 하면서 가진 것을 늘 교인들과 함께 나누고 베푸셨다. 그날도 전도사님이 신학교 입학을 위한 등록금과 구비서류 일체를 이미 제출한 뒤여서 나는 그냥 따를 수밖에 없었고, 하루 사이에 신학생이라는 신분으로 변해 있었다.

신학생 첫날 오리엔테이션 시간, 나는 가슴에 벅차오르는 흥분을 억누를 수 없었다. 당시 생업에 얽매여 가난한 막벌이 품꾼이었던 내 처지를 생각지 않을 수 없었지만, 나는 오히려 점차 태연해지고 있었다. 자력으로는 감히 꿈꿀 수조차 없었던 신학생이 돼 수업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수록 눈물 나도록 전도사님에게 감사했다. 전도사님은 당시 내 인생이 너무나 잘 풀리지 않아 고생만 하니까 신학공부를 해 목회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주방용품 중간 도매업을 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오토바이를 타고 서울시내 재래시장의 생필품 가게를 찾아다녔다. 그렇게 버스 뒤에서 뿜어대는 매연으로 새까맣게 된 얼굴을 씻지도 못한 채 오후 5시가 되면 강의실로 들어갔다. 수업을 마치고 밤 10시가 넘어 집으로 와서 밤늦게까지 리포트를 쓰고, 강의내용을 정리하는 것으로도 공부가 벅찼다. 그러나 신학공부의 꿈, 가족의 생계를 위한 장사꾼의 몫, 나는 어느 것 하나도 포기할 수 없었다.

내가 크리스천이 된 것은 열두 살이던 1951년이었다. 당시 1·4 후퇴로 내려온 피란민이 우리 학교 교실에서 예배 드리던 모습에 반한 후였다. 청년시절의 나는 비닐하우스 특수작물을 재배하며 고소득을 꿈꾸는 영농인으로서 나름의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첫 열매를 따는 날이면 그것을 갖고 교회로 달려가며 '지금은 이렇게 농사꾼이지만 앞으로 목회자가 됐을 때 그때에 나 같은 교인이 많아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곤 했다. 당시 성연교회에 첫 부임하신 33세의 박상호 전도사님은 내 인생의 최우선순위에 하나님을 두는 철학, 절제와 근검절약의 정신, 그리고 기도생활의 중요성 등 내 신앙이 뿌리를 내리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훌륭한 멘토를 만난 행운 때문인지 나는 마라톤 선수처럼 십리가 넘는 거리를 뛰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다. 금식도 철저히 이행했다. 간혹 남의 집에 품꾼으로 일한 날, 저녁식사가 진수성찬으로 차려졌어도 그날이 금요일이면 꼭 금식하고 속회예배에 참석했다. 그렇게 훈련된 신앙의 기초는 삶의 고달픈 여정을 극복하게 한 무형자산으로 야간신학교를 잘 마치게 해주었다.

이런 역경을 거쳐 하나님께서는 나를 목회자가 아닌 기독교문화사업체 대표로 세우셨다. 두 주먹 쥐고 시작한 사업은 이제 120여명의 진흥가족으로 늘어났고, 연간 600여만부의 캘린더를 생산하고 도서출판, 크리스천 팬시, 진흥기독교 백화점 등 다양하게 기독교문화사업을 펼치는 사업가로 키워주셨다. 또한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 회장, 감리교 장로회전국연합회 회장의 사명도 감당하게 하셨다. 그 옛날 가난한 나에게 베푸는 삶의 모범을 보여준 목사님처럼 나 또한 사원들을 가족같이 생각한다. 또 1996년부터 시작한 해외 입양아초청모국방문 행사는 올해로 12주년을 맞는다.

진흥을 일구기까지 나는 그날그날 먹고 살기 위해 뛰었을 뿐인데 하나님은 물질, 명예, 행복을 선물로 주셨다. 내가 크리스천일 수밖에 없는 이유, 그것은 부족한 나의 남은 부분을 채우신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체험했기 때문이다. 가야 할 바를 알지 못했던 아브라함처럼, 막막한 중에도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이고 주께서 내게 품으신 삶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누구인가?>

1944년 충남 서산출생, 협성대 선교신학과, 서울시립대 경영대학원 AMP수료, (사)한카문화교류협회장, 감리교 실업인회 회장 역임, 현재 기감 장로회전국연합회장, 홀리원투어 대표, 진흥문화사 회장, 왕십리감리교회 장로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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