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존재에 대한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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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존재에의 용기(Courage to Be)'라고 하는 그 유명한 책에서 이렇게 역사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고대인의 불행은 숙명과 죽음의 문제에서 왔다.’
모든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어떤 고난도 팔자요, 운명이라고 받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운명에 저항 할 생각을 못했어요.
그대로 그 많은 고생을 치르며 수천년을 살아오게 됩니다.
중세기 사람들의 불행은 죄와 벌에 있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은 저주다.
죄에 내리시는 신의 저주다.
죄와 벌! 그 무서운 심판 앞에서 벌벌 떨면서 흑사병이 돌아도 저주다.
전염병이 돌아도 저주다.
홍수가 나도 저주다.
이렇게 몰아치는 무서운 저주 속에서 저들은 헤어나지 못하고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은 그 불행의 원인이 생의 무의미에서 비롯된다고 신학자는 말합니다.
'무의미함'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배고픈 것도 아닙니다.
집이 없는 것도 아니에요.
왜 그렇게 걱정이 많습니까?
왜 그렇게 고독해 하는 것입니까?
왜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왜 감사가 없고 왜 감격이 없습니까?
그만하면 감사 감격할 만도 한데.
뭐 때문에 감사를 잃고 행복을 잃고 자유를 잃은 것입니까?
현실에 보이는 세계에만 집착하고 삶의 깊은 것을 들여다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존재와 모든 삶을 있게 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이요, 물질적이고 현상 중심의 찰나적 생각만 있을 뿐, 이 모든 것의 근본인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불신앙이 현대인의 불행의 원인인 것입니다.
‘고대인의 불행은 숙명과 죽음의 문제에서 왔다.’
모든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어떤 고난도 팔자요, 운명이라고 받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운명에 저항 할 생각을 못했어요.
그대로 그 많은 고생을 치르며 수천년을 살아오게 됩니다.
중세기 사람들의 불행은 죄와 벌에 있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은 저주다.
죄에 내리시는 신의 저주다.
죄와 벌! 그 무서운 심판 앞에서 벌벌 떨면서 흑사병이 돌아도 저주다.
전염병이 돌아도 저주다.
홍수가 나도 저주다.
이렇게 몰아치는 무서운 저주 속에서 저들은 헤어나지 못하고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은 그 불행의 원인이 생의 무의미에서 비롯된다고 신학자는 말합니다.
'무의미함'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배고픈 것도 아닙니다.
집이 없는 것도 아니에요.
왜 그렇게 걱정이 많습니까?
왜 그렇게 고독해 하는 것입니까?
왜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왜 감사가 없고 왜 감격이 없습니까?
그만하면 감사 감격할 만도 한데.
뭐 때문에 감사를 잃고 행복을 잃고 자유를 잃은 것입니까?
현실에 보이는 세계에만 집착하고 삶의 깊은 것을 들여다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존재와 모든 삶을 있게 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이요, 물질적이고 현상 중심의 찰나적 생각만 있을 뿐, 이 모든 것의 근본인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불신앙이 현대인의 불행의 원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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