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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사랑의 원자탄’ 같은 참 목자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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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원자탄’ 같은 참 목자 없소?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킨 손양원 목사 
 
- 송태흔 목사(엘림코뮤니오)


손양원은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653번지에서 손종일 장로와 김은주 집사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1914년 4월 1일 칠원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해 일본의 왕이 사는 동쪽을 향해 절할 것을 강요하는 동방요배(東方遙拜)로 어려움을 겪었다. 보통학교 3학년 때인 1916년 그가 궁성요배는 성경이 금하는 제1계명을 범하는 것이라 거절하자 퇴학을 당했다.

이후 맹호은 선교사 도움으로 복학해 학업을 계속하던 중 주일날 학교에 출석하라고 하자 하나님께 예배해야 한다며 출석하지 않았다. 1919년 3월 24일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성적이 우수한 그는 서울 중동학교에 진학해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만두장사를 했다. 중동학교 시절, 안국동교회에 등록해 주일을 성수하며 십일조 생활을 철저히 했다. 1920년 4월 3일 3·1운동 여파로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징역 8개월의 실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게 됐다.

극심한 생활고에 빠진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수중에 남은 돈 70전을 안국동교회에 헌금으로 모두 바치고 낙향했다. 이후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스가모(巢鴨)중학교 야간부에 입학했다. 아침과 낮에는 우유와 신문을 배달했고, 밤에는 공부해 1923년 졸업과 함께 귀국했다.

1926년 3월 경남 성경학교에 입학해 부산 감만동 한센병자 교회 전도사로 일했고, 1935년 4월 5일 33세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대동강변 능라도교회 전도사로 사역했다. 손양원은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참배를 강력 반대했다. 1938년 3월 제33회로 신학교를 졸업한 후 1년간 부산지방 순회전도를 하면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1939년 37세로 7월 14일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있는 여수 애양원교회 담임으로 부임했다. 평양신학교 2학년 때 애양원교회 사경회 강사로 초청된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애양원교회는 외부 사람이 방문할 때 하얀 가운을 입고, 하얀 장갑을 끼도록 규정했다. 그런데 강사로 초빙된 손양원은 교회당에 들어가면서 이를 거절하고 그냥 들어갔다. 교회 성도들은 그런 손양원의 용기에 큰 감동을 받아 애양원교회 담임으로 청빙했다.

교회에서 설교할 때마다 그는 신사참배의 신학적 부당성을 강력히 지적했다. 반기독교적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본은 곧 망할 것이라고 소리높여 주장했고, 성도들이 신사참배를 못하도록 철저히 교육했다.

그는 한센병 환우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으며, 심지어 잠자리도 같이했다. 당시 애양원교회에는 눈을 잃어버린 사람, 손이 꼬부라진 사람, 걸음걸이가 부자유한 사람, 얼굴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진 환우들이 많았다. 사람들이 출입하는 식당, 다방, 극장, 목욕탕 및 이발소에 그들이 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누구도 그들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았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외면했다. 특히 14호실은 상태가 매우 심한 중환자들이 모여 있는 병실이었다. 그 중환자실에는 같은 한센병 환우들도 들어가기 꺼리는 곳이었지만 손양원은 그 곳에서 중환자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안고 기도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한센병 환우들이 손양원의 신앙 지도를 받으면서 소망을 품게 됐다.

1940년 9월 25일 손양원은 수요예배 후 여수 경찰서 소속 형사에 의해 ‘신사참배 거부와 선량한 주민 선동죄’로 연행돼 1년 6개월형을 받았다. 1943년 5월 17일 만기 출옥을 앞두고 담당검사가 그에게 신사참배를 하도록 강요했다. 손양원은 신사참배에 대한 유혹과 핍박의 손길을 단호하게 뿌리치고 광주·경성·청주 등의 구금소를 옮겨 다니면서 6년간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도 기도와 찬송, 성경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사랑을 실천해 동료들로부터 옥중 성자로 불렸다. 8·15 해방과 함께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애양원교회를 찾았고, 교우들의 신앙은 더욱 강하게 불탔다. 그는 1946년 3월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한센병 환우들을 위해 더욱 헌신했다.

1948년 10월 19일 제주 폭동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여수에 집결했던 남로당 계열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약 4시간 만에 여수 시내 경찰서와 파출소, 군청, 역 등 주요 기관을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했다. 반란군들은 인민위원회를 만들어 자신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무조건 잡아 죽이는 민족 대학살극을 벌였다. 손양원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은 각각 순천 사범학교와 순천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아버지를 닮아서 신앙과 민족 정신에 불탔던 두 형제는 학교 안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하며 공산주의의 잘못을 폭로했다. 학교에 들어온 공산주의 프락치들은 그들을 체포해 한꺼번에 총살했다. 손양원은 두 아들의 장례식장에서 다음과 인사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왔으니 하나님께 감사한다. 둘째, 보배들을 내게 주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한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을 바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한데 두 아들을 순교의 제물로 삼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인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했으니 하나님께 감사한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이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하나님께 감사한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여덟째,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하나님께 감사한다. 아홉째,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과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한다. 열 번째, 분수에 넘치는 큰 복을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린다.”

여수, 순천 반란 사건이 진압된 이후 동인과 동신 두 형제를 죽인 안재선도 체포됐다. 손양원은 계엄사령관을 찾아가 그의 석방을 간청했다. 손양원은 석방된 안재선을 양아들로 삼아 부산의 고려 성경 고등학교에 수학하도록 배려했다.

손양원은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돼 28일 저녁 11시 여수 근교 미평에서 48세의 젊은 나이로 총살당했다. 마지막까지 하나님 맡기신 양들을 사랑으로 보호하고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 개머리 판으로 입을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 되었으며,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서도 기도를 잃지 않으며 신앙의 굳은 지조를 지켰다.

개인의 유익만을 삶의 유일한 가치관으로 정하고 살아가는 이 시대에 내가 아닌 이웃을 위해 몸과 마음을 모두 바칠 참 목자와 교회를 우리는 만나고 싶다. 나라와 민족과 교회와 우주를 위해 자신을 철저히 죽일 수 있는 참 사도, 21세기형 손양원의 출현을 하나님은 고대하고 있다. 신실한 하나님의 교회는 신앙의 지조를 지키며, 나의 것을 잘라서 부족한 이웃에게 베푸는 모임이다.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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