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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밴드목회 - 제2과 하나님의 바른 관계성을 가진 가정의 창조와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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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과 하나님의 바른 관계성을 가진 가정의 창조와 파괴

 

▣밴드목회 2강 [제1장 교회론]

 

이제 교회라고 하는 밴드 목회라는 1차 세미나 2차 세미나를 했는데 여기에서 놓쳐 가지고 이해를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아요. 오늘 이 밤에 대단히 중요한데요 '교회론'입니다. 우리가 밴드 목회라는 것이 어떤 방향성을 띄고 나가는 것이냐 하면 교회론적인 것을 뚜렷하게 알고 나가야 뒤에가 정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밤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1. 창조된 가정 -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6-28)

 

오늘 여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복준 내용이 여기 나와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바른 관계성을 가진 가정창조에서 살펴보겠는데 저는 교회론을 어디에서 찾고 있느냐 하면 창조, 하나님의 창조, 아담과 하와를 만들어 놓은 가정이라는 곳에서부터 교회론을 정립해 보자는 의미로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만드셨는데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먼저 천지만물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렇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좋았더라, 좋았더라, 좋았더라' 계속 좋았더라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까 읽었던 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이 창조해 놓은 피조물을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 모습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이 좋으신 거죠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마치 어린아이를 밴 엄마가 그 아이를 위해서 아이가 태어나면 이부자리, 애기옷, 목욕통, 젖병을 준비하는 이 아이를 위해서 모든 것을 준비해 놓을 때마다 엄마의 심정은 좋은 것입니다.

 

이 아이가 이것을 입고 소록소록 잠자며 편안하게 지낼 것을 생각할 때에 보기에 좋은 것입니다. 이 자체 물건이 좋은 것이 아니고 이 뱃속의 아이가 출생해서 그것에서 누리면서 편안하게 지낼 것을 생각하니까 보기에 좋은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이죠.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천지를 창조하시고 창조하실 때마다 좋았다는 고백은 다른 것이 아니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표현이라는 것을 우리가 먼저 알아야겠습니다.

 

 

 

1) 사랑의 관계

 

제일 먼저 맺어지는 게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천지창조를 통해서 제일 먼저 맺어지는 게 사랑의 관계입니다. 사랑의 관계, 이렇게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리고 우리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마음껏 내가 먹고 마음껏 내가 누리며 그리고 내가 이름도 짓고 각종 실과를 내 마음대로 따먹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무얼 요구했냐 하면 최소한 질서만 요구했습니다.

 

질서, 그 질서가 무엇이냐 하면 모든 것을 다 먹어라 다 좋은데 계명 하나만 너하고 나하고 지키자.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계명을 주었는데 모든 것은 다해도 좋은데 요것만하지 말아라 하는 질서를 준 것을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법을 주었다' 우리 목사님께 제가 물어 보겠습니다. 법을 지키기가 어렵습니까 어기기가 어렵습니까? 교인들만 대답하라 하지 말고 우리 목사님들도 한번 대답해 보세요.

 

법을 지키기가 어렵습니까? 어기기가 어렵습니까? 법의 종류가 다 다릅니다. 우리 목사님들 다 합리적인 대답을 하시네 네, 법이라는 게 지키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어기기가 힘들다. 대개 법을 어기는 사람은 법을 빠삭하게 압니다. 저같은 사람은 법에 대해서 전혀 몰라도 자유스럽습니다. 왜냐 법을 어기지 않고 그 안에 사니까 자유스러운 거죠. 우리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 완전히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사람은 하나님 말씀에 살기가 편합니다.

 

그런데 이것 줄타기하는 교인들이 있어요. 세상으로 갈까 교회로 갈까 이분들이 예수 믿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분들이 완전히 남이야 어차피 예수 안에 들어와야 할 사람이야 그 안에 들어간 사람은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어 놓은 것은 우리로 하여금 법에 얽매어 놓아서 고통에 빠뜨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들을 보호 하고자 하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인격적인 관계, 자발적인 사랑의 관계를 하자는 것입니다.

 

강압적인 것이 아니라 은혜 안에서, 진리 안에서 계명 안에서 우리가 자유를 누리자는 것입니다. 그래 우리 예수님은 이러한 계명을 통해서 최소한 질서를 주었는데 '중앙에 있는 선악과만 먹지 말라 그것을 먹으면 네가 죽는다' 우리 하나님이 여기서 계명을 준 것은 다시 말합니다. 인격적 관계를 맺자는 것입니다.

 

인격적 관계, 강압적 관계가 아닌 예를 들면 부부간에 사랑하는데 강압적으로 빨래해, 안한다고 하니까 남자가 여자를 때린다든지 밥을 안한다고 때린다던가 하면 살수가 없지 않습니까? 스스로 인격적으로 사랑이 가서 밥도 하고 서로 도와주고 이런 모습으로 나타날 때 이런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최고의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과의 닮은꼴이 인간을 만드시고 스스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자발적인 인격적 관계를 형성시킨 것이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것을 어김으로 인해서 그것이 깨어졌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질서라는 것입니다. 질서, 자유와의 관계입니다. 그 안에 살아갈 때 얼마든지 평화의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는 이것이 하나님이 계획하고 계신 교회라는 거죠. 교회, 쉽게 이야기하면 정리해 봅시다.

 

제일 위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창조하는 가운데서 누구를 만드셨습니까? 아담을 만들었습니다. 아담은 사람이란 뜻이죠 우리 하나님이 아담에게 무엇을 주었냐 하면 계명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의 걸작 중 최고의 걸작을 만드시고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형성하기 위해서 준 것이 무엇이냐 계명입니다. 이때부터 하나님과 아담은 유무상통합니다. 계명도 주고받고 한 것이 에덴 동산에서 함께 교통하면서 아주 화평하게 살아갑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과 아담과의 관계, 철저한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의 신앙이죠, 우리 하나님이 아담이 혼자 독처하는 것이 좋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아담을 깊은 잠에 들게 하시고 새로 한사람을 만들었는데 누구입니까? 하와,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하와를 이끌어 아담에게 데려다 주었습니다. 아담,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가 한참 좋고 너무너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게 보인지라 그래 우리 하나님이 하와를 만드시고 하와를 이끄시고 누구에게로 왔어요? 잘 들으셨네 목사님들, 아담에게 왔습니다. 하나님이 이끌어 오셨습니다.

 

그 앞에서 만들어 놓고 여기 있다가 아니고 하나님이 만들어선 아담에게로 이끌어 왔습니다. 이때 아담이 하와를 보고 무어라 이야기합니까?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로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하와에게 어떤 계명도 준 적이 없습니다. 성경을 보아도 하나님이 하와에게 계명을 준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 주었습니까? 아담에게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어요 하나님도, 아담도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서로 관계가 잘 맺어졌어요. 하나님과 아담과의 관계가 좋아지니까 하나님이 아담이 혼자 지내는 것이 좋지 않다 해서 하와를 만들어서 아담에게 이끌어 주니 아담이 무어라 고백하느냐 하면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다'고 고백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금 무엇을 계산하느냐 하나님과 사랑이 맺어진 아담, 하나님의 계명이 주어진 아담에게 우리 하나님은 이를 통해서 계명이 여기에 전달되기 원하고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맺어진 그 사람이 하와에게 전달되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공동체 하나가 되어서 이 사람을 통해서 하와가 누구를 발견해야 옳으냐? 하나님을 발견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와가 하나님을 발견하기 전에 누가 여기에 새롭게 등장하느냐 하면 사단이 등장합니다. 사단이 등장해서 하와를 유혹합니다. 누가 왜 '이 중앙에 있는 걸 하나님이 먹지 말라 하더냐'했을 때 아담에게 들은 이야기로 확실하게 듣지 못했어요. 하와가 분명하게 이 사림이 양육을 못 받았어요.

 

그로 인해서 '이것을 먹으면 죽는 데나, 어찌되나' 그랬죠 성경에 죽을까 하노라 말이나 '죽는 데나 어쩐 데나'하는 말이 똑같죠. 그랬으니 긴가민가하죠. '너 안 죽어 너 하나님과 될 수 있어'하면서 하와에게 하나님을 불신하게 만듭니다. 결국에 하와는 사단의 말을 듣게 되고 선악과를 따먹게 되었습니다.

 

이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로 인해 아담에게까지 갔다. 아담에게 미친 영향으로 결과로 아담은 누구와 단절이 되었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요구하는 교회는 가정 같은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계명을 주었고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가 맺어진 상태에서 이웃을 주어 이 이웃이 아담에게 이끌어져 왔고 이끌어 온 아담이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알게 되고 하나님이 사랑을 깨닫게 되는 순간에 하나님을 발견하는 이런 가정과 같은 교회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자 여러분 우리가 어디에서 답을 찾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마태복음 22:37-38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아담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너와 나와의 관계는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너와 나하고는 죽기 살기로 하자' 그런 이 사랑만 가지고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 받았습니다. 좋습니다. 여기까지 이 수직적인 신앙이 한국 교회에서 좋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도 좋습니다.

 

그럼 우리 하나님이 아담이 혼자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아서 누구를 보내 주었답니다. 이웃을 보내 주었습니다. 이 이웃을 요한복음 6:44에서는 "나를 보내서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네게 올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이 예수께로 한 영혼이라도 보내 주지 않으면 주님 앞에 올 자가 없습니다. 목사님들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이 하와는 만드시고 아담에게 이끌어 왔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관계가 잘 맺어 있는 기존교인입니다. 이 기존 교인에 너 혼자 지내는 것이 옳지 않아 네 이웃을 데려다 줄께. 그래서 이웃을 한 영혼을 데려다 주었다는 거죠. 그러면 그 이웃이 왔을 때 하나님과 관계가 똑바로 맺어졌다면 이 사람에게 무어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무어라 이야기 하느냐 하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이나 똑같은 말입니다. 이것을 어떤 부부간에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감추어져 있는 비밀적인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엡5장에 나오는 말입니다. 제가 이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들의 교회에 병이 든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과 이 아담과의 관계가 좋을 때처럼 좋은 수직적 신앙은 아주 좋다는 것입니다. 잘합니다. 교인들이, 열심 있고 십일조도 잘하고 교회도 열심히 나오고 잘합니다. 문제는 하와란 이웃을 나에게 데려다 주었는데 이 사람과의 관계가 안된다는 거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이 안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럼 새로운 사람이 하나님을 발견할 길이 없어요. 누구에게 말씀이 주어졌느냐 먼저 믿는 우리에게 주어졌거든요., 이 계명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은 사랑하는데 목숨을 다해서 사랑한다면 이웃을 사랑해야 하거든요. 이 사랑을 가졌을 때 누굴 발견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을 발견하는데 그분이 하나님입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단이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하와가 아담에게 영향을 미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 버렸습니다. 그런 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아담아 누가 너희들에게 중앙에 있는 나무 실과를 먹으라고 했느냐'그랬을 때 아담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을 때는 무엇이라 했는가 하면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고백하던 아담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준 저 여자가 먹으라고 했습니다'

 

하나였던 관계가 둘로 나누어지기 시작합니다. 성경이니까 저 여자라고 그랬겠지 여기 목사님들 계시지만 '저년'이 먹으라고 그랬습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당장 저년 때문에 망했습니다. 뭐죠, 원망, 불이해의 관계가 생깁니다. 이것을 우리가 근거로 해서 본다면 우리 교회 안에 사랑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 이유는 이것은 누구의 잘못이 아닙니다.

 

먼저 믿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야죠. 한 영혼을 내가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없다면 이것은 이미 여기서 금이 갔을 때 이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지듯이 내가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 사람을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의 지배를 받느냐 사단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들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만 열심히 해야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당 중심이고 예배중심, 헌금중심, 행사중심이고 그것은 열심히 하는데 이웃과의 관계는 어떠냐? 성도와의 사랑하라는 이야기인데 이웃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데려다 준 사람이 바로 내 이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을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해야 하는데 그것이 안되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것을 회복하고자 세워 놓은 것이 우리 교회, 가정교회라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목사님들이 즐겨 쓰는 대목인 에베소서 5:22에서는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지금 아내와 남편의 이야기를 하면서 꼭 대두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을 꼭 비유하면서 이야기합니다. 바울이 지금 부부의 관계는 무어냐 하나의 가정을 강조하고 있는 모습 아닙니까? 가정을 강조하는데 가정과 똑같은 곳은 어디냐, 교회라는 거죠. 그러다가 교회의 가정을 동등한 위치에 놓고 설명한 것입니다. 아내의 머리는 남편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입니다. 이런 식으로 풀기 시작합니다.

 

24절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지금 교회와 가정이 똑같다는 걸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25절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얼마만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 같이 아내들도 남편을 사랑해라. 남편들도 아내를 사랑하라. 지금 교회와 가정의 관계를 계속 반복하면서 들어가는 것은

 

26-27절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타나 주름, 정한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렇게 부부간에도 서로 사랑하고 복종하는 관계를 통해서 흠과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어져야 되듯이 교회도 이같이 해야 합니다.

 

28절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요,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무엇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까?

 

32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아내와 남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아내와 남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교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로 교회에 대한 비밀적인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어떤 교회냐, 가정교회입니다. 가정같은 것이 아니라 가정인 교회입니다.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을 바울은 강력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밴드 목회가 무엇이냐,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나누고, 서로 대화하고, 서로 관심을 쏟을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주는 가정,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것이 어디에서부터 이루어졌냐 창세 전부터 이루어졌습니다. 에베소서 3:9-10입니다.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 비밀의 경륜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입니까?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사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창세 전부터 감추어졌던 비밀스런 교회,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그 교회가 어떤 교회냐 5장에 나와 있는 바로 '가정인 교회'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가 형성되어져야만 반드시 교회다운 교회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서 목회사역을 하셨습니다. 웨슬리만 그런것이 아니라 사도들도 그러한 교회를 세워 나갔습니다.

 

 

 

제가 설명한 것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가정,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있는 가정,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가정이란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엄연히 내재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그들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하나님 중심의 삶, 제일 중요한 삶,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가 성립되어 어떤 욕심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중심적인 삶만 살면 됩니다.

 

이 때 너무너무 좋아서 사랑의 관계가 맺어질 때 아담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사랑으로 인격적인 관계가 맺어질 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 자신과 하와는 각각 독립적인 존재임을 불구하고 하나라고 고백한 이 고백은 하나님의 사랑이 내재하지 않고는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교인들끼리 옆사람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라고 하면 '별 미친놈 다 보았네' 이 소리 듣죠.

 

내 남편도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소리가 안 나오는데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관계가 나옵니까?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철저하게 하나가 되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되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는 관계가 아니면 이 관계는 절대 맺어질 수 없습니다.

 

초대 교인들이 공동으로 모든 것을 공유했잖아요. 왜 저 사람들은 공유할 수 있었냐 하면 이 사람들은 내일이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붙들리면 죽는 것이기에 이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욕심이 없습니다. 오직 주만을 살겠다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무상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욕심과 내 사리사욕이 밝혀져 있으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생명같이 사랑할 때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아담과의 관계가 뜨겁게 되었을 때 이웃을 주었고 그 이웃인 하와를 하나님이 이끌어 주었습니다.

 

창세기 2: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분명히 하나님이 이끌어 오신 것입니다. 이 내용과 똑같은 것은

 

요한복음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다시 살리리라" 여기 보세요. 아버지께서 이끌어 오셨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교회에 한 영혼이 와 있다는 것은 스스로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이끌어 왔습니다.

 

먼저 믿은 우리에게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보내셨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에게 진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고 따르면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어려움이 있으면 요즘 교인들은 자신의 어려움을 십자가라 하는데 그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나를 살리기 위해서 지신 십자가"입니다. 나를 죄악의 자리에서 멸망의 자리에서 구원하여 생명의 자리에 옮겨 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들보고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너도 죽으라'는 것입니다. 너도 너를 살려주기 위해서 죽지 않았느냐 옆에 사랑하라고 내 이웃을 데려다 준 한 영혼을 위해서 네가 죽으라, 희생하라, 그 영혼이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어 굳게 서기까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전혀 교회가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는 교회는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기업체지 무슨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까? 마태복음 7:21에 얼마나 하나님 앞에 똑바로 잘하는가 보세요.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내가 주의 이름으로 능력도 행하고 내가 주의 이름으로 병도 고쳤다"는 거죠. 그런데 나는 몰라 "주여 주여"한다고 천국 가는 줄 아느냐, 요한일서에서 분명히 강조하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아직도 어둠에 있는 자요, 형제는 사랑하는 자는 생명이 있는 줄 안다. 구원을 얻은 자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 다음에 이웃 사랑입니다. 이 이웃 사랑을 맺기 위해서는 틀림없이 가정 공동체를 만들지 않으면 안됩니다. 가정교회 하나님이 여자를 만드시고 이끌어 오신 것이나 요한복음 6:44이 새가족을 교회에 정착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한 영혼이 이끌고 왔을 때 한 영혼을 위해 생명을 걸고 그 영혼을 책임져 주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모습이 나타납니다. 교인 하나가 안 오면 새가족이 안 오면 엉엉 울고 있습니다. 멸시와 수모를 당하면서 쫓아가서 그 영혼을 끄집어냅니다. 생명을 살려냅니다. 왜 예수님이 나를 살리기 위해 죽으셨는데 나도 저 영혼을 위해 죽으라고 난 저 영혼을 위해 죽어야지 이런 사명감 거기에 그 사랑에 녹아 납니다. 새가족들이 거기에 녹아 나서..

 

 

 

2) 자유의 관계

 

 

 

그 밑을 봅시다. 사랑의 관계에서 인간을 만들기 전 완벽한 환경을 미리 준비하신 것은 사람을 향한 큰 사람을 표현한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태중에 아기를 위해 모든 것을 기쁨으로 준비하며 한없는 사랑을 표현한 것 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기 전에 우리가 살 수 있는 모든 환경을 최상의 것으로 준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을 받았기에 우리는 인격적이며 깊은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와를 향해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다'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표현입니다. 자신과는 분명히 각각 독립적인 존재임을 불구하고 하나라고 고백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내재하지 않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사랑의 관계가 맺어진 그 안에서 자유의 관계가 맺어집니다.

 

18 페이지 여섯 번째 줄입니다. 당신과의 관계 속에서 자유를 마음껏 누리기 위하여 최소한의 질서를 주셨는데 그것은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습니다. 이 나무의 실과를 먹는 날엔 정녕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무절제한 방종을 원하지 않으시고 창조주의 피조물의 바른 관계성 속에서 얻는 자유를 허락하셨습니다.

 

우리 잘 아는 대로 8.15 해방 후 자유당 시절에 어떤 젊은이가 기차를 타고 가는데 자리에 벌렁 누워서 자니까 어떤 할아버지가 '이보게. 젊은이 나 자리좀 앉게 자리 양보좀 하게. 일어나 앉게' 그랬더니 '아 왜 그러세요 내 자유입니다.' 할아버지가 긴 곤봉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끝은 구리였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이마빡을 지지면서, 얼마나 뜨거운지 깜짝 놀라 일어나면서 '왜 이러세요 할아버지' '내 자유다, 이놈아'

 

자유라는 것은 마음껏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규칙이 있고 룰이 있습니다. 자유라고 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은 방종입니다. 분명히 룰 안에서 규칙 안에서 자유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모든 것이 자유입니다. 그런데 질서는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는 질서 안에서 자유입니다. 그래서 계명을 주었습니다. 교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계명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사는 것은 믿는 자의 삶이 아닙니다.

 

 

 

3) 평화의 관계

 

 

 

하나님의 동산은 평화의 동산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가정도 평화의 가정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통해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고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자유롭게 대화도 하였습니다. 이런 때는 미움도 다툼도 시기도, 증오도 없습니다. 이 가정은 사랑이 넘치니까 평화가 있습니다. 싸울 일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참 좋고 이웃과의 관계성이 잘 맺어진 이 가정은 사랑과 자유, 평화가 있습니다.

 

 

 

2. 창조된 가정의 파괴 - 하나님의 가치관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문제는 이것이 파괴된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이분들을 통해서 이분들이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먼저 믿은 사람들이 하와에게 신앙의 영향을 주어서 이 하와가 하나님을 발견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것이 아니고 지금 이 사람들이 하와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해요. 아담이 여기에다 영향을 끼치지 못했던 것처럼 영향을 전혀 못 끼쳐요. 오히려 사단의 지배를 받은 하와가 아담에게 영향을 주어서 아담과 하나님의 관계를 단절 시켜 버리지 않습니까 교회도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 곳도 교회입니다.

 

그런데 불신앙적인 인간을 통해서 교회가 지배되어 졌습니다. 교회의 중직이라는 사람들이 진짜 신앙인이 얼마 없습니다. 거듭남의 삶을 살아간 사람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진정 이렇게 불신앙적인 요소를 가진 이 사람들 때문에 교회에 먼저 믿었던 사람들도 영향을 미쳐요. 세상에 아직도 불신앙적인 요소를 가진 사람도 영향력을 끼칩니다.

 

인천 모지방에 부흥회를 갔을 때 그 지방에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장로있는 교회와 없는 교회로 두 지방이 나누었는데 왜 이 지방으로 나누었느냐고 하니까 장로들끼리 목사 못 내어쫓는 교회는 병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거기서는 한번씩은 내어쫓습니다. 어디라고 하면 알기에 감리교에서는 다 알 것입니다.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사단의 사주를 받고 있는 불신앙의 사람들이 영향을 끼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당연히 이 사람이 철저해서 이 사람에게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힘을 잃고 있으니 안됩니다. 교회가 이 사람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철저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철저한 관계를 회복시켜 놓지 않으면 교회는 살길이 없습니다. 날마다 목사님들이 얻어터지고 이리저리 쫓아 다녀야 되고 문제 속에서 헤매어야 되고 교회답지 않은 교회를 가지고 월급받아 먹고 앉아 있어야 됩니다. 이런 교회를 가지고 있으면 가슴을 쳐야 합니다. 통곡할 일입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이 나중에는 이 사람들이 똑같은 관계가 되어져 버립니다. 끼리끼리 놀아요. 아주 더 웃겨요, 이런 일이 있고 난 뒤의 현상을 보겠습니다.

 

 

 

1) 사랑의 관계가 깨어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나니까 어떤 일이 벌어지니 하나님이 선악을 따 먹자마자 이런 일이 생깁니다.

 

창세기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무엇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느냐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을 때에는

 

창세기 2:25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너무너무 사랑스러울 때는 허물이 보이지 안보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딱 끊어지니까 그때부터 자기를 감추기 시작합니다. 자기를 포장합니다.

 

7절에 보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를 감추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들어가 보면 자기를 포장하고 감추는 사람 수두룩합니다. 그러면서

 

8절에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교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특징을 보면 자기를 감추기 시작하고 도망다니기 시작합니다. 교회에 와서도 기둥 뒤에 앉습니다. 교회에 와서도 등짝 큰 사람 뒤에 숨습니다. 목사님 축도하고 인사하는 것이 껄끄러워 내빼 버립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자꾸 시험들어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 자꾸 멀리 멀리 뒤로 가는 것 있죠. 이것이 증거입니다.

 

우리 교회 2층을 사마리아 동네라고 합니다. 밑에 앉았다가 2층에 올라가요, 사마리아 동네에 가요. 그러다가 어느 날 없어졌습니다. 점점 숨기 시작하고 자기가 앞으로 가까이 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이상이 있습니다.

 

10절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니까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교회에 안 나옵니다. 숨어 버리니까 안 나와 하나님이 네가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었느냐고 하니 핑계를 대는데 하나님이 짝 지어준 여자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습니다. 무슨 관계가 깨어지는가 하면 사랑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끔찍하게 좋아하던 '이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관계가 '저 여자 때문이라'고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교회 안에도 하나되지 않고 서먹서먹하고 거리가 생기면 멀어지는 증상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문제가 있습니다.

 

결국 창세기 3:15에 영적 싸움이 일어납니다. "네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영적 싸움이 시작됩니다.

 

 

 

2) 자유의 관계가 깨짐

 

 

 

그 다음에 창세기 3:16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라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무엇이 깨어진 것입니까 억압을 받으니까 자유가 깨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을 때 이 사람은 죽은 자입니다.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죽었습니다. 죽어져 있는 이 사람을 어떻게 하느냐?

 

 

 

3) 평화의 관계가 깨어짐

 

 

 

창세기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아무리 사랑스런 자식이라 할지라도 죽은 자식은 부모님이 품고 있지 않습니다. 내버립니다. 우리 주님도 아담과 죽은 하와를 내쫓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난 이들의 삶을 봅시다.

 

 

 

3. 관계성 단절 이후의 인간의 삶

 

-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끝난 아담과 하와가 어떤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그 후손을 보니까 가인이 아벨을 때려 죽었습니다. 왜 죽였느냐 하면 아벨의 제사는 받고 자기 제사는 안 받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저놈 때문에 대접을 못 받는다 저놈 때문에 저놈만 없으면 내가 존귀해 질 수 있는데 저놈 때문에 무시당합니다.' 그래서 들에서 일할 때 돌로 때려 죽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똑바로 안 맺어진 교회가 가인과 아벨이 많습니다.

 

예수님 제대로 믿어 보겠다고 오는 사람, 먼저 믿었다는 가인이 저놈 때문에 내가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둘이 있을 때 입으로 두들겨 패죠. 돌멩이 들어 네가 뭘 안다고 여기서 설쳐. 꺼져버려. 어느 한 순간에 영적으로 때려 죽여 버려 교회 안에서, 오래된 교회를 보세요. 먼저 난 가인이 진실되게 믿어 보겠다는 아벨은 죽이는 일이 허다합니다. 자기의 존엄성을 위해서 남을 죽입니다. 특별히 적은 교회일수록 더 심합니다. 역사가 오래된 교회일수록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1) 하나님을 떠남

 

 

 

창세기 4:16에 가인이 결국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기로 했습니다.

 

 

 

2) 세상의 가치관으로 부와 명예와 권력을 추구

 

 

 

4:17에 자기의 노력을 통해서 성공했습니다. "아내와 동침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성이라 했다" 한 도시를 세웠습니다. 성공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후손들은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야발은 육축을 치는 조상, 목축업을 했고 유발은 수금과 퉁소부는 자의 조상, 음악가로 성공했습니다. 두발가인은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 기술자로 성공했습니다.

 

이 정도로 살아간다면 우리가 볼 때 축복 받았다고 하겠죠. 하나같이 세상적으로 다 성공했으니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라멕의 후손들이 어떻게 살았느냐 하면 4:23 "라멕이 아내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이 말은 내가 부를 얻고 우리 자손들이 출세를 위하여 훼방을 놓은 사람은 아이고 어른이고 다 죽였습니다.

 

얼마나 폭군이 심하면 4:24에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라, 이것은 하나님이 벌주겠다는 것입니다.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입니다. 얼마나 도도한가 보세요. 가인을 위하여는 7배의 벌이지만 라멕의 후손을 건드리면 내기 77배를 보복해 버릴 것이라는 라멕의 잔인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보고 우리는 축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요즘 교회서는 십일조 많이 하고 교회 봉사 많이 하면 축복받았다고 할렐루야! 하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서 어떤 방법으로 돈을 벌었는지 모르잖아요. 남의 것 떼어먹고 남의 것 사기쳐서 교회 건축하다가 돈 받아다 부도내고 도망가서 십일조낸 것 그것이 축복받은 것입니까? 하나같이 자기 중심적인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사는 욕심을 좇아 사는 이런 자들이 지금 교회 안에 판을 치고 있고 이런 자들을 축복받았다고 교회에서 직분 주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모 교회가 큰 교회가 모 장로가 헌금을 엄청나게 했다고 떠들고 있지만 지금 와서 돈 때문에 두 사람이 재판이 벌어졌어요.

 

우리는 하나님 없이 세상적인 명예와 부를 놓고 살아가는 것을 축복이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가인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더 이상 쓰지 않습니다. 왜 이것은 축복이 아니니까

 

창세기 4:25에는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 다른 종자를 주잖아요. 이런 종자는 나하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가인과 같이 가인의 후손 이야기는 그만하자. 이런 것은 복받은 것이 아닙니다. 딱 잘라 버리고 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자는 축복 받았습니다.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까는 하나님과 관계가 밀접할 때 아담은 하나님이 전부였습니다. 자기의 가장 소중한 분이 누구냐,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난 뒤는 무엇이 전부였나? 세상적인 욕망이, 가치관이 최고였습니다. 오직 내가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내가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보다 올라서면 됩니다. 남은 짓밟아서 죽여도 됩니다.

 

나 하나만 성공하면 축복이라는 세속적인 가치관, 이런 것들을 움켜지고 있는 지금, 이걸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다. 축복 받았다 할 수 있느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면 이런 욕심에 사로잡혀 살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거듭나야 됩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왔을 때 '당신의 표적을 보니 하나님의 정말 아들이요'할 때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하는 말입니다. 거듭남이란 무엇입니까 옛사람이 가치관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의 가치관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만나고 외친 말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전에 바울이 그렇게 좋아하든 것,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하던 것,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 베냐민 지파에 로마 시민권, 철저한 율법주의자, 또 그가 자랑할 것이 많았지만 예수 만나고 보니까 배설물이라는 것입니다.

 

배설물. 좀더 강하게 말하면 똥이라는 것, 똥, 요즈음 교인들은 그것을 붙잡고 축복 받았다는 것 아닙니까? 바울이 똥이라고 버린 것을 붙잡고 축복 받았다고 합니다. 어느 책을 보니까 '똥찬 교인, 똥 담고 다니는 교인들'이라고 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아 아름다운 사랑의 가정 공동체가 파괴되어 버리고 사랑의 관계가 깨어져 버립니다.

 

 

 

여자에 대한 원망하고 둘이 분리가 되어서 책임을 전가해 버리고 나중에 가서 둘이다 뱀에게까지 책임을 전가해 버리는 정말 비참한 것입니다. 사랑은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인데 전가해 버리는 거죠.

 

 

 

둘째 가서는 자유의 관계가 깨어져 버렸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네가 죽는다는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게 되고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만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파괴되고 맙니다.

 

 

 

셋째 평화의 관계도 파괴가 되어서 껄끄러운 관계가 되어 버립니다.

 

 

 

서먹서먹한 관계가 되어 버리니까 피해 버립니다.

 

결국 하나님의 중심의 가치관이 세상 중심의 가치관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중요한 부분이니까 밑줄을 치세요. 하나님을 떠나고 나니까 남에게 자손들이 잘못되어 버렸습니다.

 

22 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24.26.28에 보면 하나님이 저들을 내어 버렸다는 말이 계속 나온다. 반복됩니다. 내어버려 두사, 내버려 두사, 내버려 두사, 결국은 육체대로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버렸습니다. 자기 욕망대로 살아가는 자는 하나님이 버립니다. 버림받았다는 것은 저주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잖아요.

 

'아 목사님, 제가 바빠 가지고요, 제가 세상일에 너무너무 바빠 가지고 예배 드릴 시간이 없어 가지고 목사님, 이번만 봐 주세요' 하는데 바빠서 하나님께 예배 드릴 시간이 없어 가지고 목사님 이번만 봐 주세요 하는데 이 바빠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지 못한다는 것은 절대 축복이지 않습니다. 저주 중에 왕 저주입니다. 왜 돼지가 꿀꿀댈 때 주인이 맛있는 것 많이 줘요. 막 주는데 이뻐서 먹을 것 줍니까? 주인이 돼지가 이뻐서 먹을 것 줍니까? 빨리 커야 널 잡아먹겠습니다.

 

 

 

4. 지금 우리의 모습은?

 

 

 

마귀가 자꾸 우리 신앙생활에 방해하면서 세상적인 욕심을 갖고 살아가게 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아무리 세상의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해도 이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저주입니다.

 

하나님의 관계가 멀어지는 것은 성경을 보면 가인의 후손들이 포악한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것,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사람은 미래도 없고 기억될 것도 없고 존귀하게 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것 아무리 움켜지고 살았어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살펴봅시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도 하나님을 떠난 가인의 후손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연예인으로, 법관으로, 의사, 학자, 운동선수로 각자의 분야에서 유명해 지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부의 축적이 자기 존엄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국가 공직의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온갖 힘을 다 쓰는 사람도 있고 권력을 최고의 목적을 삼고 수단과 방법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말초적 쾌락에 빠져 사는 사람들도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이 주신 가치관이 아닌 거리, 세상, 자기 심지어 마귀가 주는 가치관에 사는 사람들, 그 결과 가정은 파괴되고 사업은 파산하고 약물중독, 알콜중독, 정신병을 앓을 뿐 아니라 마음은 공허해지고 인생은 무의미하게 됩니다. 이것 아무것도 이러한 속박들로 이들을 구원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 안에 한번 봅시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정말 예수가 전부인 사람 있습니까? 예수님을 너무 사랑해서 살아가는 사람, 혹이야 있기야 있겠죠.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 추구하는 것은 예수보다 세상적인 것입니다. 전부다 세상적인 욕심으로 꽉차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찬송은 잘 부르는데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하지만 속으로 '많네'하죠. 많죠, 엄청나게 많죠. 가치관이 이러한 형성된 세상에 욕심적인 가치관으로 꽉 차 있는 사람이 거듭난 자가 아니라는 거죠. 거듭난다는 것은 옛것의 가치관이 벗겨져야 되는 거죠. 이것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이제 교회라고 하는 밴드 목회라는 1차 세미나 2차 세미나를 했는데 여기에서 놓쳐 가지고 이해를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아요. 오늘 이 밤에 대단히 중요한데요 '교회론'입니다. 우리가 밴드 목회라는 것이 어떤 방향성을 띄고 나가는 것이냐 하면 교회론적인 것을 뚜렷하게 알고 나가야 뒤에가 정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밤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1. 창조된 가정 -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6-28)

 

오늘 여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복준 내용이 여기 나와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바른 관계성을 가진 가정창조에서 살펴보겠는데 저는 교회론을 어디에서 찾고 있느냐 하면 창조, 하나님의 창조, 아담과 하와를 만들어 놓은 가정이라는 곳에서부터 교회론을 정립해 보자는 의미로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만드셨는데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먼저 천지만물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렇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좋았더라, 좋았더라, 좋았더라' 계속 좋았더라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까 읽었던 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이 창조해 놓은 피조물을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 모습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이 좋으신 거죠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마치 어린아이를 밴 엄마가 그 아이를 위해서 아이가 태어나면 이부자리, 애기옷, 목욕통, 젖병을 준비하는 이 아이를 위해서 모든 것을 준비해 놓을 때마다 엄마의 심정은 좋은 것입니다.

 

이 아이가 이것을 입고 소록소록 잠자며 편안하게 지낼 것을 생각할 때에 보기에 좋은 것입니다. 이 자체 물건이 좋은 것이 아니고 이 뱃속의 아이가 출생해서 그것에서 누리면서 편안하게 지낼 것을 생각하니까 보기에 좋은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이죠.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천지를 창조하시고 창조하실 때마다 좋았다는 고백은 다른 것이 아니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표현이라는 것을 우리가 먼저 알아야겠습니다.

 

 

 

1) 사랑의 관계

 

제일 먼저 맺어지는 게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천지창조를 통해서 제일 먼저 맺어지는 게 사랑의 관계입니다. 사랑의 관계, 이렇게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리고 우리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마음껏 내가 먹고 마음껏 내가 누리며 그리고 내가 이름도 짓고 각종 실과를 내 마음대로 따먹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무얼 요구했냐 하면 최소한 질서만 요구했습니다.

 

질서, 그 질서가 무엇이냐 하면 모든 것을 다 먹어라 다 좋은데 계명 하나만 너하고 나하고 지키자.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계명을 주었는데 모든 것은 다해도 좋은데 요것만하지 말아라 하는 질서를 준 것을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법을 주었다' 우리 목사님께 제가 물어 보겠습니다. 법을 지키기가 어렵습니까 어기기가 어렵습니까? 교인들만 대답하라 하지 말고 우리 목사님들도 한번 대답해 보세요.

 

법을 지키기가 어렵습니까? 어기기가 어렵습니까? 법의 종류가 다 다릅니다. 우리 목사님들 다 합리적인 대답을 하시네 네, 법이라는 게 지키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어기기가 힘들다. 대개 법을 어기는 사람은 법을 빠삭하게 압니다. 저같은 사람은 법에 대해서 전혀 몰라도 자유스럽습니다. 왜냐 법을 어기지 않고 그 안에 사니까 자유스러운 거죠. 우리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 완전히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사람은 하나님 말씀에 살기가 편합니다.

 

그런데 이것 줄타기하는 교인들이 있어요. 세상으로 갈까 교회로 갈까 이분들이 예수 믿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분들이 완전히 남이야 어차피 예수 안에 들어와야 할 사람이야 그 안에 들어간 사람은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어 놓은 것은 우리로 하여금 법에 얽매어 놓아서 고통에 빠뜨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들을 보호 하고자 하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인격적인 관계, 자발적인 사랑의 관계를 하자는 것입니다.

 

강압적인 것이 아니라 은혜 안에서, 진리 안에서 계명 안에서 우리가 자유를 누리자는 것입니다. 그래 우리 예수님은 이러한 계명을 통해서 최소한 질서를 주었는데 '중앙에 있는 선악과만 먹지 말라 그것을 먹으면 네가 죽는다' 우리 하나님이 여기서 계명을 준 것은 다시 말합니다. 인격적 관계를 맺자는 것입니다.

 

인격적 관계, 강압적 관계가 아닌 예를 들면 부부간에 사랑하는데 강압적으로 빨래해, 안한다고 하니까 남자가 여자를 때린다든지 밥을 안한다고 때린다던가 하면 살수가 없지 않습니까? 스스로 인격적으로 사랑이 가서 밥도 하고 서로 도와주고 이런 모습으로 나타날 때 이런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최고의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과의 닮은꼴이 인간을 만드시고 스스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자발적인 인격적 관계를 형성시킨 것이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것을 어김으로 인해서 그것이 깨어졌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질서라는 것입니다. 질서, 자유와의 관계입니다. 그 안에 살아갈 때 얼마든지 평화의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는 이것이 하나님이 계획하고 계신 교회라는 거죠. 교회, 쉽게 이야기하면 정리해 봅시다.

 

제일 위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창조하는 가운데서 누구를 만드셨습니까? 아담을 만들었습니다. 아담은 사람이란 뜻이죠 우리 하나님이 아담에게 무엇을 주었냐 하면 계명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의 걸작 중 최고의 걸작을 만드시고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형성하기 위해서 준 것이 무엇이냐 계명입니다. 이때부터 하나님과 아담은 유무상통합니다. 계명도 주고받고 한 것이 에덴 동산에서 함께 교통하면서 아주 화평하게 살아갑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과 아담과의 관계, 철저한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의 신앙이죠, 우리 하나님이 아담이 혼자 독처하는 것이 좋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아담을 깊은 잠에 들게 하시고 새로 한사람을 만들었는데 누구입니까? 하와,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하와를 이끌어 아담에게 데려다 주었습니다. 아담,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가 한참 좋고 너무너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게 보인지라 그래 우리 하나님이 하와를 만드시고 하와를 이끄시고 누구에게로 왔어요? 잘 들으셨네 목사님들, 아담에게 왔습니다. 하나님이 이끌어 오셨습니다.

 

그 앞에서 만들어 놓고 여기 있다가 아니고 하나님이 만들어선 아담에게로 이끌어 왔습니다. 이때 아담이 하와를 보고 무어라 이야기합니까?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로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하와에게 어떤 계명도 준 적이 없습니다. 성경을 보아도 하나님이 하와에게 계명을 준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 주었습니까? 아담에게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어요 하나님도, 아담도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서로 관계가 잘 맺어졌어요. 하나님과 아담과의 관계가 좋아지니까 하나님이 아담이 혼자 지내는 것이 좋지 않다 해서 하와를 만들어서 아담에게 이끌어 주니 아담이 무어라 고백하느냐 하면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다'고 고백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금 무엇을 계산하느냐 하나님과 사랑이 맺어진 아담, 하나님의 계명이 주어진 아담에게 우리 하나님은 이를 통해서 계명이 여기에 전달되기 원하고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맺어진 그 사람이 하와에게 전달되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공동체 하나가 되어서 이 사람을 통해서 하와가 누구를 발견해야 옳으냐? 하나님을 발견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와가 하나님을 발견하기 전에 누가 여기에 새롭게 등장하느냐 하면 사단이 등장합니다. 사단이 등장해서 하와를 유혹합니다. 누가 왜 '이 중앙에 있는 걸 하나님이 먹지 말라 하더냐'했을 때 아담에게 들은 이야기로 확실하게 듣지 못했어요. 하와가 분명하게 이 사림이 양육을 못 받았어요.

 

그로 인해서 '이것을 먹으면 죽는 데나, 어찌되나' 그랬죠 성경에 죽을까 하노라 말이나 '죽는 데나 어쩐 데나'하는 말이 똑같죠. 그랬으니 긴가민가하죠. '너 안 죽어 너 하나님과 될 수 있어'하면서 하와에게 하나님을 불신하게 만듭니다. 결국에 하와는 사단의 말을 듣게 되고 선악과를 따먹게 되었습니다.

 

이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로 인해 아담에게까지 갔다. 아담에게 미친 영향으로 결과로 아담은 누구와 단절이 되었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요구하는 교회는 가정 같은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계명을 주었고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가 맺어진 상태에서 이웃을 주어 이 이웃이 아담에게 이끌어져 왔고 이끌어 온 아담이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알게 되고 하나님이 사랑을 깨닫게 되는 순간에 하나님을 발견하는 이런 가정과 같은 교회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자 여러분 우리가 어디에서 답을 찾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마태복음 22:37-38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아담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너와 나와의 관계는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너와 나하고는 죽기 살기로 하자' 그런 이 사랑만 가지고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 받았습니다. 좋습니다. 여기까지 이 수직적인 신앙이 한국 교회에서 좋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도 좋습니다.

 

그럼 우리 하나님이 아담이 혼자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아서 누구를 보내 주었답니다. 이웃을 보내 주었습니다. 이 이웃을 요한복음 6:44에서는 "나를 보내서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네게 올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이 예수께로 한 영혼이라도 보내 주지 않으면 주님 앞에 올 자가 없습니다. 목사님들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이 하와는 만드시고 아담에게 이끌어 왔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관계가 잘 맺어 있는 기존교인입니다. 이 기존 교인에 너 혼자 지내는 것이 옳지 않아 네 이웃을 데려다 줄께. 그래서 이웃을 한 영혼을 데려다 주었다는 거죠. 그러면 그 이웃이 왔을 때 하나님과 관계가 똑바로 맺어졌다면 이 사람에게 무어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무어라 이야기 하느냐 하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이나 똑같은 말입니다. 이것을 어떤 부부간에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감추어져 있는 비밀적인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엡5장에 나오는 말입니다. 제가 이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들의 교회에 병이 든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과 이 아담과의 관계가 좋을 때처럼 좋은 수직적 신앙은 아주 좋다는 것입니다. 잘합니다. 교인들이, 열심 있고 십일조도 잘하고 교회도 열심히 나오고 잘합니다. 문제는 하와란 이웃을 나에게 데려다 주었는데 이 사람과의 관계가 안된다는 거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이 안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럼 새로운 사람이 하나님을 발견할 길이 없어요. 누구에게 말씀이 주어졌느냐 먼저 믿는 우리에게 주어졌거든요., 이 계명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은 사랑하는데 목숨을 다해서 사랑한다면 이웃을 사랑해야 하거든요. 이 사랑을 가졌을 때 누굴 발견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을 발견하는데 그분이 하나님입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단이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하와가 아담에게 영향을 미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 버렸습니다. 그런 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아담아 누가 너희들에게 중앙에 있는 나무 실과를 먹으라고 했느냐'그랬을 때 아담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을 때는 무엇이라 했는가 하면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고백하던 아담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준 저 여자가 먹으라고 했습니다'

 

하나였던 관계가 둘로 나누어지기 시작합니다. 성경이니까 저 여자라고 그랬겠지 여기 목사님들 계시지만 '저년'이 먹으라고 그랬습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당장 저년 때문에 망했습니다. 뭐죠, 원망, 불이해의 관계가 생깁니다. 이것을 우리가 근거로 해서 본다면 우리 교회 안에 사랑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 이유는 이것은 누구의 잘못이 아닙니다.

 

먼저 믿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야죠. 한 영혼을 내가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없다면 이것은 이미 여기서 금이 갔을 때 이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지듯이 내가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 사람을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의 지배를 받느냐 사단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들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만 열심히 해야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당 중심이고 예배중심, 헌금중심, 행사중심이고 그것은 열심히 하는데 이웃과의 관계는 어떠냐? 성도와의 사랑하라는 이야기인데 이웃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데려다 준 사람이 바로 내 이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을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해야 하는데 그것이 안되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것을 회복하고자 세워 놓은 것이 우리 교회, 가정교회라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목사님들이 즐겨 쓰는 대목인 에베소서 5:22에서는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지금 아내와 남편의 이야기를 하면서 꼭 대두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을 꼭 비유하면서 이야기합니다. 바울이 지금 부부의 관계는 무어냐 하나의 가정을 강조하고 있는 모습 아닙니까? 가정을 강조하는데 가정과 똑같은 곳은 어디냐, 교회라는 거죠. 그러다가 교회의 가정을 동등한 위치에 놓고 설명한 것입니다. 아내의 머리는 남편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입니다. 이런 식으로 풀기 시작합니다.

 

24절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지금 교회와 가정이 똑같다는 걸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25절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얼마만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 같이 아내들도 남편을 사랑해라. 남편들도 아내를 사랑하라. 지금 교회와 가정의 관계를 계속 반복하면서 들어가는 것은

 

26-27절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타나 주름, 정한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렇게 부부간에도 서로 사랑하고 복종하는 관계를 통해서 흠과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어져야 되듯이 교회도 이같이 해야 합니다.

 

28절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요,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무엇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까?

 

32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아내와 남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아내와 남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교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로 교회에 대한 비밀적인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어떤 교회냐, 가정교회입니다. 가정같은 것이 아니라 가정인 교회입니다.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을 바울은 강력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밴드 목회가 무엇이냐,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나누고, 서로 대화하고, 서로 관심을 쏟을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주는 가정,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것이 어디에서부터 이루어졌냐 창세 전부터 이루어졌습니다. 에베소서 3:9-10입니다.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 비밀의 경륜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입니까?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사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창세 전부터 감추어졌던 비밀스런 교회,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그 교회가 어떤 교회냐 5장에 나와 있는 바로 '가정인 교회'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가 형성되어져야만 반드시 교회다운 교회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서 목회사역을 하셨습니다. 웨슬리만 그런것이 아니라 사도들도 그러한 교회를 세워 나갔습니다.

 

 

 

제가 설명한 것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가정,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있는 가정,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가정이란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엄연히 내재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그들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하나님 중심의 삶, 제일 중요한 삶,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가 성립되어 어떤 욕심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중심적인 삶만 살면 됩니다.

 

이 때 너무너무 좋아서 사랑의 관계가 맺어질 때 아담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사랑으로 인격적인 관계가 맺어질 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 자신과 하와는 각각 독립적인 존재임을 불구하고 하나라고 고백한 이 고백은 하나님의 사랑이 내재하지 않고는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교인들끼리 옆사람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라고 하면 '별 미친놈 다 보았네' 이 소리 듣죠.

 

내 남편도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소리가 안 나오는데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관계가 나옵니까?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철저하게 하나가 되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되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는 관계가 아니면 이 관계는 절대 맺어질 수 없습니다.

 

초대 교인들이 공동으로 모든 것을 공유했잖아요. 왜 저 사람들은 공유할 수 있었냐 하면 이 사람들은 내일이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붙들리면 죽는 것이기에 이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욕심이 없습니다. 오직 주만을 살겠다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무상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욕심과 내 사리사욕이 밝혀져 있으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생명같이 사랑할 때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아담과의 관계가 뜨겁게 되었을 때 이웃을 주었고 그 이웃인 하와를 하나님이 이끌어 주었습니다.

 

창세기 2: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분명히 하나님이 이끌어 오신 것입니다. 이 내용과 똑같은 것은

 

요한복음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다시 살리리라" 여기 보세요. 아버지께서 이끌어 오셨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교회에 한 영혼이 와 있다는 것은 스스로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이끌어 왔습니다.

 

먼저 믿은 우리에게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보내셨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에게 진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고 따르면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어려움이 있으면 요즘 교인들은 자신의 어려움을 십자가라 하는데 그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나를 살리기 위해서 지신 십자가"입니다. 나를 죄악의 자리에서 멸망의 자리에서 구원하여 생명의 자리에 옮겨 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들보고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너도 죽으라'는 것입니다. 너도 너를 살려주기 위해서 죽지 않았느냐 옆에 사랑하라고 내 이웃을 데려다 준 한 영혼을 위해서 네가 죽으라, 희생하라, 그 영혼이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어 굳게 서기까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전혀 교회가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는 교회는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기업체지 무슨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까? 마태복음 7:21에 얼마나 하나님 앞에 똑바로 잘하는가 보세요.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내가 주의 이름으로 능력도 행하고 내가 주의 이름으로 병도 고쳤다"는 거죠. 그런데 나는 몰라 "주여 주여"한다고 천국 가는 줄 아느냐, 요한일서에서 분명히 강조하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아직도 어둠에 있는 자요, 형제는 사랑하는 자는 생명이 있는 줄 안다. 구원을 얻은 자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 다음에 이웃 사랑입니다. 이 이웃 사랑을 맺기 위해서는 틀림없이 가정 공동체를 만들지 않으면 안됩니다. 가정교회 하나님이 여자를 만드시고 이끌어 오신 것이나 요한복음 6:44이 새가족을 교회에 정착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한 영혼이 이끌고 왔을 때 한 영혼을 위해 생명을 걸고 그 영혼을 책임져 주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모습이 나타납니다. 교인 하나가 안 오면 새가족이 안 오면 엉엉 울고 있습니다. 멸시와 수모를 당하면서 쫓아가서 그 영혼을 끄집어냅니다. 생명을 살려냅니다. 왜 예수님이 나를 살리기 위해 죽으셨는데 나도 저 영혼을 위해 죽으라고 난 저 영혼을 위해 죽어야지 이런 사명감 거기에 그 사랑에 녹아 납니다. 새가족들이 거기에 녹아 나서..

 

 

 

2) 자유의 관계

 

 

 

그 밑을 봅시다. 사랑의 관계에서 인간을 만들기 전 완벽한 환경을 미리 준비하신 것은 사람을 향한 큰 사람을 표현한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태중에 아기를 위해 모든 것을 기쁨으로 준비하며 한없는 사랑을 표현한 것 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기 전에 우리가 살 수 있는 모든 환경을 최상의 것으로 준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을 받았기에 우리는 인격적이며 깊은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와를 향해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다'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표현입니다. 자신과는 분명히 각각 독립적인 존재임을 불구하고 하나라고 고백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내재하지 않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사랑의 관계가 맺어진 그 안에서 자유의 관계가 맺어집니다.

 

18 페이지 여섯 번째 줄입니다. 당신과의 관계 속에서 자유를 마음껏 누리기 위하여 최소한의 질서를 주셨는데 그것은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습니다. 이 나무의 실과를 먹는 날엔 정녕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무절제한 방종을 원하지 않으시고 창조주의 피조물의 바른 관계성 속에서 얻는 자유를 허락하셨습니다.

 

우리 잘 아는 대로 8.15 해방 후 자유당 시절에 어떤 젊은이가 기차를 타고 가는데 자리에 벌렁 누워서 자니까 어떤 할아버지가 '이보게. 젊은이 나 자리좀 앉게 자리 양보좀 하게. 일어나 앉게' 그랬더니 '아 왜 그러세요 내 자유입니다.' 할아버지가 긴 곤봉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끝은 구리였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이마빡을 지지면서, 얼마나 뜨거운지 깜짝 놀라 일어나면서 '왜 이러세요 할아버지' '내 자유다, 이놈아'

 

자유라는 것은 마음껏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규칙이 있고 룰이 있습니다. 자유라고 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은 방종입니다. 분명히 룰 안에서 규칙 안에서 자유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모든 것이 자유입니다. 그런데 질서는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는 질서 안에서 자유입니다. 그래서 계명을 주었습니다. 교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계명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사는 것은 믿는 자의 삶이 아닙니다.

 

 

 

3) 평화의 관계

 

 

 

하나님의 동산은 평화의 동산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가정도 평화의 가정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통해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고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자유롭게 대화도 하였습니다. 이런 때는 미움도 다툼도 시기도, 증오도 없습니다. 이 가정은 사랑이 넘치니까 평화가 있습니다. 싸울 일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참 좋고 이웃과의 관계성이 잘 맺어진 이 가정은 사랑과 자유, 평화가 있습니다.

 

 

 

2. 창조된 가정의 파괴 - 하나님의 가치관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문제는 이것이 파괴된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이분들을 통해서 이분들이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먼저 믿은 사람들이 하와에게 신앙의 영향을 주어서 이 하와가 하나님을 발견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것이 아니고 지금 이 사람들이 하와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해요. 아담이 여기에다 영향을 끼치지 못했던 것처럼 영향을 전혀 못 끼쳐요. 오히려 사단의 지배를 받은 하와가 아담에게 영향을 주어서 아담과 하나님의 관계를 단절 시켜 버리지 않습니까 교회도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 곳도 교회입니다.

 

그런데 불신앙적인 인간을 통해서 교회가 지배되어 졌습니다. 교회의 중직이라는 사람들이 진짜 신앙인이 얼마 없습니다. 거듭남의 삶을 살아간 사람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진정 이렇게 불신앙적인 요소를 가진 이 사람들 때문에 교회에 먼저 믿었던 사람들도 영향을 미쳐요. 세상에 아직도 불신앙적인 요소를 가진 사람도 영향력을 끼칩니다.

 

인천 모지방에 부흥회를 갔을 때 그 지방에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장로있는 교회와 없는 교회로 두 지방이 나누었는데 왜 이 지방으로 나누었느냐고 하니까 장로들끼리 목사 못 내어쫓는 교회는 병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거기서는 한번씩은 내어쫓습니다. 어디라고 하면 알기에 감리교에서는 다 알 것입니다.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사단의 사주를 받고 있는 불신앙의 사람들이 영향을 끼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당연히 이 사람이 철저해서 이 사람에게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힘을 잃고 있으니 안됩니다. 교회가 이 사람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철저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철저한 관계를 회복시켜 놓지 않으면 교회는 살길이 없습니다. 날마다 목사님들이 얻어터지고 이리저리 쫓아 다녀야 되고 문제 속에서 헤매어야 되고 교회답지 않은 교회를 가지고 월급받아 먹고 앉아 있어야 됩니다. 이런 교회를 가지고 있으면 가슴을 쳐야 합니다. 통곡할 일입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이 나중에는 이 사람들이 똑같은 관계가 되어져 버립니다. 끼리끼리 놀아요. 아주 더 웃겨요, 이런 일이 있고 난 뒤의 현상을 보겠습니다.

 

 

 

1) 사랑의 관계가 깨어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나니까 어떤 일이 벌어지니 하나님이 선악을 따 먹자마자 이런 일이 생깁니다.

 

창세기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무엇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느냐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을 때에는

 

창세기 2:25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너무너무 사랑스러울 때는 허물이 보이지 안보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딱 끊어지니까 그때부터 자기를 감추기 시작합니다. 자기를 포장합니다.

 

7절에 보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를 감추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들어가 보면 자기를 포장하고 감추는 사람 수두룩합니다. 그러면서

 

8절에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교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특징을 보면 자기를 감추기 시작하고 도망다니기 시작합니다. 교회에 와서도 기둥 뒤에 앉습니다. 교회에 와서도 등짝 큰 사람 뒤에 숨습니다. 목사님 축도하고 인사하는 것이 껄끄러워 내빼 버립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자꾸 시험들어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 자꾸 멀리 멀리 뒤로 가는 것 있죠. 이것이 증거입니다.

 

우리 교회 2층을 사마리아 동네라고 합니다. 밑에 앉았다가 2층에 올라가요, 사마리아 동네에 가요. 그러다가 어느 날 없어졌습니다. 점점 숨기 시작하고 자기가 앞으로 가까이 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이상이 있습니다.

 

10절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니까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교회에 안 나옵니다. 숨어 버리니까 안 나와 하나님이 네가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었느냐고 하니 핑계를 대는데 하나님이 짝 지어준 여자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습니다. 무슨 관계가 깨어지는가 하면 사랑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끔찍하게 좋아하던 '이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관계가 '저 여자 때문이라'고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교회 안에도 하나되지 않고 서먹서먹하고 거리가 생기면 멀어지는 증상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문제가 있습니다.

 

결국 창세기 3:15에 영적 싸움이 일어납니다. "네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영적 싸움이 시작됩니다.

 

 

 

2) 자유의 관계가 깨짐

 

 

 

그 다음에 창세기 3:16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라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무엇이 깨어진 것입니까 억압을 받으니까 자유가 깨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을 때 이 사람은 죽은 자입니다.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죽었습니다. 죽어져 있는 이 사람을 어떻게 하느냐?

 

 

 

3) 평화의 관계가 깨어짐

 

 

 

창세기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아무리 사랑스런 자식이라 할지라도 죽은 자식은 부모님이 품고 있지 않습니다. 내버립니다. 우리 주님도 아담과 죽은 하와를 내쫓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난 이들의 삶을 봅시다.

 

 

 

3. 관계성 단절 이후의 인간의 삶

 

-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끝난 아담과 하와가 어떤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그 후손을 보니까 가인이 아벨을 때려 죽었습니다. 왜 죽였느냐 하면 아벨의 제사는 받고 자기 제사는 안 받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저놈 때문에 대접을 못 받는다 저놈 때문에 저놈만 없으면 내가 존귀해 질 수 있는데 저놈 때문에 무시당합니다.' 그래서 들에서 일할 때 돌로 때려 죽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똑바로 안 맺어진 교회가 가인과 아벨이 많습니다.

 

예수님 제대로 믿어 보겠다고 오는 사람, 먼저 믿었다는 가인이 저놈 때문에 내가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둘이 있을 때 입으로 두들겨 패죠. 돌멩이 들어 네가 뭘 안다고 여기서 설쳐. 꺼져버려. 어느 한 순간에 영적으로 때려 죽여 버려 교회 안에서, 오래된 교회를 보세요. 먼저 난 가인이 진실되게 믿어 보겠다는 아벨은 죽이는 일이 허다합니다. 자기의 존엄성을 위해서 남을 죽입니다. 특별히 적은 교회일수록 더 심합니다. 역사가 오래된 교회일수록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1) 하나님을 떠남

 

 

 

창세기 4:16에 가인이 결국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기로 했습니다.

 

 

 

2) 세상의 가치관으로 부와 명예와 권력을 추구

 

 

 

4:17에 자기의 노력을 통해서 성공했습니다. "아내와 동침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성이라 했다" 한 도시를 세웠습니다. 성공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후손들은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야발은 육축을 치는 조상, 목축업을 했고 유발은 수금과 퉁소부는 자의 조상, 음악가로 성공했습니다. 두발가인은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 기술자로 성공했습니다.

 

이 정도로 살아간다면 우리가 볼 때 축복 받았다고 하겠죠. 하나같이 세상적으로 다 성공했으니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라멕의 후손들이 어떻게 살았느냐 하면 4:23 "라멕이 아내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이 말은 내가 부를 얻고 우리 자손들이 출세를 위하여 훼방을 놓은 사람은 아이고 어른이고 다 죽였습니다.

 

얼마나 폭군이 심하면 4:24에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라, 이것은 하나님이 벌주겠다는 것입니다.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입니다. 얼마나 도도한가 보세요. 가인을 위하여는 7배의 벌이지만 라멕의 후손을 건드리면 내기 77배를 보복해 버릴 것이라는 라멕의 잔인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보고 우리는 축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요즘 교회서는 십일조 많이 하고 교회 봉사 많이 하면 축복받았다고 할렐루야! 하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서 어떤 방법으로 돈을 벌었는지 모르잖아요. 남의 것 떼어먹고 남의 것 사기쳐서 교회 건축하다가 돈 받아다 부도내고 도망가서 십일조낸 것 그것이 축복받은 것입니까? 하나같이 자기 중심적인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사는 욕심을 좇아 사는 이런 자들이 지금 교회 안에 판을 치고 있고 이런 자들을 축복받았다고 교회에서 직분 주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모 교회가 큰 교회가 모 장로가 헌금을 엄청나게 했다고 떠들고 있지만 지금 와서 돈 때문에 두 사람이 재판이 벌어졌어요.

 

우리는 하나님 없이 세상적인 명예와 부를 놓고 살아가는 것을 축복이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가인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더 이상 쓰지 않습니다. 왜 이것은 축복이 아니니까

 

창세기 4:25에는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 다른 종자를 주잖아요. 이런 종자는 나하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가인과 같이 가인의 후손 이야기는 그만하자. 이런 것은 복받은 것이 아닙니다. 딱 잘라 버리고 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자는 축복 받았습니다.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까는 하나님과 관계가 밀접할 때 아담은 하나님이 전부였습니다. 자기의 가장 소중한 분이 누구냐,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난 뒤는 무엇이 전부였나? 세상적인 욕망이, 가치관이 최고였습니다. 오직 내가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내가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보다 올라서면 됩니다. 남은 짓밟아서 죽여도 됩니다.

 

나 하나만 성공하면 축복이라는 세속적인 가치관, 이런 것들을 움켜지고 있는 지금, 이걸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다. 축복 받았다 할 수 있느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면 이런 욕심에 사로잡혀 살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거듭나야 됩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왔을 때 '당신의 표적을 보니 하나님의 정말 아들이요'할 때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하는 말입니다. 거듭남이란 무엇입니까 옛사람이 가치관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의 가치관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만나고 외친 말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전에 바울이 그렇게 좋아하든 것,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하던 것,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 베냐민 지파에 로마 시민권, 철저한 율법주의자, 또 그가 자랑할 것이 많았지만 예수 만나고 보니까 배설물이라는 것입니다.

 

배설물. 좀더 강하게 말하면 똥이라는 것, 똥, 요즈음 교인들은 그것을 붙잡고 축복 받았다는 것 아닙니까? 바울이 똥이라고 버린 것을 붙잡고 축복 받았다고 합니다. 어느 책을 보니까 '똥찬 교인, 똥 담고 다니는 교인들'이라고 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아 아름다운 사랑의 가정 공동체가 파괴되어 버리고 사랑의 관계가 깨어져 버립니다.

 

 

 

여자에 대한 원망하고 둘이 분리가 되어서 책임을 전가해 버리고 나중에 가서 둘이다 뱀에게까지 책임을 전가해 버리는 정말 비참한 것입니다. 사랑은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인데 전가해 버리는 거죠.

 

 

 

둘째 가서는 자유의 관계가 깨어져 버렸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네가 죽는다는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게 되고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만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파괴되고 맙니다.

 

 

 

셋째 평화의 관계도 파괴가 되어서 껄끄러운 관계가 되어 버립니다.

 

 

 

서먹서먹한 관계가 되어 버리니까 피해 버립니다.

 

결국 하나님의 중심의 가치관이 세상 중심의 가치관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중요한 부분이니까 밑줄을 치세요. 하나님을 떠나고 나니까 남에게 자손들이 잘못되어 버렸습니다.

 

22 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24.26.28에 보면 하나님이 저들을 내어 버렸다는 말이 계속 나온다. 반복됩니다. 내어버려 두사, 내버려 두사, 내버려 두사, 결국은 육체대로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버렸습니다. 자기 욕망대로 살아가는 자는 하나님이 버립니다. 버림받았다는 것은 저주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잖아요.

 

'아 목사님, 제가 바빠 가지고요, 제가 세상일에 너무너무 바빠 가지고 예배 드릴 시간이 없어 가지고 목사님, 이번만 봐 주세요' 하는데 바빠서 하나님께 예배 드릴 시간이 없어 가지고 목사님 이번만 봐 주세요 하는데 이 바빠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지 못한다는 것은 절대 축복이지 않습니다. 저주 중에 왕 저주입니다. 왜 돼지가 꿀꿀댈 때 주인이 맛있는 것 많이 줘요. 막 주는데 이뻐서 먹을 것 줍니까? 주인이 돼지가 이뻐서 먹을 것 줍니까? 빨리 커야 널 잡아먹겠습니다.

 

 

 

4. 지금 우리의 모습은?

 

 

 

마귀가 자꾸 우리 신앙생활에 방해하면서 세상적인 욕심을 갖고 살아가게 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아무리 세상의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해도 이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저주입니다.

 

하나님의 관계가 멀어지는 것은 성경을 보면 가인의 후손들이 포악한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것,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사람은 미래도 없고 기억될 것도 없고 존귀하게 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것 아무리 움켜지고 살았어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살펴봅시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도 하나님을 떠난 가인의 후손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연예인으로, 법관으로, 의사, 학자, 운동선수로 각자의 분야에서 유명해 지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부의 축적이 자기 존엄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국가 공직의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온갖 힘을 다 쓰는 사람도 있고 권력을 최고의 목적을 삼고 수단과 방법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말초적 쾌락에 빠져 사는 사람들도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이 주신 가치관이 아닌 거리, 세상, 자기 심지어 마귀가 주는 가치관에 사는 사람들, 그 결과 가정은 파괴되고 사업은 파산하고 약물중독, 알콜중독, 정신병을 앓을 뿐 아니라 마음은 공허해지고 인생은 무의미하게 됩니다. 이것 아무것도 이러한 속박들로 이들을 구원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 안에 한번 봅시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정말 예수가 전부인 사람 있습니까? 예수님을 너무 사랑해서 살아가는 사람, 혹이야 있기야 있겠죠.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 추구하는 것은 예수보다 세상적인 것입니다. 전부다 세상적인 욕심으로 꽉차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찬송은 잘 부르는데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하지만 속으로 '많네'하죠. 많죠, 엄청나게 많죠. 가치관이 이러한 형성된 세상에 욕심적인 가치관으로 꽉 차 있는 사람이 거듭난 자가 아니라는 거죠. 거듭난다는 것은 옛것의 가치관이 벗겨져야 되는 거죠. 이것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밴드목회3-제 1 장 교회론/ 제 3 과 창조된 가정의 회복과 교회의 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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