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칼럼 좌절하거나 포기할 수 없는 ‘거룩’

첨부 1


좌절하거나 포기할 수 없는 ‘거룩’    
 
- 김병삼 목사 (만나교회)
 

‘거룩’이라는 단어 앞에서 당당할 수 없는 우리에게 성경이 요구하는 ‘거룩’은 때로 좌절을 경험하게 한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거룩은 모든 사역자와 그리스도인에게 두려운 말이다. 어쩌면 이 불가능한 도전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은 아닐까? 

많은 그리스도인이 거룩을 이루는 데 실패하는 것은 너무 쉽게, 너무 빨리 거룩함에 도달하려는 조급함 때문이다. 어떤 젊은 화가가 원로 화가에게 푸념을 한다. “요즘 경기가 안 좋아서 그림이 팔리지 않아요. 그림을 그리는 데 3일밖에 안 걸리는데, 이 그림 한 장 파는 데는 3년이나 걸려요.” 

이 말을 듣던 원로 화가가 이렇게 대답했다. “생각을 바꿔보게, 자네가 3년 동안 진지하게 그림을 그린다면, 그 그림은 3일 안에 팔리게 될 걸세.” 

거룩함을 이루어가는 것이 힘든 일이지만, 그 거룩을 이루고자 우리가 얼마나 애쓰며 최선을 다하는지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다. 영어 성경에 보면 거룩이라는 단어를 ‘남에게 비난받지 않는 것(blameless)’이라고 표현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아야 하지만, 그 거룩함이 증명되는 것은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드러난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이지만 사람들과의 관계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면 거룩하기 위해 하나님도 만족시키고 사람도 만족시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사람들에게 비난받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는 거룩함과 동일시될 수 있는가? 한 번 진지하게 우리 양심에 손을 대고 신앙적인 물음을 던져봤으면 좋겠다. 거룩함이 양자택일의 문제라고 생각하며 우리를 정당화하지 않는지.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마음대로 하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행동은 어떤 행동도 잘못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변명이나 편리함 때문에 우리가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삶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비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필자가 개척교회에서 새벽예배를 인도하던 시절, 문을 가장 먼저 열고 들어가서 또 문을 마지막에 잠가야 했기에 오래 기도하는 교인들 때문에 괴로웠던 적이 있었다. 기다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기다리는 동안 어떤 모습으로 있어야 하느냐는 난감함 때문이었다. 사람들을 의식해야 할 때, 거룩함은 나를 속박하는 것이었다. 

그때보다 조금은 성숙한 목회자로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나는, 때로 거룩하게 보이지 않는 나의 모습을 교인들 앞에 표현할 때가 많다. 그 모습이 적어도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는 내가 부끄럽다고 느끼지 않을 때에 말이다. 비로소 거룩함이 율법적인 속박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자유함이라는 것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나를 알아보는 이 없는 곳에서 홀로 서 있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거룩을 말해준다. 

- 출처 : 국민일보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