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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무소유보다 위대한 부활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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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보다 위대한 부활신앙 

- 소강석 목사 (새에덴교회)
 

한동안 불교계 승려 법정의 무소유 신드롬이 있었다. 물론 무소유의 환상과 가치를 인정한다. 사람은 소유와 집착의 노예가 될 때 불행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도피적 무소유, 혹은 감성적 무소유를 경계해야 한다. 세상에 대한 소유와 집착이 싫다고 해서 우리가 적삼 하나만 가지고 산으로 들어가 버리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가정을 이끌고 자녀를 교육하려면 학자금도 저축하고 아파트도 사고 소유해야 한다. 나도 한 사람의 목사로서 무소유의 행복을 인정한다. 그러나 무소유만 행복인가. 소유를 통한 행복도 있다. 자신의 땀과 열정으로 합법적인 부를 소유하여 어려운 이웃을 위해 선한 일을 한다면 그것은 더 실제적인 무소유이며 삶의 행복일 것이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소유, 무소유가 아니다. 아무리 청산에 들어가 혼자 고고한 무소유적 삶을 살며 행복을 누렸다고 해도 인간은 어차피 죽는다. 솔로몬처럼 세상의 모든 부와 명예와 권력을 소유한 사람도 결국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고백하였다. 

일제시대에 효봉 스님은 원래 유명한 판사였는데 한순간의 판단 실수로 무고한 사람을 사형시켜 버렸다. 그 후로 그는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에 법복을 벗고 전국을 다니면서 엿장수를 하다 결국 속세를 떠나 승려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남은 평생을 무소유의 삶을 살며 당대 최고의 승려가 되었다. 그런데 그가 죽을 때 많은 제자들과 신도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모든 것이 무다. 모든 것이 무야….” 

그렇다. 소유의 삶이건 무소유의 삶이건 인생은 죽음 앞에서 다 허무하다. 인생은 결국 죽음으로 끝난다. 이 세상의 어느 종교도 인류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죽음을 넘어선 부활의 종교다. 예수님만이 인간의 죄 문제와 죽음의 문제를 박살내시고 승리하셨다. 아무리 자기 혼자 무소유의 삶을 살며 행복을 누리든지, 소유의 삶을 살면서 선을 향하여 행복을 누리든지 결국 인간은 죽는다. 헛되고 무상하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은 아름답고 위대한 것이다. 

미국 어느 대학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자유주의 신학자는 톨스토이가 말한 정신과 마음의 부활만 믿고 예수의 육체 부활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이 교통사고로 죽음을 당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딸의 시체를 끌어안고 절규하였다. “하나님, 죽은 내 딸을 위해서라도 과연 부활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 후로 그는 주님의 부활과 천국을 전하는 교수가 되었다고 한다. 

들녘의 꽃들은 겨울의 폐허를 지나 스프링처럼 솟아난다. 겨울나무 가지 끝에서는 푸른 새싹들이 돋아난다. 

이제, 죽음과 절망을 넘어서 부활을 노래하자. 한국교회의 부활 신앙을 한반도에 가득 울려 퍼지게 하자. 

유한한 인생의 길 위에서 무소유보다 위대한 부활 신앙을 가지며 산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가. 인류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박살내 버린 부활신앙은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한가.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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