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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린튼 家의 한국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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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튼 家의 한국사랑 
 
- 정충영 교수(경북대 명예교수)


<光州開化의 아버지>라 불리는 유진 벨(Eugene Bell 한국명 인돈: 1868-1925)은 구한말 근대 교육과 의료사역을 펼친 선교사입니다.

1895년 조선에 온 27세 선교사 유진 벨은 호남지방에서 활동하며 많은 학교, 병원, 많은 교회를 세우고 봉사활동을 해오다 1925년 광주 양림동에 묻혔습니다. 그러나 그의 일은 후손들에게 이어졌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3년 전 윌리엄 린튼(1891∼1960: 한국명 인돈)을 사위로 맞았습니다. 린튼은 1912년 선교사로 목포에 왔습니다. 군산 영명학교 교장으로 일을 때 그의 고향 애틀랜타 신문에 3·1운동의 생생한 기사를 싣고 도움을 청했다가 총독부에 ‘요주의 인물’로 찍히기도 했습니다.

린튼은 1937년 전주 신흥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는 학교 문을 닫을 정도로 신사참배를 거부하였고 1940년에는 추방되었지만 해방 이듬해 한국에 돌아와 전주 기전여고 신사 터에 화장실을 지어 일제에 통쾌하게 복수했습니다. 1959년 기독교대학 대전대학(지금의 한남대)을 세운 지 1년 만에 암으로 세상을 떴습니다.

그러나 린튼 가문의 한국사랑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린튼의 네 아들 윌리엄 린튼, 샬롯, 휴, 드와이트는 한국에서 나서 고등학교까지 한국에서 교육을 받았고 셋째 휴와 넷째 드와이트는 계속 한국에 남아 목회와 교육·의료 활동을 폈습니다.

셋째 아들 휴는 순천지역 선교를 맡아 남해안을 돌며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니며 600곳 넘는 교회를 개척했기 때문에 ‘순천의 검정 고무신’으로 통했습니다. 아깝게도 1984년 그는 교통사고로 숨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인 베티(한국명 인애자) 여사는 순천에서 결핵재활원을 운영해 30년 이상 결핵퇴치사업을 전개해온 공로로 국민훈장, 호암상 등을 받았습니다.

넷째 아들 드와이트는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1952년 한국으로 돌아와 25년간 줄곧 광주에 머물며 의료봉사활동을 전개하였고 호남신학대 학장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2010년 1월11일) 한 장례식에 참석하고 승용차편으로 귀가하다 애틀랜타 인근에서 교통사고로 숨졌습니다.

휴 린튼의 맏아들 스티브(59.한국명 인세반)과 둘째 존(50.한국명 인요한)은 유진 벨 선교사의 한국 선교 사역 100주년을 기념하여 1995년에 유진 벨 재단을 설립하고 유진벨재단 이사장과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으로 대북 의료지원 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몇 대에 걸친 한국 사랑을 보면서 우리들의 나라사랑이 어떤지 살펴보게 됩니다. 이들과 함께 잃었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쓴 우리들의 애국지사들과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의 나라사랑으로 오늘이 존재하게 되었음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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