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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당신의 귀는 몇 개 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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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귀는 몇 개 인가요? 

- 도원욱 목사 (서울 한성교회)
 

“목사님, 우리 애 때문에 걱정이에요. 어찌나 덤벙대는지 매일 한 가지씩 빼먹고 가는 건 보통이구요. 저와 전화로 통화할 때도 ‘엄마가 지금부터 하는 말 잘 들어. 전화기 끊지 말고 주방에 가서 통신문 가져다가 읽어줄래?’ 했더니 이 녀석 왈 ‘응, 알았어. 엄마 끊어’ 하곤 딸깍 전화를 끊더라고요. 어쩌면 좋아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새내기 학부형의 웃지 못할 고민거리다.

아이들이 꾸지람 당하는 이유는 대부분 제대로 듣지 못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말하는 법을 배우는데 2년이 걸린다면 듣는 법을 배우는 데는 80년이 걸린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만큼 듣는 기술을 배우고 습득하는 일은 끊임없이 연마해 나가야 할 장기적인 훈련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듣는 사람의 대표적인 표본은 예수님이시다. 마가복음 10장에는 예수께서 소경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이 기록돼 있다. 예수께서 그의 눈을 뜨게 하실 수 있었던 건 그의 외치는 소리를 들으셨기 때문이었다.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은 바디매오에게 한결같이 ‘꾸짖어 잠잠하라’며 무시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소리에 ‘머물러 서서’ 그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신 뒤 보기를 원하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셨다(막 10:46∼52).

예수께서는 이 땅에 계시는 동안 하나님의 음성에 늘 귀 기울이셨고, 또한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그들의 말을 경청하셨다. 헨리 나우웬은 말한다. “예수님의 온몸이 귀였다”고. 대화에 있어서 이처럼 ‘경청’은 온몸을 공들이고 애써야 할 만큼 값진 일이다. 경청은 그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을 듣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대방도 입술로만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눈빛과 제스처, 억양, 표정, 목소리의 강약과 떨림으로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차라리 경청은 대화에 있어서 하나의 예술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철학자 제노가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은 왜 하나의 입과 두 개의 귀를 주셨을까? 말하기보다 듣기를 배로 하라는 메시지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을 때 그 답을 몰라서 고민하기보다 해답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자신이 고민스러울 때가 더 많다. 그러기에 내 고민을 들어주고 공감해줄 그 누군가를 찾게 된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고난의 대표적인 인물 욥에게도 세 친구가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욥의 참담한 그 마음을 헤아려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저마다 자신만의 논리로 말하고 판단하기에 급급했을 뿐 그 어느 한마디도 욥에게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입을 여는 대신 귀를 열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혹시 내가 욥의 친구 중 하나와 같은 사람은 아닌지 내 모습에 귀 기울여 보기 바란다. 예수께서 소경 바디매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던 건 그에게 관심이 있으셨기 때문이었다. 

관심은 곧 사랑이다. 사랑은 곧 섬김의 마음이다. 상대방을 사랑하고 섬기려는 마음이 없이는 절대로 귀를 열 수 없다. 귀를 열기 전에 먼저 당신의 마음을 그에게로 열라. 예수께서 섬기려 이 땅에 오셨듯 그 마음으로 섬기라. 그러면 들릴 것이다. 그렇게 듣게 된다면 아마도 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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