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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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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    
 
- 김병삼 목사 (만나교회)
 

박성민 목사는 그의 책 ‘완전 소중한 비밀’에서 새로운 관계를 위해 “통념을 뛰어넘는 넓은 관점으로 보라”고 권면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당시 통념이라고 여기던 사실을 절묘하게 뒤집은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관계라는 측면에서 더욱 그렇다. 

먼저 마태복음 7장 12절을 보자.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당시 존경받은 랍비 할렐은 구약의 율법을 해석하면서 “남이 너에게 했을 때 싫은 것을 남에게도 하지 말라”고 말했다. 차이를 알겠는가? 할렐은 피동적이며 대응적이고 소극적이다. 내가 당해서 싫은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은 능동적이며 주도적이고, 적극적이다. 남이 나에게 해주었을 때 좋을 만한 것을 남에게 행하라고 가르친다. 

다음으로 누가복음 9장 50절을 보자.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우리를 위하지 않으면 우리를 반대하는 이들이라는 논리를 가진 세상은 늘 이 기준으로 편 가르기를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으면 우리를 위하는 자”라고 말씀한다. 

즉, 영어의 ‘against’와 ‘for’의 차이다. 제자들이 생각하는 우리 편과 예수님이 생각하는 우리 편의 범위가 다르다. 

‘도덕적 위안’이라는 말이 있다. 어느 정도의 선행을 통해 자신의 죄책감을 상쇄시켜 보려는 의도를 뜻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왠지 꺼림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름의 기준을 세운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자기중심적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준에서 보라는 것이다.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라는 책에서 피터 싱어는 지금 일어나는 기부문화가 얼마나 진정성이 있는가를 묻는다. 예를 들어 유명한 기부의 사람 빌 게이츠가 빈곤 퇴치를 위해 290억 달러를 내놓았다는 말에 세상은 감동한다. 게이츠와 그의 아내 멜린다는 매년 50만명의 어린이가 ‘로타바이러스’(아동의 설사를 유발하는 바이러스)로 죽어 간다는 보도를 보고 “모든 생명은 그들이 어떻게 살든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라고 선언하며 자선사업에 뛰어들었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한다고 해도 카네기나 록펠러가 평생 동안 기부한 것을 무색하게 만드는 액수다. 

하지만 그는 지금 시애틀 근교 호반에 1억3500만 달러에 달하는 집에 산다. 매년 그 집에 대한 재산세만 100만 달러가 넘는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한다. 그가 그렇게 많은 기부를 했기 때문에 이런 정도의 사치를 누리고 살 자격이 충분히 있는가? 물론 그는 다른 어떤 부자보다 훌륭하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 보자. 오라클사의 최고경영자 래리 엘리슨은 2007년에 3900만 달러를 기부했다. 굉장히 큰 액수 같지만 그렇게 매년 600년간 기부해도 10억 달러가 수중에 남는다. 그 역시 2억 달러짜리 집에서 살고, 2억 달러짜리 요트인 ‘라이징 선’이 있으며 자가용 비행기와 제트기까지 소유하고 있다. 

각자 자신의 기준에서 행하는 일이 마음의 위안이나 사람들의 시선을 가릴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준에서 산다면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삶의 지평이 열릴 것이다. 그래서 늘 예수님의 삶은 우리에게 도전을 준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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