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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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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교회  
 
- 레너드 스위트(드루신학대학교 석좌교수)
 

모던 세계에서는 보는 것이 전부였다. 모던인들은 소리의 음량 때문에 혼란을 느꼈다. 진실은 눈을 뜨는 것이었다. 그런데 소리가 객관적 실재를 대체하는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진실은 귀를 여는 것이다. 보는 것은 혼돈에 질서를 부과하는 것이다. 소리는 ‘귀의 이미지화’(auditory imagination·T S 엘리엇)와 ‘청각적인 생각’(acoustic ideas·토마스 만)을 통한 주의 깊은 경청으로 본질적인 형태를 발견하는 것이다. 

교회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일은 ‘비전을 가진 리더’라고 부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먼저 경청하지 않고 혼자서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는 폭군이 될 위험성이 있다. 귀와 눈이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위험이 닥친다. 비전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비전은 말과 시각으로 들어오는 것을 듣는 것이다. 

‘소리’를 우선으로 하는 것은 교회를 더욱 성경적으로 또한 더 과학적인 뼈대로 돌아가도록 이끈다. 성경 본문과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영혼으로 가는 제일의 통로는 귀였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비전을 ‘듣는’ 것만큼 ‘보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물리학에서 실제 우주의 블록 건축물은 ‘에너지의 진동하는 끈’으로 정의된다. 다시 말해 물질의 에너지화된 배열은 진동하는 공명을 만들어낸다. 우주의 본질은 이제 보는 것보다 듣는 것으로 드러난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그의 고전 에세이 헤라클리투스(Heraclitus)에서 로고스의 개념이 ‘말’의 직관적이고 경험적인 측면을 제한하여 연설과 추론적인 판단은 일방적인 것이 되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로고스는 ‘말하는 것’만큼 ‘듣는 것’이며 ‘나타난 것’만큼 ‘경청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양들 사이에는 음색의 반향이 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 포스트모던인들은 소리의 신학을 발전시킬 것이다. 

켈트(Celtic) 전통에는 ‘하나님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듣는’ 형상이 있다. 켈트 전설에 따르면 왜 사랑받는 자 요한이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 기대었는가? 하나님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장에 가장 가까운’ 분이시다(요 1:18). 

포스트모던 리더들은 무엇보다도 기대는 자이며 듣는 자이다. 자신들의 존재가 삶에 기대도록 하며 그들의 귀가 삶의 고동소리를 듣도록 훈련된 사람들이다. 리더십은 하나님의 ‘속삭이는 소리’와 그의 ‘능력의 우레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욥 16:14) 예수님께서 이미 세상에서 하고 계시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외치고 따르도록 도와주는 것이다(요 14:12). 

<번역: 김영래 감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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