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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백년 후를 내다보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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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후를 내다보는 꿈   
 
- 소강석 목사 (새에덴교회)
 

허영자 시인은 꿈을 이렇게 노래했다. “밤마다 밤마다/ 한 트럭 가득히/ 불보다 뜨거운/ 장미꽃 싣고/ 고속으로 질주하는/ 나의 꿈이여” 꿈은 불보다 뜨겁다. 꿈은 장미꽃보다 향기롭다.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질주한다. 나는 전주에 집회를 가면 꼭 들르는 곳이 있다. 전킨 선교사의 묘지다. 전킨 선교사는 유니언 신학교를 졸업하고 1892년 11월 3일 한국에 도착한 선교사이다. 그는 전도를 하다가 급류에 빠져 죽을 뻔 했고 숯불가스 중독으로 쓰러지기도 했다. 밤에는 주막에서 모기나 빈대에게 시달렸다.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호남지방에 선교의 길을 열었는데, 그것이 군산구암교회와 개복교회의 시작이었다. 

그는 이후로 옥구, 익산, 김제 등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세 아들이 풍토병에 걸려 모두 죽고 말았다. 고국을 등지고 타국에 선교하러 와서 세 아들이 죽고 말았으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그러나 그는 세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은 선교사의 영광이고 하늘에 쌓은 상급이라고 생각하면서 더 열심히 전도를 했다. 그러나 그도 육신을 가졌기에 풍토병으로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건강을 걱정한 동료 선교사들이 회의를 해서 그 당시 어느 정도 안정적이었던 전주서문교회로 사역지를 옮겨 버렸다. 그리고 법을 제정하여 절대 20리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그래도 가만히 있지 않고 그 당시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전주서문교회 예배당을 건축하고 20리 밖으로 나가 6개의 교회를 개척하며 고아원을 여러 개 설립했다. 그러다 결국 풍토병으로 인한 폐렴으로 1908월 1월 2일 43세의 젊은 나이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전킨선교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전주서문교회와 동역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가 현재의 기전여중, 고, 대학교이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시울이 젖는다. 그래서 전주에 갈 때 마다 그의 묘지를 찾아 헌화하고 불꽃같은 꿈을 기억하며 다시 꿈을 새롭게 한다. 그럴 때 그의 초라한 무덤보다 나의 초라함이 더 느껴지는 것이다. “과연 나는 얼마나 그처럼 멀리 내다보는 꿈을 꾸고 있는가” 하면서 말이다. 

그는 과연 한국교회 백년 후를 내다보는 꿈을 꾼 것이다. 백 년 전의 조선 땅은 미신과 우상의 족쇄에 묶인 흑암의 땅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꿈의 씨앗을 뿌렸을 때 반드시 복음의 꽃이 만개한 빛의 나라가 될 것을 내다보았다. 그가 풍토병에 걸렸을 때 그의 얼굴은 창백하였겠지만 가슴에는 파란 꿈이 빛나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도 백년을 내다보는 꿈을 꾸어야 한다. 아니, 한국교회 미래 천년을 내다보는 꿈을 꾸어야 한다. 

전킨선교사가 복음을 전할 때는 얼마나 조선 사람들이 핍박을 했는가. 지금 한국교회가 당하는 질시와 손가락질은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가 한숨을 쉬고 절망하는 까닭은 미래에 대한 꿈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백년의 꿈을 꾸자. 먹구름 사이로 빛나는 파란 꿈을 꾸자. 통일조국, 민족복음화, 세계선교를 향한 눈부신 꿈을 다시 회복하자.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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