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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내 인생의 셰르파, 어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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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셰르파, 어버이 

- 유관재 목사(성광교회)
 

지난달 27일 우리는 온 국민의 마음속에 희망을 주는 선물을 받았다. 바로 오은선의 안나푸르나 정상 등정이다. 그것으로 그녀는 여성 최초 히말라야 8000m 이상 14봉우리 완등을 이루었다. 그녀는 역사를 완성한 지난달 27일 안나푸르나(해발 8091m) 정상에 태극기를 꽂고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너무 기쁩니다. 대한민국 국민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엄마 아빠가 가장 생각납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영광이 있기까지 숨은 주인공이 많지만 가장 희생적 숨은 주인공은 그의 길을 안내하고, 짐을 들어주며 함께했던 ‘셰르파’가 아닐까?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사람은 에드먼드 힐러리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같이 에베레스트에 올라갔던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는 잘 조명 받지 못하고 있다. 사실 최초 에베레스트 등정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은 노르가이를 포함한 셰르파들이었다. 실상 에베레스트에 최초 등정할 때 정상에서 찍은 사진에는 힐러리가 없고 노르가이만 있다. 

셰르파는 티베트에서 살다가 네팔로 넘어오면서 집단을 이룬 부족의 이름이다(셰르파는 ‘동쪽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뿌리가 없는 이방인이었고 가난했다. 계급으로 구분된 당시 사회에서 최하층에 속했다. 그들이 구할 수 있는 직업도 힐러리의 최초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 붐이 일기 시작한, 에베레스트를 등정하는 백인들을 위한 짐꾼이나 인력거꾼 정도였다. 

셰르파들은 산을 오르는 데 필요한 식량, 의복, 텐트, 산소, 연료, 의약품 등을 지고 갔다. 산더미 같은 보급품을 날라야 했다. 그 덕분에 등반가들은 편하게 산을 오를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등반가들은 등반 중에 셰르파들이 운반한 고기, 치즈, 설탕 등을 맘껏 먹을 수 있었지만, 셰르파들은 빵으로 만족해야 했다. 등반가들은 옷을 여러 벌 껴입고 두터운 외투까지 걸치고 산을 올랐지만 셰르파들의 옷은 얇았으며 맨발로 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악천후에 짐을 나르다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럼에도 셰르파들은 결코 등반대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들은 마치 자일이나 피켈처럼 등반에 필요한 도구로 취급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셰르파가 없었다면 어떤 등반대도 산을 오르지 못했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셰르파를 생각하며 내 인생의 셰르파가 바로 어머니 아버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 때문에 모든 것을 희생하신 분들. 자식에게 좋은 것을 먹이기 위해 먹고 싶은 것을 못 먹었던 분들. 자식들에게 좋은 것을 입히기 위해 좋은 것을 못 입었던 분들. 자식이 더 잘 되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셨던 분들. 

히말라야 등반의 영광 뒤에 셰르파의 희생이 있었던 것처럼, 내 인생의 빛 뒤에는 어버이의 희생의 그림자가 있다. 어머니 아버지는 나를 눈부시게 하기 위해 눈물겨움을 선택하셨던 분들이다. 오늘 이렇게 어버이에게 고백하고 싶다. “어머니, 아버지! 당신들은 나를 위해 이름 없이 희생하신 나의 인생의 셰르파입니다. 당신들이 있기에 내가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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