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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당신에게 축구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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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축구는 무엇인가? 
 
- 박명철 ('아름다운동행' 편집장)


우리에게 축구는 무엇인가. 

12일 저녁, 대한민국은 축구로 하나가 됐다. 좌와 우의 이념 차이도, 기독교와 불교, 이슬람교 등 종교의 차이도 12일 저녁에는 없었다. 우리 모두는 ‘대한민국∼’으로 하나가 됐다. 한국이 그리스에게 완승을 거둔 저녁은 토요일이다. 아마도 다음날 설교해야 하는 목회자들은 강단에서 축구 이야기 하나 정도 하지 않고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실제로 13일 전국의 수많은 교회 강단의 메시지는 축구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당신에게 축구는 무엇인가. ‘축구는 [ ]이다.’ 이 [ ]속에 당신의 이야기를 채워 놓아 보시라. 크리스천들은 축구로 온 국민이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이 축구를 통해서 복음을 전할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교계에서 오랜 기간 기자생활을 했고 현재 아름다운동행 편집장으로 있는 박명철씨가 ‘축구는 [ ]이다’라는 제목의 글을 보내왔다. 교회 장로인 박 편집장은 기독저술가이며 축구소설을 쓸 정도의 축구 매니아다. 모 프로구단의 서포터스인 아들과 함께 경기장을 즐겨 찾는다. <편집자 주> 

1. 축구는 [우리]이다

메시, 마라도나의 재림

1986년 멕시코월드컵은 마라도나라는 걸출한 선수를 기억하게 만들었다.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의 경기에서 보여준 마라도나의 드리블은 수십 년의 세월을 두고두고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는 명장면 중의 명장면이다. 미드필드에서 출발해 다섯 명의 선수를 농락하며 57m를 드리블 한 뒤 골키퍼까지 제치고 골을 만들어냈다. 신기라 해도 모자람이 없는 재간이었다. 

그리고 ‘마라도나의 재림’이라 불리는 리오넬 메시를 본다. 메시도 드리블의 마술사다. 그가 드리블 할 때 볼은 그의 발에 붙어 있는 듯하다. 달리는 속도와 드리블 속도가 비슷하면서 순식간의 상대의 중심을 허물고 전진해 들어간다. 영화 속의 제임스 본드가 축구를 하는 것처럼 메시의 드리블은 어떤 상대도 저지할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그라운드의 영웅들은 모두 화려한 드리블 능력을 가진 선수들이었다. 호날두의 드리블은 힘이 넘치고, 호나우딩요의 드리블은 서커스를 보는 듯 재미있다. 프랑스월드컵에서 우리나라는 멕시코와 첫 경기를 치렀다. 하석주의 프리킥 골과 연이은 하석주의 퇴장이 기억나지만 무엇보다 블랑코라는 친구가 우리 수비수 두 명을 앞에 두고 그 사이로 볼을 빼가던 드리블 모습이 더욱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 드리블은 나의 기억을 점령하는 특별함이 있다. 그러니 드리블 없는 축구는 건조하다.

드리블은 영웅을 만들어준다. 한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게 만든다. 그의 얼굴에 포커스를 맞출수록 그의 주변은 뿌옇게 사라진다. 그렇게 경기장의 스물두 명 가운데 한 사람만을 기억하게 만드는 마력을 가진 게 드리블의 힘이다. 

그러나 축구는 위대한 한 사람의 탄생에만 의지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현란한 드리블이 없어도 수비를 허물고 골을 향하여 나아가는 강력한 패스의 하모니가 있기 때문이다. 패스는 두 사람 이상의 하모니를 전제로 한다. 드리블이 아무리 빨라도 달리는 속도를 뛰어넘을 수 없지만 패스를 통한 전진은 공의 속도만큼 빠르게 상대의 골대로 침투할 수 있다. 드리블은 마치 상대를 제거하며 적진에 이르는 저격수라면 패스워크는 상대가 잠든 사이를 뚫고 적진에 이르러 목적을 수행하는 기술이다. 그래서 패스워크는 한 사람의 부각과 나머지 사람들의 망각으로 귀결되는 드리블과 달리 구성원 전체의 얼굴을 또렷이 볼 수 있는 단체사진 같다. 

드리블은 현란하다, 그러나 패스는 아름답다

축구는 열한 사람의 하모니가 만드는 예술이다. 나머지 열 사람을 지우고 한 사람에게 집중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탁월함은 열한 사람의 평범함 앞에서 무기력하다고 전제한 게임이다. 한 사람의 존재방식이 드리블이라면 열한 사람의 존재방식이 패스워크이다. 패스워크의 힘은 벵거의 철학처럼 공보다 빠른 사람은 없다는 데 뿌리를 둔다. 그래서 패스워크는 드리블보다 빠르고 강력하다. 드리블은 한 사람의 탁월함을 기반으로 하지만 패스를 통한 전진은 두 사람 이상의 협동으로 성취된다. 패싱 플레이의 매력은 패스를 통해 공간을 열어가는 데 있다. 여기서 전술이 탄생한다. 드리블을 전술이라 하지 않는다.

패스워크는 나와 함께하는 다른 사람의 자리를 확인하는 데서 출발한다. 나아가 그의 움직임과 그가 도달해야 할 공간을 생각한다. 공을 지닌 채 도달할 수 없는 공간을 동료의 패스를 도움 받아 도달하는 일이다. 패스워크는 공을 가진 사람에게만 초점을 맞춰선 무의미하다. 공을 가진 사람과 동시에 그 공이 침투하여 도달할 동료의 자리까지 바라봄으로써 의미가 있다. 뿐만 아니라 패스를 한 뒤에도 그는 홀로 소외되지 않는다. 패스를 한 뒤 오히려 동료의 안전을 생각해야 하는 책임을 부여받는다. 패스를 받은 동료가 다시 그 공을 상대의 진영 핵심부로 보낸 뒤 자신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하려면 그 핵심부에 공을 갖지 않은 자신이 침투해 있어야 한다. 공을 갖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자유롭고, 그 자유로움을 무기 삼아 자신의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움직이는 속도보다 빠르게 공이 도달하도록 적절한 간격을 유지하는 것이 공을 갖지 않은 자유로운 동료들의 몫인 셈이다. 그럼으로써 공을 가진 동료가 공을 상대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언제나 긴장해야 한다. 그러므로 패스워크는 나의 생존과 동료의 생존이 다르지 않다. 그것은 네트워크로 연결된 혈관처럼 공생하고 공존한다. 축구는 이렇게 열한 사람이 하나의 목숨을 가진 공동체의 게임이다. 축구의 아름다움은 현란한 드리블에 있지 않고 공동체의 하나 됨에 있다.

연대하는 ‘우리’의 탄생

축구의 아름다움 곧 축구의 미학을 통해 나는 서로 다른 수많은 ‘우리’의 가능성을 생각한다. 탁월한 영웅 한 사람을 만듦으로써 수많은 ‘우리’를 망각해버리는 삶의 방식이 결코 아름답지 않음을 생각한다. 골을 얻기 위한 전술을 탄생시킨 패스의 힘이 공보다 빠른 사람이 없다는 철학에서 출발한 것처럼, 인류의 진보가 얻어내야 할 인류의 존엄에 이르기 위하여 함께 연대하고 손을 맞잡아야 하는 일 또한 모든 한 사람은 나머지 아흔아홉 사람만큼 무겁고 존귀하다는 전제를 그 철학으로 삼는다. 이것이 연대하는 ‘우리’의 탄생이다.

축구가 패스워크를 통한 하모니 게임이듯 내가 살아가는 삶 또한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의 원리를 통해 하모니를 만드는 일이다. 그러니 나의 존재를 다른 사람의 존재와 따로 떼어놓지 말아야 한다. 나는 누군가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 적당한 거리를 가짐으로써 누군가의 존재를 완성해야 하는 동시에 나의 책임을 완성해야 한다. 나와 누군가의 거리, 이 관계를 긴장 속에서 유지해 나갈 때 우리는 우리가 꿈꾸는 골에 이를 수 있다.

골에 이르기 위하여 우리는 자칫 우리를 포기한 채 한 사람의 위대한 영웅에 의지한다. 이것이 목표를 이룰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렇게 이룬 목표는 아름답지 않다. 한 사람을 부각하고 나머지를 망각해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방식은 나의 책임을 방기해버린 게으른 공동체의 모습을 떠올린다. 비정상이다. 이런 비정상의 상황을 즐기거나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2. 축구는 [둥근 평화]이다

월드컵이 열리는 남아공은 불과 20여 년 전까지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지긋지긋한 흑백차별정책이 있던 땅이다. 21세기가 가까운 그때까지 백인들이 공식적으로 흑인들을 차별하며 지배하던 땅이었다.

언감생심 거기서 월드컵이 열리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심지어 그때는 FIFA가 월드컵 출전 자격까지 남아공에게 주지 않던 시절이었다. 국제사회가 남아공을 향하여 분노할 수 있는 방법이란 게 고작 그런 것뿐이었다.

하지만 나중에야 알려진 일이지만 그 분노의 땅에서도 축구는 희망을 만드는 아름다운 게임이었다. 

마테라치와 지단, 그리고 로벤 섬

자, 이제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2006년 독일 월드컵으로 시점을 옮겨보자.

결승전에서 우승의 향방보다 더 큰 이슈가 된 사건이 있었지. 바로 세기의 축구 스타 지단과 이탈리아의 수비수 마테라치의 박치기 사건 말이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출신의 지단은 경기 중 마테라치의 인종 차별 발언을 참지 못해 그에게 박치기를 했고, 지단이 퇴장당한 프랑스 팀은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이탈리아에게 우승컵을 내줘야 했다. 

당시 이 사건은 경기장 폭력, 인종 차별, 지단의 은퇴 등 숱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며 전 세계적인 이슈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사건에 관한 수많은 언급들 가운데 유난히 눈에 띄는 내용이 있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조직위원이었던 토쿄 섹스월레라는 사람과 제프 블래터 FIFA 회장이 이런 제안을 한 것이다.

“남아공의 로벤 섬에 두 사람을 불러 화해를 주선하겠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남아공 로벤섬이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축구와는 무슨 관계가 있기에 이런 제안이 나왔을까? 그 궁금증을 풀어주는 이야기는 한참 뒤에 한 권의 책으로 나와 전 세계 축구팬들에게 알려졌다. 

이런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남아공 케이프타운 근처에 있는 로벤 섬은 정치범 수용소로 사용된 섬이었다. 정치범 수용소라는 게 주로 그 아파르트헤이트라는 흑백차별정책 때문에 생겨난 범죄자들을 수용한 곳이었다. 남아공의 극단적인 인종분리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는 잔혹하고 엄격했다. 흑인들은 자유롭게 거주할 수도, 일할 수도, 심지어 통행증이 없이는 거리를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이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하며, 흑백차별정책의 철폐를 위해 싸우던 흑인들이 로벤 섬에 수용되어 슬프게 썩어가고 있었다.

수용소에서 그들은 구타와 고된 노동으로 힘겨운 수감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그러나 수감자들에게도 하나의 숨 쉴 틈이 생겼다. 그것은 간수들 몰래 셔츠를 둥글게 뭉쳐서 시작한 축구게임이었다. 축구를 통해서 수감자들은 작은 희망을 만들었다. 

남아공월드컵이 싹트다

그들은 같은 흑인들이었으나 어떻게 보면 정치 노선에 따라 서로 갈라져 있었다. 그것은 더욱 슬픈 일이었다. 하지만 축구를 하며 하나가 되어가던 수감자들이 이번에는 함께 연대하여 교도소 당국에 당시 남아공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인 축구를 수용소에서도 공식적으로 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주장하였다. 때마침 남아공의 가혹한 인종차별정책에 반대하던 국제사회와 적십자사의 압력까지 더하여 당국은 이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결구 허락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마침내 수감자들의 축구 리그인 마카나축구협회가 1966년 만들어졌다. ‘마카나’라는 이름은 로벤 섬에 전설로 전해지는 흑인 영웅의 이름이었다. 1400여 명에 이르는 수감자들은 그들 중에서 선수는 물론 매니저, 심판, 코치 등을 체계적으로 구성하였고, 세 개의 리그로 나누어 수십 개의 팀들이 매주 축구경기를 치렀다. 경기는 FIFA의 규정을 엄격하게 적용하였으며, 이 리그는 1991년 감옥이 폐쇄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답답하고 억눌린 그 칠흑 같은 어둠의 시간을 견뎌오던 그들에게 축구를 하는 것, 또는 이 리그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졌을까? 먼 바닷가로 갈매기가 날 때 그들에겐 얼마나 가슴 끓는 열망이 있었을까? 그들의 축구는 바로 그 열망을 담은 몸부림이었을 게다.

그러니 로벤 섬은 자유와 억압, 그리고 인간정신의 승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인 셈이다. 바로 이 로벤 섬 수용소에 수용된 그들, 절망 속에서 자신의 몸을 곧추세우기도 벅찼을 그들이 축구를 통해 희망과 평화를 일궈냈고, 나중에 차별정책이 사라지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었을 때, 그들은 누구보다 아름다운 남아공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영역에서 지도자가 되었다. 

그들에게 축구는 즐거움이었고, 운동이었으며, 싸움의 힘을 결집시키는 큰 힘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축구를 통해 하나가 되고 희망을 발견했으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되찾았다. 그래서 마카나축구협회의 역사는 세계를 하나로 만들어준다는 축구 정신을 무엇보다 잘 상징하였고, 결국 남아공이 2010년 월드컵 개최지로 선정되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그래서 제프 블레터 FIFA 회장은 자주 “축구는 로벤 섬의 축구인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로벤 섬은 이처럼 축구라는 스포츠의 이상을 담은 ‘성지’ 같은 곳이 되었다. 

거기서 수용되어 이 축구협회의 일원이었다가 나중에 남아공의 대통령이 된 만델라는 이렇게 증언한다.

“축구를 통해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축구는 그저 재미있는 게임만은 아니다. 때로 축구는 위대한 역사의 중심에서 새롭고도 당당한 존재로서의 역할을 부여받기도 한다. 축구가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까닭은 이처럼 숱한 인류의 역사와 함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구인이 함께 축구를 하는 한, 우리는 그 축구를 통해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고, 평등한 세상을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방해하고 억압하는 어떠한 세력과도 맞서 싸울 용기를 불어넣어줄 상징적인 힘을 우린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축구이다.

크로싱 속의 축구

알다시피 영화 ‘크로싱’은 북한 함경도 어느 탄광마을에서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아가던 세 가족의 잔인하고도 엇갈리는 삶을 그려낸다. 폐결핵으로 쓰러진 엄마, 그리고 엄마의 약을 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목숨을 걸고 떠나는 아빠 영수, 그리고 엄마 아빠 없는 고향을 떠나 죽음과 마주하며 아슬아슬한 생명을 이어가는 아들 준이…. 

그들을 움직이는 힘은 사회주의니 자본주의니 하는 따위의 이념이거나, 또는 욕심을 부려 부를 쌓으려는 탐욕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 그들에게 천국 같은 세상이란 건, 건강한 엄마가 있고, 함께 축구하며 놀아줄 아빠가 있고, 그리움을 달래줄 비 한 줌이 내리고, 나의 사랑을 받아줄 친구와의 만남만 보장되면 되었다. 그들의 천국은 그렇게 소박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가족에 대한, 이 조촐한 그리움 하나 지켜주지 못할 만큼 허황하였다. 어이없는 건 아빠가 그렇게 목숨을 걸고 찾아야 했던 엄마의 약이란 게, 우리가 살아가는 이 남한 땅에서는 보건소에만 가면 무료로 구할 수 있는 흔하디 흔한 약이라는 사실이었다. 

굶주린 배를 안고 살아가는 그들 뒤로 언제나 붉은 글씨의 정치문구들이 보였다. 실제로 북한 어디를 가든 볼 수 있는 문구들이다. 나는 북한에서 살아가는 우리 동포들의 가여운 모습과 오늘의 북한을 그렇게 만들어온 그 정치적인 문구들이 따로 떼놓을 수 없이 연관되어 있음에도 그 두 개의 풍경이 결코 어울리지 못하는 별개의 풍경으로 와 닿는다.

정치적인 선전문구들이 그렇게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일까? 지금 당장 아내의 결핵을 고칠 약이 필요하고, 자식이 뛰노는 데 필요한 운동화와 축구공이 필요한 아빠에게, 수령을 찬송하는 그런 선전글귀가 어떤 위로를 줄 수 있을까? 인민들의 눈에서 멀어져버린 ‘그들만의 천국’이 무슨 의미를 가질까? 

그 시뻘건 글씨를 두려워하는 건 어쩌면 그 글씨를 보면서 살아가는 그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형편을 나 몰라라 하고 살아가는 남한 사람들이 아닐까? 먹을 것이 남아돌아 음식물 쓰레기로 10조를 버리는 우리들에게나 의미 있는 문구들 아닐까?

그렇게 소박한 소망조차 충족할 수 없는 땅에서 살아가는 아빠 영수와 아들 준이는 우리와 같은 얼굴, 같은 언어, 같은 역사를 가진 친구들의 모습이다. 그들이 지금 죽음처럼 깊은 신음을 하며 살아간다, 아니 죽어간다. 죽음이 삶만큼 가까워서 생명이 생명의 존엄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북한에서 축구를 잘하여 인민들에게 영웅이었던 사람 영수가 만난 풍요로운 남조선은, 그래서 감탄의 땅이 아니라 형제의 배고픔에도 귀 막고 살아가는 배신의 땅처럼 와 닿는다. 영수의 절규는 그래서 귀에 먹먹하다. 

“예수? 예수는 남조선에만 있고, 가난한 나라엔 없습니까?” 


남북한의 남아공 월드컵

‘인민 루니’라는 별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대세는 북한 축구의 아이콘으로 등장하며 남한의 팬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얼굴이 되었다. 심지어 두 사람은 함께 광고모델이 되기도 했다. 두 사람을 보면 남북한의 분단상황이 현실처럼 와 닿지도 않는다.

통일이라는 이야기의 성격 상 정치적인 측면이 많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정치라는 게 사람들의 생각을 모으는 일이라고 본다면 사람들의 생각을 아는 것이 정치 이전의 과제가 된다. 사람들의 생각은 멀리 있지 않다. 나의 생각부터, 친구와 엄마아빠의 생각이 사람들의 생각이다. 

사람들은 정대세를 보며 북한의 인민군이나 정치지도자를 떠올리지 않는다. 그저 같은 언어와 같은 역사를 가진 사람들이고, 가능하면 그들과 함께 자유로이 오가며 살기를 바라고, 나아가 가능하면 하나의 국가로 통일하는 것을 바랄 뿐이다.

그것이 축구가 줄 수 있는 희망이다. 남아공 월드컵의 가까운 역사 속에 로벤 섬의 전설이 있듯이 축구는 남한과 북한의 엇갈린 분단상황을 정치적인 이해관계 없이 접할 수 있는 마당을 펼쳐주고 있다. 

우리는 이 마당에서 보다 아름다운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그 아름다운 생각이 더 이상 ‘크로싱’의 비극 같은 것을 막을 수 있는 큰 버팀목 하나를 건설하였으면 좋겠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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