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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박해받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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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받는 교회 

- 레너드 스위트(드루신학대학교 석좌교수)
 

지난 2001년 4월 24일 선교사를 태운 비행기가 마약수송기로 오인되어 페루 공군에 의해 격추된 사건이 일어났다. 방송 프로그램 ‘폴리티컬리 인코렉트(Politically Incorrect)’의 진행자 빌 마허는 이 사건을 가지고 기독교를 비난했다. 

선교사와 그녀의 7개월 된 딸이 죽임을 당했을지라도 마약 거래자와 선교사는 모두 중독자를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한 사람은 약물을 제공하고, 또 한 사람은 종교를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중독 사업에 종사한 사람들이라고 교회를 모독했다. 

교회를 향한 박해는 교회의 역사와 함께한다. 그리고 박해는 앞으로 더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박해는 선교 사역에 본래부터 함께했다고 말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행 20:23). 포스트모던 제자들은 순교의 소책자인 빌립보서의 가르침에 의해 고도의 박해에 대해 대비할 것을 충고 받는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세상은 부와 명예를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있다. 이러한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하루에도 수천 번씩 “당신은 바보다. 당신은 물질과 재산도 축적하지 못하고 희생당하고 있다. 당신은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고 메시지를 전달한다. 

만약 1세기의 상황으로 되돌아가 본다면 네로 황제가 기독교인을 굶주린 사자에게 던지는 것뿐만 아니라 목마른 구름 떼 같은 모기들에게 기독교인을 먹이로 준 것과 같다. 이러한 세상의 박해는 사자와 불의 위협, 그리고 예수가 주님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과 그들의 신앙을 거부하도록 사람들을 참수시키는 것만큼 큰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박해는 교회의 정체성이다. 그러니 박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박해를 피하려고 진리를 희석시키거나 거짓과 타협하는 것은 곧 교회가 교회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AD 33년 4000만명의 기독교인을 죽게 한 것은 표면적으로는 국가와 종교에 대한 문제였다.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형제와 자매에게 화냄”(마 5:22∼24) “물고 헐뜯는” 그리고 “다른 한 사람에 의해 멸망”되는 사람(갈 5:15)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위험한 것은 아무런 박해도 받지 않아 죽음을 맞이하게 된 기독교인의 경우다. 왜일까? 독일의 신학자 울프강 심슨(Wolfgang Simson)은 “박해가 없는 것은 ‘교회는 박해를 받을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며, 그것의 가치와 존재방식은 하나님 없는 사회와 섞여버리는 것이고, 소금이 그 맛을 잃은 것처럼 사회의 발아래 무시되고 짓밟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교회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박해 없는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닐까. 

<번역·정리 : 감신대 김영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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