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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지식의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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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저주 

- 김병삼 목사 (만나교회)
 

이 땅 모든 크리스천의 최고 관심이 복음을 전하는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선교학을 공부하면서 생뚱맞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가장 복음이 활발하게 전파되던 때는 굳이 선교학이라는 학문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 적어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모든 역사가 증명하듯이, ‘조직화되고 학문화되면서 사역의 본질과 역동성을 잃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서구 교회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것이 있다. 그들이 교회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안다는 것이다. 유럽의 많은 나라가 당연히 종교세를 내고 교회로부터 서비스를 받는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한 종교의식이 그들로 하여금 가장 무지하게 만들고 있다. 

칩 히스 교수가 쓴 ‘스틱’이라는 책을 보면 ‘지식의 저주’라는 말이 등장한다. 전문가들은 일반 사람들보다 세 걸음쯤 앞서서 얘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럼 상대방이 전혀 이해를 못하게 되는 현상이 그것이다.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지식의 저주에 빠져 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아는 것을 당연히 이야기하지만, 무지한 사람들에게 더는 통하지 않는 복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지식의 저주를 벗어나는 길은 빨리 소통의 기술을 익히는 것이다. 히스 교수는 이런 실험을 했다. 두 무리의 사람들에게 ‘두드리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역할을 줬다. 두드리는 사람은 생일 축가 같은 아주 잘 아는 노래 목록을 받았다. 그들의 임무는 노래 하나를 골라 리듬에 맞춰 테이블을 두드리는 것이고, 듣는 사람은 그 소리만 듣고 노래의 제목을 맞히는 것이다. 이 실험에서 선택된 노래는 모두 120곡이었는데 듣는 사람들은 그중 단 3개, 즉 2.5%밖에는 맞히지 못했다. 그런데 두드리는 사람들은 상대방이 정답을 맞힐 확률을 50%나 된다고 예측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지 상상이 가지 않는가? 두드리는 사람은 자신이 아는 노래를 상대방이 당연히 알아맞힐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방에게 그 리듬은 아주 생소하게 들리는 것이다. 

교회는 흔히 이렇게 말한다. “예수를 믿으세요! 얼마나 좋은지 아세요? 교회를 다니세요! 교회가 얼마나 좋은 일을 하는지 아세요?”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세상은 우리에게 묻는다. “그 좋은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주세요.” 

NGO 단체에서 성금을 모을 때, “아프리카 가난을 퇴치하는 데 성금을 보냅시다”라고 말하면 별로 동조하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마을에 사는 아이를 실제로 보여주면서 이 아이가 학교에 갔을 때 일어날 변화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면 성금이 쏟아진다. 마더 테레사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대중을 구하기 위해 일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 사람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세상은 교회의 모든 일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가진 교회의 그 무엇을 원한다. 소통이 없는 곳에서는 감동도 없다. 감동이 없으면 움직임도 없다. 참 힘든 일이다. 우리가 선행을 할 때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지 않는 것도 뭔가 잘못된 것이다. 

세상은 우리가 아는 그 무엇을 알기 원한다. 우리 머리와 가슴속에 있는 강력한 그 무엇을 느끼고 따라 하기를 원한다. 우리가 아는 그 무엇이 지식의 저주가 아니길 바란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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