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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좋은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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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이별   
 
- 안성우 목사 (서대신교회)
 

스위스 태생의 정신과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어렸을 때 그의 집에서 식용 토끼를 키웠다. 토끼들 중 엘리자베스를 잘 따르는 ‘블래키’가 있었다. 아버지가 블래키를 푸줏간에 데려가라고 했을 때 그는 블래키를 살리고 싶어서 멀리 달아나라고 내쫓았다. 그러나 블래키는 거듭 그의 품으로 돌아왔다. 결국 아버지에게 야단맞은 후 블래키를 푸줏간으로 데려갔다. 데려가는 내내 울었고, 자루에 담겨 나오는 것을 받아들었을 때는 손이 덜덜 떨렸다. 그때 푸줏간 아저씨가 말했다. “토끼를 지금 잡아 유감이다. 하루 이틀 후면 새끼를 낳았을 것이야.” 

그날 저녁 식사 시간에 식구들이 블래키를 먹을 때 어린 엘리자베스의 눈에는 그들이 모두 식인종처럼 보였다. 그 후 거의 40년 동안 그는 블래키나 다른 어떤 이를 위해서도 울지 않았다. 그가 워크숍을 하기 위해 하와이에 잠시 머물 때 집 주인은 사소한 것에도 5센트, 10센트씩 돈을 요구했다. 그곳에서 지내는 닷새 동안 그는 낯선 남자를 죽이고 싶을 만큼 분노를 느꼈다. 그렇지만 분노를 삭이고 무사히 귀국했다. 집에 돌아온 후 통제하지 못한 분노를 결국 친구에게 쏟아 붓고 말았다. 40년 동안 울지 않았던 그는 갑자기 통곡하는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충격을 받았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사실 그 대답을 한 단어로 정의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조심스럽게 이별의 연속이라고 말하고 싶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 돈, 명예, 건강, 친구 등 많은 것을 잃어버린다. 목회를 하다 보면 잃는 것이 더 많다. 그중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사람이다. 사도 바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대는 속히 나에게로 오십시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가고, 디도는 달마디아로 가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딤후 4:9∼11) 

인생의 초겨울에 노 사도는 그동안의 사역을 회고하고 있다. 디모데에게 속히 오라고 부탁을 하며 숨겨 놓았던 이별의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이 본문을 ‘사도바울의 아리랑’이라 명명하고 싶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필자는 그런 바울이 참 좋다. 

이제 다음 주일이면 교회가 개척 후 13년 동안 섬겼던 동네에서 15분 정도의 거리로 이사를 간다. 축하받고 기뻐할 일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남겠다는 분들이 있다. 그분들께 함께 가자고 말할 용기도 없다. 오히려 남을 분들께 미안할 뿐이다. 그러나 섭섭함도 있다. ‘좋은 대학이나 직장이면 멀어도 가는데…’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가 잃어버린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좋은 이별은 창조의 주인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시고, 상실의 아픔을 통하여 영적인 성장을 이루게 하실 것이라고 믿을 때 가능하다. 이상일 수 있지만 누구와도 언제 어디서 마주쳐도 웃을 수 있는 좋은 이별을 하고 싶다. 혹시 한쪽에서 무례한 이별을 요구한다 할지라도 좋은 이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상황이 와도 그 무엇을 잃어버려도 그 잃어버림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반응하기를 선택한다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 하나님은 그 아픔을 통하여 능력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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