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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하나됨을 위한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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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됨을 위한 소통

- Sergei(모스크바 선교사)


요즘 들어 거론되는 사회의 화두 중의 한 가지는 소통에 대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특히 재계를 주름잡고 있는 기업의 수장들이 소통을 위하여 무기명 게시판을 운영하고, 현장을 두루 살피며, 이것이 기업이 살고 국가가 살아나는 방법인 것을 알고 전심을 기울이고 있다 하니 역시 앞선 자들은 무엇인가 다른 데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필자도 현장에서 고민하고 있는 소통의 문제를 몇 가지 생각해 보았다.

1. 소통의 즐거움

소통, “오늘은 공휴일이 되어서 경부고속도로에 양방향 모두 소통이 시원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듣기도 좋고 시원한지 모른다. 모스크바에도 토요일이나 주일에는 소통이 잘 이루어진다. 그러나 평일에는 완전 불통, 먹통, 울화통이 된다. 소통은 서로에게 즐거운 일이며, 생기를 부어주는 것임을 느낀다.

소통, 신약성경 마가복음 7장에 보면, 가나안 여인이 예수 앞에 와서 딸의 귀신 들린 것을 고쳐달라고 부탁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불통으로 일관하였다. 오히려 여인에게 비통함과 침통함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여인의 애통으로 인하여 소통이 이루어지게 되고 생명이 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여기서 소통이란 것은 생명을 회복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을 본다.

소통, 젊은 남녀간의 소통이 잘 이루어지기에 사랑이 싹트게 되고 아름다움과 배려와 이해가 생기게 된다. 결혼으로 이어지면 생명이 잉태되는 역사를 만들고, 인류 발전을 꾀하는 일에 동참하게 되는 거사가 일어난다. 소통이 이처럼 즐겁고 신나는 일이다. 소통은 역사의 발전을 가져다 주는 일인 것이다.

소통, 하나님과의 소통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소통은 인간의 구원을 이루고 행복한 삶을 보장해 준 것이다. 이것이 최고의 소통일 것이다. 이 소통의 은혜를 입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꼬임과 엉크러진 세상의 소통을 위하여 헌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형통의 길인 것이다. 세상이 복음으로 통하게 되는 사명인 것이다.


2. 불통의 현장

불통 가정, 한국 사회에 국제 이민자들이 급증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작년 보도자료에 의하면 한국에는 18만 명의 이민 결혼자들이 늘어났다고 한다.

여성 가족부의 조사에 의하면 결혼여성 이민자들은 가정폭력과 언어소통의 한계로 인한 심리적 소외감, 음식, 문화의 차이로 인해 고통을 받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고부갈등 자녀양육 등의 문제는 한국어 소통 능력을 가장 큰 어려움으로 들었다.

역시 불통으로 인하여 비통과 울화통이 일어나게 되고 갈등과 파괴로 연결되는 침통함이 생긴다. 부부간의 소통이 안되면 바람이 일어난다. 부모와 자녀간의 소통이 일어나지 않으면 어긋남이 생겨나고 탈선이 일어난다. 어디에서나 소통은 이렇게 중요하다.

불통 선교지, 선교지에서 생활하다 보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현지인들과 소통일 것이다. 몇 년이 지나면 일반적인 대화나 생활은 문제가 없을지라도, 법적인 문제나 부동산 문제나 공공기관과 연관되는 문제에 있어서는 심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문화와 법을 알아야 하고 상식이 통하여야 하는데, 민주화가 덜 된 후진국가에서는 그렇지를 못한 것이다. 이것이 불통으로 다가올 때에는 얼마나 심한 고통과 스트레스가 되어 울화통으로 연결된다. 비통한 일이 된다.

불통 관계, 교회와 선교의 문제에 있어서도 역시 불통이 문제가 되는 것 같다. 후원교회는 정한 후원금을 보내고, 보고서나 받는 것으로 한정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파송받은 자는 열심히 보고서를 보낸다. 기도제목도 보낸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응답은 거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외통인 것이다. 현지에서 요청하는 대로 다 응할 수 없어 미안하여 답을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지만, 꼭 요구에 맞게 대답을 주는 것이 해답은 아니다. 마음과 관심이다. 공동의 관심사로 공유하자는 것이 소통인 것이다.

소통이 안되니, 보내는 자와 보냄을 받은 자 사이에 지체 의식이 없고, 가족의식, 형제의식도 없이 지극히 사무적인 관계로 맺어진다. 그리고 조그만 문제가 발생하면 서로간에 오해를 하게 되고 오랫동안 형식적으로 유지해 오던 관계가 쉽게 파괴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게 된다.

보고서를 받은 후원교회는 안부와 함께, 본 교회의 중요한 소식과 행사 등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기도요청도 하고 소식을 공유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소통이다.

나는 1년 동안 지인들에게 여러 통의 소식과 보고를 한다. 긴급소식도 전하고, 안부인사도 한다. 때로는 핸드폰으로 SMS를 쏘기도 한다. 그런데 답장을 받아보는 것은 한두 통 있을까 말까 하다. 그래서 관계는 지극히 의무적이 되어, 서로에게 좋은 후원교회, 말썽 안피우는 선교사를 만났으면 행복한 정도이다. 불통이다.

성도들은 바쁜 생활에 이국만리 떨어진 현장에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고, 깨알 같은 내용으로 소식을 보내도 와닿지가 않는다. 현지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의 상황은 주일날 광고 정도로 때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기에서 어찌 소통이 일어나겠는가?

소통이 안되니, 싸움이 일어난다. 갈등이 생기고, 불필요한 에너지 소비가 생긴다.

소통이 안되니, 오해가 생긴다. 소통이 안되니, 지체의식이 없다. 관심이 없다.

소통이 안되니, 의무적인 물질관계만 형성이 된다. 소통이 안되니, 관계 단절이 일어난다.

목사와 성도간의 소통,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소통, 지식인과 무식한 자들과의 소통, 교회와 사회간의 소통이 교회에서 일어나야 바른 것인데…, 문화적인 소통과 정치 경제적 소통이 이루어져야만 원만하게 되고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대인관계나 동료 관계 속에서 소통이 안되는 경우를 흔히 접한다. 지나친 고집과 편견, 독선적 행동과 사고방식, 무식함, 열등의식, 피해망상, 밀어붙임, 원만하지 못한 성격, 어릴 때의 가정환경, 삶의 습관, 신앙행태, 이러한 것들이 어우러져 복통 쌤통 신경통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본다.

선교 정책을 결정하는 기관의 밀어붙임, 소통이 없이 외통만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문 한 번 없이, 혹은 그 쉬운 여론수렴 한 번 없이 정책을 경정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상부기관이라는 이유로 외통수만 두는 것이다. 성숙한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교회나 단체의 공동 재정사용의 문제도 외통수를 두는 경우가 많다. 몇몇의 생각에 의하여 많은 재정을 쉽게 지출해 버리는 위험한 일을 진행한다. 당연한 일이고, 정당한 일들을,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외통수를 두어서 분통을 만들어 내는 경우가 많다.

전 근대사회나 보수주의 사회에서는 일방적인 외통이 통하는 세대였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디지털 기술로 대표되는 지식정보화 사회이다. 인터넷과 영상문화의 발달로 인하여 일방통행의 시대는 지나가고 쌍방향 시대가 도달한 것이다. 사회 문화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여 사회로부터, 교회와 선교단체는 게토화 되어가고 있다. 원통을 만들어 내고 있다.

진리와 복음의 사명과 상식과 배려와 관심으로 소통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신음하고 고통을 당한다. 주님은 소통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소통케 하시려고.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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