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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은유로 생각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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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너드 스위트

생각은 은유로 만들어진다. 매번 잠을 잘 때마다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글로 꿈을 꾸지 않는다. 은유와 이미지로 꿈을 꾼다. 생각과 의식을 전달하는 언어의 본래 모습은 은유다. 신앙의 전달도 마찬가지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 500년은 생각, 의식, 신앙을 전달하는 언어의 본래적 모습을 잃어왔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모던시대가 이미지가 아닌 글을 바탕으로 복음을 전해오면서 복음전달은 어려움을 겪어왔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문화소통의 기반이 글에서 이미지로 옮겨가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의식이라는 측면에서 근대적이기보다는 더욱 중세적이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생각해보자. 성경의 본래 언어는 글이 아니라 이미지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글이나 명제나 요점을 가지고 전달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이미지를 가지고 복음을 전하셨다. 비유가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빛이다.” 바로 이것이 은유의 정수다. 예수님께서는 비유가 아니고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때문에 우리는 신앙의 언어를 되찾기 위해 은유로 생각했던 중세교회로, 그리고 초대교회로 눈을 돌려야 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연설에서 알렉산더 솔제니친은 러시아의 속담 하나를 인용했다. “진리의 한 마디가 온 세상보다 더 무겁다.” 그러나 포스트 모던 문화 속에서 ‘진리의 한 이미지’ 즉 ‘진리로 오신 한 분’은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 놓으신다.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마치 광야를 방황하는 이스라엘 백성과도 같다. 그들은 추상적인 명령이나 의미 없는 전제들이 아닌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쫓아갈 것이다.

미국교회의 역사 속에서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놓인 죄인’이라는 제목의 설교보다 더 유명한 설교는 없을 것이다. 만일 미국 교인들에게 기억에 남는 명설교를 꼽으라고 하면 바로 이 설교를 선택할 것이다. 왜일까. 그것은 이 설교의 내용 때문이 아니다. 이는 조너선 에드워드가 표현한 지옥의 불에 갇힌 거미로 묘사된 사람들의 이미지를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C S 루이스는 신앙의 저술가들은 잉크가 아니라 자신의 혈관 속에 흐른 피로 글을 써야 한다고 했다. 이는 21세기 목회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조언일 것이다. 설교자들은 원고 속에 있는 글의 잉크가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 흐르는 신앙의 피로 설교해야 하는 것이다. 21세기 설교자는 성경의 본문 속에서 ‘원리’나 ‘중심주제’ 또는 ‘요점’을 찾으려하기 보다는 ‘중심 은유’를 찾아야 한다. 이 은유는 한 인물일 수도 있고, 이야기의 중심부분이 될 수도 있으며, 한 단어일 수도 있다. 은유는 단순히 중요한 통찰을 꾸며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깨닫게 해주는 통로다. 따라서 설교에 있어서 은유는 첨가되는 양념이 아니라 설교의 몸체인 것이다.

21세기 교회여, 예수님을 따라, 성령에 의지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은유로 생각하고 은유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자.

- 번역=김영래 (스피릿벤처미니스트리스 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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