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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죽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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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하여 [2010.09.15 17:53]        
 
- 최문자 시인(협성대 총장)
 

가까웠던 사람 둘의 사망 소식을 3일 간격으로 전해 들었다. 그들 모두 전혀 죽을 것 같지 않던 건장한 사람들이었다. 한 사람은 뇌출혈로, 한 사람은 심근경색으로 긴 시간 끌 사이도 없이 쓰러진 지 10분 안에 운명했다고 한다. 

죽음에 대하여는 책에서 수없이 읽었고 시로 쓴 바도 있지만 당혹스럽고 떨리고 아팠다. 죽음 자체는 부정적인 것, 허무한 것이지만 부정할 것이 아니라 긍정의 대상으로 봐야 한다는 ‘하이데거의 릴케론’, 그 이론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며칠 동안 마음이 몹시 우울했다.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고 생전에 고인과 가졌던 기억들로 무척 괴로워했다. 허약한 신자의 모습일 수밖에 없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 미라나 사람의 해골을 갖다 놓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대는 흙이니라. 머지않아 그대는 다시 흙으로 된다’라는 노래와 함께 잔치는 시작된다고 한다. 

가장 기쁜 자리, 가장 축하할 순간, 기쁨의 절정에 해골, 즉 죽음을 보게 한다. 죽음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갖게 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지만 죽음을 멀리 두고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으로만 놔두지 않고 죽음과의 일상, 끊임없이 각성된 생명, 끊임없는 출발까지 느끼게 해주는 풍습이라고 본다. 

분명 죽음은 ‘생의 타자, 어두운 그림자’이다. 그래서 시인 김수영도 “나에게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좀처럼 해결하지 못할 것 같은 문제가 있다”며 그 첫 번째가 죽음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크리스천은 ‘죽음에 대한 인식’이 다른 사람과 달라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 죽음 앞에서 어떻게 죽음을 완수했느냐의 문제는 이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고 있는 모습, 그 최후의 문턱은 실제로는 성서와 많이 떠나 있다. 

누가 그 문턱을 찬미하면서 즐겁게 넘어갈 수 있을 것인가? 필자가 쓴 시 중에 ‘닿고 싶은 곳’이라는 시는 독자들이 뽑은 필자의 대표시다. 

“나무들은 죽을 때/ 슬픈 쪽으로 쓰러진다/ 늘 비어서 슬픔의 하중을 받던 곳/ 그 쪽으로 죽음의 방향을 정하고야/ 꽉 움켜잡았던 흙을 놓는다/ 새들도 마지막엔 땅으로 내려온다/ 죽을 줄 아는 새들은 땅으로 내려온다/ 새처럼 죽기 위하여 내려온다”(‘닿고 싶은 곳’ 중에서) 

죽기까지 우리는 하중을 받는 곳이 있다. 우리를 누르고 있는 무게가 있다. 그 무게 때문에 결국 죽음의 방향으로 쓰러진다. 우리 각자에게 그 무게는 무엇이었을까? 

위의 시는 죽음을 완수하거나 완성하거나 수락하는 태도를 나무나 새의 죽음 형태를 들어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죽음은 상처와 슬픔뿐 아니라 사랑의 모순과 좌절을 함께 보듬고 그것을 긍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더 큰 존재론적 성찰의 계기를 마련한다. 

두 사람의 죽음 이후 쓰러짐의 자세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만 우리의 속죄가 가능했던 그 귀한 사실이 죽음을 맞을 때마다 왜 이렇게 따로따로 생소하게 느껴지게 되는 것일까?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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