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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청개구리 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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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개구리 심보

우리 내면의 이중적 성격들 
 
- 김형태 총장 (한남대)


거의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이중적 성격이 자리 잡고 있다. ‘양가감정’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실례를 찾아보자.

“나는 정직하자고 다짐하면서 꾀를 내기도 한다. 나는 떠난다고 하면서 돌아와 있고, 또다시 떠날 생각을 한다. 나는 참아야 한다고 하면서 화를 내고 시원해 한다. 나는 눈물을 흘리다 우스운 장면을 생각하기도 한다. 나는 외로울수록 바쁜 척 한다. 나는 같이 가자고 하면 혼자 있고 싶고, 혼자 있으라 하면 같이 가고 싶어진다. 나는 봄에는 봄이 좋다 하고, 가을엔 가을이 좋다 한다. 나는 남에게는 쉬는 게 좋다고 하면서 나 자신은 계속 일을 한다. 나는 희망을 품으면서도 불안해하고,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 예속되기를 바란다. 나는 변화를 좋아하지만 동시에 안정되기를 바란다. 나는 절약하자고 하면서 낭비할 때도 있다. 나는 약속을 하고 나서는 지키고 싶지 않아 핑계를 찾기도 한다. 나는 남의 성공에 박수를 치지만 동시에 질투도 느낀다. 나는 실패도 도움이 된다고 말하지만 내가 실패하는 건 두렵다. 나는 너그러운 척 하지만 까다롭다. 나는 감사의 인사를 하지만 불평도 털어놓고 싶다. 나는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지만 동시에 두렵기도 하다. 나는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미워할 때도 있다.”

우리들은 이렇게 흔들리고 괴로워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이것이 우리들의 본색이요 진면목이다. 바울사도도 그랬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이 변화되고 다듬어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고기잡이로 살아오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난 후 사람 낚는 어부로 변화되어 그 후 인류의 존경을 받게 되었고, 무식한 장사꾼 이승훈은 도산 안창호를 만났기 때문에 민족이 우러러 보는 3·1운동의 주역이 될 수 있었다.

디모데는 바울을 만나 선교동역자와 훌륭한 목회자가 되었고 바울은 또 바나바를 만났기에 이방선교의 태두가 될 수 있었다. 큰 나무가 훌륭한 목수를 만나면 궁궐의 대들보가 될 수 있지만, 나무꾼을 만나면 아궁이에 넣어지는 장작으로 떨어진다. 온돌방의 구들이나 길바닥의 디딤돌로 쓰여질 화강암이 탁월한 예술가를 만나면 석굴암의 불상도 될 수 있고 거룩한 성전의 돌기둥으로 바뀔 수도 있다.

두번째로 혼이 있는 한마디의 명언이다. 성경 한 구절로 인해 인생이 통째로 바뀌는 수도 있다. 명석한 두뇌로 일찌기 해외유학을 했고 대학자의 반열에 설 수도 있었지만 도덕적으로 타락하였던 어거스틴은 로마서 13장 12-14절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을 읽고 인생이 바뀌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3,000명이 회개한 일이나 길선주 장로의 회개와 자백을 듣고 수백명이 성령체험을 한 한국초기 선교역사를 볼 때 우유부단과 이중적 경향성, 겉과 속이 서로 다른 표리부동, 아는 지식과 실제생활 사이의 분리, 믿음(신앙)과 삶(실천)의 엇박자 등 우리의 연약하고 부족한 인간성이지만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거듭나고 새로 빚어지기만 하면 잘 정돈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나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네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 하는 바 악을 행하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5-25)”

이같은 내면적 싸움, 성령과 육신의 대립, 고뇌와 갈등을 겪지 않는 자 몇이나 될까? 선비, 양반, 지성인, 교육자, 원로, 성직자로서 일반인의 존경 대상이 되는 사람들도 뚜껑을 열고 보면 이와 같이 복잡한 인격분열이 있다. 바울도 곤고한 자아를 탄식했는데 하물며 우리들이 바울보다 더 나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항상 깨어 있어 조심해야 되는 것이다.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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