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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중적 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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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적 자아 
 
- 최문자 시인 <협성대학교 총장> 


‘퍼소나(Persona)’란 용어는 탈 또는 가면으로 번역되는 문학용어인 동시에 인간이 세상에 내보이는 외적 인격의 상징물이다. 인간은 자아와 이 세계와의 갈등 관계로 늘 혼란을 겪는다. 자아가 부정적일 때 인간은 자기 봉쇄적 방법으로 탈을 쓰게 된다. 

탈을 쓴 탈 속의 자아는 거리낄 것 없이 자유롭고 멋있고 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다. 그러나 탈 속에 숨겨진 실재적 자아 때문에 인간은 분리에 대한 인식이 날카로워지고 자아는 더욱 고립적이 된다. 

이 시대는 이러한 이중적 자아가 내적 갈등을 겪으며 살아가기에 아주 좋은 시대이다. 

인간들이 쓰고 있는 탈은 얼마든지 다양하다. 가장 어두운 표정의 실재 위에 가장 밝은 탈을 쓰고 있을 때라든지, 악마적 상상을 하고 있는 얼굴 위에 성자의 정결한 탈을 쓰고 있을 때도 있다. 이때 탈 속의 실재 자아는 자기가 자기를 타인으로 여기기도 하고 순간적이지만 자기가 아닌 쓰고 있는 탈의 흉내를 훌륭히 해내기도 한다. 

가끔 TV나 신문에 사회문제를 크게 일으킨 자들의 얼굴을 본다. 한결같이 그런 일을 할 사람 같지 않은 얼굴과 표정을 짓고 있다. 오랫동안 탈을 쓰고 있으면 실재와는 상관없이 탈의 외형과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는 힘이 생기나 보다. 

그러나 퍼소나는 인간과 비슷하다. 보는 사람들은 그로부터 어떤 행위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시인 윤동주도 ‘참회록’이라는 시에서 자기의 욕된 얼굴과 외형으로 드러난 자신과의 괴리를 참지 못해 자기가 자기 얼굴을 문지르는 것을 시에서 읽을 수 있다. 

만일 실재의 인물과 탈의 인물과 인격이 같다면 탈을 쓸 필요가 있을까? 그때는 아무런 자기 분리의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한 문제를 안고 있는 한 인간이, 한 문제 있는 탈을 쓸 때 퍼소나는 고압적으로 자아와 관계를 분해시키고 있다. 

윤동주의 ‘참회록’이라는 시를 잠깐 소개한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중략)…/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시인은 자신을 욕된 역사의 유물이라고, 역사에 짓눌려 있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한다. 윤동주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끊임없이 닦으면서 녹, 즉 가식의 근원인 퍼소나를 지우면 자기를 찾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여기서 거울은 ‘나’가 아닌 퍼소나를 쓰고 있는 나를 비춘다. 거울에 비춰진 얼굴은 실재의 자기가 아니고 역사의 굴욕적인 유물인 퍼소나이다. 윤동주는 탈을 쓰지 않은 참 자기를 찾기 위해 철저하게 참회한다. 

이 시대의 아침, 어느 누가 퍼소나를 벗어던지며 이처럼 정결한 참회를 할 수 있을까?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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