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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우리 말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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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 하기 

- 이원영 (중앙대학교 유아교육과 명예교수)
 

우리말을 못해 대학병원에서 상담 치료를 받는 만 4세 남자 아이가 있다. 사물의 명칭을 우리말로 가르쳐 주어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인지치료 상담사가 곰 인형을 보여주며 “이건 곰 인형이야” 하는데 아이는 딴청을 하거나 ‘ball’ 등 상관없는 영어 단어를 대신 말하곤 한다. 엉뚱하게 “나, 브라이언”이라며 학원에서 지어준 영어 이름을 대기도 했다. 

눈앞에 있는 사물과 선생님이 말해주는 단어를 연결시키는 능력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말 배우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다. 이는 당연히 다른 학습에도 지장을 주는 심각한 문제다. 

‘지금 여기서(here and now)’는 영·유아들이 말을 효과적으로 배우게 돕는 방법을 지칭하는 말이다. 아이가 눈앞에 있는 사물을 오감을 사용하며 가지고 노는 바로 그 순간, 주변의 어른이 그 사물의 이름을 알려 주면 가장 확실하게 배우기 때문이다. 

아이가 노란 단풍잎을 가지고 노는 그 순간에 “노란 은행나무 잎이야” 하면 ‘노란’ ‘은행나무’ ‘잎’ 등의 뜻을 무의식적으로 배울 것이고 은행잎은 가을이 되면 노래진다는 것도 함께 알게 된다. 이런 과정은 아이가 말을 배우기 훨씬 이전부터 시작해야 뇌에 길이 생겨 그 다음 말도 쉽게 배운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천천히 배우지만 일단 뇌에 길이 생기면 나중에는 그 길이 고속도로가 된다. 갑자기 종알종알 말을 잘하게 되는 것이다. 

위의 4세 아이는 생활경험과 밀접하지 않은 영어 단어를 암기식으로 배운 것이 문제로 판명됐다. 뇌에 한국말 길이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엉뚱한 말을 내뱉는 것은 상황을 모면하는 방법만 터득한 결과였다. 

이 아이를 치료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은 또래 아이들과 많이 뛰어 놀게 하는 것이다. 상담자는 어머니에게 “상담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놀이 중심의 교육을 하는 유치원에 보내시지요”라고 권했다. 그랬더니 어머니의 반응이 놀라웠다. “유치원에 가면 말 못하는 거 표 나잖아요. 영어 학원에 보내면 표가 나지 않아요. 나중에 미국에 가서 살면 돼요”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물을 보며 엉뚱한 영어 단어를 말하는 이 아이가 미국에 간들 문제없이 살 수 있을까? 미국 아이들이 ‘bear’ 할 때 ‘ball’을 말하는 것은 과연 소통일까? 지금보다도 오히려 더 어려운 처지에 놓일 가능성이 높다. 

세계적 언어학자 촘스키에 의하면, 우리 뇌에는 말의 의미를 파악하는 구조가 있다. 단어를 기계적으로 외우는 것만으로는 이런 능력이 생기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사람들이 하는 말의 내면에 숨어 있는 의미를 파악하는 경험을 쌓아야 한다.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고, 친구들과 많이 놀 수 있게 하면 언어 능력은 자연히 길러진다. 

모국어와 놀이는 아이들의 삶 자체이기 때문에 쉽게 배우는 것이다. 모국어로 하는 말의 의미를 파악하게 되면 나중에 어떤 외국어든지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고 촘스키는 말했다. 라틴어를 배워야 했던 학생들이 불쌍해서 성경을 모국어인 독일어로 번역한 마르틴 루터 덕에 우리가 지금 성경을 읽고 예수를 알게 됐다는 사실을 기독교인들만이라도 깊이 생각해 봤으면 한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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