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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생태주의자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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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주의자 예수 

- 최문자 시인 (협성대학교 총장)
 

생태 저술가 프란츠 알트 박사는 철학을 거쳐 신학까지 전공했고, 교회와 신학자의 탐욕과 무지를 질타하는 삐딱한 사상가였다. 그가 쓴 ‘생태주의자 예수’에서 그는 예수를 생태적 예수라고 규정짓고 있다. 자연과의 평화 없이 사람들 사이에 평화 없고, 사람들 사이의 평화 없이 자연과의 평화 없음을 강조했다. 

2001년도에 네팔에서 트레킹으로 3200m 이상 걸어서 올라간 적이 있었다. 3일 올라가고 3일 내려오는 난코스 트레킹이었다. 높은 산길을 걷다가 맨발로 나무하는 여인들을 보았다. 나무하기 직전 그들은 무릎을 꿇고 잠시 기도했다. 가이드에게 무슨 기도를 드리는가 물었더니 “신이여, 오늘 당신의 나무를 조금 가져가겠습니다. 용서하시고 허락하소서”라고 기도의 내용을 소개해주었다. 

이미 여인들은 이 자연이 자기의 것이 아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신의 소중한 소유임을 인정하고 있었다. 나무를 해가는 모습도 매우 조심스러웠다. 자연과 어울리는 모습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고 친근한 모습이었다. 

또 이들의 장례의식인 조장(鳥葬) 의식행사도 보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들것에다 시신을 떠메고 와서 나무 위에 시신을 달아놓았다. 상주를 비롯한 친척들은 나무 밑에 대기하면서 시신을 먹어줄 새를 기다렸다. 섭씨 40도가 넘는 땡볕 속에서도 장대비로 쏟아져 내리는 스콜을 다 맞으면서 상주는 계속 나무 밑에서 울고 있어야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새는 오지 않았다. 

갑자기 ‘깍’ 하고 새소리가 나더니 그 큰 산을 넘어 검은 새들 수백 마리가 날아와 나무에 앉았다. 삽시간에 시체의 살은 새의 먹이가 되고 뼈와 들것은 나무 밑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울음소리가 그치고 유족들은 땅 속에 뼈를 묻고 그들은 돌아갔다. 

자연에서 태어나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그날 빠짐없이 보게 되었다. 또 하나의 신비했던 자연의 모습이 생각난다. 네팔에서의 일출은 경이롭다 못해 숨이 멎을 정도로 신비했다. 해발 8000m 넘는 산봉들이 번쩍거리는 눈이 덮인 에베레스트 산봉과 함께 안개를 가르며 해 아래로 드러날 때, 이대로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 아름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경에 나타난 말씀처럼 모든 주님이 지으신 세계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큰 산들을 다녀온 얼마 동안은 좋은 생각, 아름다운 생각만으로 꽉 차게 된다. 자연과 깊은 교감을 갖는 것은 사람과도 순하고 자연스러운 관계를 이어갈 수 있게 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삐딱한 사상가 알트 박사가 생태적 예수라고 규정지은 것은 틀리지 않은 얘기가 된다. 

그의 말대로 자연과의 평화 없이 사람들 사이의 평화는 없고, 사람들 사이의 평화 없이 자연과의 평화는 없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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