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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백성들의 나라, 국가의 백성

  • 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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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의 나라, 국가의 백성

삼상8:19~20


오늘 읽은 성서 구절은 고대이스라엘 사회에서 ‘국가화’로의 문제제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사사 체제에서 제왕으로의 체제 전환입니다. 대통령 뽑기죠.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 부족동맹 시대 말기입니다. 평등이상을 지향했던, 그 누구의 권력 독점도 허용하지 않았던 부족동맹의 가치가 어느덧 심각하게 와해되고 있던 때입니다.

 

그때 지도자는 사무엘이었습니다. 그는 에브라임 부족의 지도자인 동시에 부족동맹 전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였지요. 그런데 그가 권력을 세습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두 아들의 배임과 비리, 불공정이 대중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하여 대중은 사무엘에게 대안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중이 요구한 것은 사무엘을 잇는 지도자가 아니라 군주입니다. 권력을 독점하고 세습하는 자요, 대중의 자원을 빼앗는 자입니다. 사무엘도 이미 그런 권력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아직 군주의 직책으로 대중을 이끌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전통적인 지도자인 ‘사사’의 직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한데 대중은 사무엘이 아니라 다른 이를, 그것도 군주로 떠받들겠다고 합니다.

 

이유인즉슨 다른 나라들처럼 군주제를 도입하여 그이가 이웃나라들을 정복하고 그 자원을 배분함으로써 그 풍요를 누리겠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부족동맹은 정복전쟁을 치루지 않았습니다. 적이 쳐들어오면 지도자를 세워 방어전쟁만을 수행했지요. 한데 군주가 이끄는 나라는 나른 나라를 정복해서 그곳을 수탈하여 자기 백성에게 나누어준다고 대중은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데 사무엘은 군주는 나누어주는 자가 아니라 빼앗는 자라고 주장합니다. 사무엘은 평등이상이 무너지고 있는 사회에서 독점화되는 권력을 거머쥔 인물이었지만, 그럼에도 군주제로의 이행에는 반대하는 이였습니다. 그가 속한 에브라임 부족은 그런 이상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있었지요.

 

하지만 대중의 강력한 요구에 사무엘은 굴복하였고, 군주제에 보다 적극적이던 부족인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 왕으로 추대됩니다. 이스라엘 부족동맹이 와해되고 군주국 이스라엘이 등장한 것입니다. 물론 사울은 대중이 기대한 정복군주도, 사무엘이 우려한 독재자도 되지 못했지만, 얼마 후 이스라엘은 다른 군주국이 등장하여 사무엘의 예언대로 되었습니다.

부족동맹(숙의제)이라는 정치체제와는 달리 군주국(단일 지도체제)은 공공성을 개인에게 이양하는 체제입니다. 해서 무수한 이들의 자원과 심지어 생명을 경시하고, 독점 권력의 이익에만 민감한 고대적 국가 체제입니다. 그런데 그런 체제의 등장을 대중이 욕망했다는 것, 그것을 이 성서 본문은 적시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대중은 희생자가 된 대다수 백성들과 성공한 소수의 협잡꾼들로 나뉘게 됩니다. 하여 이 본문은 ‘이것이 (당신들이 갈망하는) 국가인가’라고 되묻고 있는 것입니다.


프리모 레비라는 이가 있습니다. 유태계 이탈리아인 화학도였던 그는 파시스트에 대항하는 지하운동을 벌이다 1943년 12월에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다가 10개월 만에 극적으로 살아남아, 자신의 수용소 경험을 증언하는 저작을 1947년에 펴냈는데, 그것이 바로 그의 첫 번째 저서는 ‘이것이 인간인가’입니다.

 

한데 이 책은 1960년대에 엄청난 논란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것은 이 책에 수록된 한 장 때문입니다. 그 장의 제목은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입니다. 레비는 1987년 자살함으로써 생을 마감하는데, 그의 마지막 저서(1986년)의 제목도 바로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한글 번역본은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였으니, 논란의 중심이 되었던 이장의 내용은 그가 평생에 걸쳐 증언하고자 했던 것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히틀러 체제를 낳은 유럽과 독일의 모순이 국가를 흉물스러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맨얼굴로 드러나게 했고, 그 흉물스러움이 가장 극한적인 야만과 폭력으로 응축된 것이 바로 아우슈비츠라고 보면서, 이 수용소의 적나라한 모습을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수용소(평균 구금 기간은 3개월 정도)에서 학살당한 이들은 무려 110~150만 명에 이르고 살아남은 이들은 고작 7천 명 정도입니다. 여기서 학살당한 자를 레비는 ‘익사한 자’로, 생존자를 ‘구조된 자’로 묘사한 것이지요. 한데 중요한 것은 ‘살아남은 자’는 대개 비열하고 야비한 자인 반면, ‘익사한 자’는 대개 아직은 인간성을 간직한 이들이었다는 점입니다. 해서 그는 저 구조된 자들을, 그런 이들이 주도하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체제를 향해 ‘이것이 인간인가’라고 항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서 본문은 ‘이것이 국가인가’라고 묻는 것이고, 프리모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라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건이후 몰락한 국가주의, 붕괴된 인간실상에 혼란을 느끼며 질문 두 개를 동시에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이것이 나라인가’ 다른 하나는 ‘이것이 인간인가’였습니다. 폭풍 같은 사회적인 격랑 속에서 우리는 급기야, 그리고 드디어 지난 주 대통령을 새로 뽑았습니다. 사실 국가의 붕괴와 인간성 파괴의 혼란은 1993년에 시작된 세계화 정책부터일 것입니다. 레이건과 대처가 세계화에 보수적 자본주의의 세례를 베푼 이후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맞이하기 위해 국가가 나서서 길을 닦는 제도화를 시작한 것이지요. 그것이 1997년 외환위기로 이어졌고, 이후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급박하게 신자유주의로의 길로 들어서게 된 나라의 하나가 되었지요.

 

외환위기 이후 자리 잡은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핵심은 외주 화(아웃소싱)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기업이 그렇게 했고, 심지어 공공적 성격을 지니는 기관들, 가령 학교나 정부도 그랬습니다. 나아가 정부는 공기업을 직접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민영화하여, 국가의 많은 기능들을 외주 화하는 방식을 취했지요. 바로 이런 시스템 하에서 여객선을 운항하는 회사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선장도 외주, 항해사도 정 직원이 아니라 바깥에서 데려다 쓰는 고용정책을 썼습니다. 세월호가 뒤집어지자 국민을 구명해야 할 국가인 해경도 생명구조의 기능을 사기업인 언딘에게 외주 화했지요.

 

그 결과 국가의 공공성은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오늘 ‘정의’니 ‘공공성’이니 하는 의제가 제기된 것은 바로 이런 국가의 공공성 약화가 우려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우려가 세월호 사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익사한 자들과 구조된 자들의 극적인 양분화는 바로 민주주의적인 공공적 가치를 포기한 결과 국가의 야만적 폭력성이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양상을 띠게 된 것이지요. 공공적인 것은 누군가의 독점물이 되었고, 사회적 경쟁은 독점을 향한 경쟁이 되었으며, 국가는 그러한 독점의 체계를 보호하는 데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사고로 희생자들이 생기면 국가는 그들을 구조하기보다는 그 사고가 발생시키는 이윤과 손실의 법칙에만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인가’ 와 ‘이것이 나라인가’라는 도전적인 슬로건은 바로 이런 현상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인 것이지요.

 

새로운 대통령을 뽑았습니다. 대통령이 모든 걸 다 하지 않습니다. 다하라고 국민이 손을 떼면 그 즉시 과거로 돌아갑니다. 이제 모든 국민은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자기 성찰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밖으로는 ‘이것이 나라인가?’하는 눈으로 세상을 직시해야 합니다. 자기 성찰과 세상에 대한 직시는 곧 바른 기독교 생활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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