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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홀로코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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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 이철 연세의료원장
 

1월 16일은 유엔이 정한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기념일’이다. 이날은 2차 대전에서 최대의 희생자를 냈던 폴란드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포로수용소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제정된 날이다. “무엇을 해도 내 실수를 보상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로선 다만 용서를 빌 수 있을 뿐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나치 친위대(SS)로 복무했던 오스카 그뢰닝이라는 80대 독일 노인은 60년 만에 이렇게 용서를 구했다.

독일 나치에 의해 자행된 약 600만 명의 유대인 학살은 인류가 행한 최대 치욕 중의 하나이다. 이런 학살을 과연 우리는 용서할 수 있을까? 지난 일제 통치를 통해 정신대, 강제노역, 731부대의 생체실험 등을 겪은 우리 민족이다. 용서의 문제는 우리도 같이 생각하고 함께 갈등하여야 하는 숙제이다.

미국 스탠퍼드 의대의 프레드 러스킨 교수는 ‘용서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원한을 키우면 많은 신체 변화가 일어난다. 혈압이 높아지고, 면역 기능이 떨어지며,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반대로 용서하는 법을 배운 이들은 신체적으로 더 건강하고 정서적으로도 더 행복하다고 한다. 이런 용서의 유익함을 이해해도 선뜻 용서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막상 입으로 용서한다고 말은 하지만 마음속의 원한과 고통이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러나 용서는 감정이 아니라 결단이다. 지금부터 자신이 더 이상 과거의 고통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하지 않겠다는 결정이다. 미움 분노 섭섭함 등 용서하지 못하여 생기는 자신의 모든 감정과 그 감정들의 소멸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결심이다.

요셉은 자신을 종으로 팔아버린 형들을 조건 없이 용서해 줌으로써 큰 복의 주인공이 되었다(창 50:17). 그러나 세상의 그 어느 용서도 하나님의 용서보다 더 큰 용서는 없다. 신구약을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고의적으로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우리의 죄악은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시켰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이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시러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눅 23:34) 이러한 하나님의 용서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가 용서의 결단을 할 수 있다. 

용서를 받는 것과 용서를 실천하는 것은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누군가를 끝없이 원망하면서 자신과 주변의 인생을 곪아터지게 하지 말고,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용서하기로 결심하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심과 같이 말이다.

참혹했던 홀로코스트도 60여 년의 세월을 지나며 점차 우리의 기억에 희미해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지구촌 곳곳에서 이 같은 인류의 어리석음이 반복되고 있다. 지금도 수용소 철문에 새겨져 있는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는 문구처럼 이 같은 어리석은 역사를 기억하며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오늘은 600만명의 가련한 희생자들의 영혼과 그리고 지금도 용서받기를 바라는 가해자들을 잊지 말며 이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자.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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