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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보고싶은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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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싶은 대상 

- 최문자 시인 (협성대 총장)
 

사람들은 각기 자기가 바라보고 싶은 대상이 있다. 무엇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는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하루에 100명의 다른 얼굴을 바꿔가면서 바라보면 절대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우울증 환자들은 거의 한 곳, 한 대상만 주시하거나, 아예 아무 것도 바라보지 않으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강변에 성벽처럼 둘러서 있는 아파트. 거기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많은 시간 무엇을 바라보며 지낼까. 아마 흐르는 강물만 바라보게 될 게 아닌가. 어떤 마음이 들까? 

지리산 속으로 들어가 허름한 집을 짓고 암 치료를 하고 있는 지인이 있다. 가끔 편지를 보내주는데, 내용이 이러하다. “오늘은 홍단풍 사이를 걸었어. 빨간 단풍이 이렇게 매혹적이라는 걸 처음 알았어.” 

편지를 보낼 때마다 바라보는 대상이 바뀌어 있고, 그 바라보는 대상에 매료되어 있었다. 역시 자연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가장 아름답고 평안하고 많은 걸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 

또 미국 도심 속에서 의사를 하고 있는 지인은 이런 편지를 보내오기도 한다. “온통 노린내가 나서 아무 것도 바라볼 게 없었어요. 옥수수 익는 냄새, 마늘 냄새 가득한 밭둑길을 내려다보고 싶었지요.” 

인류의 역사는 ‘섞는’ 역사이긴 하다. 어떻게 섞이느냐, 무엇과 섞이느냐가 중요하다. 바라보는 관점이나 시각도 이 섞임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이같이 우리 삶의 정체성은 벽을 뚫으면서 섞이려고 하는 통에 바라보는 것들도 흐려지고 있다. 아무리 바라보는 대상을 익명으로 가장시켜도, 우리에게 부글거리며 급격히 다가오고 있는 퓨전의 시각과 관점은 어쩔 수 없다. 


한편의 시를 소개한다. 

“나무는 죽을 때 슬픈 쪽으로 쓰러진다
 늘 비어서 슬픔의 하중을 받던 곳
 그 쪽으로 죽음의 방향을 정하고서야
 꽉 움켜잡았던 흙을 놓는다
 새들도 마지막엔 땅으로 내려온다
 죽을 줄 아는 새들은 땅으로 내려온다
 새처럼 죽기 위하여 내려온다
 허공에 떴던 삶을 다 데리고 내려온다
 종종거리다가 입술을 대고 싶은 슬픈 땅을 찾는다
 죽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 서 있다
 아름다운 듯 서 있다
 참을 수 없는 무게를 들고
 정신의 땀을 흘리고 있다.” 

이 ‘닿고 싶은 곳’은 어떤 곳인가? 퓨전 문화 속에 살고 있는 대상을 바라보다 거기에 닿고 싶은 대상이 아니라 죽는 것까지 아날로그식 자연에 순응하는 깊은 바라봄의 대상이다. 

우리는 퓨전 문화 속에 살고 있다. 하루 종일 TV 시청이나 인터넷을 즐기는 사람은 모니터 크기 안의 것들만 하루 종일 바라보게 된다. 퓨전 사극, 에로, 공포 만화를 폰 카드로 보고 듣기보다는 가끔 3m씩 뛰어오르는 바다도 보았다가 작은 제비꽃잎을 바라보기도 하고 큰 산을 넘는 구름을 보면 어떨까.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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