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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목사와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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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와 지식인 (2010년 6월 2일 수요일) 글자크기 크게보기 작게보기      프린트 이메일 조회 :(219)

- 간증 : 임태현 목사(생명시내교회)


프랑스 아메리칸 비즈니스 스쿨 교수로 있는 역사학자 앤런 S. 케이헌(Alan S. Kahan)은 “지식인과 자본주의”라는 그의 저서에서 지식인을 구별하는 3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가 직업이다. 19세기에는 작가와 예술가, 소설가와 저널리스트 시인들이 학자들보다 지식인 계층이 두터웠다. 1860년 영국, 프랑스, 독일의 대학교수는 3,500명에 불과했지만 작가와 편집자들은 1만 명 이상을 헤아렸다. 2004년 미국을 보면 교수의 수는 160만에 이르지만 작가와 편집자들은 32만 가량이다. 

둘째는 교육수준이다. 19세기 지식인은 고등학교 정도의 교육을 이수한 경우가 많았다. 현재 지식인은 대학교육을 받았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교육의 코스웍(coursework)은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사고의 능력이나 깊이는 개인적인 자질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셋째는 언어사용이다. 지식인은 “신중하고 비판적인 담론(careful critical discourse)”을 갖고 있다. 담론은 시대를 해석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지평이다. 논리적인 절차와 객관성을 통해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지식인을 만드는 것은 직업이나 교육, 말하는 방식은 더더욱 아니다. 19세기 미국 심리학자이며 철학자인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기업가와 지식인을 '소유한 사람'과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말로 대비시켰다. 

그의 반(反)상업적인 편견을 떠나서, 지식인들이란 내면적인 자질에 의해 분류되는 사람이라고 한 제임스의 말은 맞다. 외적인 특징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어떤 사람을 지식인으로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의 태도이다. 모든 지식인들에게는 보헤미안의 기질이 있다. 그들 모두는 도덕적인 목소리를 내기를 좋아한다. 매우 나직이 속삭이는 사람은 있을지라도 그 점에는 예외가 없다. 

인텔리겐치아임을 말해주는 특징 중 하나가 바로 도덕성이다. 지식인이라면 좌파든 우파든, 아니면 자본주의를 사랑하든 증오하든 관계없이 누구나 도덕적 목소리를 낸다. '지식인'(intellectual)이라는 표현은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드레퓌스(Dreyfus) 사건이 전개될 때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유명 예술가들과 학자들이 독일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기소된 유대인 육군대위 드레퓌스를 놓고(서로 두 편으로 갈라져서) 도덕적 견해를 보였다. 서구 지식인들은 언제나 도덕적 비평가의 목소리를 냈다. “나는 나의 조국을 고발한다”를 신문논설에 기고한 대문호 에밀 졸라도 드레퓌스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이다. 

이렇듯 근대의 지식인들은 도덕적 비판가라는 성직자의 역할을 물려받았다. 지식인들이 도덕적 역할에 쏟는 열정이야말로 가히 종교적 열정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성직자와는 달리, 지식인들의 비판기준은 이중으로 모호하다. 그들의 사명이 모든 사람들에게 두루 인식되지 않고 있고, 또 그들이 의지할 '계시'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대신에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창작품인 논리학에 기댄다. 논리학이라면 순전히 이성의 도움만을 받는 것이 아닌가. 이성 그 이상의 권위도, 그 이하의 권위도 동원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식인들은 준(準)성직자라고 할 수 있다. (앨런 S. 케이헌, 정명진 역. “지식인과 자본주의”. 부글. p30-31) 

그러나 논리학은 저자인 앨런이 낭만적으로 본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논리학은 설득과 합리화의 수단이고 더 명쾌한 것은 이해이다. 어느 쪽에서 이해하고 있는가. 성직자처럼 계시의 절대적인 기준이 없는 사람들의 기준은 결국 이해관계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해관계는 단순히 자신의 이익을 위한 방향의 좁은 의미로서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역사적 맥락에서, 그리고 시대의 공간적 제약 속에서 갖는 이해관계를 의미한다. 

아랍계의 역사학자들과 서방세계의 역사학자들이 현재의 상황을 같은 결론으로 인정하는 비평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중동지역 내에서도 민족과 종교에 따라 서로 다양한 평가가 내려질 것이다. 따라서 이해관계는 포괄적인 접근을 통해 민족, 종교, 국가, 개인의 좁은 이해관계로의 합리화 과정으로 이행되기가 쉽다. 물론 개중에는 지식인으로서 그같은 한계를 뛰어넘어 세상의 편견을 지적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개별적인 정서, 즉 문화, 종교, 민족, 학문적 계보, 개인적 성향 등등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일정부분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인은 독립과 자유가 중요하다. 15세기 체코의 보헤미아 지방에 유랑하던 집시들을 프랑스인들은 보헤미안이라고 칭한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사회의 관습에 매이지 않는 예술, 문학 분야의 지식인들을 지칭하게 되었다. 오늘날 보헤미안 기질은 지식인들은 갖춰야할 덕목으로 인식되고 있다. 권력의 억압에 굴하지 않으면서 비판적인 담론의 언어를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에서 시장의 힘으로부터 자유로운 것도 의미한다. 

사회학자 칼 만하임(Karl Mannheim)도 지식인이라는 존재의 본질에 대해 어떠한 집단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떠도는” 사회적 지위를 즐기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을 낭만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역동적인 20세기 초까지야 그야말로 보헤미안 기질을 갖고 한껏 목청을 높일 수 있었지만 자본주의의 세계화로 야기된 자본의 힘은 무소불휘의 권력을 갖고 시장을 지배하게 되면서 보헤미안 기질은 전설로 남겨지고 있다. 

삼성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의 게재를 두고 경영진과 편집진의 갈등이 깊었던 “시사저널”은 결국 편집진들이 독립하여”시사in”을 창간하게 되었다. 오늘날 대학교 총장 선출은 학문적 업적과 인격적 덕목 이외 경영능력이 추가된다. 더 이상 지식인의 자유는 없다. 골방에서 세상을 놀라게 할 비판적 담론을 제시한다 한들 그것을 전할 매체가 자본의 권력과 지배를 받고 있다면 세상에 내놓을 방도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뜻 있는 지식인들은 고통과 압제 속에서도 세상을 위한 제 목소리를 낸다. 

비록 소소한 울림이어서 권력에 의해 독식된 자본, 혹은 자본에 의해 독식된 권력의 메커니즘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그 메커니즘이 전체사회에 이데올로기로 확산되는 것은 막아준다. 그런데 기독교가 진리라는 전제하에서 보면 그마저도 사람들을 진리로 이끄는 목소리는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 진리를 분별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능력이 있다면 인류의 숙원인 마음의 문제나 인간의 죽음은 이미 해결되었을 것이다. 진리를 분별할 수 없지만 생각할 수 있는 이성(理性)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양면이 있는 것이다. 진리를 분별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진리를 찾는 구도자가 될 터인데 생각의 능력을 갖고 있다 보니 마치 생각의 능력, 즉 이성(理性)을 통해 스스로 진리를 분별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물론 이같은 논지는 기독교적 진리를 담보한 변증임에는 틀림이 없다. 

즉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인간은 진리를 깨닫게 되고 진리 안에 거하게 된다는 것은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야말로 지식인이다. 그리고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이 없는 주관적인 담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진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 진리를 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성경의 진리가 진리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법문에 가까운 교리의 습득을 진리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 기준으로 세상에서 잘 사는 방식이 그리스도의 삶에서도 동일한 조건이 되다보니 편의에 따라 조금씩 본질이 편집되는 것이다. 

교회에 예언자적 메시지가 사라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야말로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이 소멸되고 있는 것이다. 예언자(預言者, prophet)는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자를 예언자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啓示)를 전하는 순종을 다하는 사람이 예언자이다. 예언의 내용에 따라 예언자는 칭송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이 대중적인 상식과 어긋날 때면 혹독한 시련을 당하기도 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대하여 말씀하고자 하시면 그 어느 역사 시점 보다 하실 말씀이 많을 것 같다. 직접 성령의 음성으로 하나님의 뜻을 들을 수 없다면 이미 계시된 성경의 뜻을 전하면 그것이 곧 오늘날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될 터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예언자적 메시지가 없는 것은 세상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 세상을 아는 지식인들은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세상을 올바로 계몽할 수 없고 진리를 아는 자들은 세상을 모르기 때문에 무엇을 전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더구나 지식인 사회가 자본시장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처럼 적지 않게 교회도 일정 자본의 권력에 지배당하는 세속화의 전형을 보이고 있다. 목회자가 지식인 계층인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더구나 절대적인 진리로 인도하기에 가장 고귀한 일이기도 하다. 교회법을 어긴 영국 왕 헨리 8세에게 진언을 하다가 순교한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이상적인 국가를 그린 소설)에서도 통치자들은 목회자이다. 

속된 말로 세상의 지식인들은 세상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정확히 잘못되었다고 지적할 능력이 있다. 사실 그들에 의해 일정부분 세상이 계도되고 있다. 그들의 시각에서는 기독교가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보다 폐해를 주는 것이 더 많다고 본다. 현상적으로 본다면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 확실하게 반박할 열매가 없다. 교회라고 말할 때 교회의 위용이 아닌 교회 건물의 위용이 높으면 높을수록 사회적 생산성은 소모적이기 때문이다. 

변명거리가 없을 만큼 기독교의 본질적인 위용은 실추되어 왔다. 고대의 예언자들은 동네 교회 안에서 혹은 동네 골목에서 외친 것이 아니다. 동네를 넘어 이스라엘을 넘어 열방을 향하여 외쳤다. 교인들에게만 유효한 선포를 넘어서야 한다. 목회자가 진실로 사회의 지식인으로서 세상을 계몽하는 것은 권력에 붙어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물론 오늘날의 권력은 정치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본에 의해 정치적 권력을 얻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자본에 의해 권력이 형성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권력을 꾸짖고 자본에 의한 맘몬의 실체를 규명하고 급격히 변화되는 세상 속에 변화되지 않는 진리를 전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다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세상을 좀 더 알아야 한다. 환자의 아픈 곳을 알아야 처방할 수 있는 것처럼 현상적인 범주를 넘어서 세계사적 맥락에서 구조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진리로 무장하고 세상 그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는 보헤미안 기질을 타고난 지식인,목회자의 몫이다. 

- 출처 : 홀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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