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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집트사태를 통해 본 중동 이슬람권 기독교선교의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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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사태를 통해 본 중동 이슬람권 기독교선교의 전망 

- 이현호 (중동전문칼럼리스트)
 

아랍지역의 오래된 속담이 있다. “나와 내 형제는 삼촌을 대적하고, 나와 내 삼촌은 외세에 대적한다.” 이 말은 외부인에 대항하는 가족간의 깊은 혈연적 결속을 보여준다. 실제로 부족 중심의 사회와 문화를 이뤄온 아랍인들에게는 혈연의 가치가 다른 문화에 비해 상당히 높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새해를 시작하면서 터진 중동 지역의 사건들은 여러 면에서 시사하는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외세에 대항하는 것이 아닌 내부의, 그것도 가장 강력한 힘을 행사하는 정치적 수반에 대항하는 강력한 흐름이 군부가 아닌, 평범한 국민들의 힘을 기반으로 일어났다는 점이다. 

튀니지에서 일어난 시민운동의 여파가 이집트로 옮겨졌고, 또한 이집트에서 다른 아랍국가들 심지어 이란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흐름이 전 세계 언론을 통해 연일 보도되고 있다. 이미 국가수반이 사라져 버린 튀니지와 이집트의 예를 통해 볼 때, 아랍 지역의 정치 리더들은 장기집권을 통해 국가를 이끌어왔다.

결과적으로 권력자들과 그 혈연들은 정치적 부패의 온상으로 자리를 잡았다. 사실, 이번 사태는 갑작스런 일이기는 하였지만, 실상은 현실 정치에 대해 오래도록 억압당해온 국민들의 분노와 불신이 표출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난 1월 25일에 시작한 이집트 시민운동은 튀니지가 시발점이라고 보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무바라크 정권에 대한 불만과 불신은 이미 오래부터 국민들의 입에서 표출되던 묵인된 현실이었다. 지난해 11월 이집트에서 있었던 총선에서 보여주듯 정부 권력의 부정부패는 여느 총선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정치편력에 반발하는 무리들은 대항하였고, 총선이 있던 주간에는 거리 곳곳에서 심상치 않은 무리들 간의 마찰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필자는 당시 카이로에서 그 현장을 자주 목격하였다. 

오랜 내전으로 국가가 붕괴 위기까지 갔었던 레바논의 사례 외에 아랍지역에서 이와 같은 시민운동은 전무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중동 전체에 번지는 이러한 현상이 끼치는 영향을 몇 가지 가능한 관점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먼저, 이번 사태를 민주화의 과정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다. 이는 중동국가들의 권력이 소수의 권력자들에게 몰려있음으로 인한 민주적 정치시스템의 부재라는 전제를 배경으로 한다. 국민 개개인의 의견과 참여를 격려하며 존중하는 서방의 정치체계의 틀에서 볼 때, 중동은 민주 정치체계와는 먼 모습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번 사태가 민주화를 갈망하는 시민들의 운동이라고 보기에 어려운 점이 많다. 왜냐하면 아랍인들에게 민주정치라는 체계가 익숙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이번 사태의 핵심에는 백성들의 삶의 문제가 직접적으로 연관된 점에 있어서 그러하다. 

즉, 극심한 빈부의 격차, 인플레이션, 높은 실업률, 가난 등의 문제에서 기인한 행복하지 않은 백성들의 불만이 주요한 원인이라는 점이다. 이런 면에서 이번 문제를 민주화로 보는 관점은 외부인의 시각일 수 있다. 이번 사태는 단지 정치 수반이 물러감으로 갑작스레 해결될 수 있는 정치적 문제가 아닌, 보다 복잡한 측면의 관계, 역동성이 존재한다. 

오래 전 처음으로 발을 디딘 북 아프리카의 한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1993년쯤으로 기억된다. 선거철이었는데 한 정당의 문구가 마을 구석구석에 장식되어 있었다. 문구는 간단했다. ‘이슬람 후와 알할!’(이슬람만이 해결이다!). 이는 이슬람 근본주의 정당이 외치는 구호였다. 친 서구 정권에 불만을 품은 근본주의 이슬람 정당은 사회의 빈곤층과 소외층에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집트의 경우 ‘아코완 무슬리민’(무슬림 형제단)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무슬림 형제단이 ‘핫산 알 반나’에 의해 처음 결성되어졌던 20세기 초반에는 이집트에서만 100만명의 회원이 모아질 만큼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당시 반나는 이슬람사회를 매주 심각한 변혁의 시기로 보았다. 서양문화의 선별적 수용을 주장한 이슬람 모더니즘 운동과는 대조적으로, 서양 문화를 정죄하는 ‘이슬람 자족설’을 주장하였다. 이는 이슬람 내부의 세속화 문제를 서양정치와의 관계의 틀에서 이해한 반응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서양 기독교와의 상관관계인데, 반나는 서양 기독교 선교에 대해 강하게 저항하였다. 그때로부터 거의 한 세기를 지나면서 상당한 변화가 있었지만, 이번 시민운동의 과정을 통하여 무슬림 형제단의 입지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서방 정치권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분이 여기에 있다. 대부분의 중동지역은 1960년대까지 친 서구 정권의 입지가 굳어져있었다. 하지만 권력의 부패가 가져온 백성들의 불신, 이슬람의 세속화 등의 문제들은 이슬람주의자들에게 개혁을 위한 강력한 동기를 제공해 주었다. 

이란 호메이니 혁명의 성공(1979년)은 시아파 이슬람 뿐만 아니라 무슬림 세계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 그의 이슬람국가통치 이념은 다른 지역의 무슬림 공동체에 영감을 주었으며, 이슬람공화국 설립은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결과적으로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이 힘을 얻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서구 정치권은 이러한 현상에 대한 촉각을 내세우며 긴장하였다. 무시할 수 없는 갈등의 구도가 생기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번 중동 사태로 인해 또 하나의 이란이 될 것인지에 대한 우려도 높다. 그러나 이번의 사건은 이란의 예와 여러 면에서 다른 정황이 포착된다. 무슬림 형제단은 이번 사태를 통해 새로운 입지를 얻었지만, 자신들의 입지에 대해 상당히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번 사건의 핵심이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아님을 신중히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사실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은 무슬림 형제단을 정치적 집단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대선이 있었던 1993년에는 상당한 수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체포, 수배하면서 무슬림 형제단에 대한 강력한 정치적 압박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무바라크 정권 아래서 친 서구적 정책과 더불어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은 힘을 얻지 못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기독교 사역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행사하였다. 중동 이슬람지역에서 가장 큰 기독교 공동체가 존재하는 이집트에서 기독교 선교활동이 꾸준히 지속될 수 있었던 배경이 된다.

이집트 기독교는 대부분이 콥틱 교회로서 전체인구(약 8000만명)에서 10∼15% 정도의 수치를 기록한다. 친 정권, 친 이스라엘 성향을 보였던 이집트 기독교에 대해 무슬림 상당수는 불편한 태도를 일관하였다. 최근에 이르러 기독교-이슬람 갈등과 충돌이 잦아진 이유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이번 사태에서 보여준 두 진영간의 태도는 종교를 떠나 이집트인으로서의 연합과 화합을 보여준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이집트 사태가 한창일 때 현지에 있는 그리스도인 형제와 통화를 하면서 확인된 바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들은 ‘미단 알 따하리르’(해방의 광장)에서 열리는 무슬림들의 기도회를 인간장벽을 치며 보호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광장의 중앙에서 국가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양하는 기독교회의 모습을 보여줌으로 기독교-이슬람 관계의 새로운 국면을 일으키는 역동성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집트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교회인 카스르 엘 두바라교회는 이러한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 내고 있다. 사태가 진행 중일 때 지속적인 기도회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을 모으며 현실적이고 성경적인 정치참여를 고민하였다. 이 교회는 실제적인 사회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어두운 사회를 재활하는 시도가 널리 인정받고 있다. 이는 무슬림 다수의 사회에서 소수로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좋은 본보기이다. 

이집트의 교회가 책임있는 역사성과 복음의 역동성을 회복한다면 미래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충분한 가능성이 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간략하게나마 이집트 사태를 통해 서구 정치권의 관점, 이슬람 근본주의의 관점, 역사적 관점, 그리고 기독교-이슬람 관계적 차원에서 해석을 생각해 보았다. 마지막으로 선교적 관점에서 이번 사태가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번 사태가 어떠한 변화의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변화는 모든 이들에게 다른 해석의 창을 제공하여주기 때문에 긍정, 부정을 결정할 수 있는 입지는 아니라고 본다. 

이집트의 미래는 어쩌면 더욱 복잡한 정치적 과정을 거쳐야 할지도 모른다. 기독교-이슬람 관계 또한 이슬람 국가의 틀 안에서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 이번 사건을 통해 현지의 선교사들은 아랍 이웃들과 더불어 깊은 현안의 문제들을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이는 위기를 통해 좋은 이웃이 되어준 대가이기도 하다. 

이러한 흐름은 복음 증거의 효과적인 모티브가 된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이러한 기회를 통해 효과적인 사역이 증대되도록 하는데 관심을 쏟아야 한다. 이는 그동안 한국선교가 보여준 단발성 프로젝트식의 모험을 강행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랍선교에 꼭 필요한 장기적 시각을 준비하라는 말이다. 

중동선교는 중동인들의 시각과 방법에 맞는 것이 되어야 열매가 있다. 교회건축, 센터건립 등에 들어가는 막대한 재정을 오히려 영향력 있는 제자를 양산해내는 입체적 시스템에 쏟아낼 수 있는 선교적 전환과 실제적인 채널 구축이 필요하다. 이슬람 사회 내에서 선한 영향력을 주는 ‘증거하는 공동체’(witnessing community)의 실현이 필요하다. 

선교단체와 선교사는 끝까지 동반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떠나야 제대로 된 선교가 시작될 수 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선교의 방법이다. 또한 전 세계가 주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글로벌 기도 네트워크가 좀더 효과적으로 형성되고 운영되어야 한다. 역동적 기도 사역 이후엔 늘 선교의 열매가 맺혔던 역사를 되돌아볼 때 지금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일어나는 현상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선교의 현장임을 기억하여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기독교 선교역사상 가장 흥분되는 시대를 살고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의무가 있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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