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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뒷간의 쥐와 곳간의 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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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간의 쥐와 곳간의 쥐 

- 임석명 목사(성북교회) 
 

진나라에 ‘이사’라고 하는 사람은 미관말직에 있을 때 가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면서도 그것을 자기 운명으로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사’는 평범하면서도 작은 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계기를 체험하게 된다.

하루는 뒷간에 갔다가 쥐를 보게 되었다. 이 쥐는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삐쩍 말라 있었고 털은 윤기가 없었으며 그야말로 쥐 뜯어 먹은 듯 털이 빠져 있었다. 두려움에 가득한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더러운 것을 먹고 있다가 인기척이 나자 쏜 살 같이 달아나 버렸다. 뒷간을 나온 ‘이사’는 이번에는 곳간을 가게 되었는데 그는 그곳에서 포동포동하게 살이 찐 쥐를 보았다. 털은 윤기가 흐르고 인기척이 나도 도망가지도 않고 곡식 알갱이를 뜯고 있는 쥐였다. 

‘이사’는 깨닫는 바가 있었다. 같은 쥐라도 뒷간의 쥐와 곳간의 쥐는 이렇게 다른 것 이로구나 그러면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내 인생은 뒷간 인생인가? 곳간 인생인가?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곳간 인생 같지가 않았다. ‘이사’는 그 때부터 순자의 문하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를 하고 노력해서 결국 재상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이사’의 이런 변화를 인식의 변화라고 한다.

자신에 대해서, 사물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그동안 인식 했던 생각의 변화만 일어나도 사람은 운명적 변화를 체험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왜냐하면 ‘이사’는 크게 출세는 했지만 지나치게 권력에 탐닉하다가 결국 아들과 함께 거리에서 참수를 당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인식의 변화가 아니라 전인적 변화이다. 전인적 변화란 지(知)·정(情)·의(意)를 모두 갖춘 완벽한 형태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는 칸트가 말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를 중심으로 하늘이 움직이고 있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진 인식의 변화들은 문명의 답보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하늘을 중심으로 내가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의 변화는 상상을 초월하는 문명의 발달을 가져왔다.

불신자가 세상에서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어느 날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을 하고 교회를 나오는 것은 인식의 변화다. “예수 믿고 바르게 살아보자” “아무개처럼 나도 예수 믿고 축복 받고 살자” “교회 가서 기도하면 병이 낫는다는데 나도 교회나 나가야 겠다” 이러한 생각은 “뒷간 쥐처럼 살지 말고 곳간 쥐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참 된 신앙적 변화는 나 중심의 인식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전인적 변화이다.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것이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이다.

우리는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삶을 살고 있을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전인적 변화가 일어난 사람이다. 그러나 혹시 인식의 변화만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지는 않을까? 거듭났는가? 성령의 충만을 받았는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렸나?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고 있다는 확실한 고백이 있나? 그렇다면 완벽한 형태의 변화와 기적이 일어나서 깜짝 놀랄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고 꿈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 출처 : 순복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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