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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교회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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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역사 

- 김홍기 총장 (감리교신학대학교) 


초대교회는 250여년간의 기나긴 박해에서 드디어 해방됐다.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e the Great)는 그의 정적 막센티우스(Maxentius)와 로마 근처 밀비안 다리(Mulvian 혹은 Milvian 다리)에서 전쟁을 하게 되었다. 9만8000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가울에서 알프스로 넘어가서 이미 3번 이기고 마지막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전쟁 전날 밤 ‘ΧΡ(키로·Chi-rho)’의 환상을 꿈꾸었고 어느 날 태양을 가로지르는 십자가와 함께 ‘이것으로 정복하라’를 보게 되었다. 이는 크리스토그램(Christogram)으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돼 온 군인의 깃발과 방패와 헬멧에 키로를 붙이고 나갔다. 결국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승리를 거두게 되었다(312년 10월 28일). 막센티우스와 그의 군사들은 티베르강에서 익사했다. 

그리고 이듬해 그 유명한 밀라노 칙령(the Edict of Milan)을 발표함으로써 기독교를 해방시켰다. 초대교회는 키로와 함께 익투스(IXTHUS), 곧 물고기가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익투스란 물고기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란 희랍어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물고기를 그린 사람의 뒤를 따라 가면 기독교인들이 숨어 사는 카타콤을 찾아갈 수 있었다. 카타콤 무덤동굴은 로마제국의 치외법권 지대였다. 

기독교의 승인은 많은 지성인을 선교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4세기 전반(313년)까지 기독교에서 지성인을 보기 드물었으나 4세기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지성인이 급증하게 되었다. 지성인들의 회심은 타 종교나 철학들보다 기독교가 더 지성적·영적 해방을 주는 종교임을 보여주게 되었다. 성 제롬, 성 바실, 성 빅토리누스, 성 힐라리 그리고 지성인 황제 줄리안과 성 어거스틴 등의 회심은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왕자 줄리안은 카파도키아에서 시작하여 에베소에서 끝나는 지성적·영적 진리 추구를 통하여, 그의 지성적 의문이 기독교 신앙 안에서 풀리고 기쁨을 얻게 되었다. 

어거스틴도 마니교, 플라톤 철학을 거쳐 기독교에서 지적·영적 행복을 경험하는 밀라노정원 회심을 386년 얻게 되었다. 로마제국이 멸망(476년)의 길로 접어들게 되자 이교도들은 로마의 기독교 국교화를 그 원인이라고 문제 삼기 시작했다. 이에 어거스틴은 이기적 사랑(amor sui)에 지배당하는 세속도성(civitas terrenei) 때문이라고 했다. 교회는 세속 도성에 의해 고난의 순례를 당하지만 최종 승리한다는 역사의 섭리를 강조한 것이다. 

초대교회의 지성적 크리스천들, 곧 북아프리카의 신학자들이 대부분 흑인들이었다. 성 어거스틴도 흑갈색(Dark brown)의 피부색을 지닌 북아프리카 누미디안(Numidian)이었다. 또한 니케아신조의 동일본질론을 사수한 대 신학자 성 아다나시우스도 콥틱(Coptic)족의 흑인 난쟁이였다. 성 키프리안, 성 터털리안 등 서방교회 라틴신학을 형성한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흑인들이었다. 하나님은 민중 크리스천들을 들어 쓰셔서 당신의 선교역사를, 로마의 복음화를 이루신 것이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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