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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카이스트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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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의 죽음

- 조성돈 교수(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카이스트의 학생이 올 들어 벌써 세 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 각각의 인생에는 다른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들에게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이라는 카이스트의 학생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대학이었는데 그들은 왜 그곳에서 살아야할 의미를, 아니면 살아야할 용기를 잃어버리게 된 걸까. 

이미 알려졌듯이 카이스트는 2007년 현 서남표 총장이 취임하면서 무한경쟁으로 돌입했다.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한 학생들에게 4.3 만점의 학점에서 3.0이하가 되면 벌금형식의 등록금을 내게 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0.01점마다 6만3천원으로 계산해서 최대 700여만 원을 내도록 했다. 공과대학교 다운 정확한 계산이다. 

물론 서 총장이 한 신문에서 인터뷰한 것과 같이 공부 안한 학생까지 국민세금으로 뒷바라지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성적은 상대평가이다. 중·고등학교처럼 어느 수준이 되면 점수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30%는 무조건 2.3 이하의 성적을 받아야하고, 그 상위 40% 정도도 3.3 이하의 성적을 받아야한다. 그것은 규칙으로 그 클래스의 학생들이 어떠했는지에 상관없이 무조건 정해지는 성적이다. 

즉 1백 명의 학생이 있으면 이론적으로 반 이상은 3.0 이하의 성적을 받아야하는 것이다. 이것은 누군가 3.0 이상의 성적을 받으면 나는 3.0 이하의 성적을 받아야한다는 이야기이다. 대한민국에서 0.5%의 성적으로 이 대학에 왔다는 아이들이 이 무한경쟁의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했을지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슬프게도 그 아이들은 죽기까지 공부했을 것이다. 

이 대학을 보면서 철창게임이 생각났다. 격투기 선수들이 도망갈 수 없게 링 대신에 철창을 쳐 놓고 하는 경기가 있다. 싸움을 잘 한다는 근육질의 사내들이 피를 튀기며 쓰러지기까지, 아니 쓰러져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싸워대는 경기이다. 그 경기를 보면서 환호하는 이들이 있기에 TV를 통해 매일 방영이 되고 있을 것이다. 

카이스트의 학생들은 어떨까. 근육질 대신 두뇌질을 가진 젊은이들이 그 좁은 학교에서 서로를 쓰러뜨리지 않으면 자신이 낙오자가 되어야하는 철창경기를 펼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피를 튀기며 쓰러지기까지, 아니 쓰러져 죽기까지…. 

그 좁은 학교는 어쩌면 이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이라는 정글의 법칙이, 성공하지 못하면 살아야할 이유도 댈 수 없는 이 사회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다. 효율과 속도, 그리고 돈으로 환산되는 인생의 의미들이 지배하는 이 사회에서 우리는 존재의 이유를 찾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세계 1위의 자살률, 그것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높은 자살률을 가지고 있는 이 사회와 카이스트는 결코 다른 두 세상이 아니다. 이것이 대한민국이 살아온 방법이었고, 존재해나가는 방식이었다. 올 들어 자살한 카이스트의 세 학생은 어쩌면 하루에 42명에 이르는 대한민국의 자살자들과 결코 다르지 않은 우리의 아이들일 뿐이다. 

그 학생들을 향해 심약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손가락질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내 대신 그들이 죽어주어서 고맙다고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저 세리와 같이 않음을 감사하던 그 바리새인의 모습이 우리가 아니었으면 한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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