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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도스토예프스키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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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 설교
 
- 정충영 교수(경북대학교 명예교수)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는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호입니다.

그는 빈민구제병원 의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도시적인 환경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학을 좋아하였습니다. 16세 때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병사관학교에 입학했고 졸업한 다음에는 공병국에 근무했으나, 싫증을 느껴 1년 남짓 있다가 퇴직했습니다. 그 당시 사회가 부패하자 급진적인 혁명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똑똑한 젊은 사람들이 페트라셰프스키 라는 사람의 집에 모여 러시아의 역사와 미래에 대해서 열띤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프랑스 혁명사상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프랑스 혁명가의 기록을 분석하는 페트라셰프스키의 서클회원이 되었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페트라셰프스키 서클을 예의주시했고, 결국 1849년에 서클의 전 회원이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영하 50도의 추위가 그의 살을 바늘처럼 찔렀습니다. 나중에 형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12월 22일, 우리는 모두 세묘노프 광장으로 끌려갔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십자가에 입을 맞추고 사형수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그런 다음 일행 중 3명이 처형장으로 끌려가 기둥에 묶였습니다. 저는 앞에서 6번째였고, 우리는 3명씩 끌려갔으므로, 저는 2번째 그룹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시간은 5분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가족과 친구를 생각하면서 3분을 사용했습니다. 2분이 남았습니다.

“아, 이렇게 내 인생이 끝나다니. 내게 다시 한 번 더 생명이 주어진다면 정말 보람차게 살 텐데.” 그는 28년간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후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바로 그 때 멀리서 한 병사가 황제의 특명을 갖고 달려 왔습니다.

“황제께서 사형집행을 중지하라는 특명을 내렸소.”

그는 가까스로 사형을 모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베리아의 옴스크 감옥에 갇혀야 했습니다. 거기서 4년간 수감생활을 하던 초기에 한 여성이 그에게 신약성경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는 신약성경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4년 내내 성경은 나의 베개 밑에 놓여 있었다. 어떤 때는 혼자 성경을 읽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읽어주던 때도 있었다. 어떤 죄수에게는 그 성경으로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더 이상 혁명주의자들의 급진적인 유토피아 사상에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통과 불합리로 얼룩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랐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인간의 삶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아무리 훌륭한 진리와 부귀가 있다 해도 그것이 신앙에 위배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편에 설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항상 하나님을 기대하면서 ‘죄와 벌’, ‘백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과 같은 작품들을 통해 설교자들이 전하기 어려운, 기독교 신앙의 깊은 차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의 달란트인 소설을 통해 오늘까지도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을 널리 전파하고 있습니다. 설교는 교역자들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삶에서 그의 달란트를 통해 깊이 있는 신앙을 전파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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