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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지금 ‘그’사람 때문에 살고 있다.

  • 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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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그’사람 때문에 살고 있다.

요21:15-17

 
15절은 13절의 계속입니다.

새벽에 예수는 피곤한 저들에게 아침 조반을 장만해서 먹게 하고 그리고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네가 나를 저들보다 더 사랑하느냐?’ 이것은 부활 후의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바로 십자가 직전의 장면과 비교하여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최후 만찬에서는 ‘너희 중에 나를 팔 사람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또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합니다. 십자가에까지는, 즉 고난은 예수가 홀로 참가하고, 또 그것을 전제로 하고, 십자가의 고난으로 죽음을 극복한 다음에 이제 예수는 저들에게 사랑의 고백을 시키고 있습니다.

 

둘째, 베다니에서의 최후의 만찬은 종말의 직전에서 하는 송별의 만찬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벌써 새 출발의 축하, 즉 새로운 만남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셋째, 여기서는 세 번을 계속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데요. 이것은 베드로가 세 번 예수를 부인한 것과 맞먹는다 할 수 있겠죠. 십자가 사건 전에는 사랑을 아무리 맹세해도 그것을 결코 용인하지 않으시더니, 부활 후에는 예수가 그에게 오히려 사랑을 요청하며 고백하게 하고 있습니다. 벌써 여기서는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거죠.

 

사실상 베드로는 벌써 그 사랑을 포기하고 그의 생애에서 예수와의 1년은 물에 던진 돌의 파문 정도일 뿐 이제 그는 다시 갈릴리 바다의 일상생활로 돌입해 있었습니다. 그러니 사랑이란 센티멘탈리즘으로 되는 것도, 결심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구체적인 과업을 눈에 두고 그 과업을 이루어 가는 것을 통해서만 그 사랑이 실현되고 지속됩니다. 이제 예수는 일상생활로 돌아간 베드로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것은 이 사랑을 참 실현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에게 한 과업을 주기 위해서 입니다.

 

이것을 베드로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 될까요? 그의 사랑은 일단 부정되었습니다. 자기가 정열적인 고백과 결의를 한 것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에야 비로소 참 사랑이 가능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 예수의 물음에 대한 그의 대답은 이제 그가 사랑한다면 그 사랑마저도 주어지는 것이지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고백이라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사람은 모든 것을 산 채로는 먹지 못합니다. 죽여야 먹습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은 일단 부정됨으로서만 비로소 새 사랑이 가능합니다. 죽지 않는다면 부정된 채 남아 있게 되는 것이죠. 종교심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열심이라도 그것이 일단 자기 안에서 부정된 후에라야만 참 신앙이 출발되는 겁니다.

 

성서 본문을 한번 보죠. 일단 상황은 ‘조반을 먹은 후’입니다. 12절에서는 주님인 줄 알았으나 ‘당신이 누구인가?’를 감히 묻는 이가 없더라고 합니다. 베드로 입장에서 이쯤 되면 지난 날 그렇게 용감하게 했던 내 결심, 내 자신이 다 후회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이제는 내 운명은 내 손에 없고, 그의 처분만 기다리는 장면이죠. 돌아온 탕자처럼, 간음한 여인이 찾아온 남편 앞에 있듯이, 단지 그의 처분만 기다리는 그 장면이라 하겠어요.

 

그런데 예수는 이런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하고 부릅니다. ‘안레데’(Anrede)입니다. 직접 내게 대하고 묻는 것입니다. 1대 1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물음입니다. ‘너희들’ 이 아니라 ‘너’입니다.

 

그 다음에 베드로에게 하는 말은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하죠. ‘저들보다 나를’이 아니고, ‘저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더 나를 사랑하느냐?’입니다. 이제는 십자가에 죽기 전에 베드로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던 그 예수가 아니라 부활한 예수입니다. 그 예수가 베드로 앞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차원이 다른 대상입니다. 이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은 ‘주께서 아시나이다’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확실히 사랑하는 것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자신이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판단할 일이지 나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는 베드로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말합니다. 부활한 그는 ‘복수해 달라’고도 또 마태복음에서처럼 ‘세계 전도를 해달라’고도 아니고, 그저 ‘내 양을 먹이라’고 할 뿐입니다. 새 과제는 내 양을 먹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 양’이란, 10장에서 예수가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한 바로 그의 것들입니다. ‘먹이라’, ‘그의 것들을 먹인다’ 함은 당시에 모든 악한 것에서 보호하고 춥고 더운 것을 가리고 풀 있는 곳으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거기에서는 도적이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에 저 양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여기서 다시 돌이켜 베드로의 입장을 한 번 보지요. 그의 사랑은 일단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센티멘탈한 자기편에서 시작된 사랑은 좌절되었습니다. 다시 그와의 관계의 사랑은 어떤 것인가요? 그것은 그의 뜻을 한 과업으로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요? 그가 원하던 것은 그(예수)가 사랑하는 형제를 지키는 일입니다. 나는 정말 그를 사랑하는가요? 그렇다면 내 할 일은 그가 사랑하는 형제들을 위해서 내 목숨을 바치는 일입니다. 예수는 두 번째도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똑같은 부탁을 다시 반복합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 보면 이 질문은 어떠했을까요? 내가 정말 그런 자격이 있나?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나? 세 번째에 베드로는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정말 내가 그를 사랑하는가? 그가 내 사랑을 부정한 게 아닌가? 정말 내게 그것이 가능할까? 그렇더라도 나는 해야 하겠다.

 

이제 예수를 사랑한다는 일은 감정에서, 또는 형이상학적인 기대에서부터 아주 구체적인 이웃과의 관계로 내려왔습니다. ‘예수님의 양’을 먹이고 쳐야 하니까요. 그리고 이제 그를 사랑한다는 일은 이웃을 사랑한다는 일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를 사랑하면 고행을 하라, 기도하라, 또는 의식(儀式)을 지켜라’가 아니라, 바로 ‘내 양을, 즉 네 이웃을 모든 위험과 고통에서 건져 주라’로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에만 그는 그를 사랑하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동시에 사실은 그렇게 할 때에만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를 알게 된다는 겁니다. 사랑, 그것은 궁극적으로 내가 저를 사랑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저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벌써 베드로가 순교한 뒤에 씌어진 것으로서 베드로의 생애에 대한 해석이기도 합니다. 그가 순교했다는 것은 18절 아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하는 말로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베드로가 마침내 예수 때문에 죽음에까지 이를 수 있었을까요? 그는 그렇게도 비겁했는데! 그렇게도 실패를 거듭했는데! 그는 인간적으로 결코 위대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하나의 자연인이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마침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에 골인한 것은 결국 그 자신이 아니라 예수에게서 온 힘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이것을 본문의 이야기를 통하여 ‘자기가 아니다. 타력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그 타력은 양을 먹이는 동안에 왔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과업을 맡은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복잡한 관계에서 내 선의가 여지없이 거부당하고 배신을 당할 때 ‘이 따위 짓을 왜 해’ 하고 반항하지만 만일에 그 다음에 ‘그러나’ 하게 될 때 그런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것을 그가 원했는데’ 하는 사랑의 대상이 없는 사람들은 반드시 넘어집니다. 그런데 반해서 번번이 자기 선의(善意)가 유린됨에도 불구하고 또는 내 자신 안에 있는 제한성 때문에 끊임없이 실망함에도 불구하고 되 던 안 되든 ‘그가 원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도전하는 사람이, 그러한 사랑의 대상을 가진 사람이, 그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직업을 갖고 있습니다. 이 직업이라는 것 때문에 하루 종일 시달립니다. 젊어서 어느 단계까지 하면 기반이 잡힐 거고, 그렇게 기반을 잡으면 내 인생도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막산 기반이 잡혀도 인생의 방향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저 더 많은 걱정, 더 많은 일만이 거듭될 뿐입니다. ‘어느 단계에 오면’이라는 희망 속에서 그 고된 일들을 견디어 내지만 결국 도달하는 결론은 ‘밥 세끼를 위해서?’라는 허탈감입니다.

 

루터는 직업이라는 말을 ‘Beruf’라는 뜻으로 강조했습니다. 직업, 그것은 Job이 아니라 Beruf였습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이의 뜻에 의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Beruf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여기에 이 Beruf를 통해서 나를, 내 사랑을, 또는 그의 사랑을 느낍니다. 그런 의미에서 Beruf는 신성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Beruf는 그렇기 때문에 허무와 허탈의 결말에 이르지 않습니다. 직업의 목적이 돈에 있다면 그 직업은 어쩔 수 없이 부패해집니다. 그러나 Beruf는 그의 뜻을 위해,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허탈과 허무 그리고 부패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그 때문에’가 있습니까? ‘나 때문에’가 아니라 ‘그 때문에’ 내가 지금 무언가 붙잡고 일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면’,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가 원하는 일을 하고, 그를 위해 일해야 합니다. 아니, 당신이 지금 부활한 예수를 믿고 있고 그 예수를 사랑한다면 지금 당신이 하는 일은 그의 뜻이며, 그를 위한 것이며, 그를 향한 당신의 사랑입니다. 지금 당신은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그 사람 때문에 살고 있다’라고 말입니다. ‘나는 그 사람 때문에 일하고 있다’라고 말입니다.

 

그 일 즉 ‘양을 치는 것’혹은 ‘양을 먹이는 일’은 무엇입니까?

 

‘내 양’이란, 10장에서 예수가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한 바로 그의 것들입니다. ‘먹이라’, ‘그의 것들을 먹인다’ 함은 당시에 모든 악한 것에서 보호하고 춥고 더운 것을 가리고 풀 있는 곳으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거기에서는 도적이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에 저 양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게 예수의 양을 먹이는 일입니다. 예수를 사랑한다는 일은 이런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그 사람 때문에 살고 있다’라고 말입니다. ‘나는 그 사람 때문에 일하고 있다’라고 말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 사람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루터는 성경을 번역하면서 관용적인 표현을 많이 썼는데 이로써 독일어 표현이 더욱 풍부해졌다. 또한 시적인 표현을 즐겨 썼는데 이를 통해 독일어가 아름다워지는 데 기여했다. 예를 들어 “아베 마리아, 그라시아 플레나 (Ave Maria, gratia plena)”는 말 그대로 번역하면 “마리아는 은혜가 꽉 찼더라.”이다. 그러나 당시 평민들은 ‘꽉 차다’라는 말을 ‘배가 꽉 차다’, ‘맥주통이 꽉 차다’라는 뜻으로 연결시켰다. 당시 루터는 이 말을 “마리아는 은혜로 충만하더라.”로 번역했다.

 

이러한 루터의 작업으로 인해 독일어 어휘에도 변화가 생겼는데 한 예로 독일어로 ‘직업’을 의미하는 ‘베루프 (beruf)'는 루터 당시에는 목사들에게만 사용되는 어휘였다. 그러나 루터는 돈을 받고 일하는 모든 직종에 이 단어를 사용했으며 지금도 독일에서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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