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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호모 데우스 Homo Deus

  • 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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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Homo Deus

롬7:14~25

 

오늘 본문은, 어떻게 보면 아직도 정설이 없는, 어려운 얘기입니다. 몇 가지로 정리를 하면 이래요.

 

첫째는, 바울이나 우리나 예수를 믿기 전의 상태가 이렇다는 것인지 아니면 예수를 믿은 후에도 이런 고뇌가 있다는 것인지 하는 겁니다. 그런데 좀 더 깊이 살피면 이건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니죠. 이 고백은 모든 인간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혹은 강제된 인간 내면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세례를 받았어도,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었어도, 목사가 되어도 강제처럼 내 안에서 이런 갈등과 고뇌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둘째로, 이것은 우리 개인의 실존적인 고백이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주로 제1인칭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괴롭다” 하는 말을 썼기 때문에, 이것은 바울 자신이 아마 예수를 믿기 전, 율법 아래 있을 때의 자기를 고백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은 다음에도 자기 안에 있는 모순 때문에 싸우는 자기를 나타낸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안에는 1인칭 단수(‘나’)와 1인칭 복수(‘우리’)가 교차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바울 개인의 얘기가 아니고 인간 전체, 인간성, 인간의 조건을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20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공감대를 가지는 말씀입니다. 물론 거기에 바울의 실존적인 경험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마는, 바울은 자기 실존적인 고백에 멈추지 않고 이것의 보편성을 여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해석하는 두 가지 전통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것이 고대 희랍의 전통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입니다. 희랍적 전통은, 선과 악 둘 중에서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실제로는 선을 행하려고 해도 그러지 못하고 악을 행하는 내적 고뇌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메타몰포스라는 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욕망이, 또 한편으로는 이성이 나를 설득한다. 나는 더 좋은 것, 그것을 시인한다. 그러나 나는 더 나쁜 것을 행한다. 묘하게도 분명히 이성적으로는 좋은 것이 이것임을 아는데 내 행동은 결과적으로는 이성에 반하는 나쁜 것을 행한다. 그래서 내 안의 모순률, 이것 때문에 나는 괴롭다.”

 

여기에 대해서 또 하나의 전통이 있습니다. 특별히 쿰란전통이라고 합니다만, 거기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악한 인류와 죄 짓는 육신의 공동체에 속했다. 그런 고로 나는 괴롭다.” 여기에는 이원론이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악한 세계와 선한 세계가 있고, 이 두 세계가 대결하는 틈에서 내가 지금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나는 현재는 악마가 지배하는 세계에 속해 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저 해방되려고 애를 쓰는 상황이다. 여기에서 아하 나는 괴롭다, 누가 나를 해방해 줄 것이냐, 하는 우주론적인 이원론에 입각한 것입니다. 이 둘에서 보면 바울은 후자에 속한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고통을 당합니까? 그것은 15절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하게 되지 않고 오히려 안 해야 할 일을 하게 된다, 이게 문제입니다. 하고 싶지도 않은데 하게 되는 것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말이 16절 전반 절, 18절 마지막, 19절, 20절 전반에 반복되어 나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하게 되지 않고 오히려 원하지 않는 것을 하게 되는 이 고뇌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이것이 주제입니다.

 

이런 인간 내면의 이중적 갈등에 대한 통찰은 세계 일차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없었습니다. 인간을 무한한 가능성으로 보고 우리 자신의 지식과 우리의 기술이 점점 발전이 되어 가면 인간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인간 낙관주의’가 르네상스와 함께 등장했습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 있다는 이 낙관주의가 충만할 때 사람들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갈등 때문에 고민하는 째째한 인간’은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계일차대전에 의해서 하루아침에 모두 잿더미로 없어진 것을 경험한 사람들이 ‘아! 틀렸구나. 어찌 전능한 인간들이 이런 참혹한 일을 저질렀는가!’하면서 이중적 갈등을 내재한 인간인 것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위인들이 키에르케고르, 파스칼, 토스토예프스키 등이죠.

 

그들이 인간 안에 모든 것이 가능하고 일사천리로 풀려나갈 희망적인 가능성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어쩌지 못하게 누르는 조건들이 있다고 말하기 시작한 겁니다. 나는 아닌데 묘하게도 내 삶의 조건이 나를 소외시키고 있는 이런 것을 보고 거기서 실존적인 고뇌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소설로도 인간 내면의 이런 갈등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카프카의 성(Castle) 같은 것이 대표적인 것의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의외로 나는 큰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 밖에서 빙빙 돌고 있는, 그야말로 내 주제 속에도 못 들어가고 내가 주체도 못된 채 손님같이, 내쫓긴 녀석처럼, 내 일에 주체가 못되고 밖으로 도는 나, 그것을 그들이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까뮈나 사르트르나 그런 인물들이 문학적으로 내 안에 있는 욕구와 실제 행동 사이의 상충을 그린 것이 실존주의의 기본적인 바탕입니다. 이 실존의 문제는 그렇게 행위하는 내가 강제된다는 겁니다.

 

무슨 일이든 강제가 되면 갈등하고 고뇌 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린이나 어른이나, 배운 사람이나 배우지 못한 사람이나, 도를 닦은 사람이나 닦지 않은 사람이나, 바울이나 우리나 꼭 같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충실했습니다. 율법대로 했습니다.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에 흠이 없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그 강제된 금단에 반항하는 자기를 발견합니다. 반항하는 그게 나쁘다 좋다는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강제된 데 대해서 분해하고 반항하는, 분화된 자기, 이율배반의 자기를 발견한 겁니다. 그러면 무조건 율법에 반항을 해 버리면 됩니까? 바울은 아니다, 반항을 해 버리면 나도 죽는다, 망한다 합니다. 여기에 고민이 있습니다.

 

선악과 얘기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 질문하는 것이지만, 왜 하느님이 하필 선악과를 만들어 가운데 딱 세워놓고, 이걸 먹으면 죽으니 먹지 말라고 했습니까? 안 만들어 놓으면 괜찮은데 만들어 놓고 먹지 말라고 그랬습니까? 여기에서 인간성을 그대로 노출한 것입니다. 먹지 말라. 강제성이 있습니다. 먹으면 죽습니다. 먹지 말라는 것과 그 말이 옳다고 전제해도 바로 그런 강제성 때문에 금단의 열매에 대해 매력을 느낍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강제성에 대해 근원적으로 저항심을 갖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반항이 고뇌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고뇌하는 아담을 예로 읽을 수 있겠지요. 아담은 먹지 말라는 그 강제성에 반항하듯이 먹죠. 그리고 죽음으로 들어갑니다. 밀턴의 실락원이 바로 그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고뇌의 역사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 원초적인 경험 속에서 마침내 바울은 절규를 합니다(24절).

 

아아, 나는 괴로운 사람이다. 그러다 결국 나는 죽어버린다. 여기에 반항하면 나는 죽는다. 진리니까, 참이니까. 죽어가는 나를 누가 구원해 줄 것인가? 어쩌면 예수가 처형당할 때의 최후의 비명에도 비길 만한 겁니다. 예수의 고뇌도 그겁니다. 아하, 나는 괴로운 사람이다. 누가 나를 여기서 구해 줄 건가? 기본적으로 말하면 같습니다. 이 고뇌는 같은 고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나를 사망에서 구해 줄 것인가 하는 24절과 그 다음의 25절 사이에는 커다란 무덤이 하나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십자가의 처형과 같은 무덤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25절을 읽어야 됩니다. 누가 나를 구원해 주랴? 무덤입니다. 죽었습니다. 대답이 없습니다. 거기에 대답이 연속 발전이 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한계는 거기까지입니다. 누가 나를 구해주랴? 내가? 아니, 그게 끝입니다.

 

그런데 25절에서 갑자기, ‘나는 우리 주님께 감사하며 그리고 그와 더불어 하느님께 감사 한다’고 합니다. 긴 멈춤 뒤에 놀라운 점프가 일어난 것입니다. 뭔가 변화가, 존재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바울이 제일 많이 쓰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입니다. 율법이 선한 하느님의 뜻을 분명히 전달하지만 그 강제성에 견딜 수 없어 나는 반항했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다시 강제 받지 않는 자율의 나를 발견했다는 감격입니다. 여기서 다시 부활한 겁니다. 어떤 상태인가? 다시 거기서 살아난 상태는 어떤 것인가?

 

사랑에는 해지(하게 되는)는 사랑이 있습니다. 짐승도, 벌레도, 우리도, 어머니가 자식에게 하는 것처럼 저절로(거의)해지는 사랑이 있다는 겁니다. 그건 동물적인 사랑이죠. 그 다음 단계로 해야 할 사랑이 있다고 해요. 이것은 강제된 겁니다. 교회가 자꾸, 나도 여러분에게 해야 할 것을 얘기하는데, 나도 율법이 아닌가 하고 고민합니다. 그 다음에 세 번 째 진짜 단계가 무엇인가 하면 해야 할 사랑이 해지는 사랑입니다. 어떤 상태인가? 강제된 것이 자율적으로 되는 상태, 이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에게 감사하는 그 감사의 내용입니다. 타율적인 것을 자율적으로 결단하고 내가 이니시어티브initiative를 취할 수 있는 것, 내가 주체가 되는 것, 해야 할 것이 해지는 사랑, 그것은 죽음을 극복을 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바울이 그런 표현을 많이 합니다. 내가 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한다. 나와 그리스도가 분별이 안 된 상태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보라, 나는 새로운 존재 New Being, New Creation 이다! 새로운 존재란 다른 게 아닙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즐겨서 하는 존재입니다.

 

사랑은 무엇이냐 하면 결국은 자기초월입니다. 자기 초월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겁니다. 우리는 역시 이기적으로 생겨 먹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기적으로 자기 욕심만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원래 이기적이고 내 욕심밖에는 모르고 그러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 안에서 나는 비로소 놀랍게도 자기를 극복하고 자기를 초월해서 너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비약을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새 창조물입니다.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다, 누가 나를 여기서 구해주랴? 그러고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하고 소리를 친 것은 자기 극복을 한, 자기 초월을 한 바울입니다.

 

이 자기초월의 사건이 놀랍게도 교회 안에서 일어나지 않고 지금은 계속 교회 밖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얼른 보면 향락에 도취해서 정신없는 것 같은 그런 아이들이, 고등학교 시절에 죽도록 공부하고 좋은 학교에 들어가서 이제 미래를 설계하며 애쓰던 그것을 어느 순간 초개와 같이 버리고 뛰어듭니다. 이건 단적으로 자기 초월입니다. 자기 초월의 사건입니다. 이걸 빼고 사랑이라는 말을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이 사랑의 제물로서 그들은 지금 현장에서 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자기 초월의 사건이 놀랍게도 교회 밖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교회 안에 있는 우리에게 무서운 도전이라는 것을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유발 하라리 라는 이스라엘 히브리대학에 아주 젊은, 마흔 몇 밖에 되지 않은 선생이 그의 사상을 책으로 펴냈습니다. 인류학이기도 하고 미래학인 책은 대표적인 두 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호모 싸피엔스>라는 책과 <호모 데우스>라는 책입니다. 앞의 ‘호모 사피엔스’라는 책에서 그는 그동안 인류가 수 만 년 동안 다른 포유동물과는 다르게 인지와, 농업과, 과학을 혁명적으로 발전시켜서 여타 동물과는 다른 차원의 존재로 살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한 단계 그 존재를 높여서 <호모 데우스>즉 ‘신 같은 인간’으로 점프를 하지 않으면 그저 지금처럼 ‘욕망의 포유류’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인류학적 제안을 신학적으로 답하기 위해 오늘 제목을 <호모 데우스>로 하고 앞에서와 같이 신학적 해답을 제시한 겁니다.

 

그 해답을 한 번 더 말씀드리자면, 인간 본성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강제 된 선한 의지와 악한 행동’을 되풀이 하지 말고, 자기 초월을 하라는 겁니다. 이게 뭔 말인지 아시지요? ‘해야만 하는 사랑이 해지도록’ 강제된 것이 자율이 되도록 그렇게 자신을 끌어 올리라는 겁니다. 이런 존재변화를 교회 다니는 사람은 하지 않는 반면, 교회 밖의 사람들이 지금도 맹렬하게 하고 있으니, 교회 밖의 사람들 가운데서 자기 초월을 일으키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으니 무서운 도전으로 받아 들여 초월의 출발점으로 삼으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하라리가 말하는 <호모 데우스>적 인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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