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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험한 상식

  • 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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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상식

행6:1-7


오늘의 성서 본문은 보통 교회 안의 여러 직무 중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이해돼 왔습니다. 또는 사도들이 자신들에게 집중된 권력을 헬라 이름을 가진 일곱 사람에게 나눠줌으로써 교회 안의 갈등을 해결하는 ‘훈훈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장로나 집사라는 교회의 직분이 출현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본문으로 해석되는 경향도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2-4절은 교회 안의 갈등해결의 모범 사례, 직분 선출을 위한 기준 등으로 이해돼 왔죠.

 

이러한 경향은 특정한 해석의 틀을 기반에 두고 있습니다. 바로 사도행전 전체를 교회의 성립과 복음의 확장 과정으로 보려는 틀입니다. 예수 사후의 기독교사(史)는 제도화된 교회형태와 공교회(Catholicism)라는 목표를 향해 수렴해간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사도행전에 묘사된 갈등은 결국 ‘교회’를 완성하기 위한 체계 내적인 분화와 적응의 과정이라고 이해하는 목적론적 해석학이 성립하게 됩니다. 바꿔 말하면, 초대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구제업무를 수행했는데, 사람이 많아지자 이 일 때문에 사도들이 시간을 많이 뺏기게 돼 자신의 업무에 충실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일곱 장로 혹은 집사를 선출하는 것은 사도들의 업무를 대신할 사람을 뽑는 것입니다. 일곱 사람이 그 일을 대신했기 때문에 사도들이 ‘방해받지 않고’ 자신들 본연의 업무에 충실할 수 있었고, 그것은 교회가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자연스런 분화와 적응 행동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차분하게 본문을 들여다보면 몇 가지 궁금증이 발생합니다. 그 처음이, 매일의 구제에서 헬라 말을 하는 과부들이 차별받았다고 하는데, 차별의 주체는 누구였으며 어떤 차별을 받았는가 하는 겁니다. 그 다음의 궁금증은, 분명히 1절에서는 ‘분배의 불평등’이 문제라고 되어 있는데, 사도들이 제시하는 2-4절의 ‘해결책’에는 왜 분배방식 개선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는 것일까 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문제 상황이 분배 때문이었다면 왜 선출된 일곱 집사의 자격조건이 하나같이 분배 업무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들뿐일까 하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모두 불러”(2절) “여러분 가운데서”(3절) 일할 사람 일곱을 뽑으라고 하고는 (모인 사람들 중에는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과 히브리말을 하는 유대인이 함께 있었을 텐데) 뽑힌 사람은 왜 전부 헬라 이름을 가진 사람들일까 하는 거죠. 이러고 보니 발생한 문제와 그 해결책의 연결이 성립이 안 되고 있습니다.

 

이 궁금증에 대한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해결방식은 이 껄끄러움을 ‘없는 셈’ 치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목적론적 해석학’을 가져다가 성서는 교회와 신자들의 나아갈 바를 모범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선언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목적론적 해석에서 ‘시간’이라는 변수는 사실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목적을 향해 가는 과정에 다양한 ‘단계’는 있을지 몰라도 그것들은 구체적 시간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해석학은 성서를 통해 현대의 ‘삶의 지침’을 발견하고자 하는 많은 기독교인에게 매우 매력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이 해석학의 입장에서, 사도행전에서 언급되는 이상적 교회를 향해 나아가는 모든 단계들은 현재의 상황과 쉽게 동일시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방식은 다양한 형태로 각색돼 한국교회 안에서 소비되고 있는데, 주로 교회의 위계질서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는 양상을 보입니다. 예를 들어, 선출된 일곱 사람에 대한 묘사(3절, “신망이 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를 근거로 교회를 위해 봉사할 사람들의 마음가짐이나 삶의 태도, 신앙양식을 통제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선택받은 일꾼’은 이 일곱 집사처럼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으로 설교하는 많은 목회자들은 이 본문이 ‘사역의 우선순위’를 규정하고 있다고 받아들입니다. 즉, 구제와 같은 봉사활동도 중요하지만 목회자들이 그것보다 우선시해야 할 일은 바로 기도하는 것과 말씀 섬기는 것이라고 설교합니다. 이 주장은 양날의 검과 같이 사용되는데, 한편으로는 교회 안에서 성서를 해석하고 가르치는 목회자의 역할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해 장로들로부터 자신의 지위를 보호하는 데 사용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목회자만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이 기도와 말씀 섬기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신자들의 신앙을 규율하는 논리로 사용됩니다. 이 논리를 따라 기도와 말씀 섬김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이 선한 봉사활동이라 해도 ‘장애물’에 불과하다고 서슴없이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이 성서 본문은 목회자 중심의 위계질서를 정당화하고 있을까요? 오늘의 본문 바로 뒤에 이어지는 스데반에 대한 묘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해석이 쉽게 내파되고 맙니다. 위의 설명대로라면 스데반은 사도에 의해 임명된 집사 또는 장로입니다. 하지만 그는 평신도지 목회자와 같은 ‘급’이 아닙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해서...기적을 행하였”으며(8절),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므로” 논쟁의 적수가 그를 “당해날 수 없었다”(10절)고 성서는 전합니다. 이런 표현들을 염두에 두고 사도행전을 살펴보면, 사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스데반을 사도와 동급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는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기적을 행하고,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그러니 스데반을 봉사 업무를 전담하는 평신도라고 규정할 근거가 없게 되는 것이지요. 반면, 그를 평신도로 본다면 평신도가 사도처럼 행동하는 것을 막을 근거가 없게 됩니다.

 

그럼 오늘 본문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게 하는 요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섬김(디아코니아)’이라는 단어와 3절에 나오는 ‘이 일’이라는 언어의 불일치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의 ‘섬김’과 3절의 ‘이 일’이 일치될 수 없는 것 때문에, 아니 일치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공동체에 갈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섬기는 일과 ‘이 일’이라고 지칭된 그 일이 당시의 교회 안에서 대등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부연하면, 디아코니아라는 단어는 동사형으로 쓰인 것을 포함해 오늘의 본문 안에서만 세 번이나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세 번의 사용에서 모두 다른 의미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새 번역 성서를 놓고 볼 때, 1절에서는 “구호음식을 나누어 받는 일”, 2절에서는 “음식을 베풀다(식탁에서 봉사하다)”, 그리고 4절에서는 “말씀을 섬기는 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이때 단어의 기본적 의미에 가장 충실한 용법은 2절의 ‘식탁 섬김(봉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구호제도 전통과 기독교 신앙 전통 속에서 이 단어가 갖는 ‘섬김’의 의미가 확장돼 ‘구제활동’이나 (섬김을 본연의 임무로 하는) ‘사역’, ‘직무’의 의미로 쓰이게 된 듯합니다. 그러니 앞에서 발생하는 해석의 껄끄러움은 한 단어, ‘디아코니아’를 일관성 없게 번역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깊습니다. 이 번역 때문에 구제 문제에서 시작해 뜬금없이 사도의 직무 문제로 귀결되는 방식으로 이 본문이 이해돼온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안에서 각기 다르게 번역되고 있는 ‘디아코니아’를 구호제도나 직무라고 보는 해석 전통을 따르지 않고 원래의 의미에 가깝게 통일해서 ‘섬김’으로 바꿔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1장 앞부분. 이 시기에 제자들이 점점 불어났다.

1장 중간 부분. 그런데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이 히브리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에게 불평을 터뜨렸다.

1끝부분. 왜냐하면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의 섬김에서 무시 받았기 때문이다.

 

2장 전반 부분.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을 모두 불러놓고 말하였다.

2장 후반 부분.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두고 식탁들을 섬기는 것은 우리에게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3장. 그러니 형제자매 여러분, 신망이 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여러분 가운데서 뽑으십시오. 그러면 그들에게 이 요구를 맡기고,

 

4장. 그리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섬김을 계속하겠습니다."

 

5장. 모든 사람이 이 말을 좋게 받아들여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데반과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안디옥 출신의 이방 사람으로서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인 니골라를 뽑아서,

 

6장. 사도들 앞에 세웠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7장.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퍼져 나가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의 수가 부쩍 늘어가고, 제사장들 가운데서도 이 믿음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때 눈에 띄는 것은 2장 중간 부분의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두고”라는 표현입니다. 기존의 번역에서는 이 부분을 ‘하느님의 말씀을 섬기는 일’과 ‘식탁을 섬기는 일’이라고 해석해 마치 두 일이 대비되고 있는 것처럼 표현했지만, 다시 보면 그것은 식탁을 섬기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반(反)하는’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즉, 식탁을 섬기는 것은 자신들의 신앙적 신념에 반대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섬기는 일’과 ‘식탁을 섬기는 일’을 원래 모순되는 것으로 보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행 2:42, 46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사도행전의 문맥 속에서 식탁 섬김과 말씀 섬김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두 가지가 함께 이뤄질 때 공동체가 화합과 평화의 상태에 있다고 보는 것이 사도행전 저자의 시각입니다. 그런데 위의 해석을 보면 사도들은 말씀 섬김과 식탁 섬김을 함께 할 수 없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이로부터 이야기를 재구성하면,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 그룹의 과부들이 매일의 식탁 섬김에서 무시 받았고(1절),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들이 이에 대해 사도들에게 식탁 섬김에 함께 할 것을 요구했는데(3절), 사도들은 그 식탁 섬김에 참여하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두’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보고 거절했습니다(2절). 그리고 식탁 섬김의 요구는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 일곱 사람을 뽑아 그들에게 맡김으로써(3절) 자신들은 신앙적 소신을 지키며 기도와 말씀 섬김을 계속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4절). 그렇다면 이때 사도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직무의 충돌이 아니라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들의 식탁 섬김에 참여하는 것이 자신의 신앙적 소신에 위배된다는 점입니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성서의 다른 본문들을 참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깝게는 사도행전 10장의 ‘베드로의 환상’ 에피소드를 들 수 있습니다. 환상 중에 하늘에서 베드로에게 음식이 가득 담긴 바구니가 내려오는데, 베드로가 보니 그것들은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먹을거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속되고 부정한 것”을 먹을 수 없다고 세 번 거절합니다. 이 환상은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예비하는 문학적 장치입니다.

 

또한 우리는 갈라디아서 2장을 참조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11-13에는 바울이 ‘게바(베드로)’를 나무란 일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베드로의 유대인적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하는 부분에서 의도적으로 ‘게바’라는 이름으로 베드로를 부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갈 2:9) 중 한 사람인 게바가 안디옥 교회에 방문했을 때 “야고보에게서 몇몇 사람이 오기 전에는 이방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그들이 오니, 할례 받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떠나 물러난 일”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게바의 이 행위를 “위선”(13절)이라고 질타합니다. 이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은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일상적 실천에서 나타났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오늘의 본문에 등장하는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 과부들에 대한 식탁 섬김을 유대인인 열두 사도가 거절한 것은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동일한 취급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역사적 정황으로 봤을 때,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들’은 종교적 열심에서나 유대인으로서의 자의식에서 ‘히브리 말을 하는 유대인’보다 결코 뒤떨어지는 이들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1절에서 언급된 ‘헬라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은 주로 동로마의 헬라적 도시들의 디아스포라(유대인 이산집단) 출신으로, 종교적 열심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다가 예수 운동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거나, 디아스포라에 소속돼 있을 때부터 이미 예수 운동을 접하고 매력을 느꼈던 이들로 추정됩니다. 그들이 헬라 말을 한다는 점 때문에 헬라문화에 우호적이며 따라서 성전제의와 안식일 규정 등 율법의 준수에서 느슨한 태도를 보이는 ‘혼합주의적’ 경향을 보였을 것으로 오해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디아스포라가 헬라 문화의 충격에 대응하는 방식은 흡수, 타협, 전통 고수 등 다각적이었으며, 그 양상은 동방과 서방의 디아스포라가 각기 달랐습니다. 동로마의 헬라적 도시들에 거주한 유대인들은 절대 다수가 유대적 정체성을 강하게 유지했으며 팔레스틴의 유대인들보다도 더 성전과 율법에 대한 헌신이 뛰어났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귀환한 디아스포라 유대인 그리고 예수 운동에 소속된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들’은 율법과 성전에 대한 태도에서 유대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도에 의해 이방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한 학자에 따르면, 팔레스틴 유대인들에게 ‘헬라인’이라는 호칭은 율법과 전통이 정한 신앙과 관습으로부터 이탈한 사람들을 뜻하는 ‘이방인’과 동의어였으며, 이는 곧 헬라인을 불경스런 자로 보는 경멸적 시선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 학자는 70년 이전까지 ‘헬라파 사람들’이란 표현은 ‘정통’을 자처한 바리새주의를 제외하고 모든 다양한 사상과 관습을 포괄하는 일반적 용어였다고도 말합니다. 단정 짓기는 어려우나, 이로부터 1절에서 언급된 ‘헬라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은 적어도 유대 중심적 가치관에서 배제된 이들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다는 점은 추론할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1절에 등장하는 히브리말을 하는 유대인과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은 애초부터 동등한 주체로 성서에 소개된 것이 아닙니다. 당시의 시대적 맥락에서 보면, 유대 사회의 주류집단과 하위 주체화된 집단이 예수 운동 공동체 안에 미묘한 형태로 공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들이 신앙의 이름으로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가정은 너무 순진한 시각일 것입니다. 설령 사도들이 식탁 섬김 참여 요청을 거절하기 전까지는 이 두 집단 간의 갈등이 가시화되지 않았을지라도, 사실 그 공동체 안에서는 (신앙 공동체 밖과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존재를 평가 절하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삶의 방식이 일종의 상식처럼 작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 ‘위험한 상식’을 사도들이 견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동안 평화롭던 교회가 분배 문제로 위기를 맞고, 그 위기를 집사 선출로 타개하는 것으로 이해됐던 오늘의 본문은 새롭게 읽어야 합니다.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 집단에서 일곱 지도자를 선출(혹은 이미 존재하던 지도자를 승인)하는 것은 교회의 화합과 일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심지어 사도들마저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던 ‘위험한 상식’이 신앙 공동체를 그 근본부터 뒤흔들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일곱 지도자의 선출은 교회가 그 위험한 상식으로 인해 결국 분열돼나가는 상황을 그리는 것이고, 어느 시대 어떤 공동체에서나 발생할 수 있는 ‘위험한 상식’이 진실인 것처럼 둔갑하는 것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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