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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민족주의 연구 - 이만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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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 연구

 

이만열(숙명여자대학교 교수)

 

 

1. 머리말 - 민족?민족주의?민족주의운동

 

민족주의는 자유주의?민주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와 함께 20세기를 움직인 중요한 사조의 하나였다. 그것은 19세기말부터 20세기말까지 끊임없이 지속되어 오면서 근대사회로 발돋움하던 한국과 제3세계에 가장 광범하고 깊은 영향을 미쳤다. 한국의 민족주의 사상은 한말에는 반봉건 반외세운동을 추동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국권회복 운동과 근대국가 건설을 이끌었으며, 해방 직후에는 자주독립국가 건설과 좌우이념의 조화와 협력 및 민족통일운동의 핵심적인 사상이었다. 특히 유신 군부 정권하에서는 인권?민주화 운동과 민중운동?통일운동의 에너지로서 그리고 90년대에 들어서서는 WTO체제와 설익은 세계화정책에 대한 대응이념으로서 지속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민족주의는 19세기말부터 한국의 사회사상계를 이끈 가장 중요한 사상의 하나임을 부정할 수 없다.

 

민족주의의 영어(서구)적 표현은 내셔널리즘(nationalism)이다. 우선 이 말이 우리 용어로 '민족주의'라고 번역할 때 타당성이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이 없지 않다. 차기벽의 다음 지적은 이 의문의 한 근거가 될 수 있다.

 

"내셔널리즘이란 감정은 두 면을 가지고 있다. 대내적으로 그것은 네이션 안의 모든 동료성원과의 생생한 공감을 자아낸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그것은 네이션의 범위 밖에 있는 동료인간들에 대한 무관심이나 불신, 증오로 표현된다. 그리하여 내셔널리즘이 대외적으로 나타날 때에는 우리말로 민족주의가 되고, 대내적으로 나타날 때에는 국민주의가 된다. 민족주의가 대외적으로 자?타를 엄격히 구별하는 측면을 강하게 표시한다면, 국민주의는 대내적으로 성원간의 통합을 강하게 표현한다. 그리고 시민적 기반이 약한 나라에서 내셔널리즘이 국가의 권능에 너무 기댈 때 국가주의로 된다."(차기벽, 『민족주의원론』, 한길사, 1990, 66쪽)

 

이 지적은 서구에서 이해하고 있는 내셔널리즘을 '민족주의'라는 용어로 단순화시켜 사용하는 데 대한 일종의 경고이며, 그 한계를 의미한다. 지금까지 다양하게 전개된 한국민족주의 연구가 "기본적으로 거의 모두가 서구학계에서 발전시켜 온 기존의 일반론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한국적 현실에 대한 개인적 인식 경험과 연계시켜" 왔고, 또 "민족주의에 대한 서구학자들의 개념과 분석조망에 기초하여 이들의 논리와 유형에다 한국 현실에 대한 인식결과를 꿰어 맞추고 있다"(김동성, 『한국민족주의 연구』,오름, 1995, 74쪽)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글도 '민족주의'에 대한 한국적인 개념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민족주의는 한스 콘이나 E.H.카아, A.헤이즈, T.몸젠 및 최근의 A.D.스미스나 B.앤더슨 등 구미의 여러 학자들과 국내의 여러 학자들이 논의해 왔다. 이들에 의해 민족주의는 "민족국가라는 구체적 집단을 일차적인 준거집단으로 신봉하고 그 집단적 이익을 위하여 내집단의 연대성을 확보 내지 강화할 수 있는 정신적 지주"(고영복), 혹은 "국가의 생존권을 형성, 유지해야 하는 일차적 목표를 위하여 대외 자주성과 대내 평등성을 제고시키는 원리"(김용욱)로 이해되거나, "민족의 통일 독립 및 발전을 지향 추진하는 이데올로기와 운동의 총칭"(차기벽)이라는 뜻으로 파악되었다. 따라서 민족주의는 민족이 단일 주권국가를 이루어 대외적으로는 자주독립성을 유지하고 대내적으로는 공동체 내의 평등과 정의실현을 목표로 하여 사회적 통합과 발전을 기해보려는 이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민족주의는 자기 완결적 논리구조를 갖추지 못하기 때문에 다양한 사회 이데올로기들과 결합되면서 천의 얼굴을 갖게 되었다고 지적된다.(임지현,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소나무, 1999, 24~25쪽)

 

내셔널리즘은 역사에서, 통합의 힘, 현상유지의 힘, 독립의 힘, 동포애의 힘, 식민지 팽창의 힘, 침략의 힘, 경제적 팽창의 힘, 반식민주의의 힘을 나타내었다.(차기벽, 위의 책, 72-73쪽). 한국민족주의를 구성시켜 온 필수요소는 한민족 혹은 우리 국민의, 민족정체성(正體性)에 대한 긍정적 인식과 민족자존의식, 반제?반봉건의 민중주의 출현과 전개, 국민주권의식의 형성과 그것의 정치운동화, 민족적 독립의지와 운동력, 국민적 근대화의지와 그 지향성(指向性) 등이었다.(김동성, 위의 책, 81쪽)

 

민족주의 논의에서 '민족'은 알맹이다. 민족은 혈통을 같이하는 공동체지만, 종족과는 다르다. 민족은 혈통과 외형적인 체질과 내면적인 심적 경향, 언어와 사고의 체계, 문화와 전통, 동일한 삶의 근거 등에서 다른 집단과 구분되는 공동체를 이른다. 따라서 민족은 혈연과 언어, 전통과 문화 역사와 지연을 공유하는 공동체다. 그러나 유대 민족 같이 지연공동체적 양상을 벗어나는 경우도 있었다.

 

종래 민족주의는 서구 학계의 이해를 근거로 해서 연구되어 왔기 때문에 그 생성과정에 대한 설명도 그들의 연구에 의존해 왔다. 민족주의는 서구에서 근대사회의 생성 과정에서 산출된 것으로 간주되는 만큼, 민족이라는 말도 근대사회와 관련시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이란 단순히 체질?언어?문화?전통 등이 다른 집단과 구분되는 어떤 공동체로서의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공동체 내부의 신분적인 차별이 극복되고 구성원 간의 평등성이 보장될 때 그것을 근대적인 의미의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족 개념이 이렇게 이해되어야 한다면, 종래 한국 근대사에서 민족주의와 관련되었다고 알려진 여러 사건들이 정확하게 설명된 것인지는 단언하기 힘들다. 민족주의라는 단어 앞에 '전근대적'이니 '고전적'이니 혹은 '근대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이유가 아마 여기에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근대적' 혹은 '고전적' 민족주의는 대외저항성은 강하지만 공동체 내부에 신분적 차별 등 봉건적 요소가 강고하게 유지되고 있는 경우를 말한다. 거기에 비해 '근대적' 민족주의는 대외적인 주체성과 함께 공동체 내부의 신분평등 등 근대성이 담보되는 경우를 말한다. 민족주의를 이같은 관점에서 말한다면, 20세기의 한국민족주의를 이해함에도 전근대적인 요소와 근대적인 요소가 정확하게 구분되지 않았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서구적인 개념에 의한 구분이지, 한국 학계가 이를 그대로 동의하는가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다.

 

민족주의는 그 이념 자체만이 논의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민족주의는 다른 이데올로기들과 결합, 천의 얼굴을 갖는다. 민족주의가 외형적으로 동태화될 때 이를 민족주의운동이라 하는데, 따라서 민족주의는 그 속에 이념과 운동을 동시에 포용하고 있다(진덕규)는 것이다, 따라서 격렬한 운동성을 지니는 민족주의는 이데올로기인 동시에 사회변동을 주도하는 정치?사회 운동인데(P.알터), "그러므로 민족주의를 포괄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상사적 관점뿐만 아니라 운동사적 관점이 아울러 요구된다"는 것이다(임지현, 위의 책, 24쪽). 여기서 민족주의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방법은 그것이 외부로 표출될 때, 동태화되는 운동과 함께 고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글이 한국의 민족주의를 민족주의운동과 함께 이해하려고 시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종래 한국의 민족주의 연구는, 외세에 대한 저항 즉 반제(反帝)?반침략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근대화의 추진이나 사회통합 내지 사회구조 재편성과 같은 대내적인 자기 발전 과제가 소홀히 취급되어 연구의 한계를 드러내었다고 지적되었다. 이는 민족주의의 다른 한 측면인 반봉건?근대화 운동을 소홀히했음을 의미하는데, 이 점은 1960년대 이래 민족주의 연구가 새롭게 시도되면서 점차 극복되어졌다. 또 해방 후 분단?냉전 체제가 굳어짐에 따라 일정한 기간동안 한국 민족주의의 기본과제였던 분단극복(통일)의 문제가 다뤄지지 못했는데, 이 점도 1980년대를 경과하면서 점차 극복되어 최근에는 통일문제가 민족주의의 최대의 과제로 되었다.(송건호?강만길 편, 『한국민족주의론』, 창작과 비평사, 1982, 4-5쪽)

 

한국 민족주의운동은 대체로 한말(1876-1910), 일제시대(1910-45), 해방 후의 시기로 나누어 설명되어 왔다. 이 글에서도 한국민족주의를 민족주의운동과 함께 세단계로 나누고 민족주의가 동태화되는 과정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2. 한말 반외세?반봉건 의식과 '민족주의적' 운동

 

신채호의 글로 전해지는 「제국주의와 민족주의」(대한매일신보,1909.5.28)에는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방법으로 민족주의가 발휘되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민족주의는 바로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는 사상이라고 하였다. 이 글은 민족주의가 발전하면 어떠한 극렬, 괴악한 제국주의라도 감히 침입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과, 한국동포는 민족주의를 대분발하여 "우리 민족의 나라는 우리 민족이 주장한다"는 한마디를 호신부로 삼아 민족을 보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위에 언급한 글은 한말 언론계에서 민족주의가 거론된 한 예로서, 이것은 민족주의가 한말 지식인에게 이미 소개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무렵에 양계초(梁啓超)의 여러 저술들이 소개되고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한말의 지식인들은 서양의 여러 학설을 이해하였을 것이다. 제국주의니 민족주의니 하는 용어는 당시 개화자강에 힘쓰던 지식인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한 여러 방략들을 강구하면서 논의했던 화두로서 등장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민족주의가 사회사상으로 이해되기 전에 한말 '민족주의적' 운동은 동태적으로 이미 전개되고 있었다. 그것이 근대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느냐에 대한 논란은 있으나 학계에서는 이미 몇 갈래의 '민족주의적'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고 주목하였다. 이른 바 '척사위정(斥邪衛正)운동', '민중운동' 및 '개화운동'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조선 말기 서세동점에 위기를 느낀 조선인들의 여러 형태의 '민족주의적' 반응이었다.

 

척사위정운동은 조선 후기 중국중심 세계관인 화이관(華夷觀)에 입각하여 조선이 곧 소중화(小中華)라는 자의식을 동태화시킨 일종의 배외(排外)운동이었다. 그들은 중화권에 속한 소중화(조선)를 지키기 위해서는 서학 혹은 천주교라는 '사학(邪學)'을 배척하고 '오도(吾道)' 혹은 '사문(斯文)'으로 불리는 '정학'(正學: 성리학)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여 성립된 조선조의 주체성을 지키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들에게는 서구의 문화를 배척하며 조선의 성리학적인 전통을 지키는 것이 곧 조선=소중화=중화를 지키는 것이었다.

 

척사위정론은 한말 이항로, 기정진, 김평묵을 거쳐 최익현으로 이어졌고, 1876년의 개항을 반대하는 운동에서 시작하여 '영남만인소'운동, 임오군란 등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주공정주(周孔程朱)로 계승되는 유교의 학맥을 정통으로 삼고 서양의 '근대적'인 윤리와 제도에 대해서는 '짐승의 것'으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며, 봉건사회를 강고하게 온존시키려고 했다. 이 운동이 대외적으로 주체성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들이 온존시키려고 한 사회가 개혁을 통해 이루어질 근대사회는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척사위정론과 그 운동은 근대민족주의와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으로 간주했다.(강만길 조동걸) 그러나 척사위정사상은 뒷날 의병운동으로 계승되었고, 복벽(復抗)주의적인 것이긴 하지만 일제 강점하에서는 국권회복운동에 나서고 있음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민중사상 혹은 민중운동은 19세기 초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농민운동을 통해 집적된 힘이 1860년대에 최제우가 창도한 동학과 연계됨으로 사회사상 및 사회운동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1840~60년대에 중국이 서양 제국으로부터 침략을 당하게 되자 불안을 느낀 민중들은 세계사적 혁명을 예고하는 천지개벽사상과 동학의 인내천(人乃天)사상을 수용하게 되었는데, 인내천 사상은 사람이 곧 하늘님이라고 가르치는, 일종의 평등사상을 함의하고 있었다. 이 민중사상이 사회적 실천운동으로 나타난 것이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이 민족주의 성격이 짙다는 점을 장을병은 이렇게 지적한다.

 

"뭐니뭐니해도 한국의 민족주의가 온전한 모습을 갖추고 꽃피었던 것은 1894년 동학운동을 통해서였다. 바로 동학운동은 한국의 민중[농민]이 주체가 되어 일으킨 민족주의 운동이었다. 그런가 하면 동학운동은 민중에 의한 반(反)제국주의적[반외세적]이고 반봉건적[민주적]인 정치운동이었다. 동학운동의 반제국주의적이고 반외세적인 성격은 '척왜(斥倭)?척양(斥洋)'에서 드러났고, 동학운동의 반봉건적이고 민주적인 성격은 '폐정개혁 12개조'를 시정에 반영시켰던 사실에서 나타났다. 동학운동이 조선 왕조의 왕권을 부인하고 국민주권을 지향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그것은 분명 제국주의 침략 세력 앞에서 국가적 독립을 지키려 했고, 그들의 정치적 요구를 시정에 반영시키려 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장을병, 『인물로 본 한국민족주의』, 범우사, 1988, 26쪽)

 

위의 글은 동학운동에서 한국 민족주의가 꽃피었다고 보고 그 이유를 동학운동이 갖는 반제(반외세)와 반봉건에서 찾았다. 동학농민운동에 나타난 '민족주의사상'은 척양척왜를 강하게 부르짖고 있는 데서 대외저항적인 성격이 보이고, 신분적인 평등을 요구하는 등 근대적 개혁을 제시한 '폐정개혁 12개조'에서는 이 운동의 근대적 성격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학농민운동을 그 전의 '민란'과 함께 '민중적 민족주의'로 범주화하려는 견해도 있는데, 이 견해에 따르면 '민중적 민족주의'는 그 뒤 광무농민운동을 주도하고 1904년부터는 중기의병으로 전환하는 등 의병운동을 크게 부각시켰다는 것이다.(조동걸, 『한국민족주의의 성립과 독립운동사연구』, 지식산업사, 1989, 11쪽) 그러나 동학운동의 이념 속에 과연 근대사회를 이룩하려는 구체적 경륜이 있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뿐만 아니라 동학농민운동이 왕조에 대한 충성과 구체제로의 복귀를 주장한 측면이 강하다는 지적(류영익)도 대두되고 있어서, 당분간은 학계의 논란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한말 민족주의적 조류로서 개화사상 혹은 개화운동이 거론된다. 이것은 서세동점으로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을 때에 서구화 내지는 근대화를 실현하여 위기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려는 일련의 사상?운동이다. 그 연원을 서구에서 수용된 근대적인 사조에 두기도 하지만, 조선 후기 실학사상에 직?간접으로 연계된다는 주장도 있다. 개화운동은 개항(1876)을 강행하고 이어서 일본과 중국을 통해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수용, 적극적으로 개화정책을 펴 나감으로 운동력을 얻게 되었다. 초기에 활동한 급진개화파는 1884년 '갑신정변'을 통해, 1890년대에 활동한 온건개화파는 1894년의 '갑오개혁'과 뒤이은 일련의 개혁(을미개혁과 광무개혁 등)을 통해 근대사회를 이룩하려고 몸부림쳤다. 갑신정변에서 나타난 급진개화파의 주장이 "자주적 근대국가의 수립을 지향하면서도 반침략보다는 반봉건에, 민권보다는 국권에, 국민보다는 정부에 중심이 되는 사상체계"였고, 갑오개혁을 추진한 온건개화파의 주장도 "민권보다는 국권에, 국민보다는 정부에 치중되어 있는 사상체계"로서, 뒷날 신채호의 의해 반봉건을 주축으로 하던 민족주의가 반제를 주축으로 하는 민족주의로 전환된 것과는 달리, "식민화에 무력한 근대주의적 이념으로 전화"되었다는 것이다(도진순, 「근대 민족주의의 형성과 분화」『한국고대사논총 1』, 한국고대사연구소, 1991, 219~220쪽). 따라서 이들 일련의 개혁은 외세를 등에 업은 것으로 자주성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또 위로부터의 개혁이기 때문에 민중의 호응을 받지 못한, 사회 통합과 발전을 기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고 지적된다.

 

이렇게 정부적인 차원의 개화운동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힘들게 될 즈음, 개화운동의 분류(分流)로서 민간에 의한 독립협회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는 정부적인 차원의 개혁운동이 한계에 달했을 때 백성을 깨우치고 민권의 신장을 기함으로 '민족주의적'인 목표를 달성하려는 일련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개화운동은 근대적인 성격과 경륜을 분명히 갖고 있었지만, 민권론이 국권론을 극복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한계를 노출하였고, 따라서 이 시기 민족주의의 중요한 목표였어야 할 근대국가 형성에 실패하였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독립협회의 경우, 천부인권설과 만민평등을 이해했고 이제껏 조선의 자주권을 제약해 온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고 국민참정권을 시험하기 위해 의회개설론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독립협회운동이 '국민혁명의 가능성을 부인'했다고 강만길은 이렇게 지적한다.

 

"전제군주체제 아래서 국민주권주의를 달성하는 첩경이 국민혁명에 있었지만 이 운동은 당시 일부의 진보주의자들 사이에 나타났던 공화주의론 내지 국민혁명론을 오히려 진정시키는 논설을 폈다. 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독립을 위해서는 군주권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결과가 칭제건원(稱帝乾元)을 건의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의회개설론은 상원에 한정했고 그것도 관선의원과 독립협회회원 의원으로만 구성하자는 주장이었다."(강만길, 「한국 近代民族主義의 전개과정」『韓國 民族運動史論』, 1985, 16쪽)

 

그는 이어서 독립협회가 문호개방 이후 어느 정치운동보다도 국민참정권을 선명히 요구한 것은 사실이지만 군주주권(왕권)을 부정하지 못했고 철저하게 국민주권을 성취하는 데에도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고 지적하면서, 의의가 있다면 갑신정변에서 미처 선명하게 드러내지 못한 군민동치론(君民同治論)을 한층 더 분명하게 드러낸 정도라고 주장하였다. 그 뒤 대한자강회와 서북학회에서 국민주권주의를 완곡하게 표현한 적이 있고, 해외의 『신한민보』에서 '국민혁명을 전망하는 논설'을 실은 적이 있지만, 한말 국민주권주의는 실현되지 않았다. 한말 민족주의의 출발을 국민주권주의의 성립이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아직 민족주의가 본궤도에 오르기 전인 배태기 내지 맹아기로밖에는 볼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강만길, 앞의 책, 17~18빢 참조). 그러나 한말의 '민족주의적 요소'를 '국민주권'이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는 것은 역시 논란의 여지를 남긴다고 본다.

 

한말 이런 '민족주의적' 사상과 운동이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권은 강탈당하고 말았다. 그 이유를 근대국가의 성립여부에서 찾는다면 주권재민의 국민주권론이 실현되지 못했다는 것을 들 수 있겠지만, 척사위정?민중?개화 사상 상호간의 갈등도 그 못지 않게 중요한 요인이었다. 즉 척사위정계와 민중계가 의병활동에서 만나고 개화계와 민중계가 독립협회운동과 애국계몽운동에서 만나는 것 외에는 거의 갈등 관계를 벗어나지 못해 적전분열로 일제의 침략에 대응할 수 있는 전열을 가다듬지 못했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서도 온존하던 세 조류는 3.1운동에서 통합된 역량을 발휘하게 된다.

 

3. 일제하 국권회복?민주공화정?민족문화수호의 이념

 

일제 강점으로 한 민족은 심각한 자기정체성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침략자는 한 민족의 생존의 근거를 박탈했을 뿐만 아니라 언어와 문화, 역사 등을 말살하려 하였다. 식민지로 전락된 한민족은 무엇보다 생존을 위해 피나는 투쟁을 벌여야 했고, 민족 문화와 그 정신을 수호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한국민족주의의 선명성이 드러나는 시기였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후 민족주의는 다음 몇가지 측면에서 역동화되었다. 첫째, 반외세?반침략의 맥락에서는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으로 나타났다. 둘째, 반봉건?근대사회 건설의 차원에서는 민주공화정 이념을 정착시키는 한편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수용하는 단계에까지 나아갔다. 후자는 국권회복운동 선상에서 좌우파 세력이 통일전선을 형성하려는 노력 위에서 가능했다. 셋째,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저항하면서 민족문화를 수호하려는 운동이 어문?국사 등 국학과 종교적 측면에서 일어났다.

 

이같이 일제 강점기의 민족주의는 대외적으로는 국권회복을 위한 자주독립운동으로, 대내적으로는 국권회복과 함께 마련할 근대국가를 위한 사회개혁운동으로 그리고 민족사와 민족문화를 수호하기 위한 문화운동으로 각각 전개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민족주의는 우선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으로 나타났다. 1919년의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운동을 비롯하여 만주 및 연해주의 무장투쟁, 의열투쟁, 실력양성운동 그리고 외교론이 그런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일일이 설명할 필요을 느끼지 않지만, 3.1운동의 민족주의(운동) 사상의 위치에 대해서는 주목해서 좋을 것이다. 3.1운동은 한국 민족주의가 재편성되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3.1운동은 국권회복운동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린 민족주의 운동이었다. 3.1운동이 계획 단계에서는 온건노선이 모색되었다. 그러나 3.1운동의 대중화 단계에서 이 운동의 지향이 처음의 계획과는 달리 폭력적이고 항쟁적인, 바로 민중적인 것으로 전환되었다. 3.1운동은 종래의 척사위정계와 개화계 그리고 민중계의 흐름들과 독립운동의 방식도 통합하여 민족주의의 거대한 호수를 만들고 거기에서 독립운동의 물줄기를 새롭게 뻗어나가게 하였다. 3.1운동 후에 임시정부운동과 무력독립전쟁, 국내의 실력양성운동 등이 독립운동의 한 형태로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이렇게 국권회복운동을 본격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3.1운동은 우선 한국민족주의의 한 분수령을 이루었다.

 

3.1운동은 한국 민족주의 운동사에서 주권재민의 근대국가 이념을 정립하였다. 한말 척사위정사상은 반외세주의를 견지하면서 의병운동을 전개하였고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서도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활동을 계속하였으나 대부분 복벽(復抗)주의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3.1운동에서는 복벽주의가 극복되고 대신 공화주의가 확립되었다. 이는 3.1운동을 통해 설립하고자 하는 나라가, 복벽주의에서처럼 대한제국을 회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공화주의를 통해 백성이 주인이 되는 민주국가를 세운다는 것을 뜻했다. 이런 의미에서 3.1운동은 주권재민의 민족주의 이념을 실현하는 한 계기가 되었다. 3.1운동 후에 설립된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정을 채택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3.1운동에서 확고하게 자리잡은 주권재민의 근대국가 이념은 그 후 한국 민족주의 이념의 중심축으로 기능하면서 독립운동을 강화시키고 사회적 문제 해결에 적극적인 자세를 갖게 되었다. 3.1운동 후 1919년 4월에 성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헌장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1조)이라고 국체를 명시한 외에 "대한민국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임"(3조), 또 "대한민국 인민은 신교(信敎)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신서(信書) 주소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4조)을 명시하였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2, 임정편II』, 1971, 1쪽) 이로써 한국 역사상 최초의 주권재민의 민주국가가, 비록 해외에서 임시정부로 출발하여 통치권 행사에 완전성을 기할 수는 없었지만, 인민의 평등과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공화정으로 출발했던 것이다. 따라서 민족주의를 국민주권주의의 관점에서만 이해한다면 한국의 민족주의는 이 때에 비로소 성립되었다는 견해가 가능하다. 1920년대 이후에 복벽주의자들이 독립운동에서 점차 도태되고 공화주의자들의 항일운동만이 지속되었던 것은 이들 공화주의자들의 국민주권주의만이 진정한 민족주의였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강만길, 앞의 글, 20~21쪽)

 

국민주권주의에 의한 민주공화제의 성립은 한말 개화사상의 맥락과 3.1운동을 통해 통합적 역량을 갖게 된 한국 민족주의의 일대 진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말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에서 군민동치(君民同治) 내지는 입헌군주국을 구상하였지만, 을미?광무 개혁의 단계에서는 황제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보수반동적인 견해가 개진된 바 있어서 근대국가 성립에 대한 기대가 쉽지 않았다. 20세기 초 애국계몽단계의 애국단체들(대한자강회, 서북학회 등)은 국내의 정치적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지만 "국민주권주의를 완곡히 표현"하였으며 해외의 『신한민보』에서는 국민혁명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한국은 국민이 목숨 걸고 지켜야 할 '내 나라' 즉 인민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고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그런 국가를 이룩하지 못한 채, 아니 못했기 때문에 결국 일제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말 그렇게 몸부림쳤지만 불가능했던 국민주권국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창건을 통해 이룩했는데, 이는 3.1운동에서 민중적인 요구를 수용함으로 민족적 역량을 극대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국의 민족주의는 반침략주의와 반봉건주의, 국가의 자주독립과 인민의 자유평등을 결합하는 단계로까지 진전시킬 수 있게 되었다.

 

독립운동 노선에는 외교독립론과 무장독립론의 두 큰 흐름이 있었다. 상해 임정에는 초기에 만주 연해주의 세력도 참여함으로 두 노선이 통합을 이루는 듯하였다. 그러나 1923년 국민대표회의의 결렬을 계기로 무장독립세력이 만주 연해주를 중심으로 분리되었고, 상해 임정은 독립운동의 중앙으로서의 역할을 점차 상실하게 되었다. 거기에다 1925년 조선 공산당이 조직되면서 사회주의 세력이 독립운동의 한 축을 이루게 되었고,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의열단운동도 맹렬하게 전개되어 독립운동 노선에는 좌우익의 분열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좌우익의 분열을 극복하려는 움직임으로 민족유일당 운동이 국내외에서 전개되었는데, 1926년에는 중국 관내(關內)와 만주 지역에서, 1927년에는 국내에서 신간회가 해외의 영향을 받아 좌우합작의 형태로 시작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서는 다시 중국 관내에서 좌우파가 각각 합작운동을 시도하였는데, 그 결과 1940년대에는 좌익진영이 임정에 참여함으로 임정중심의 통일전선이 형성되었고,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참여함으로 군사통일도 기하게 되어 당(黨), 군(軍), 정(政)의 순서로 임정에 의한 통일전선체제가 이루어졌다. 이런 과정에서 임정은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토록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상의 위상도 현저하게 향상시켰다.

 

임시정부는 1941년 11월 23일에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제정, 공포하였다. 이것은 한국독립당 및 임정의 정치이념인 삼균주의(三均主義)를 구체화시킨 것으로 당시 임정에 참여하고 있는 각 정파의 이념을 통합하여 제정한 것이다. 임정은 1919년 정부건립 때 임시헌장에서 민주공화제를 선포하고 인민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한 이래 수차의 헌법 개정을 통해 근대국가 이상을 전진시켜 가다가, 이 때 건국강령에서 사회주의 경제정책을 채택하게 되었다. 내용은 "대생산기관의 공구(工具)와 수단을 국유로 하고 토지 광산 어업 농림 수리 소택(沼澤)과 수상 육상 공중의 운수사업과 은행 전신 교통 등과 대규모의 농 공 상 기업과 성시(城市)공업구역의 공용적 주요 방산(房産)은 국유로 하고 소규모 혹 중소기업은 사영(私營)으로 함"(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2, 임정편II』 33쪽)이었다.

 

민주공화정을 명시, 국민주권주의 이념을 채택했던 임시정부는 건국강령과 개정된 헌법을 통해 삼균주의에 근거한 사회주의 경제정책도 채택하는 대담성을 보였다. 건국강령에 나타난 국가적 이상은 정치적 민주주랗와 경제적 사회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임정체제 내에 민혁당 등 좌파를 수용함으로써 민족주의운동의 폭을 넓혀갔기 때문에 가능했다. 임정의 임시약헌과 건국강령 그리고 그 뒤 개정된 헌법 등은 당시 민족주의 이념이 사회주의의 이상을 수용하여 사회민주주의 수준에 이르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국내에서도 1920년대 사회주의가 수용됨으로 민족운동은 농민운동 노동운동을 통해서도 전개되었다. 해외의 민족유일당 운동은 국내에 영향을 미쳐 1927년 좌우협동전선으로 신간회를 조직토록 했는데, 이는 비타협적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가 민족모순을 타개하기 위해 이룩한 것이다. 이념상의 기복은 있지만, 3.1운동 때에 나타났던 통합적인 민족주의운동이 이제 신간회로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신간회가 1931년 코민테른의 '12월 테제'를 계기로 와해되었다는 것은 당시 국내 민족주의 운동이 일제와 코민테른에 의해 이중적으로 시련을 겪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신간회운동이 와해된 후, 만주사변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의 도발로 전시체제가 강화되면서 국내 민족운동은 상당한 타격을 받아, 좌익계는 당재건조차 어렵게 되었고, 우익계 역시 문화운동을 제외하고는 활동이 거의 정지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활동은 지하로 잠적하고 말았다. 이러한 잠적기에 뒤에서 언급할, 좌?우 이념의 조화를 추구하려는 신민족주의가 배태되고 있었다.

 

일제 강점하에서 전개된 국내민족주의운동으로는 문화운동을 거론할 수 있다. 일제는 강점 초기부터 어문?역사?종교 등의 분야에서 통제를 가하다가 중일전쟁을 계기로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전시체제를 강화하였다. 조선의 혼과 전통을 제거해버리려는 민족말살정책이 강행되었다. 이같은 민족말살정책에 저항하여 조선의 어문과 역사, 문화를 수호하려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어문?국사 등 국학 분야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측면에서 전개된 신사참배반대투쟁도 항일민족운동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 같은 민족주의를 어문민족주의 역사민족주의 종교민족주의로 부르기도 한다.

 

어문의 연구는 국학운동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서 '국어'?'국문'이란 용어는 사라지고 '조선어'?'조선문'이라 불려졌다. 조선어학회는 '한글맞춤법통일안'(1933)과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 및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1941) 등을 공표하고, 1942년부터는 '조선어사전' 편찬에 착수, 맞춤법 통일, 표준어 사정, 외국어 표기 문제 등을 함께 다루었으나 일제는 이 해에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 이를 중단시켰다.

 

한말 이래 전개되어 온 국사학의 연구도 민족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민족주의 사학은 이때 '사대주의적' 역사학과 일제 관학자들의 '식민주의사학'과 대결하였다. 특히 일제의 어용학자들은 한말부터 정체성론(停滯性論)과 타율성론( 他律性論) 및 일선동조동근론(日鮮同祖同根論)을 내세워 그들의 침략행위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려 하였다. 신채호, 박은식, 정인보, 안재홍, 문일평 등 많은 역사연구자들은 국내외에서 연구활동을 통해 방법론을 근대화하는 한편, 민족의 자주성을 연구?선양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일제하의 역사학에는 유물사관의 관점에서 한국사의 세계사적 보편성을 추구하려는 일련의 학자들도 있었다.

 

1930년대 국학연구와 관련, 주목되는 것은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서거 100주년을 맞아 전개된 국학운동이다. "다산 선생 서세 100주년 기념이 있었던 1934년대에는 민족의식을 살리고 이족부화(異族附和)를 막으려고 민족 전체가 귀일할 수 있는 구심점을 찾으려"고 충무공 추모사업을 일으키기도 하고 다산선생을 배우고 따르게 하는 운동도 전개하였다는 것이다(백낙준, 「實學의 現代的 理解」 『백낙준전집 6』,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5, 17쪽). 1930년대를 전후하여 '다른 민족운동과 함께 백화난만(百花爛漫)'하게 일어난 민족문화운동은 3 1운동 이후의 일제의 소위 '문화통치'가 더욱 악랄하게 민족문화를 탄압하는 상황에서 전개되었던 것으로, 특히 다산연구와 관련해서는 정인보?안재홍 교열의 『여유당전서』를 간행하는 한편, 조선 후기의 학문적 성격을 규명하여 비로소 '다산학' 혹은 '실학'이라는 용어를 본격화시켰다. 특히 정인보가 다산을 두고 '조선이 가졌던 최대 학자'이며 '개혁적 정치가로서 그 택국리민(澤國利民)으로 신아방국(新我邦國)하는 대경륜"을 가졌다고 평가한 것은 식민지하의 시대적 상황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컸다.

 

4. 해방 후 '완전자주독립'?신민족주의 및 민족통일의 이념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요'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 나라의 독립이요'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 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요' 하고 대답할 것이다."

 

위의 글은 27년 간이나 임시정부에 봉사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해 애쓰다가 환국한 백범 김구가 해방 공간에서 표명한 「나의 소원」의 일절이다. 백범과 같이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민족주의자들의 소원과 과제는 바로 나라의 '완전자주독립'이었다. 이것은 비단 백범 같은 독립운동가들의 소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하에서 부일(附日) 민족반역을 일삼았거나 국제공산주의를 선도했던 일부 계층을 제외한 온 민족의 염원이요 당면목표이기도 했다. 해방공간에서 한때 400여 개나 되는 정당 사회단체가 난립하여 독립국가 건설에 참여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염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에서 미?소 군정이 들어서고,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강대국에 의한 신탁통치가 결정되었을 때, 일제가 물러나면 3.1운동과 임시정부가 표방했고 건국강령에서 명시된 사회민주국가를 건설할 수 있으리라고 다짐했던 기대는 점차 사라지고 나라의 독립조차 가눌 수 없음을 느끼게 되었다. 백범을 비롯한 완전자주독립에 평생을 걸었던 민족주의자들이 신탁통치반대 전국민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은 당연하였다. 그들이 반탁(反託)운동을 '제2의 독립운동'이라 하고 민족운동의 전열을 가다듬은 것은, 해방공간에서 임정이 소외되었다는 현실적인 이유 외에, 즉각 독립을 이루려는 의지가 벽에 부딪친 것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백범을 비롯한 임정계의 반탁의지는 모스크바삼상회의 결과로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이 아니다. 1943년 11월 카이로선언에 '당연한 순서'(in due course)라는 구절이 삽입되었음을 발견하였을 때 이미 표명된 것이었다. 김구는 장개석을 통해 카이로회담에서 미?영 거두를 설득, 한국의 독립을 약속받았으나 선언에 그 같은 구절이 삽입된 데 대하여 '격분'하면서 중국에 있는 1천여 한인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 적이 있다.

 

"만일 연합국이 제2 전쟁 끝에 한국의 무조건 자유독립을 부여하기를 실패할 때에는 우리는 어떤 침략자나 또는 침략하는 단체가 그 누구임을 물론하고 우리의 역사적 전쟁을 계속할 것을 결심하였다. 우리는 우리 나라를 스스로 통치하며 우리 조국을 지배할 지력과 능력을 동등으로 가졌으며 우리는 다른 족속이 우리를 다스리며 혹은 노예로 삼는 것을 원치 아니하며 또 우리는 어떤 종류의 국제지배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당연한 순서'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던지 그 표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반드시 일본이 붕괴되는 그 때에 독립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변할 수 없는 목적이다 하였다."(국사편찬위원회, 「주석 김구의 카이로선언에 대한 성명」『한국독립운동사 자료3 임정편III』, 1973, 239쪽)

 

반탁운동은 김구와 임정계가 추구해온 완전자주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임정은 1920년대 초에 위임통치론 문제로 한때 위기에 처했으나 30년대에 들어서서는 노선상의 갈등을 정리하고 '무조건적 자유독립'론을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신탁통치의 문제는 남한에서는 찬탁론자들을, 북한에서는 반탁론자들을 도태시키고 남북 분열을 심화시켰다는 비판도 있으나, 해방공간에서 '완전자주독립'의 민족주의 이념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이념은 '완전자주독립'을 위해 '남북협상론'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해방공간에서 나타난 중요한 민족주의론은 '신민족주의'였다. 신민족주의는 일제강점기 민족운동 선상에서 갈등을 빚어왔고 해방공간에서도 타협점을 찾기 어려웠던 좌?우 이념의 지양과 조화를 목표로 하여 다듬은 이론으로, "해방 이후에 보기 드문 자생적 정치이데올로기로서 민족사의 날(經)과 씨(緯)를 엮을 수 있는 민족주의"(정윤재, 「민세 안재홍의 신민족주의론 연구」『한국현대사회사상』, 신용하 편, 지식산업사, 1984, 354족)였지만, 미?소 냉전과 분단구조하에서 빛을 보지 못했다. 이 이념의 핵심은 손진태와 안재홍에게서 선명하게 보인다.

 

손진태는 역사학자로서 '신민족주의 조선사' 저술을 기도하였다. 그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던 때부터 동학 친구들과 함께 밀회하면서 이론을 토의하고 체계를 구상하였다. 그는, "진정한 민족의 번영은 민족 내부의 반목과 투쟁에 있지 않고, 민족의 전체적 친화(親和)와 단결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자본주의적 지배와 계급투쟁을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손진태, 『한국민족사개론』, 을유문화사, 1948, 「자서」참조)

 

신민족주의 이론을 정교하게 다듬은 이는 안재홍이다. 일본의 최고학부에서 신학문을 연마하여 당시 세계에 풍미하던 사회사상과 이론에 밝았던 그는 좌?우의 협동전선이라 할 신간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바 있고, 해방공간에서는 건준(建準)에도 관여하는 등 좌?우의 대립과 협력을 폭넓게 경험하였다. 그랬던 만큼 새로운 민족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부르주아지적 데모크라시와 자본주의가 민족주의와 함께 추구되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계급모순 지양을 위한 혁정(革正)도 병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 계급적 모순 때문에 민족적 존재를 말살하거나 부인해서는 안된다고 보고 어디까지나 민족공동체를 계급보다 우위에 놓고 계급모순은 그 안에서 항쟁과 조화의 양면으로 풀어가야 한다는 논리를 제시하였다.(한영우, 「1930~1940년대 안재홍의 신민족주의와 사학」『한국민족주의역사학』, 일조각, 212~213쪽 참조)

 

안재홍의 신민족주의는 "한국 고유의 '다사리이념'(개인 국가 세계의 조화를 최종목표로 하는 이념)의 현대적 표현으로 균형경제?평권(平權)정치?대중공생을 구현함으로써, 서양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이념적으로 지양 종합하는 정치사상"으로서, "한국의 민족주의이념을 연구 정립시키는 과정에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한국민족주의의 한 유형」"이었다.(정윤재, 위의 글, 353~355쪽) 해방공간에서 좌?우 대립의 지양과 조화를 추구하려던 이 사상은 분단구조가 확정됨으로 빛을 잃어버린 것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이 이념이야말로 분단이 고착화되던 기간에는 좌우합작?남북협상을 통해 통일정부를 이룩해야 한다는 운동을 가능하게 하였고, 분단고착, 남북상잔, 극렬한 대치상황이 계속되는 냉전체제하에서는 통일운동을 면면시키는 이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46년 3월 민족주의 진영의 합당운동이 전개될 때 '신민족주의'의 주창자인 안재홍은 자신의 국민당을 김구의 한독당에 통합시켰는데, 이때 김구와 한독당이 '신민족주의'의 좌우협력 이념을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일찍이 임시정부에서 좌?우 통합을 이룩했던 김구가 뒷날 민족분단을 막기 위해 김규식과 제휴, 남북협상을 진행시킨 것을 보면, 신민족주의 이념이 해방공간에서도 일정하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던 것 같이 느껴진다.

 

분단체제의 고착화, 6.25의 동족상잔, 공산주의와 반공주의의 대결 등 해방 이후 1950년대까지는 이 땅에 민족주의가 자리잡기 힘들었다. 세계 냉전체제의 당사국인 미?소는 보편주의를 내세워 개성적인 민족주의를 극도로 기피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영향력이 가장 강하게 미치고 있던 한 반도에서는 해방 직후의 민족주의적 분위기마저 점차 사라져 갔다. 남한의 경우, 친일파가 득세한 것도 민족주의적 분위기를 몰아내는 데 한 몫을 감당하였다. 대학교양과목에서 세계사가 필수로 된 것과는 달리 국사 과목이 빠진 것은 이 무렵의 민족주의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었다. 남과 북에서 민족주의자들이 희생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4.19혁명은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를 회생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부정선거와 독재에 항거하여 일어난 4.19혁명은 민주화와 부패추방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을 뿐 아니라 당시까지 금기시되어 온 분단체제에 대한 비판을 가능하게 하였다. 민족주의가 구성원의 민주의식과 병행해야 한다면, 학생들이 북한을 대화의 상대로 혹은 서로 협력하여 통일을 이뤄야 할 민족으로 확인하게 된 것은 통일운동과 민족주의의 새로운 단계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 무렵 일제하의 민족주의 사학이 재조명되고, 무력통일론 대신 평화통일론이 등장하게 된 것도 새로운 민족주의의 전개와 관련이 있다는 증거다.

 

4.19혁명을 계기로 성장하던 민족주의는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병행하는 한편, 5.16 후 군사정권이 추진하던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 항일의식을 고조시키기도 하였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된 후 남쪽의 집권세력이 국가민족주의를 강화하여 경제성장을 주도한 데 비해 북쪽에서는 '주체사상'으로 종래의 마르크스 레닌주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민족주의 노선'을 추구하였다. 나아가 1972년 '7.4공동성명'은 민족통일 문제에 대한 합의를 도출함으로 남북이 연대하여 민족주의를 대외적으로 과시하는 듯했다. 그러나 남북 집권자들은 이를 정권강화에 이용, 남쪽에서는 유신체제를, 북쪽에서는 김일성의 유일체제를 굳힘으로 민족의 염원을 저버리고 말았다.

 

70년대 유신독재 기간 동안 인권신장과 민주화의 요구는 '국가안보'의 논리 앞에서 자주 벽에 부딪쳤다. 그러나 '국가안보론'이 바로 분단구조에 근거한 것임을 깨닫게 되자 분단구조를 해소하는 것(민족통일)이야말로 인권신장과 민주화를 위한 가장 중요한 과제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은 미국의 실체에 대한 의문을 던졌고 민주화와 자주화를 앞당기는 첩경으로서 통일의 과제를 부각시켰다. 80년대 신군부와의 대결을 통해 민중적 민족주의가 전면적으로 대두되었고, 시민적 민족주의도 크게 성장하여 90년대의 민간정부를 창출하는 동력이 되었다.

 

5. 맺는 말 - 공생(共生)을 지향하는 '열린 민족주의'

 

20세기 후반, 냉전체제가 와해되고 정보통신의 혁명, 장벽이 없는 세계 무역구조의 성립,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등 지구화의 열풍은 한국에도 '세계화'론자들을 양산시켰다(박찬승, 「한국의 역사학은 민족주의를 버려야 할 것인가」, 한국사학사학회 제1회발표, 1999.5.8.). 각 방면에서 민족주의는 비판되고 세계화가 강조되고 있다. 심지어 대통령의 시정방침에서조차 '폐쇄적인 민족주의'와 '보편적인 세계주의'가 대비되면서 세계화의 길만이 생존을 약속하는 것처럼 강조되고 있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의 울타리는 제거되고 정보의 창출?독점자가 종래의 국경을 거침없이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추진되고 있는 세계화는 개성의 총화로서의 세계화가 아니라 다원사회를 일원화하는 의미의 세계화다. 또 현시점에서의 세계화란 미국의 자본과 미국적 가치관을 보편화하려는 것으로 느껴진다. 이럴 때 개성에 바탕한 민족주의는 발붙일 곳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민족주의는 이 같은 공격적 세계화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의 과제를 안고 있다.

 

민족주의는 다원성과 개성을 파괴하려는 세계화에 대응적인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이것은 비단 제3세계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소위 선진국들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각 국가, 각 민족이 갖고 있는 개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가꿀 때에 세계가 더 풍요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안창호나 김구가 꽃밭론을 주장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화단이 형형색색의 꽃으로 꾸며졌을 때 더 아름다운 것처럼, 세계도 각 민족이 자기의 개성을 가지고 세계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 세계사는 창조적으로 발전될 수 있을 것이다. 민족주의는 아직도 세계사에 참여하는 개성있는 민족을 다듬기 위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민족주의는, 비판자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던 것처럼, 폐쇄적 혹은 침략적이거나 국제적 협력과 교류를 거부하는 이론적 근거처럼 되어서는 안된다. 국제교류에 적극적으로 나서되 민족적인 것을 우선적인 매개체로 해야 한다. 민족주의는 자기 존재를 귀하게 여기는 것처럼 다른 민족의 존재도 귀하게 인정해야 한다. 거기서 민족주의는 공생(共生) 이념의 바탕이 될 수 있다. 그런 민족주의가 '열린 민족주의'다. '열린 민족주의', 그것이 바로 미래의 한국 민족주의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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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사단법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저서로는 『한국근대역사학의 이해』(문학과지성사, 1981), 『한국기독교와 역사의식』(지식산업사, 1981), 『한국기독교문화운동사』(대한기독교출판사, 1987), 『강좌삼국시대사』(지식산업사, 1976), 『단재신채호의 역사학연구』(문학과지성사, 1990), 『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지식산업사, 1991), 『한국기독교의 역사 I, II』(공저, 기독교문사, 1989, 91) 『대한성서공회사 I, II』(공저, 대한성서공회, 1990, 93), 『북한교회사』(공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한국기독교수용사 연구』(두레시대, 1998) 등이 있고, 편역으로는『아펜젤러-한국에 온 첫 선교사』(연세대학교 출판부, 1985), 『언더우드-한국에 온 첫 선교사』(기독교문사, 1990)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일제 '식민지근대화론' 검토」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1집』(독립운동사연구소, 1997), 「한국기독교의 말세의식과 천년왕국」『현대한국종교의 역사이해』(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아펜젤러의 초기선교활동과 '한국감리교회'의 설립」 『한국기독교와역사 8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8), 「임시정부의 통합운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 12집』(독립운동사연구소, 1998) 등을 비롯하여 사학사?독립운동사 및 기독교사에 관한 많은 연구가 있다. 『한국사시민강좌』에도 제4집(1989)에 「세계 기독교사상의 한국기독교」, 제14집(1994)에 「신채호」를 기고한 바 있다.

 

(1999년 7월 18일 교정 완료, 『한국사시민강좌』 제 25집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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