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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1920년대 초 개신교에 관한 비판과 개신교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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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초 개신교에 관한 비판과 개신교의 대응

 

강 명 숙(숙명여대 사학과 강사)

 

 

1. 머리말

1910년대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으로 본격화되었다. 그것은 3?1운동이라는 擧族的인 민족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독립운동의 방법론을 새롭게 정립하는 가운데서 나타났다. 개신교인들의 독립운동 방략은 실력양성운동을 기초로 민족적 역량을 도모하면서 국제 질서를 이용하여 독립을 성취하려는 외교론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노력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새로운 국제질서를 통하여 민족의 해방을 찾으려 하였고 그것은 3?1운동이라는 민족 전체의 독립운동으로 현실화되었다. 그러나 엄청난 노력과 희생을 치룬 3?1운동은 열강의 자국이익(自國利益)의 우선적 확보라는 제국주의 국제질서 속에서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고 말았다. 따라서 3?1운동 이후 독립운동 세력들은 1910년대 거족적(擧族的) 민족주의가 주장한 독립운동론에 이의(異議)를 제기하고 새로운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이념적으로는 공산주의?무정부주의가 고려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방법론적으로는 독립전쟁론이 힘을 얻게 되어 국외 독립운동의 주류를 형성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민족주의자들이 강고히 존재하고 있었고 제한적이나마 자본주의 발전에 참여하고 있었음으로 이들 이념과 대치되는 사회주의가 독립운동과 사회발전의 이념으로 수용되는 과정에서 민족주의자들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사회주의의 주요공격 대상으로 부각된 것이 개신교라 할 것이다. 그것은 개신교가 추구하는 지향점들과 상황이 사회주의가 타도하려는 것과 일치하였기 때문이다. 즉 독립운동 방략면에서는 실력양성과 외교론을 추구하였으므로 민족운동의 방법적인 측면에서 비판의 대상이었으며, 서구 자본주의의를 그대로 이식하려했다는 면에서 사회주의의 비판 대상이었으며, 민족주의로 상당한 세력을 이루면서 젊은 학생층을 상당 정도 포섭하고 있었기에 기독교를 공략하는 것이 세력의 획득면에서도 요구되었던 것이다. 즉 3?1운동 이후 변화된 식민지 사회와 그에 대처하는 민족운동의 방법론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방법과 이념면에서, 그리고 인적 대상면에서 구체적인 사회세력으로 지목된 것이 개신교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반종교운동은 단순히 공산주의가 가진 종교론에 배치되는 것으로써 개신교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자들의 성장을 도모하기 위한 부문운동이었던 것이다. 즉 개신교를 비판하는 것은 사회주의를 전파하는 사상운동이며 교회 내의 청년세력을 사회주의 세력으로 획득하려는 사회주의의 확산운동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사회주의자들의 반종교운동이 사회적 지지를 얻거나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당시 기독교가 가지는 반(反)사회성을 비판해야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반종교운동의 내용은 사회주의의 종교론을 바탕으로 1920년대 개신교의 사회적 모순을 비판하는 것으로 촛점이 모아졌을 것이다. 여기서 1920년대 사회가 개신교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어떤 문제들이 사회의 비판을 받았는가를 살펴볼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반종교운동에 대한 이해는 사회주의자의 사회적 확산이라는 면과 연관되어 고찰되지 못하였고 반종교적 입장만을 강조하는 종교적 이해가 앞서 반종교운동이 1920년대 조선에서 가지는 의의가 간과되어 왔다. 최근 종래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성찰하여 반종교운동의 민족운동적 성격을 고찰하려는 연구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 논의들은 당시 사회의 주요세력인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갈등을 상호연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였고 반종교운동에 대한 기독교의 대응을 대외인식의 면에만 한정하여 개신교인들의 對美從屬的인 面을 강조하였다.그러나 개신교의 대미종속적인 성격이 독립운동 방법에서 나타나는 성격을 어떻게 통제하며 당시 조선인들은 그것에 대하여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하여 충분한 고찰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더욱이 3?1운동 이후 사회의 변화 속에서 야기되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새로운 방법론인 사회주의의 수용이 무엇을 매개로 이루어졌는가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리고 반종교운동이 사회주의의 수용과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이해도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특히 반종교운동이 사회주의의 확산을 위한 사상운동이며 새로운 독립운동의 방법론을 획득하기 위한 비판운동으로서의 의미를 포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사회주의 사상을 일반대중에게 이해시키는 방법으로 또는 사회주의 세력을 확산시키는 방법으로서의 반종교운동의 역할을 상정하고 사회주의가 어떤 부분을 공격하면서 사회세력으로 성장하였는가를 살피고자 한다. 이러한 문제를 이해하기 위하여 반종교운동의 주요 대상이며 근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민족주의의 주요부분을 형성했던 개신교를 1920년대 초를 전후한 조선 사회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살피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1920년대 초 신문에 거론된 문제들의 중심으로 살펴 어떤 문제들이 사회의 비판이 되었는가를 도출하고자 한다. 즉 강고한 종교적 교리로 무장한 개신교 세력을 사회주의가 파괴?포섭하기 위하여 개신교의 어떤 부분을 공략의 대상으로 삼았는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2. 이광수의 기독교 비판

 

한국 사회에서 개신교에 대한 비판이 사회적 의미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1917년 11월 이광수가〈청춘〉에 게재한 "금일 조선야소교회의 결점"과 1918년 9월 6일부터 10월 19일까지〈매일신보〉에 게재한 "신생활론"에 의해서이다. 이광수가 당시 개신교를 비판한 내용은 한국 교회의 계급주의적 성격, 교회지상주의적 사고방식, 교역자의 무식과 미신적 경향 등 크게 4가지이다.

이광수의 기독교 비판의 의미를 당시 기독교의 사회적 존재의 성격과 연관지어 생각해본다면 이전까지의 역할에 대하여 사회적인 도전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먼저 교회의 계급화 현상을 살펴보면 교역자와 평신도는 귀족과 서민과 같이 여기는데 이것은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전통에 젖어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았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단순히 봉건사회의 폐습에서 온 것이 아니라 개신교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사회적 변동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즉 봉건제도의 해체로 혼란한 사회에서 개신교를 정신적 지주로 받아들인 개신교인들은 개신교에 담겨진 서구의 근대적 문화를 직접적으로 체득함으로써 조선사회에서 가장 먼저 서구화?근대화에 참여하였고 시대적 요구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던 것이다. 또 서구 선교사들은 서구문화의 전달자로서, 외교 통로로서 한국의 근대화를 독점하였고 그 과정에서 개신교는 사회적?경제적으로 지도적 위치에 오르게 되었고 기독교의 선민의식과 맞물려 특권의식으로 성장하였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 시기에 개신교를 수용한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신념체계를 받아들이는 데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근대화의 방법론을 수용하는 것이며 그로 인하여 학문적?사회적으로 진출할 기회를 획득하는 현실적인 통로이었던 것이다. 즉 한말에는 개신교를 수용하는 것이 근대적 학문의 수용이며 근대화의 방법론을 배우는 것이며 교회기관에 참여하는 것이 근대적 기관에 종사하는 기회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개신교를 수용하고 개신교의 선교사업에 종사한다는 것이 그대로 사회적 특권으로 관철되는 상황이었으므로 교역자들이 특권의식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개신교가 사회적으로 극대화되어 종교적 방법론으로 사회를 운영하려는 경향도 나타나게 되었다고 보인다. 한말의 사회적 요구가 개신교의 사회적 의미를 극대화하여 종교를 절대시하는 경향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 결과 종교적 지식, 종교 내적(內的)인 사업, 종교적 의무만을 절대시하는 교회지상주의가 교회 내에 팽배하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교회의 사회적 의미가 극대화되면서 종교적인 방법론이 모든 면에서 관철되는 경직 현상이 나타났다고 할 것이다.

또 한가지 문제되는 것은 종교적 방법론이 가지는 한계이다. 근대화의 방법론을 장악한 선교사는 종교적 권위에서도 조선인을 압도함으로써 종교적 이해도 선교사들의 영역를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교회지상주의가 이러한 현상을 조장함으로써 근대적 지식의 도입도 종교적 통로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도록 강요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통치가 계속되면서 식민지배를 통하여 일본적인 근대화를 직접 체험하게 되었고 해외유학을 통하여 서구문물에 대한 지식도 상당한 정도로 조선사회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구문물에 대한 이해가 지식인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1920년대 사상적 조류를 형성하게 되었고 선교사를 통한 근대화의 한계를 점차 의식하게 되었다고 보인다. 특히 1920년대 초 문화정치와 맞물려 개조사상이 사회에 풍미되면서 개화기 개신교를 통한 근대화의 한계를 인식하고 개신교 비판이 일어나 사회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보인다.

서구문화에 대한 이해는 종교의 전파 방법론으로 도입된 서구적 학문이 가지는 한계를 인식하게 되면서 교역자들의 무식과 미신적 경향이 비판의 대상으로 부각되었다고 보인다. 바꾸어 말하면 종교 전파의 방법론으로 채택된 근대화가 1920년대 수준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이고 근대화의 내용을 비판하는 단계에 이르러 종교성에 반대되는 합리성과 과학성이 사회적으로 부각되었다고 할 것이다.

결국 개신교라는 종교를 통하여 서구의 근대적 문물이 수용되면서 조선의 개신교는 서구의 근대를 모델로하는 사회개혁을 추진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서구적 가치가 종교적 가치로 절대화하는 현상이 나타나 서구적 근대주의가 개신교에 팽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종교적인 근대주의가 교권으로 구체화함으로써 교회 내에 여러가지 폐단을 자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교권이 교회를 장악하여 특권화하고 서구문화의 도입도 종교적인 것으로 국한됨으로써 근대화를 위한 근본적인 지식을 얻지 못하고 저급한 수준에 머물렀던 것이다. 즉 선교사의 교권 장악 아래서 조선의 개신교는 조선적 성격을 상실하고 교회지상주의에 매몰되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이광수의 비판은 이러한 점에서 1910년대 후반의 개신교의 문제점을 비판한 것이고 사회적 의의를 가지고 개신교에 충격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3. 제사 문제 비판

 

기독교가 수용되는 과정에서 제사의 문제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다. 조상숭배를 사회 편재와 지배 규범으로 받아들였던 조선사회는 우상숭배의 금지라는 면에서 제사문제를 둘러싸고 기독교 수용 불가론이 일어나 사회 전반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그러나 봉건적 사회질서가 해이해가면서 봉건적 질곡에서 벗어나려는 사회적 욕구는 전통적 가치체계에 대한 도전을 수반하였고 그러한 현상은 기독교의 수용이라는 종교의 신봉으로 표출되었다. 따라서 기존의 질서와 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던 시기 조선 사회가 기독교라는 외래사상과 갈등하면서 가장 먼저 제사문제를 들어 개신교의 문제점을 비판하게된 것이다.

제사문제를 둘러싼 기독교 비판은 1920년 9월 1일자〈동아일보〉에 "애매무죄한 기독교의 희생자"라는 기사가 보도되면서 시작되었다. 경북 영주군 문정리에 사는 개신교 신자 권성화(權聖華)가 어머니의 상사(喪事)를 당하여 부인에게 상식(喪食)을 드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동아일보〉는 그 부인이 남편의 불효를 속죄하는 의미로 자살하여 목숨을 잃은 사건을 기사화하면서 이상재(李商在)의 견해를 빌어 조상숭배를 금지하는 것은 예수의 참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무조건적으로 서양사람을 좇아하는 것으로 결국은 조선의 전통을 무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조상을 기리는 마음에서는 제사를 지내는 것도 종교적 신념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보도하였던 것이다. 이에 양주삼(梁柱三) 목사는 9월 4일자〈동아일보〉에 "耶蘇敎와 祭祀問題"라는 제목으로 9월 1일자〈동아일보〉기사를 비판하였다. 내용을 보면〈동아일보〉가 이 사건을 게재한 이유를, 예수교를 반대하는 반(反)기독교 선전으로 간주하고 사건의 내용을 두 가지 점에서 비판하였다. 첫째는 권성화의 아내가 죽은 것은 상식적인 인간사회에서는 남편을 배반한 것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제사를 과학지식이 미천하고 종교사상이 불일(不一)하고 도덕관념이 유치할 때에 행하던 미신적 풍속으로 여기고 문명화되면 자연히 폐기되고 하나님만 신으로 섬길 것이라고 하였다. 즉 제사를 야만적이고 유치한 것으로 여기는 근대주의에 매몰된 견해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동아일보〉는 9월 10일자 "제사와 우상숭배"라는 사설을 통하여 제사가 유일신 사상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조상숭배가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주장은 첫째 조상숭배는 공자의 가르침에 따른 것인데 공자도 개신교와 같이 하늘을 섬기는 일신교 숭배자요, 조상숭배도 선조의 영혼을 위안하고 조선(祖先)이 실재하였던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하여 기념적으로 행하는 것이니 인생의 영혼이 존재함을 인정한다면 조상숭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하였다. 다음으로 조선에서 조상숭배를 우상숭배로 여기는 것은 기독교의 전래자인 '자고'(自高)한 서양선교사가 조선의 역사를 알지 못하고 조선의 문화를 인정치 않고 '자존'(自尊)하는 선입견으로 조상숭배를 원시적인 우상숭배로 인식하여 무식한 조선인 신자에게 조상숭배를 금지한 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조선의 식자(識者)가 조상숭배의 정신을 선교사에게 이해시켰다면 조상숭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며 금지하지도 않았을 것으로 보았다. 동아일보의 논자는 조상숭배를 중시하여 현실적으로 번거롭게 행해지는 제사의 폐단을 시정하는 선에서 전통적인 제사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동아일보〉의 주장을 간추리면 기독교가 조상숭배를 우상숭배로 금지하는 것은 종교적 신조에 어긋나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선교사 조선문화에 대한 무식과 서양인 우월주의, 그리고 조선인 신자의 무식함으로 인하여 무분별하게 서양문화를 모방한 것으로 보았다고 하겠다. 결국〈동아일보〉가 제사문제를 통하여 기독교를 비판한 것은 기독교를 통한 근대화가 가져온 전통의 무시를 문제삼은 것이며 그 원인으로 선교사의 처사를 무분별하게 맹종하는 개신교를 비판하는 것에서 나온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는 오히려 제사를 도덕관념이 유치할 때 행하던 미신적인 풍속으로 여기는 근대주의의 매몰되었음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결국〈동아일보〉가 행한 개신교에 대한 비판은 서양문화의 무분별한 수용이 가져온 근대주의에의 매몰이었던 것이다.

〈동아일보〉의 기독교 비판에 대한 기독교의 대응은〈기독신보〉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다. 9월 22일자〈기독신보〉사설 "祭祀와 偶像崇拜라는 東亞日報의 社說을 讀하고셔"과 9월 29일자 같은 제목의 연속된 사설을 통하여〈동아일보〉의 조상숭배 논리를 비판하였다. 첫째, 특정한 종교의 신조를 주장?공박하는 것은 민족을 대표하는 언론기관이 취할 처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요망'한 사건을 사회문제시하여 "은연중에 기독교인을 自坊 문화의 배척자로 만들고 자각없는 肯從者로 만들어가면서" 제사를 주창하였다고 하였다. 셋째, 공자와 자유(子游)의 문답을 인용하여 공자가 주장한 제사는 유교적 신관(神觀)에 의하여 성립된 종교적 의식으로 단순한 인륜 도덕적 의식이 아니라고 하였다. 넷째, 제사는 인간의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지배를 부인하는 것으로 喪食과 제사는 기독교적 교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평가하였다. 다섯째, 제사를 금지하는 것은 기독교 교리에 의하여 종교적 신조로 이루어진 것인데 이것을 타종교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것은 편파적 입장이라고 하였다. 또한 유교가 일신교(一神敎)인지 다신교(多神敎)인지는 공자교 기관보가 담당할 것이므로〈동아일보〉가 나서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여섯째, 유교가 섬기는 사직(社稷)과 조상신(祖上神)은 분명히 귀신이므로 유일신을 섬기는 기독교의 신조로는 귀신에 대한 제사는 교리적으로 불가하다는 것이다. 일곱째, 조상숭배를 우상숭배로 여기는 것은 부모의 영혼을 우상시 하는 것이 아니라 제의(祭儀)가 우상숭배의식과 동일함으로 금지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볼 때〈동아일보〉의 기독교 비판에 대한 기독교의 대응은 무분별한 근대화에 대한 반성 없이 종교적 교리에 대한 사회적 간섭과 비판으로 인식하여 종교성의 옹호라는 방면에 자신의 입장을 국한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기독교의 태도에 대하여〈동아일보〉는 9월 24일과 25일자 "祭祀問題를 再論하노라"라는 연속적인 사설을 통해 조상을 기념하기 위한 제사와 우상숭배는 별개라는 논조로 기독교의 논박에 대응하였다.〈동아일보〉의 연속적인 사설이 실린 다음날인 9월 26일(일요일) 종로의 중앙교회에서 김창제(金昶濟) 목사의 설교가 '基督敎와 祭祀'라는 제목으로 이루어졌고 이 내용이 다시〈기독신보〉에 게재되어 제사에 대한 개신교의 입장을 정리하였다. 당시〈동아일보〉에 실린 기독교와 제사문제는 기독교 내부에도 상당한 동요를 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기독교 내부에서는 제사문제를 정리하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나타나고 단순히 사회적 비난에 대한 반박의 수준을 넘어 교리적인 작업을 수행하려는 의지가 있었음을 이 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김창제 목사의 설교는 먼저 제사의 유래를 살피고 있다. 동양에서 지내는 제사의 원형을 중국 고대《尙書》에서 찾았다.《상서》에 나타난 제사의 의미를 신(神)에게 드리는 희생(犧牲)의 봉헌(奉獻)으로 정의하였다. 또한 제사의 형식에서도 신주(神主)의 봉안, 제수(祭需)의 봉헌의 예식과 예복의 착용 등이 신께 봉사한다는 신앙사(信仰事)의 행동이므로 제사는 단순한 추도식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리고 추도식은 각 개인의 자유이며 윤리나 도덕적인 문제와는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서양의 제사는 성경에 나타나는 카인과 아벨의 제사를 효시로 모세의 율법에 의하여 히브리 민족의 제사유형으로 정착하였는데 구약시대의 제사는 생활 전부이며 중심이었다. 그것은 당시 민도(民度)가 낮아서 그리된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셔서 십자가 위에서 최종적 희생을 드림으로써 물질적?형식적 율법적인 제사는 폐지되고 회개와 자비와 진리의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조상숭배의 제사는 기독교적인 제사의 정의에 비추어 볼 때 교리적으로 어긋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십계명에 비추어 보아도 기독교는 "拜一神敎(monolatry)오 唯一神敎(monothlism; monotheism의 오기로 보임)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신을 섬길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은 시기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므로 오직 하나님만을 숭배해야 하고 제사는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우상숭배는 신상(神像)에 대한 숭배만이 아니라 "我가 神에게 奉事하는데 障碍가 될 만한 것은 物質的과 精神的을 勿論하고 다 偶像이라 指斥할 지니라. 故로 manmon과 神을 兼事치 못한다 함이 이 是라"고 하여 신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장애물을 우상으로 여기고 있다. 또한 제사에 대한 관념에서 카톨릭 교리와도 다름을 설명하여 카톨릭과 개신교의 구별을 강조하였다.

마지막으로 조선의 개신교가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을 단순히 조선을 모르는 선교사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는 무식의 소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종교적 교리에 따르는 신념이며 제사라는 고대의 유치한 예식을 폐기하고 이성의 개발과 지식의 향상에 의한 정신적이고 진리의 제사를 지내는 것이 시대적 삶임을 주장하였다.

결국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개항 이후 추진해온 기독교를 통한 근대화의 방향을 제사 문제를 통하여 비판한 것으로 전통을 무시하는 근대주의를 지적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개신교는 호교적(護敎的)인 입장을 초지일관 적용하여 제사를 통하여 구현되는 전통의 계승을 무시하고 제사의 종교성과 유치성을 강조하여 선교사의 가르침을 그대로 종교적 진리로 정립하려 하였다. 개신교는 사회의 제사문제 비판을 기회로 제사에 대한 종교적 통찰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종교 내적인 성과가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개신교의 호교론적인 대응을 종교문제로만 국한시키지 않고 개신교는 자신의 근대화 방법론을 종교적 견지에서 고수하려는 것으로 이해하였을 것이다. 한편 사회적 문제로 부각된 전통의 폐기 문제는 폐기의 원인을 종교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서양인들이 우월감을 가지고 조선의 문화를 백안시한 데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성을 어렴풋하게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개신교에 대한 사회의 비판은 계속되었고 그 양상은 김익두 목사의 신유(神癒) 문제를 통하여 다시 표출되었다.

 

4. 김익두 목사의 비판

 

1922년 6월〈新生活〉에 실린 김명식(金明植)의 "金益斗의 迷亡을 論하고 基督敎徒의 覺醒을 促하노라"는 당시 기도로 병을 치유하여 전국적인 주목을 받고 있던 김익두 목사의 활동을 사회적으로 문제삼은 글이다. 글의 내용은 서구 근대문명 도입하는 과정에서 개신교가 한 역할을 거듭 강조하고 종교적 폐단이 나타나는 것은 제도와 조직이 불순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불순하여 나타나는 것이라고 종교인들의 폐단을 강조하였고, 마지막으로 김익두 목사가 행하는 기도(祈禱)?치병(治病)을 미방(迷亡)으로 비판한다. 그런데 그 비판 논리는 사회주의자로서 사회주의 논리로 비판한 것이 아니다. 김명식의 비판은 먼저 김익두의 개인적인 면에서 이루어진다. 원래 무식하여 언어와 행동이 미망이며 지식?인격?사상이 보잘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목사로서의 활동은 그의 무식함에서 나오는 소치이므로 김익두 목사의 활동을 교회가 장려하는 것은 조선의 수치라고 하였다. 둘째는 김익두 목사의 기도치병을 종교적 입장에서 비판한다. 즉 예수의 구세주 됨은 義와 熱과 사랑 그리고 십자가 上의 鮮血에 있는 것이지 기적을 행함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비루한 언사와 행동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순결을 파는 김익두는 예수의 적(敵)이요 사회의 공적(公敵)이라 하였다. 셋째는 김익두 목사의 치병(治病) 과정에서 일어나는 무례함과, 헌금을 거두는 방법 등을 비도덕적인 것으로 비판한다. 그러므로 김익두 목사의 행적을 문제삼지 않고 장려하는 개신교는 개혁성을 잃어버린 교회이며 이러한 폐단은 장차 교회의 전도(前途)에 막대한 타격을 줄 것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김명식의 김익두 비판은 기독교를 비판한 것이기는 하지만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도를 강하게 보이면서 김익두의 활동으로 야기되는 미신성과 사회적 문란을 문제삼고 있었다. 서구의 문물을 조선에 도입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 기독교가 1920년대에 이르러 미신적인 종교행위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반성하라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었다고 할 것이며, 미신적 행위로 상징되는 제국주의적 문화 침탈의 모순을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기독교는 김목사의 활동을 범교회적으로 옹호하고 있었다. 김목사의 질병치유 은사는 1919년 경상북도 달성에서 거지 박수진을 치유하면서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후 김목사가 인도하는 부흥회가 대대적으로 열리고 그를 통하여 막대한 헌금이 교회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개신교는 그것을 기금으로 전도사업과 교육사업 등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1920년 7월에는 황해도 교인들을 중심으로 김목사의 질병치유를 문서로 발간하여 종교적 권위와 사회적 선전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서 1921년《異蹟明證》이란 김목사의 기적행위를 기록한 문서가 조선예수교서회 이름으로 발간되었다. 또 김익두 목사는 기적의 은사에 힘입어 1920년 10월 경성 안국동에 있는 안동교회에서 조선야소교장로회 제9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명실공히 조선의 장로교회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후 김목사는 더욱 활발히 각지 부흥회를 인도하여 교회부흥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고 김목사의 이러한 활동과 설교를 교계를 대표하는〈기독신보〉가 적극적으로 게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김목사의 활동과 교회 내의 위치로 볼 때 조선의 장로교회는 김목사의 활동에 커다란 기대를 걸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명식의 김목사 비판은 단순히 김목사 개인에 대한 비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김목사의 활동에 교회부흥?교육사업 등을 상당 부분 의지하고 있던 교회의 전반적인 추세를 비판한 것이라할 것이다.

개신교도 김명식에 관한 비판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기독신보〉는 2회에 걸쳐 재령인 강제모(姜齊模)의 김명식 비판과 4회에 걸친 중국 남경(南京) 금릉(金陵)신학교 학생 김경하의 김명식 비판을 연재하여 개신교의 입장을 밝혔다. 강제모는 먼저 김명식을 개인적으로 평가한다. 김명식은 종교인이 아니므로 종교에 대한 인식이 없어 '무정견'과 '몰상식'을 그대로 표출한 것으로 비판한다. 김목사에 대한 개인적 평가에 대해서는 김명식의 비판에 조목조목 비판을 가하는데 대체적인 내용은 김목사의 무식과 비도덕성은 종교성으로 옹호하였다. 그런데 김명식의 비판은 종교적 철저함을 표방하고 이루어졌으므로 개신교는 김익두의 활동을 종교성에 비추어 정당화하는 작업을 진행시켰다. 강제모는 과학과 종교를 나눔으로 김목사의 기도치병을 종교적 차원의 행위로 정당화한다. 더 나아가서 김익두의 기도치병을 기적으로 보고 성경에 나타난 기적 항목에 부합하는 것으로 정당화하였다. 반면에 김목사의 기도치병을 부인하는 것은 기도와 성경과 하나님의 권능과 성신(聖神)을 부인하는 비종교적인 행위로 단정하였다. 강제모는 마지막으로 김목사를 사회의 공적(公敵)으로 지탄하는 것에 대해서는 김목사의 부흥회 활동의 업적인 교회의 부흥과 교육기관 설립을 들어 대응하였다.

강제모에 이어 중국 남경 금릉신학교 학생인 김경하(金京河)의 비판이 이어진다. 김경하는 글을 쓰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最近 一兩年間 某某 雜誌上에 金益斗 牧師의게 對한 非難과 基督敎人의게 向한 警告의 記載가 實노 一二次가 아니였다. 그러나 우리 基督敎人은 此에 對하여 한번이라도 辯駁을 試함이 잇지 안앗더니 今玆 新生活(六月號)에 登한 金明植氏의 "金益斗의 迷亡을 論하고 基督敎徒의 覺醒을 促하노라" 題下 六項의 記事는 其論調가 前者보다 더 銳利하야 金益斗 牧師를 罪人視하야 聲討하고 基督敎人을 白痴算하야 無視하얏도다. 義憤한 道念을 止치 못하고 激動한 良心을 靜치 못하야 이제 文章의 拙劣함과 語調의 組織업슴을 不顧하고 우리 基督敎의 固有한 敎理를 陣하야써 氏의 誤見을 辯正코자 하노라.

 

이로 미루어 보면 당시 사회의 개신교에 대한 비판이 여러번 이루어졌으나 김명식의 논조가 사회적 반향을 크게 일으킴으로 개신교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1920년대 사회가 변화하면서 개신교는 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김목사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교회가 견지하고 있던 근대성은 사회적 의미를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김명식의 개신교 비판은 사회와 교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김경하는 먼저 김익두 목사의 기도치병을 미신으로 보는 견해에 대하여 반박한다. 김목사의 기도치병은 미신이 아니라 종교적 기적이라는 것이다.그리고 이러한 기적은 근본적으로 기독교적이라고 한다. 동정녀에게서 예수가 탄생한 것, 장사한 지 3일만에 부활하여 승천한 것 등을 들어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기적의 종교임을 주장하였다. 나아가서 구약에 나오는 모세가 홍해를 건넌 것, 예수님이 전도하러 다니실 때 이적(異蹟)과 기행(奇行)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백성들에게 알린 것, 요나의 기적 등을 들어 기독교가 기적의 종교임을 강조하였다. 다음은 김목사가 부흥회를 인도한 결과 학교를 진흥한 사실을 들어 김익두 목사가 반(反)사회적이라는 비판에 반박하였고, 김목사의 기도치병이 사실이 아니면 미망(迷亡)?요물(妖物)이라 하겠지만 신문이나 서신, 전언(傳言)으로 볼 때 정확한 사실이므로 미망이나 요물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오히려 영국의 '허커'와 같이 국가의 영광으로 여기고 외국에 자랑할 일이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종교와 과학의 차이점을 들어 기도치병을 종교적인 것으로 정당화하였다.

개신교는 김익두목사 비판에 대하여 끝까지 종교의 특성을 내세워 옹호한다. 그러나 교회 내적으로는 비판이 일어나고 있었다. 1923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2회 총회시에 장로회 헌법 제3장 제1조(금일에는 이적을 행하는 권능이 정지되었느니라)를 삭제하자는 헌의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 헌의는 교회의 헌법이 "신경과 성경 진리에 위반되는 조건이 안인즉 개정할 필요가 없으며 각 노회에 수의하야 개정여부를 결정키로" 하고 노회의 의견을 수렴하려 하였는데 그 결과 부결되었다. 또한 1926년 5월에는 남대문밖교회에 출석하는 세브란스의전의 학생들이 김목사의 시무(時務) 정지와 제명을 요구하여 담임교회에서부터 비판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 내의 비판은 1920년대 개신교의 종교적 분위기를 바꾸지는 못하였다. 간도 용정교회의 부흥회 도중 일어난 폭행사건의 결과를 김익두의 부흥회 강행과 부흥회의 성공으로 보도하고 용정교회사건이 있은 후 북간도의 동명교회 부흥회를 보도하여 김목사의 건재를 과시하였다. 더욱이 6월 하순 제4회 경기노회에서는 남대문밖교회의 임시 담임목사였던 김익두 목사를 위임목사로 결의하여 6월 27일 위임식이 남대문밖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이후 북간도의 동명교회 사건을 보도하여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 결과를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하였다.

이렇게 볼 때 교회 내 김목사에 대한 비판은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반면에 사회의 김익두 목사 비판에 대해서는 교리적으로 대응 옹호하고 있다. 1920년대에 일어난 개신교 비판에 대하여 개신교는 교회의 유지와 발전이라는 과제에만 매달려 교리의 옹호로 일관하는 경직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결국 개신교는 1920년대에 이르러 서양 선진문명의 전달자로서가 아니라 근대주의의 한계인 종교성에 매몰되어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고 보인다. 그것은 근대문명의 통로가 다양하게 확보되고 있었고 각 통로로부터 새로운 이념과 방법론이 도입되어 기존의 근대화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1920년대 초 3?1운동의 실패와 연관하여 한말부터 내려오던 외교적 독립운동론과 그 주도세력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으며, 문화적으로는 개신교를 통하여 들어온 근대문명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가함으로써 사회적 변화에 적응을 위한 사회전반의 재검토가 이루어지는 과정의 소산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개신교에 반대하는 세력이 확고하게 성장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개신교를 비판하는 것을 어려운 문제였을 것이다. 이에 방법적인 소재로 떠오른 것이 미신적인 기도치병이며 개신교의 신앙형태를 미신으로 몰아 사회발전의 암적인 존재로 사회적 여론을 환기시키는 것은 개신교의 사회적 의미를 상실하게 만드는 좋은 소재였을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는 사회의 비판에 사회적 위상에 걸맞는 대응을 하지 못하고 현상유지하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하고 김익두 목사의 이적을 기독교의 본질로 정의하는 경직된 자세를 보여주었다. 결과적으로 사회는 1920년대에 이르러 폭넓은 교양과 종교적 성숙에 더하여 올바른 민족문제에의 대처를 교회에 요구하였으나 교회는 사회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방어적 자세를 일관함으로써 변화에 대한 청년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 청년들의 동요가 교회의 문제로 대두하는 단서가 되었다.

 

5. 개신교의 근대 교육에 관한 비판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학생운동은 동맹휴학으로 점철되어 1920년대 전반기에 146건의 동맹휴학이 있었다. 이들 동맹휴학은 관(官)?공(公)?사립( 私立) 고등보통학교보다 의명(義明)?경신(儆新)?보광(保光) 등 인가를 거부한 '각종학교'에서 더욱 빈발하였다. 이것은 당시 일제 식민당국이 19 15년 3월 "개정사립학교규칙"을 발표하여 국어 역사교육을 철폐하고 종교교육도 폐지할 것을 요구하여 기독교 학교를 규제하려고 하였기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런데 장로교계 학교들은 선교를 중시하여 성경교육과 예배의식을 고수하여 '각종학교'로 남아있었다. 그리하여 이들 학교의 졸업생들은 상급 학교에 진학 자격을 갖지못하고 사회진출에도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 장로교계 학교 학생들은 학교 당국에게 총독부의 인가를 받을 것을 종용하는 소요와 동맹휴학이 자주 일어났다.

그런데 이들 학교의 동맹휴학이 처음부터 학교 승격문제를 들고나온 것은 아니었다. 처음은 교육내용의 충실을 요구하였다. 1920년 배재고보(1916년 승격) 학생들은 조선말과 조선역사 교육 실시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식민지 교육정책에서 나온 것으로 학교당국으로서는 식민당국에 건의하는 이상의 조치를 할 수 없는 것이어서 학교당국과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아니었다. 배재 학생들이 학교 당국을 상대로 요구한 것은 "리화학기계를 수리"하는 것과 "교원을 만히 고빙"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배재학교의 수업내용이 부실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배재학생들의 맹휴는 1922년 여름에 다시 일어났는데 1922년 학생들의 요구조건에서도 당시 교무주임을 교체할 것, 중등교원 자격을 완전하게 가진 자를 선생으로 고빙할 것 , 물리?화학 선생을 새로 고빙하여 물리?화학 기계를 잘 응용하도록 할 것 등을 요구하고 있다. 신성학교에서는 교사의 고빙과 과목의 설치 교실 증축 등을 요구하고 있다. 개성의 호수돈여자고보에서도 학교 설비와 선생에 대한 불만족을 이유로 동맹휴학을 일으켰다. 동맹휴학을 하는 학생들의 요구는 개신교 교육기관 학교승격 문제보다 교육내용의 충실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 선교사가 주로 경영하는 학교교육의 내용이 학생들의 불만의 대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것은 총독부 지정학교이건 아니건 또는 중등교육기관이건 전문교육기관이건 상관없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과학 부문의 수업이 부실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나타내주는 것은 연희전문과 세브란스의전의 동맹휴학시 학교 당국에 요구한 조건이다. 세브란스의전의 요구조건은 "자격이 충분치 못한 선생을 내어보내고 조흔 강사를 고빙하며 학교의 설비를 확장하여 달나는 이유로 동맹휴학을 하얏다"고 하여 교육 내용의 충실과 학교 설비를 충실히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연희전문학교의 경우는

 

"(1) 학과과뎡이 전문학교 뎡도에는 유치하고 뎍당치 아니한 과뎡이 만아서 정작 류익한 전문지식을 완전히 닥글 수 업스니 학과과뎡을 계뎡할 일. (2) 학교의 교수가 부족하니 전문학교의 교수가 될 만큼 상당히 학식잇는 교수를 느릴 일. (3) 학교의 위치가 경성 市街에서 너무 초원하야 통학에 극히 불편하야 학생의 □□장혜가 적지 아니하니 급속히 학교기숙사를 설비할 일."

 

등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수업내용의 전문성을 더욱 강화할 것을 요구한 것이며 그것을 위한 전문교수의 확보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개신교 경영학교의 수업내용이 학생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초기 교육내용의 충실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동맹휴학은 이후 '각종학교'로 남아 있던 장로교계 학교에서는 고등보통학교의 승격운동으로 진전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대구계성학교의 동맹휴학에 잘 나타난다. 1921년 여름에 일어난 계성학교의 동맹휴학은 요구조건이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는 "완전한 중등학교정도학교를 형성할 사", 둘째는 "사실이 이상 각조와 부합하기 위하야 사립대구계성고등보통학교로 변경할 사"를 요구하고 있다. 즉 교육 내용의 충실을 위한 고등보통학교로의 승격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의 요구에 학교당국의 노력은 학생들을 설득할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다. 대부분 학교 사정을 내세워 학생들의 요구사항 실행을 연기하거나 학생들의 요구에 묵묵무답 학교를 휴학하거나 방학을 앞당기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또 특정 선생을 지목하는 경우는 학생들이 할 행동이 아니라고 질책하고 대개는 주모자를 출학(黜學)시키거나 정학(停學)을 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심한 경우에는 학교를 폐쇄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하여 학생들의 태도는 더욱 완강해지고 맹휴가 장기화하고 반복되는 경향이 많았다. 이에 선교회는 학교경영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선교회 차원으로 교육내용을 개선하려는 논의가 일어났다. 그러나 학교시설의 개선과 교사의 질적 향상은 단시일에 해결될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고, 또 선교정책 때문에 '총독부지정학교'로의 개편은 불가하고 '인뎡학교'로의 개편을 도모하거나 지연함으로 학생들의 퇴학원서가 산적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이같이 학생들의 요구가 더욱 절실해감에 따라 192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고보승격을 위한 동맹휴학이 계속 늘어나고 양상은 더욱 격렬해져갔다.

결국 한말 이래 서구문명의 유일한 도입통로로 여겨졌던 개신교 경영의 교육기관은 1920년대에 이르러 교육제도의 정비라는 일제의 식민정책에 의하여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것은 일제의 식민정책이 개신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근대화 세력에 대한 억압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개신교를 통한 근대교육이 내용적으로 미비하였다는 내적 조건을 기폭제로 하여 나타난 것이었다. 즉 개신교를 통한 근대화가 1920년대에 이르러 서구문물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면서 그 한계를 인식하게 되었고, 식민지 교육의 정비라는 제도적 장치에 의하여 맹휴가 촉발되었다고 하겠다.

교육내용의 충실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맹휴가 끊임없이 전개되면서 조선 개신교나 선교회는 이를 개선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선교회에서는 중등교육 내용을 충실히 하기 위하여 선교회에 진정하고 교실 신축을 계획하고 고보승격의 전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재원의 마련이 여의치 않아서 연기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학생들은 요구에 대한 개신교의 노력은 학생들을 설득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개신교는 맹휴를 일으키는 학생들의 태도를 부당한 것으로 보도한다. 만약 요구할 사항이 있는 경우 학생들이 취할 태도는 "所願의 사건을 정중히 간원은 할지언정 요구는 아니함이 可하니" "요구한 바가 기한에 실현되지 아니하는 時는 불만족한 학생은 개인적으로 퇴학함은 可하되 전교학생을 망라하야 동맹휴학을 조직함은 불가하니" "불만족한 학생들은 학교당국자의게 요구하는 사건의 설비를 위하야 금전을 提呈하거나 수업료를 加供할지니" "불만을 회한 학생의 부형이나 학교동창이나 교회학교 소재지 교인들이 선교사에게 來하야 학교개선을 위하야 원죠"할 것 등 학생편의 全的인 노력을 요구하는 일방적인 내용을 표명하고있다. 또한 동맹휴학에 나타난 기독교 배척의 내용이 선교회에 알려져 선교회의 반감을 살 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이에 학생들은 개신교의 미온적인 태도에 불만을 가지고 그들 요구의 즉각적인 시행을 주장하며 맹휴에 들어가곤하였다.

이들 학교의 동맹휴학의 원인으로 교육내용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교육자의 태도였다. 평남 평원군의 의명학교에서는 화학?물리?광물을 가르치는 교사가 불친절함을 이유로 동맹휴학을 일으켰으며, 경성의 장로교 설립 여학교인 정신여학교에서는 기숙사 사감의 억압적 태도를 이유로 고등보통과 1~4학년 학생 일동과 보습과(補習科) 생도 102명이 동맹휴학하여 신문기사화되고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기숙사 경영문제로 맹휴가 일어난 평양 숭의학교의 경우 학교경영을 담당하고 있는 선교사들의 태도가 완강하여 지역 인사들이 중재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학교가 폐쇄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교사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에 대하여 각 학교의 대응은 강경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순안 의명학교의 경우는 학생들의 경거망동을 비난하였고, 정신여학교 경우는 맹휴의 원인을 맹휴의 주동자인 한 여학생의 개인적 불만으로 몰아가 맹휴학생들이 한 학생의 경거망동에 동참한 것으로 만들었다. 평양 숭의학교의 경우는 사감인 라진경을 마펫 교장이 끝까지 옹호하여 기숙사의 전등?수도 사용을 금지하고 불도 때주지 않아 학생들이 깜깜한 방에서 끼니도 굶고 지내게 되는 사태를 연출하기도 하였다.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교원들의 전제적 태도로 인하여 일어난 맹휴에 대한 학교당국의 대응은 강경일변도로 나타났다. 그 이유는 학생이 처할 태도가 아니고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잘못된 점이 있기 때문이고, 나아가서는 학생들의 요구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즉 학생의 맹휴에 대하여 개신교는 근본적으로 부정적이었던 것이다. 그결과 학생맹휴는 계속 되었고 사회는 외국인 선교사가 경영하는 비교적 저명하다는 곳에서 특별히 맹휴가 많이 일어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학생맹휴를 다루는 기자는 학교가 너무 전제적이고 교장의 교육방침이 너무도 시대에 뒤떨어져서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개신교가 선교사들의 전제적 지도로 운영되며 그로 인하여 개신교는 여러 면에서 조선사회의 발전을 저지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선교사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개신교는 시대적 변화에 진정한 대처방안의 모색하지 않았고 그 결과 학생맹휴에 대하여 권위적인 방법으로 대처하였다.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데에서도 재정적?인적으로 어려움을 이유로 지연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가 변하면서 변화를 수용할 준비가 적극적으로 모색되지 않는 가운데 1920년대 개신교는 근대화의 통로로서의 역할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할 것이다. 더욱기 근대적 지식을 체계적으로 보급하는 학교교육을 통해서도 청년들은 근대적 지식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5. 선교사 비판

 

1920년 선교사 비판의 소재로 떠오른 것은 대영성서공회(大英聖書公會) 사건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김준봉과 정태응이었다. 대영성서공회에서 사무를 보던 정태응과 김준봉은 1919년 급료의 다소(多少) 문제로 성서공회를 사임하고 용산에 있던 '스단다드' 연초회사의 사무원으로 가게 되었다. 그 후임으로는 김규헌?장재선?서상형?정범교?최항래?최덕용 등이 채용되었고, 이들은 대영성서공회와 미국성서공회의 사무를 합하여 보게 되었다. 그런데 '스단다드' 회사가 폐사되면서 그곳에서 일하던 정태응씨와 김준봉가 다시 성서공회의 사무를 보게되고 그들 후임으로 일하던 6명 중 4명을 특별한 이유없이 해고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4명의 해고로 인하여 성서공회 내부에 분쟁이 일어나고 해고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동공제회가 이 사건에 관여하게 되었다. 신문은 이것을 기사화한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사건을 보도하는 태도이다. 4명의 해고를 인격 생명 도덕의 3가지와 관계되는 문제로 보면서 "그와 갓튼 신승한 공회에 이러한 박절한 행동을 한다면 다른 사회난 더욱 말할 수 업슨즉"이라 하여 교회의 처지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비판하였다. 또한 정태응과 김준봉의 처사는 기독교 신자로서는 할 수 없는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려는 것으로 비판하고 성서공회의 총무인 민휴(閔休)의 행동도 상식밖의 처사로 김?정 양씨의 취업운동에 놀아난 것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노동공제회만이 아니라 각 종교사회에서 간섭하여 해결할 문제라고 보고 간섭을 촉구하고 있다.

이 사건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그래서 더 이상 보도되지 아니한다. 그런데 문제는 중대한 사건이 아닌 것을 신문기사화하는 의도이다. 그 의도는 기독교 기관의 직원 해임 문제를 통해서 그 기관의 일과 처리내용의 잘못을 기사화하여 사회적으로 개신교를 비판하려는 의도를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즉 개신교인들이 종교적으로도 비도덕적인 행위를 할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비도덕적인 행위를 서슴없이 하며 선교사들도 일관성 없이 일을 처리하고 있음을 보여주어 개신교 사회의 비도덕적인 면을 문제시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작용하였다고 하겠다. 더 나아가서는 선교기관 직무수행에서 보이는 무원칙성과 선교사들의 자의성(自意性)을 문제시한 것이며 무원칙성과 자의성의 원인인 서양인의 전제적 태도를 비판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1920년대 초 개신교에 관한 사회의 태도는 상당히 비판적이었으며 그것이 성서공회의 직원을 해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개신교인들의 비도덕성을 문제삼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하겠다. 그리고 개신교의 비도덕성뿐아니라 직무처리의 무원칙성과 선교사들의 자의성을 부각시킴으로써 선교사를 중심으로 전제적으로 운영되는 개신교를 비판하려는 의도가 크게 작용한 부분이었다고 생각된다.

개신교 비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선교사를 비판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제사문제는 우리문화를 모르는 선교사들이 제사를 야만적인 우상숭배로 인식하여 폐기함으로써 민족의 고유한 조상숭배의 전통을 상실하게 한 것으로 보았다. 학생들의 맹휴를 통해서는 선교사들의 교육을 통해 들어오는 서구문명의 저급성과 경영에서 나타나는 전제성을 문제시하였던 것이다.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 비판에서는 개신교 종교성을 미신으로 비판함으로써 선교사들이 주도하는 개신교의 근대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개신교의 근대화가 1920년대의 수준에서 사회적인 검토의 대상으로 부각되었고 결과는 개신교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3?1운동 이후 파리평화회의와 국제연맹에 대한 국민적인 기대가 허물어지고 연이어 1921년의 와싱톤회의에 대한 기대마저 무너지면서 미국은 보편적인 선(善)을 행한다는 허구에서 벗어나 다른 강대국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정책을 실시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과 동일한 시기에 진행되었다. 그에 따라 개항 이래 미국에 대하여 가졌던 무정형적인 호감의 실체를 파악하게 되고 개신교를 중심으로 전개된 외교적 독립운동 방법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팽배하면서 개신교 비판은 사회적 의미를 더하여 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한말 이후 미국에 대한 외교적 기대가 번번히 무너져왔고 파리평화회의와 국제연맹, 워싱톤회의를 통하여 미국 외교의 실체를 인식하면서 선린(善隣)으로서의 미국에 대한 기대가 회의와 절망으로 변화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절망이 조선에서 미국을 대변하는 개신교를 통한 근대화와 외교적 노력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이해하게 하고 서구문화에 매몰된 개신교의 근대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연계되었다. 게다가 근대주의의 모순이 조선의 개신교를 지배하는 선교사들의 종교적 권위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게된 것이다. 여기서 개신교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형성되었고 근대주의의 원천인 선교사에 대한 비판이 자리잡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 대한 기대가 좌절되면서 당시 극동의 주요세력으로 식민지 해방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있던 소비에트와 사회주의로의 경사를 유도하게 되었다고 보인다. 미국을 통한 외교적 독립운동의 허구성을 비판하는 매개로서 개신교와 선교사에 관한 비판이 진행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5. 맺음말

 

1910년대 후반부터 나타난 개신교에 대한 비판은 개화기를 거치면서 개신교를 통해서 들어온 근대화가 사회적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가운데 나타났다. 즉 개신교라는 종교적 통로가 가지는 한계, 미국적 문화의 한계, 전달자인 선교사들의 인간적 한계가 복합적으로 만들어낸 개신교의 한계가 사회적으로 모순을 빚어내는 상황에서 나타난 초기 현상이었다. 여기에 1920년대라는 세계적인 전환기를 맞아 조선 사회도 대전환을 맞고 있었다. 더구나 3?1운동의 실패라는 민족적 시련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더욱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일제의 문화정치가 민족분열을 획책하고 경제적으로 지주와 자본가들은 자본주의화의 길에 동참하면서 노동자?농민과 경제적으로 대립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에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세력의 재편성으로 인하여 새로운 정치적 이념인 사회주의가 확산되고 있었다. 이러한 대전환기를 맞이하여 우리 민족은 일제 식민정책에 대응하여 민족의 해방을 이루어야 하는 민족적인 과제를 새롭게 정비하고 그 방법론을 모색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과제의 모색의 전제 조건으로 이전의 방법론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가 일어나고 특별히 3?1운동의 방법론과 연결되어 근대화의 주도세력으로 성장한 개신교의 방법론이 검토의 대상으로 부각되었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개신교의 수용과정에서 문제시되었던 부분을 중심으로 사회의 비판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제사문제였다고 생각된다. 우상숭배를 이유로 폐기된 제사는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는 가장 중요한 사회의 지도 논리였는데 이것이 간단하게 폐지된 것이다. 따라서 제사를 폐기한 개신교의 수용은 개신교를 통로로 한 근대화가 가지는 전통의 몰이해로 이해되고 그 원인은 서구의 우월주의 내지 침략성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것이 개신교의 우상숭배 교리를 사회적인 문제로 인식하게 한 부분일 것이다. 반면에 개신교는 제사를 종교적으로 정리하는 계기를 가지게 되었으나 전통의 문제를 전근대적 유치한 의식으로 이해하는 근대주의에의 매몰을 보여주었다.

김익두의 기도치병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은 근대화 속에 나타난 종교적 한계에 매몰되어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기독교를 미신으로 비판한 것이었다.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서 근대주의는 종교적 교리의 옹호라는 미명하에 절대화되고 종교적 교리로 둔갑하는 말폐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근대주의의 산물인 종교적 이적을 절대시하는 현상을 비판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며 김명식의 비판이 사회적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는 이러한 문제에 호교적으로 대처함으로써 사회적 변화에 적절한 대응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개신교에 대한 비판은 개신교의 수용과정 초기 한국의 근대화의 통로로 지대한 역할을 담당하고 개신교의 민족주의자들의 민족해방의 이념을 제공한 미국적 개신교의 제국주의 성격을 비판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개신교는 미국적 개신교가 강요하는 근대주의를 종교적 교리의 형태로 형상화하고 선교사들의 종교적 권위가 교권제도를 통하여 조선의 개신교를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선교사의 종교적 권위를 비판하여 조선적 개신교를 형성할 필요성이 나타났던 것인데 당시 개신교는 이러한 자각을 결여하고 있었다. 오히려 사회가 앞서가며 개신교의 자각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성서공회사건은 선교사들의 권위가 개신교를 장악하고 전제적으로 운영하는 예로서 신문과 노동단체가 문제삼았다고 생각된다. 즉 선교사들이 개신교 기관을 운영하면서 사무원을 자의적으로 고용?해고하는 것을 문제삼음으로써 서양인 우월주의가 통용되는 단면을 보여주려 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선교사의 권위에 종속되어있는 개신교의 비독립성을 비판하고 선교사들의 도덕성과 합리성을 문제시함으로써 선교사들의 권위에 타격을 가하고 새로운 독림운동을 모색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하겠다.

동맹휴학을 통해서 나타난 문제점은 실험기구 사용, 교과 내용 설명의 미숙함 등이 일제가 실시하는 식민지 교육의 수준에도 이르지 못하였음을 비판함으로써 기독교 교육기관에서 실시되는 교육 내용이 얼마나 허술한가를 보여준 것이다. 이것은 개신교적 근대화가 가지는 근대적 의미를 희석하려는 의도가 강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교육수준의 저급함은 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들의 운동으로 나타남으로 현실성을 가지고 일반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1920년대 초 일어난 개신교 비판은 개신교의 근대성에 타격을 가하였고 새로운 근대화 방법론이 필요하다는 사상적 공간을 만들어 내려는 의도가 강한 비판운동이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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