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일반 결혼

첨부 1


 

결혼식에 관한 고대 전통들

 

G. Van Rongen

 

 

서론

 

이 책의 첫 공식적인 독자는 이 책이 헌정된 바로 그 분이 될 것이다. 그는 이 책의 제목에 언급된 주제에 대해서 흥미를 느꼈던 것 같다. 수년동안 그는 서구에서 살았다. 본인이 화란 자매교회들의 총회 개회식 동안 처음으로 그를 만난 것도 바로 그가 박사논문 준비를 위해 머물렀던 곳, 화란에서였다. 우리들은 똑같은 주소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는데 이후에 그는 호주 서부 Kelmscott의 목사로 부임했던 것이다.

 

여기 호주와 마찬가지로 네델란드에서 그는 결혼식이 진행되는 방식에 대해서 점차적으로 익숙해져갔다. 실제로 본인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용어들, 곧 ‘confirmed'와 ’solemnized'를 각각 다르게 사용했는데, 이는 흔히 네델란드에서는 실제적인 결혼식(solemnization)은 시의회의 지도 하에 시청 혹은 군청에서 이루어지고, 이 이후에 '확인식(Comfirmation)'이 교회에서 이루어지는데, 여기 호주에서는 목사는 시의회를 대신해서 결혼식을 집행할 수 있는(solmnize)권위가 부여되는데, 결혼식은 호주에서는 ‘호주 자유 개혁교회 의식(the rites of The Free Reformed Churches of Australia)'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허순길 박사님께서 Armadale와 Kelmscott 교회를 섬기셨을 때 결혼식을 주례할 수 있는 권위를 부여받았는데, 그는 결코 익숙하지 않은 몇몇 의식들을 만나게 되었지만, 친절한 품성으로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결혼식에서 그가 실제로 행하고 말한 것들을 항상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며, 더욱이 이들 전통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이에 허순길 박사 은퇴 기념논문집에 기고해 달라는 따뜻한 요청에 본인은 기쁘게 이 글을 보낸다. 이 책을 읽는 다른 사람들도 흥미를 느낄 것이다.

 

 

결혼식(Solemnization)

 

무엇보다도 영어권 세계에서 사용되는 “solemnization"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 몇 줄을 할애하고자 한다. 물론 이 단어의 의미를 정의 내리기 위해 다양한 사전류를 찾아 인상적인 정의들을 인용할 수 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상언어에서 ‘solemnization'은 단지 신랑, 신부가 남편과 아내가 되었음을 장엄하게 선언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며, ”내가 이제 당신들이 남편과 아내가 되었음을 선언하노라“라는 목사의 법적인 공식문구와 함께 상호적인 서약이 이루어진 다음에 ”장엄하게“ 이루어지는 어떤 것을 의미할 뿐이다. 물론 이것은 결혼식 전체 중에서도 중심적인 것인데, 이는 합당한 권위를 가진 자가 서로를 남편과 아내로 맞아들인다는 쌍방의 서약이 있은 후에 공식적이고 구속적인 선언을 하는 것이다. 여러 의미 중의 하나는 이 결혼식이 시민법의 보호 아래에 놓여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새로운 결혼관계를 창출하는 자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강조가 역사에 걸쳐 변화되어 왔다. 결혼당사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상호진술에 그 강조점이 놓여진 시대와 지역이 있었고, 또 결혼당사자의 아버지, 혹은 친척, 일족이 이 역할을 감당했던 경우도 있었고, 교회가 담당했던 적도 있었고, 오늘날의 서구사회에서처럼 시의회가 감당하는 경우도 있다. 우선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논의해 보자.

 

“누가 이 여인을 내어주는가? (Who gives this woman away?)"

실제의 결혼식이 시작되기 전 주례자는 이와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신부와 그녀의 아버지 혹은 부모들의 뜻에 의한 것인가? 오늘날에는 고대에서처럼 항상 “giving way", 즉 ”traditio puellae"라는 말로 질문을 하고 또 이 질문에 대해 답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이 전통은 오래된 것인 것 같다. 외경은 개혁주의 진영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전통에 비교적 친숙해져 있는 이유는 토비서에 이미 이것이 기록되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토비트 7장과 8장에는 바벨론 포로와 그 이후에 행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결혼식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토비트의 ‘영웅’, 젊은 토비트는 그의 삼촌 Raguel의 딸 사라와 결혼하기를 원한다. 그가 결혼승낙을 공식적으로 요청했을 때 Raguel은 딸의 손을 잡아 젊은 토비트의 손위에 얹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 축복의 말을 더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둘과 함께 하사 너희를 도우시고 풍성하게 축복해 주시기를 기원하노라.』

 

결혼식이 항상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지만, 토비트에 등장하는 이런 장면은 현격하게 유대교적인 색채를 지니는 것은 분명하다. 고대 게르만-이교 세계에서도 신부를 “내어주는 것(giving away)"은 결혼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후대에는 신랑과 신부에 의해 이루어진 진술, 곧 서로를 남편과 아내로 맞아들인다는 진술로 강조점이 옮아가게 되었다. 이는 여자에게 보다 독립적인 위치를 제공한 ‘로마법’의 영향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기간 동안에는 서구에서는 아버지가 딸을 결혼할 남자에게 내어줄 때 딸의 오른손을 잡아 장차 남편이 될 신랑의 손에 넘겨주는 것은 일종의 관습으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행동은 아버지 혹은 양부모의 전적인 동의 아래에서 결혼식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에서도 이해될 수 있다. 이후에 이 아버지의 역할은 신부, 그렇기에 교회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결혼식에 여전히 남아있는 다른 오랜 전통들에 대해서는 논의할 때 언급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딸의 손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문구가 어디에서부터 유래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즉 그것은 결혼식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이 오늘날의 몇몇 결혼식에서도 여전히 남아있는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즉 영국국교회는 “공동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에 그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 ”결혼의 형식(The Form of Solemnization of Matrimony)"라는 부분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구를 읽을 수 있다. 그 다음 목사는 말한다. 누가 이 여인을 이 남자와 결혼하도록 내어줄 것인가? (놀라운 것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없다는 것이다. 이 질문은 신부의 아버지 혹은 친구에 의해 이미 긍정의 답변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기 호주에서 우리는 ‘영국화된’ 사회 속에 살고 있는데, 이런 이유는 ‘우리 자신의’ 결혼식의 첫 순서들에 여전히 “누가 이 여인을 내어줄 것인가?”라는 질문이 때때로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오른손을 잡으시겠습니까?”

이제 목사/주례자가 어떤 시점에 가서는 “이제 오른손을 잡으시겠습니까?”라고 말하는 이유를 알만할 것이다(여기서 물음표는 물론 선택적인 것이 아니며 신랑, 신부가 아니오 라고 말할 수 있는 성격의 문제도 아니다! 이 경우 답변이 아니라 동작이 기대된다. 이에 대한 보다 오래된 결혼식 표현은 다음과 같다. “이제 이들은 오른손을 잡게 됩니다.”). Raguel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딸 Sarah의 오른손을 토비트의 손으로 넘겨준 것이 오랜 세월을 거쳐 전통으로 내려왔고 화란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 호주의 우리 교회들에서도 여전히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물론 오늘날에는 신부의 손을 신랑에게 넘겨주는 사람은 신부의 아버지가 아니라, 결혼식을 집례하는 목사다. 이는 결혼식이 전통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동안에 발생한 역사적 과정의 또 다른 영향이다. 초기에는 결혼식은 몇 사람의 증인들 앞에서 이루어졌지만, 어떤 경우에는 이들 증인들 중 한 사람, 곧 사제가 그 위치를 감당하게 되었다. 사제는 지역공동체에 있어서 주요한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었고 결혼식에서 이런 역할을 하기 시작함으로 사제가 아버지를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이후 곧 교회가 결혼식을 ‘집행(made)'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현재의 우리 전통에서는 목사가 신랑, 신부가 서약을 하고 서로 오른손을 잡도록 되어있다. 이는 시의회로부터 위임을 받아 남편과 아내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 전통은 사실 우리 자신의 전통에 대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인용한 문구처럼 영국국교회의 ‘공동기도서’는 다음의 문장으로 이어진다. 신부의 아버지 혹은 친구의 손으로부터 신부를 맞은 목사는 신랑의 오른손과 신부의 오른손을 마주 잡게 하여 다음과 같이 따라하게 한다.… 그런 다음 신랑은 서약을 하고 신부도 이어서 서약을 한다. 그런 다음 신랑, 신부는 손을 놓는다. 신부는 신랑의 오른손을 잡은 채 목사를 따라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부의 서약 다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뒤따른다. 그런 다음 신랑, 신부는 다시 손을 놓고, 신랑이 신부에게 반지를 끼워준다. 영국국교회의 전통은 반복적으로 오른손을 잡았다가 놓았다가 하는 등 조금은 복잡하다. 우리 전통은 조금은 단순하지만, 그래도 오랜 전통들은 견지되고 있는 것이다.

 

 

반지를 주고받음

 

반지를 주고받는 것은 결혼예식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우리 교회의 공식적인 예식에는 없지만 우리의 결혼식 전통에 언젠가부터 포함된 또 다른 전통 중 하나이다.

 

이 전통에 대한 역사적인 설명을 위해서 우리는 영국국교회의 공식문서에서 다음 구절을 인용하고자 한다. 그런 후에 신랑, 신부는 다시금 손을 놓는다. 그리고 신랑은 신부에게 반지를 건네고 사제와 목사에 대한 예의와 함께 성경책 위에 반지를 둔다. 사제는 반지를 받아서 남자에게 건네며 신부의 왼손 약지에 끼운다. 신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운 채 사제가 가르치는 대로 말하기를 이 반지로 나는 당신과 결혼합니다. 나의 몸으로 당신을 섬깁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당신에게 드립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아멘. 이런 다음 신랑은 신부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뺀 후 무릎을 꿇는다.… 이러한 결혼식 장면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문점을 갖게 한다. 예를 들어 왜 반지여야 하며, 또 반지의 역할은 무엇인가? 왜 신부만 반지를 받아야 하며 우리 전통처럼 신랑은 왜 반지를 받지 않는가? 그리고 무슨 이유로 신부의 왼쪽 약지에 끼우는가?

 

왜 반지인가?

고대에서 반지는 두 사람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이 계약을 맺을 때 사용되었다. 반지는 그 계약의 의무를 다할 것을 보증하는 일종의 상징물이었다.

이후에 반지는 일종의 계약금 혹은 착수금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반지는 신랑이 될 남자가 신부가 될 여자의 아버지에게 드릴 결혼지참금과 그 ‘보증금’(반지 형식으로)은 신부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영국국교회의 결혼식에서는 신랑이 신부에게 반지를 건네주는 것이 여전히 전통으로 남아있는 것인데, 이 경우 신랑, 신부의 반지 교환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결혼식에서도 동일하다. 그러나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국지적, 지역적, 민족적 결혼식 전통의 (재)도입에 대한 상당한 자유가 주어졌기에 많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신랑, 신부가 반지를 서로 교환하고 있다.

 

고대 기독교회는 고대 로마와 헬라문화로부터 전통을 채택했었다. 이는 특히 성경이 ‘보증’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 기업의 보증’으로 표현한 것을 보면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다(엡 1:14;고후 1:22; 5:5). 또한 반지를 사용하는 것은 성경시대에서는 ‘탕자 비유’ 에서도 나타나듯이(눅 15:22) 관계의 성립 혹은 회복을 인치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로마 카톨릭과 영국국교회는 왜 왼쪽 손 약지에 반지를 끼우도록 하는 것인가? 고대 의학에서 약지는 특별한 혈관을 통해 심장과 직접 연결되어 있으며 왼손이 (오른손보다) 심장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아마 이런 이유로 1576년 Milan에서 열린 회의에서 반지를 오른손이 아니라, 왼손에 끼울 것을 결의한 것일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결의가 1576년, 곧 종교개혁 이후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종교개혁가들은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구별되기를 원했고, 그렇기에 오른손 ‘약지’에 결혼반지를 끼웠다.

 

그러는 사이 신부가 신랑에게 반지를 건네주는 것이 점차 전통이 되어갔다. 신부가 신랑에게 반지를 주는 것은 이미 약혼식에서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약혼식 자체가 진지하고도 구속적인 것으로 생각되었기에 한 약혼식 때 이루어지는 고전적인 개혁주의적인 질문형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그대는 여기 하나님 앞과 그의 거룩한 회중 앞에서 여기서 있는 이를 그대의 합법적인 남편/아내로서 인정하는가?

 

위에서 말하는 “반지를 건네주는 것”은 화란의 경우처럼 교회에서의 ‘confirmation'에 선행되는 시의회에서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결혼 solemnization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결혼생활의 시작으로 생각되기에 구속적인 성격을 지니는 약혼식에 관한 것이다.

 

마틴 루터가 개혁한 결혼식 요소 중 하나는 신랑, 신부의 상호적인 반지교환이었다. 그러나 신랑, 신부가 서로에게 반지를 주는 전통을 도입한 것은 루터가 처음은 아니었는데, 이는 중세의 몇몇 지역에서는 이미 전통이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동일한 근원으로 가지는 고전적인 개혁주의 결혼예식서와 몇몇 다른 예전서들, 즉 하이델베르크를 중심도시로 가지고 있는 Palatinate사이에는 동일한 문구가 있다는 사실은 결코 놀라운 것이 아니다. 그 동일한 문구는 다음과 같다.

 

그대가 반지를 가지고 있다면 이제 서로에게 주십시오.

우리의 현재의 결혼식에서는 그러한 문구가 포함되어 있지는 않지만, 반지를 서로 주고받는 결혼식은 사실 고대 개혁주의 전통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면사포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신부들은 결혼식에 면사포를 쓴 채 등장한다. 면사포를 쓰는 경우 주례자가 면사포를 쓰도록 ‘교훈한 후’ 신랑이 신부의 면사포를 ‘벗기도록’ 하여 남편으로서 처음으로 그녀에게 키스하는 기회가 되게 한다. 이것이 신부가 면사포를 쓰게 된 기원이 아니며 본래의 의도도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오늘날에서조차 많은 나라에서 베일(면사포)은 결혼한 여자의 위치를 확증시켜준다. 고대에서는 신부가 결혼식 전날 밤에 “베일로 가리워졌다”. 다음날 그녀는 마치 이미 결혼한 여성인 것처럼 나타나게 되는데, 이는 약혼의 구속적인 성격에 근거한 것으로, 약혼은 이미 결혼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로마사회에서 그러했는데,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velatio nuptials(결혼의 베일)”을 채택했다. 이후에 신부는 이런 모습으로 결혼식장에 나타났던 것이다.

 

결혼식의 어느 순간에 가서 신랑이 신부에게 키스를 하게 되어 있는데, 이 직전에 신랑은 면사포를 걷어올려야 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렇기에 본래는 면사포를 걷어올리는 것은 없었는데, 이는 신부가 결혼했다는 상태를 보여주는 상징을 상실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결혼식에서 신부가 면사포를 쓰는 본래적인 의미는 이와 비교될 수 있는 또 다른 전통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중세의 어떤 지역에서는 신랑과 신부를 하얀색 혹은 붉은 색 베일을 쓰는 것이 전통이었다. 이 상징적인 행위는 그 자체의 이름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obnubilatio capitis"(머리에 베일을 쓰는 것)

 

우리는 이 인상적인 라틴어를 인용했는데, 이는 신부가 면사포를 쓰는 것이나 결혼식에서 면사포를 쓰고서 등장하는 것은 그녀가 이제 결혼한 상태의 여자가 되려고 함을 보여주는 일종의 상징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결혼한다”라는 라틴어 동사는 “nubere"인데, 이는 문자적인 의미로 ”베일을 쓰다“라는 의미이다. 많은 라틴어를 앵글로화 시킨 영어가 아직도 ”nuptial"이라는 형용사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신부가 베일을 쓰는 것은 참으로 결혼식(marriage solemnization ceremony)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결혼식에 대한 배경설명은 고대 전통들이 아직도 흐르고 있지만, 그 본래적인 의미로 항상 이해되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축복

 

개혁주의 진영에서 신랑, 신부의 결혼생활에 대한 축복을 위한 기도는 항상 결혼식에 있어서 하나의 본질적인, 아니 가장(the) 본질적인 요소로 생각되어져왔다. Palatinate에서는 결혼식은 다음과 같은 공식문구로 선포되었다. 신랑, 신부는 이제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거룩한 결혼생활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신랑, 신부는 그들이 이 그리스도인의 결혼생활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까지 축복 속에 결혼생활을 완성하기를 위해 기도하는 보편적인 그리스도인의 기도를 소망한다. 위와 거의 동일한 공식문구가(특히 기도에 대한 문구) 20세기 초에 그 문구가 수정될 때까지 거의 3세기 이상이나 화란에서 사용되었다. 화란 교회들이 넘겨주지 않은 것은 Palatine 선언의 마지막 단어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May God give His blessing. Amen.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호주에서 사용되는 최근판에 등장하는 두 곳에서 신랑, 신부를 위한 축복에 대한 문구를 발견하게 된다. 목사가 신랑, 신부가 남편과 아내가 되었음을 선언한 직후 그는 말한다.

모든 은총의 아버지께서 당신의 은총으로 그대들을 이 거룩한 결혼으로 부르시고 참된 사랑과 성실로 두 사람을 묶으시고 축복을 내려주시도다.

이 말 이후에는 다음과 같이 선포된다.

 

형제, 자매된 신랑, 신부여 우리 주님께서 그대들을 풍성하게 축복해 주셔서 모든 경건과 사랑과 일치 속에서 장수하고 거룩한 삶을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들 두 문장 중 어떤 문장이 결혼식 동안에 신랑, 신부에게 향하는 축복, 혹은 축도로 간주되는가?

 

이에 대한 답변을 위해서는 우리는 다시금 역사를 더듬어 가보아야 한다.

13세기 이후로 세 가지 문구가 구분되어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첫째 문구는 신부의 아버지 집에서 이루어지는 약혼식에 사용되는 문구이다. 젊은 신랑, 신부는 엄숙하게 그들이 서로를 남편과 아내로 받아들이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결혼 계약서가 작성되어 서명하고 신랑은 신부에게 반지를 건네줌으로써 이를 확증한다. 두 번째 단계는 교회 현관 앞에서 이루어지는데, 이는 실제적인 결혼식으로서 최종적인 서약이 이루어지고 사제는 신랑과 신부에게 엄숙한 공식문구로서 “함께 말한다.” “이제 내가 그대들이 남편과 아내가 되었음을 공포하노라” 이렇게 선포된 직후(때로는 이틀이나 사흘 이후) 신랑, 신부측 사람들은 결혼미사가 이루어질 교회로 들어간다. 이 미사에는 신랑에게 대한 축도가 포함되어 있다. 이후에는 이들 마지막 두 단계가 함께 이루어지기도 했다.

 

결혼식의 성례전적인 성격을 거부한 종교개혁의 결과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를 기원합니다”(축복을 선언하노라가 아니라). 우리 전통의 결혼식에서는 “이제 내가 그대들이 남편과 아내가 되었음을 선언하노라”라고 바로 이어서 말하는데, 이는 축복 혹은 축도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 공식문구의 맨 마지막 표현들에 대한 것은 어떠한가? 그 문구 다음에는 기도가 뒤따르는데, 이는 전체 결혼식에 있어서 본질적인 부분인 것이다. 이 기도하는 신랑, 신부의 결혼식에 대한 축복을 위한 기도인 것이다. “Grant them Thy blessing… (저들에게 축복을 내리소서)”라고 되어 있다. 이런 표현을 볼 때 우리는 우리 개혁주의 결혼식 전통에서는 신랑, 신부에 대한 어떤 축복 혹은 축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이들 문장에 대한 오해로 인해 결혼식이 일종의 “consecration"(많은 화란 사람들이 ”inzegening"이라 부르는 것)이라는 부정확한 통속적 오해가 등장하게 된다.

이는 로마 카톨릭적인 개념인데, 그들에게 있어서 결혼은 사제의 중재를 필요로 하는 또 다른 하나의 성례이지만, 우리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신랑, 신부의 결혼생활 위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를 기도할 뿐인데, 이는 사제의 중재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세로부터 유래한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결혼식 전날 밤에 이루어지는 신부의 얼굴을 면사포로 가리는 것에 대해서 이미 논의했다. 이 “obnubilatio capitis"는 예식을 설명하는 동시에 축복의 역할을 가지는 기도를 동반한다. 그 기도에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한 몸이 되게 하셨다는 사실이 고백된다. 또한 결혼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사이의 연합의 상징이라는 것도 말해진다(엡 5:32). 1509년 York 예식서에는 이 점에서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여기서 성례전적인 축복이 시작된다.“ 세 번째 가서 하나님께서 결혼생활 위에 두신 축복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관련해서 언급된다. 기도는 신부를 위해 간구로 이어진다. 이 젊은 여인이 구약성경의 경건한 여인들의 모범을 따르게 하시고 사탄과 죄악의 권세를 이기게 하소서, 후대에는 이 ”신부에 대한 축복“이 결혼미사에 포함되어졌는데, 이는 우리 결혼예식서의 초기판과 최근판에 있는 중세시대의 ”신부에 대한 축복“의 몇몇 요소는 그 시절로까지 소급될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해 준다.

 

나는 ‘개혁주의’라고 주장하는 어떤 교회에서 행해진 그런 결혼식을 찍은 사진 한 장을 본적이 있다. 그 사진에는 축복을 내리는 자세로 무릎을 꿇은 신랑, 신부 위에 손을 얹고 있는 목사가 보인다. 그 결혼식은 한 궁중의 예식이었다. 그러나 그 결혼식은 “축복”이라는 말에 대한 오해를 드러내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 결혼예식에는 어떠한 특별한 축복 혹은 축도도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단지 반복되는 기원과 기도만이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이것은 또한 몇 세기 동안 개혁주의 진영 안에서의 결혼예식이 “The desire a common Christian prayer of the whole congregation"라는 문구로 시작된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가장 오래된 개혁주의 결혼예식서로 간주되는 William Farel의 결혼예식서에서 ”축복“이라는 단어는 오직 기도문에서만 등장한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개혁이었다.

 

 

결론

 

만약 우리를 위해서 여기 호주에서 목회하셨던 존경하는 허 목사님께서 다시 한번 호주의 자유 개혁교회(The Free Reformed Churches of Australia)에서 결혼식을 주례하실 수 있는 위치에 계신다면 목사님께서는 우리의 결혼식에서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포함된 몇몇 전통들의 기원을 잘 아실 수 있을 것이다. 은퇴하신 이후라도 목사님의 왕성한 활동을 기대해 본다.

 

 

 

 

 

 

 

 

혼인 서약 예식서

(FORM FOR THE SOLEMNIZATION OF MARRIAGE)

 

 

 

공 표 본 당회는 씨가 하나님의 법령에 따라 혼인 생활 을 시작하려는 자신들의 의향을 표시했음을 공표합니다. 이들은 주님의 이름 안에서 거룩한 생활을 시작하고 또 그분께 영광을 돌리고자 간절 하게 바라고 있습니다. 만일 법적인 반대가 제기되지 않는다면, 이 예식 을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계속 진행하고자 합니다.

 

 

소 개 씨, 본 당회는 혼인 생활을 시작하고자 하는 두 분의 소망을 회중들에게 공식적으로 알렸고, 또 합법적인 반대가 나오 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이제 주님의 이름 안에서 두 분의 혼인 서약 예 식을 진행하고자 합니다.

 

 

혼인제도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서 결혼에 대하여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바를 요약한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혼인이 당신을 기13:4 쁘시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도이므로, 반드시 모든 사람들 가운데 존중되어야 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 1:27 버지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뒤에, 사람을 당신의 형상에 따라서 창 2:18-24 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야웨 하나님께서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 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가운데 자기를 위한 적합한 조력자 를 발견하지 못하였을 때에, ‘야웨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 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살로 대신 채우시고, 야웨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 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내 살 중에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 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웨께서 오늘날도 역시 서로 서로에게 남편과 아내로 주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의 팔에 의해서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이생에서 이들을 나눌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가나 혼인 잔치에서 당신의 영광을 2:1-11 드러내시면서 결혼 제도를 존중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러므로 하나님19:6 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실 때에, 우리 에게 혼인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기에 결코 파기될 수 없다고 가 르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혼인을 이와 같이 강력한 결속으로 제정하셨기 때문에, 그 2:16 분은 이혼을 미워하시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누구든지 16:9 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 함이니라 ’는 말씀으로 동일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고전7:2 주님께서 음란을 금하셨듯이,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며, 여자마다 자 기 남편을 두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 몸은 성신의 전으로서 보전 고전6:19, 되어야 하며 또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기 때 20 문입니다.

 

 

심오한 신비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혼인에서 남편과 아내의 연합은 그리스도와 교회 5:22-23 사이의 관계를 반영하는 심오한 신비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께서13:1 교회의 머리시듯이, 남편은 자기 아내의 머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의 교회를 끝까지 사랑하셔서, 교회가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시기 위 해서 자신을 버리셨듯이, 이와 같이 남편도 자기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돌보고, 보양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 이, 아내도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고, 존경하며, 남편의 사랑으로 돌봄에 벧후3:5 자신을 남편에게 맡겨야 하며, 하나님을 신뢰했던 경건한 여인들의 본 을 따라서 자신들의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모든 것에서 서로를 도와야 하며, 진심으로 서로의 죄와 단점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더욱 더 그리스 도와 그의 교회의 연합을 자신들의 혼인에 반영해야 할 것입니다.

 

고전7:28 사도들이 말씀한 바와 같이, 비록 혼인한 자들이 생활 속에서 어려움을 만나게 될 것이고 또 자신들의 죄 때문에 많은 난관과 고통을 받게 될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러나 그대들은 생명의 은혜의 상속자들답 게 그분의 도움과 보호하심을, 심지어 그대들이 이러한 것을 거의 기대 하지 않을 때조차도, 항상 받을 수 있다는 약속을 또한 믿어야 합니다.

 

 

혼인의 목적 하나님의 말씀은 동시에 우리에게 결혼의 목적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로, 남편과 아내는 진실한 사랑과 거룩함으로 이생과 내세에 속 한 모든 것 안에서 서로를 신실하게 도우면서 함께 살아야 할 것입니 다.

 

1:28 둘째로 모든 인류는 혼인하기를 계속하되 중단해서는 안 되며, 또 하 6:4 나님의 축복하심 하에서, 남편과 아내는 결실을 맺어야 하며 동시에 번 성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남편과 아내가 자녀를 낳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라면, 그들은 주님의 참된 지식과 두려움으로 주신 자녀들을 양육해야 할 것입니다.

 

( 목사는 그들에게 일어날 것을 요구해야 한다.)

 

 

혼인의 의무 신랑과 신부여, 주님께서 결혼에서 그대들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십시오.

 

신랑이여, 하나님께서 당신을 당신의 아내의 머리가 되도록 세우셨다 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대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를 사랑하 시고 자기를 교회에 주신 것처럼, 아내를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대의 아내를 인도하고 보호하고 위로하십시오. 지혜롭게 아내

벧전3:7 와 함께 살며, 또 아내를 존중하십시오. 왜냐하면 그대의 아내는 그대와 함께 영생을 상속할 자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기도가 막히지 않도록 4:28 하십시오. 그대를 부르신 소명에 따라 매일 신실하게 일하십시오. 이는 그대가 그대의 가정을 지지하고 또 그들이 필요한 것을 채워주기 위해 서 입니다.

신부여, 그대는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그대의 남편을 사랑하 고 또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의 인도를 받아들이고 또 선한 모든 일에 그를 도우십시오. 그대의 가정과 가솔들을 잘 돌보십시오. 또 사랑과 거 룩 안에서 단정하게 살아가십시오.

 

항상 서로를 도우며 또 서로에게 신실하십시오. 주님께서 교회와 세 상에서 그대들에게 주신 부르심을 부지런히 감당하십시오. 하나님의 확시편128:1,2 실한 약속, 즉 ‘야웨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 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는 말 씀을 믿으십시오.

 

씨, 그대들은 이제 주님께서 그대들에게 요구하시 는 것과 그대들에게 약속하시는 것을 경청하십시오. 은혜로우신 우리 시편124:8 하나님께서 그대들에게 남편과 아내라는 이러한 방식으로 함께 살수 있 도록 힘과 신실함을 주시기를 바라며, 또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님의 이름 안에서 그대들의 도움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목사 : 이제 그대들의 오른 손을 잡으시겠습니까?)

 

 

결혼 서약 (신랑에게)

 

씨, 그대는 주님과 증인들 앞에서 여기에 있는 씨 를 그대의 법적인 아내로 받아들일 것을 여기에서 선언하십니까? 그대 는 거룩한 복음에 의거해서 아내를 진실하게 사랑으로 인도할 것과, 지 켜줄 것과 거룩함으로 살아갈 것을 약속하십니까? 그대는 아내를 결코 버리지 않고, 좋은 날이나 궂은 날이나,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건강 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그대 두 사람이 살고 있는 한, 다만 항상 아내 에게 진실할 것을 약속하십니까?

 

당신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대답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신부에게)

 

씨, 그대는 주님과 증인들 앞에서 여기에 있는 씨 를 그대의 법적인 남편으로 받아들일 것을 여기에서 선언하십니까? 그 대는 거룩한 복음에 따라 남편을 사랑하고 복종하며, 그를 도우며, 또 거룩 안에서 남편과 함께 살아갈 것을 약속하십니까? 그대는 남편을 결 코 떠나지 아니하며, 좋은 날이나 궂은 날이나,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 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그대 두 사람이 살고 있는 한, 다만 항 상 남편에게 진실할 것을 약속하십니까?

 

당신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대답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선포 (목사:) 나는 이제 그대들을 남편과 아내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하 나님의 은혜로 그대들을 거룩한 혼인 관계로 부르신 모든 자비의 아버 지께서 그대들이 진실한 사랑과 신실함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셨고, 또 그분께서 그대들에게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신랑과 신부여,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그대들은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며, 또 우리는 그대들과 함께 그대들을 위해서 그분께서 그대들이 한 서약을 지킬 수 있도록 해 주시고 또 그대들에게 축복주시기를 기도드릴 것입니다.

 

 

중재기도 전능하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당신은 태초로부터 사람이 혼자 살 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사옵니다. 우리는 당신께서 이 형제 자매들 이 서로 결혼할 수 있도록 해주시고, 그들이 하나 되게 하심을 인하여 당신께 감사드리옵니다.

 

우리는 당신께 비오니, 이들이 함께 참된 믿음 안에서 당신의 뜻대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당신의 거룩하신 영을 이들에게 허락하여 주옵 소서. 이들이 죄의 권세를 격퇴할 수 있도록 도우시고, 또 당신 앞에서 거룩하게 살도록 도와주옵소서. 당신의 얼굴을 이들에게 향하여 드사, 이들을 당신의 부성적인 팔로 번영할 때나 어려울 때나 인도하여 주옵 소서. 이들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으신 언약의 약속들에 따 라서 당신의 축복을 허락하옵소서. 만일 당신께서 이들에게 자녀 주시 기를 기뻐하신다면, 당신의 언약을 이들과 이들의 자녀들과도 견고하게 하여주옵소서. 그리고 이들이 자녀들을 주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양육할 수 있도록 하옵시고, 당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며, 교회를 지지하게 하 여주옵소서.

 

이들이 당신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와 교통하며, 진실한 사랑의 조 화 속에서, 이들의 이웃의 유익을 위해서 살게 하옵소서. 이들이 온 교 회와 함께 어린양의 혼인 잔치 날을 사모하게 하옵소서.

 

자비로우신 아버지시요, 영원부터 사시며 통치하시는 참 진실하신 하 나님이시며, 당신과 성신님과 함께 계시는 당신의 사랑하신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아멘.

 

(덧붙을 수도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 이루어 지리이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하여준 것같이

우리 빚을 탕감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오직 우리를 악 한자에게서 건져주시옵소서.

이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당신께 있사옵기 때문입니다.

아멘.

 

 

축복 형제, 자매 , 우리 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풍성하게 축복하시 며 또한 그대들에게 모든 경건과 사랑과 연합 안에서 함께 장수하며 거 룩한 삶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아멘

 

 

 

 

 

 

 

 

 

 

 

 

 

 

서 론

(INTRODUCTION)

 

 

우리 대부분 사람들에게, 혼인 확증 예식서(Form of Solemnisation of Marriage)은 매우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예식문은 우리가 결혼식을 거행할 때에 낭독되었고, 또 우리는 짐짓 열심과 전율로서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우렁찬 소리로 질문에 답했습니다. 이 날 이후로, 우리는 생활의 분주함으로 인해서, 이 예식서로부터 우리를 멀어지도록 만든 힘든 생활이 계속되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또 다른 어떤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은 잠정적인 결혼 상대자를 찾도록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두신 충동에 응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와 같은 상대자를 어떻게 찾을 수 있습니까? 실제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혼인은 어떤 것입니까? 어떻게 이들이 혼인을 준비할 수 있습니까? 혼인 예식서가 잘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이 예식문은 이와 같은 질문들 또 이 보다 더 많은 질문에 대해서 정금같은 답변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예식서로 곧바로 들어가기 전에, 저는 신앙 고백을 한 사람들이 왜 결혼 예식서를 공부하는 과정이 있어야 하는 지에 대한 이유를 숙고하기 위해서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왜 결혼 확증 예식서를 공부해야 하는가?

1. 결혼에 대한 세속적인 힘(influences)과 싸우기 위해서

 

결혼 예식서를 공부하고 이해해야 할 최고의 필요성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세속화가 가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속화(secularisation)란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배제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속 사회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하나님을 향해서 등을 돌려서 무시하고 있으며,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이러한 경향은 손이 닿지 않았던 혼인 제도도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모든 이생의 일로부터 하나님을 배제시키는 것은 하나님과 혼인 사이에 있는 연결고리를 단절시키는 것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연결고리를 단절시키는 것은 혼인이 하나님이 세우신 법령이라는 것을 거부하는 것인데, 다시 말해서 혼인 제도를 하나님께서 창설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만일 누가 하나님이 참이시며 또 그분이 결혼 제도를 제정하신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 다음 따라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혼인을 특징짓는 것이 무엇이며 또 혼인에 속해 있는 것이 무엇이냐를 구체적으로 기록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누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 다음은 필연적으로 주장하게 되는 것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서 혼인에 대해서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결혼을 하나님으로부터 절연시켜버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더 이상 혼인이 하나님의 의해서 결정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혼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 단순히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일종의 계약정도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이혼에 대해 공론(public thinking)으로 자리 잡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실제로 계시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당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혼인이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till death do us part)’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권리를 갖고 있습니까? 그리고 누가 중혼(bigamy)이나 일부다처제(polygamy)를 반대하고 오직 한 배우자와만 혼인하는 것(monogamy)이라고 말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까? 누가 혼인은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서 행해져야 한다고 말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없는 것이 분명한데, 무슨 목적으로 혼인 생활에서 자녀들을 낳겠습니까? 혼전 관계를 한들 어떻습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무엇이 혼인 생활을 특징짓는 것인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하시지 아니하셨다면, 그렇다면 남편과 아내의 각각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혼인 생활(marriage bond)에 있어서 ‘남성의 머리됨/여성의 복종’이라는 개념이 도전받거나 취하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 사회가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부인하는 선택권이 주어져 있다면, 혼인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가 도전받고 있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전혀 아닙니다.

 

더욱 혼란스러운 것이긴 하지만, 동일한 질문들과 대안들이 우리 사회의 불신자들에 의해서 요구되고 포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소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주장하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도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최근에 ‘동성애에 관한 자유주의적 견해 때문에 진보주의자로 간주된’ 페르쓰 대주교(Archbishop of Perth)인 피터 카레이(Peter Carnley)는 호주 엔젤리칸 쳐치(Angelican Church of Australia)의 선임자로 선출되었습니다. 호주 연합교회(The Uniting Church of Australia) 역시 동성애 결혼을 허용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사회의 사고 구조나 행동 양식이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은 전혀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러한 영향을 호주 개혁교회(the Free Reformed Churches of Australia) 안에서도 혼인 생활이 와해되고, 가정들의 수가 줄어들고, 남편들이 가정의 머리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또 아내들은 자신의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돕는 배필이 되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고 있는 것을 목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슬픈 현실이지만,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와 접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가 혼인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을 포함하여, 주님과 주님의 말씀에 우리가 착념하도록 명령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자녀로서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또 일치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결혼 법령을 온 회중들에게 가르쳐야 할

책임이 당회에 있습니다.

 

혼인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와의 관계를 자신들의 혼인 생활에 반영하도록 성경은 명령하고 있습니다. 동일하게 성경은 주님께서 당신의 언약 백성들을 믿는 두 부모들에게 돌보도록 맡기셨다(원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공통된 사랑으로 함께 연합한 부모들은 하나님의 어린 자녀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혼인 생활(marriage bond)은 다음 세대가 주님을 섬기도록 양육을 받는 안식처가 되어야 합니다.

 

직분자들은 자녀들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양 무리들을 돌보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직분자들은 반드시 혼인을 감독하는 것과 관계되는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 교회들이 혼인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결정하여 교회 헌법 안에 합의해 놓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67 항 혼인

 

당회는 회중들 가운데 회원들이 오직 주 안에서 결혼하고, 또 당회에 의해서 권위를 받은 자로서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게 혼인한 것에 대해서만 확증하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이 혼인 확증은 채택된 예식서를 가지고 사적인 의식으로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각 교회들이 혼인과 관계하여 고유한 과업을 받았고, 또 기독교 결혼에 대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속 사회의 쏟아지는 공격을 받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자신의 가르치는 사역에 있어 혼인에 더욱 관심을 집중해야 할 확실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을 한 사람들은 혼인 확증 예식서를 공부하는 것이 이렇게 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3. 혼인 예식문은 혼인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그릇이다.

 

혼인이라는 제목에 관한 유용한 책들이 결코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책들을 읽어보면 확실히 어떤 유익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들의 많은 부분에서 성경과 성경이 혼인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에 대해서 함보여주고 있지 못합니다. 종종 남자건 여자건 할 것 없이 대부분의 상담자들이 자신들의 생각, 경험, 견해들을 종이 위에 갈겨놓았습니다. 이러한 상담자들의 생각이 기독교식으로 포장되어 있을 수 있지만, 실상은 인본적인 사고방식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여하한 인본적인 생각은 혼인에 대한 세속화 영향들을 반대하기 위해서 필요한 처방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혼인에 대한 유일한(THE) 지침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혼인관한 다양한 측면에 관해서 제정해 놓으신 것을 반드시 차례대로 배워야 할 것이 성경에 있습니다.

 

 

혼인 확증과 혼인 예식서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

 

중세를 지나오면서, 로마교회(Roman Catholic Church)는 혼인을 하나의 성례라고 선언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5:32에서 ‘이것은 큰 비밀이라(This is a great mystery)’라는 한 말씀에서 도출한 것입니다. 신약을 기록한 언어인 희랍어에서, 여기에서 사용한 신비(mystery)’라는 단어를 똑같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벌게이트(The Vulgate)에서, 신비(mystery)’라고 하는 이 단어가 이 본문에서 ‘성례(sacrament)’로 번역되었습니다. 로마 교회는 라틴어 성경책인 벌게이트를 사용했고, 그래서 이 본문으로부터 혼인 제도를 하나의 성례로서 선언할 수 있는 여지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만으로 로마교회는 여러 가지 성례들을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람에게 은혜를 전달하시는 수단인 은혜의 방편들로서 믿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교회는 혼인을 한 성례로 생각하여 사제들의 참여와 축복을 요구하기 때문에 모든 혼인 의식을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여하한의 이유로 인하여 혼인을 이 교회에 의해서 확증하지(solemnised)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혼인을 진정한 혼인으로 만드는 것은 확증식이 아니라 혼인의 절정(즉 성관계를 말함)에 있다고 교회는 대답했습니다. 참 혼인의 본질은 ‘육체의 지식(carnal knowledge)’에 있다고 로마 교회는 주장합니다. 이 이유로 인한 논리를 확대시켜 나가는 것은 다른 사람과 육체인 지식(성교)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사실상 교회의 축복을 받지 못한 결혼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렇게 위대한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이전 시대에 유럽에서 사실상 수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혼인이 이었습니다. 이 점에 관해서 우리 시대의 모습과 대단히 흡사합니다.

 

루터와 칼빈과 같은 개혁자들은 하나님께서 원래 희랍어 번역에서 혼인과 관련하여 ‘성례(sacrament)’라는 말을 사용하시지 않으셨다는 논증을 펼치면서 로마 교회가 혼인을 성례라고 생각하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성경 어디에서도 혼인을 은혜의 방도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 역시 ‘육체의 지식’이 혼인과 동일하다는 생각을 전적으로 거부했습니다. 개혁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서 혼인에 관해서 당신의 말씀에 가르치시고 있는 것 즉 혼인이 무엇을 의미하며, 또 누가 결혼할 수 있는 지를 회중들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혼인 예식서는 1560년대에 씌어졌습니다.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벨직 고백서(1561년)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1563년)이 작성될 같은 년대였습니다. 교황파 정부에 의해서 핍박이 극심했던 시기에 우리의 선조들은 개혁 신앙을 이 고백서 안에 작성했습니다. 이 시기에 개혁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개혁신앙을 고백하고 확고한 개혁 신앙의 믿음을 갖고 결혼하려는 젊은 결혼 예비자들에게 실제로 엄청난 핍박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혼인 예식서를 작성한 것은 우리 선조들이 혼인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는 중요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이 예식서는 본질적으로 종교 개혁시대에 작성한 예식서와 똑같은 것입니다.

 

종교 개혁시기에 교황파 교회는 모든 혼인을 관장했습니다(solemnised).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은 혼인이 교회에서 제정한 성례가 아니기 때문에, 정부가 혼인 확증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네델란드 정부는 1809년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영국 정부는 혼인 확증에 관하여 정부에게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이 권위를 교회들에게 위임하였습니다. 호주 정부는 이러한 영국의 행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에, 호주 자유개혁교회(FRCA)안에 있는 모든 교회가 혼인 예식 주례(it's leadership)에서 확증까지 특정한 사람이 주관할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혼인식에서 호주 자유개혁교회에 의해 채택된 혼인 예식서를, 이 예식서는 찬양의 책(Book of Praise)에 인쇄되어 있는데, 사용하는 한에서 집례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정부 관료들에게 교회들이 혼인 확증에 가담할 수 있도록 허용하게 하시고, 또 우리가 교회들이 성경에 기초한 혼인 예식서를 사용하도록 허용한 것에 대해서 참으로 감사드려야 할 제목입니다.

 

비록 호주의 모든 교회 연합체들이 자신들의 고유의 예식서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 모든 것은 우리나라(호주)의 정부 관료들에 의해서 비준을 받아야 할 필요성이 있는데, 이는 1961년 혼인 법령에 의해서 채택된 네 가지 혼인 기준과 일치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호주의 법률에, ‘혼인은 … 자발적으로 일생을 같이 하려고, 다른 모든 사람들을 제외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연합하는 것이다.’고 명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명기한 네 가지 기준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1.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연합하는 것

2. 다른 모든 사람들을 제외한

3. 자발적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4. 일생을

 

호주 정부가 교회들이 혼인에 관여하도록 허용함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공적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혼인할 수 있는 여지를 준 것은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귀하게 생각해야할 선물입니다. 혼인 예식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혼인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또 이 큰 선물을 주신 그분께 감사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혼인 예식들이 [세속] 공적인 성격을 가지면서 실제적으로 행할 때에 주어지는 결과들은 중요성에 있어서 사실상 부차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주님 안에서’ 행하는 매 혼인이 ‘주님 안에’ 있는 혼인입니다. 우리 마음에 확고하게 자리 잡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즉 혼인은 확실히 하나님께서 가담하신다는 것이며, 또 그러하기에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결혼하는 것은 명령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혼인함

 

주님의 이름으로’라는 표현은 혼인 예식서에 세 번 나타납니다. 간단한 이 표현은 혼인 예식서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혼인에 관한 모든 것을 규정해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특별한 관심을 요구하는데, 이는 혼인 예식의 본질을 나타내주며 동시에 혼인의 본질도 나타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혼인 예식서에서 몇몇 곳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공 표

본 당회는 씨가 하나님의 법령에 따라 혼인 생활을 시작하려는 자신들의 의향을 표시했음을 공표합니다. 이들은 주님의 이름 안에서 거룩한 생활을 시작하고 또 그분께 영광을 돌리고자 간절하게 바라고 있습니다. 만일 법적인 반대가 제기되지 않는다면, 이 예식을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계속 진행하고자 합니다.

 

소 개

씨, 본 당회는 혼인 생활을 시작하고자 하는 두 분의 소망을 회중들에게 공식적으로 알렸고, 또 합법적인 반대가 나오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이제 주님의 이름 안에서 두 분의 혼인 서약 예식을 진행하고자 합니다.

 

혼인의 의무

씨, 그대들은 이제 주님께서 그대들에게 요구하시는 것과 그대들에게 약속하시는 것을 경청하십시오. 은혜로우신 우리 하나님께서 그대들에게 남편과 아내라는 이러한 방식으로 함께 살수 있도록 힘과 신실함을 주시기를 바라며, 또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님의 이름 안에서 그대들의 도움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서, 혼인 예식서는 분명하게 성경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성경에서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닌데 그 이유는 주님의 이름 안으로 열중하는 것이 신자들의 모든 활동에 있어서 공통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과 같은 본문들은 생활의 다양한 측면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열중하는 신자들의 몇몇 본보기들입니다.

 

창세기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니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야웨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자의 삶을 특징짓는 한 활동에 가담하고 있음에 대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너무도 중요하기에 그들이 이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신명기21:5 : ‘레위 자손 제사장들이 그리로 올지니 그들은 네 하나님 야웨께서 택하사 자기를 섬기게 하시며 또 야웨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신지라.

 

일반적인 회중이 아니라, 특별하게 제사장들이 야웨(LORD)의 이름으로 특별하게 축복을 선언하는 과업을 받았습니다. 회중들은 이 축복 선언의 수혜자입니다.

 

사무엘상 17:45 :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야웨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경건한 사람인 다윗은 과감하게 골리앗의 도전을 응했는데, 이는 그가 야웨의 이름을 자신의 힘을 삼았기 때문입니다.

 

시편20:7 :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야웨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야웨의 이름에 열심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은 다 배제하고 오직 야웨의 능력과 힘만을 신뢰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시편118:10-12 : ‘열방이 나를 에워쌓으니 내가 야웨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저희가 벌과 같이 나를 에워쌓으나 내가 야웨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가시덤불의 불같이 소멸되었나니 내가 야웨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어려움을 당할 때에 야웨의 이름을 열심히 상고하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모든 백성이 야웨의 이름에 열심을 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역시 계시하셨습니다. 위의 본문과 대조적으로, 아래의 두 본문은 불신자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삶 속에서 야웨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지에 대해서 보여줍니다.

 

시편79:6 :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

 

열왕기상 18:24,26 :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야웨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그래서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위의 본문들이 증명해주 것처럼, 야웨의 이름을 열심히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들의 삶을 특징짓는 것이 바로 이러한 적극성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열심히 그 이름을 부르는 야웨는 누구십니까? 우리가 위에서 찾아보았듯이, ‘야웨의 이름으로’라는 상용구에서, ‘야웨(Lord)’라는 단어는 대문자 ‘야웨(LORD)’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 즉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야웨에 대한 지시어입니다. 야웨는 ‘나는 영원히 나이다(I AM WHO I AM)’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야웨는 이런 뜻입니다. ‘나는 내가 나라고 말하는 자이다(I-am-who-I-say-I-am);내가 하겠다고 말하는 것을 하겠다(I-do-what-I-say-I-will-do)’라는 뜻입니다. 이 분이 죄인들과 은혜 언약을 세우신 그 하나님이시며, 홀로 그들에게 주장하시며, 당신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신약 성경에서 ‘주님(Lord)’이라는 단어가 우리의 구세주께 적용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께서 세우신 언약에 신실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아드님을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서 속량으로 내어주셨습니다. 승리하신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실제적으로 해당되는 모든 것을 요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에 자신을 맡기는 것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신 언약의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혼인을 포함하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 하나님의 권위로 어떤 일을 분명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헛된 것이 아닌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언약에 복종하는 자에게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권위 안에 맡기는 것이 장정 만 명의 힘에 의지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 혼인 확증 예식서에서 ‘야웨의 이름’을 언급하며, 그것도 세 번씩이나 말입니까? 그 이유는 혼인에서조차도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며, 또 혼인의 모든 측면에서 주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혼인에서 주님의 이름을 배제시키는 것은 혼인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혼인한다는 것은 혼인에서 하나님의 영명, 권위, 사역을 숙고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혼인은 하나님을 배제시킬 수 없습니다. 혼인은 사람의 ‘창작물(brainchild)’이 아닙니다. 또 혼인은 일종의 사회 협약이 아닙니다. 오히려 혼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come)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혼인하는 모든 남자와 여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혼인 예식에서 신랑 신부 두 사람은 혼인 안에서 연합하여 하나가 되기를 원합니다. 혼인 예식서가 ‘주님의 이름으로’ 이렇게 하는 것을 그들에게 말할 때에, 제 3자 즉 야웨께서 친히 가담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혼인하는 커풀이 서약을 서로 교환하는 그 교회에 야웨(LORD)께서 임재하고 계십니다. 신랑과 신부 각자가 그분이 계시는 자리에서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고 말했고, 그러하기에 그들의 서약이 묶여졌습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는 그들의 서약은 그 말의 모든 의미에 있어서 일종의 맹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것에 대한 증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속사회에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와 거리를 두기에 하나님과 결혼사이도 거리를 두는데, 교회는 혼인을 이와는 전혀 다른 실체로서 두드러지는데, 이는 혼인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 예식을 ‘주님의 이름으로’ 행함으로서 교회는 혼인을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으로 공적으로 천명할 수 있습니다. 혼인에 관한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는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을 선포할 뿐 아니라 순종해야 하는 곳은 다른 아닌 교회 안에서 입니다. 결혼하는 쌍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은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교회에 의해서 확증하는 혼인 예식에 의해서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당회는 결혼하려는 커풀의 의향을 공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양무리들을 감독하는 자로 세우신 장로들이 양 무리들의 영적인 복리를 위한 책임이 있으며 결과적으로 혼인하려는 커풀에게 결혼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모든 당회가 회중들의 회원들이 단지 주님 안에서만 혼인할 수 있기 때문에, 장로들은 혼인하려는 커풀이 과연 그분의 이름 안에서 결혼하고자 하는 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혼인의 회복

(요한복음2:1-11)

 

죄 가운데로의 타락과 혼인이 일그러짐

아담과 하와가 죄 가운데로 타락한 후에, 곧장 그들은 죄의 결과가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하다고 선언하셨던 단 하나의 피조물도 죄로 오염되지 않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창세기2장에서 기술된 가장 이상적인 혼인 생활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즉각적으로 우리는 혼인 생활에도 타락의 결과가 얼마나 황폐화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에, 그들은 사이좋게(side by side) 일을 했었습니다. 그들이 타락하는 즉시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그들을 부르셨을 때에, 그들은 더 이상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서로를 적대시하면서 서 있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적의를 품고 ‘당신이 나와 함께 있도록 주신 이 여자가 그 나무의 실과를 주기에, 내가 먹었나이다’고 응수했습니다. 이 말을 통해서 우리는 마음의 눈으로 자기 아내를 향하여 손가락으로 비난하고 있는 것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서 죄된 백성으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를 더욱 절망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창세기 3장에서 기술된 비난의 손가락질을 우리의 혼인생활에서 동일하게 경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타락한 세상에서 우리가 창세기 2장의 이상적인 혼인 생활이 오늘도 여전히 우리에게 규범이 될 수 있는지 없는 지에 대해서 궁금해 합니다. 진실로 창세기2 장에서 가르치고 있는 혼인에 대한 하나님의 원리들이 오늘 우리 혼인생활에도 여전히 적실합니까?!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혼인의 회복

 

창세기 2장을 인용하고 난 즉시로, 혼인 예식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했습니다. 우리는 ‘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혼인을 존귀하게 여기셔서 당신의 영광을 가나 혼인 잔치에서 드러내셨습니다.’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이 말은 요한복음2:1-11에 있습니다. 이 예식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나에서 혼인을 존귀하게 여기시고 창세기 3장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2장의 규범을 지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1-11로부터 적절한 본문을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습니다.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요한은 이 말씀을 ‘예수께서 행하신 첫 표적(11절)’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예수님께서 첫 번째 표적을 행하시는 장소와 초점을 왜 혼인잔치를 선택하셨는지에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2장까지 혼인은 인간 생활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요인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고 또 첫 남자와 첫 여자를 거룩한 혼인을 통해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죄가 남편과 아내로 하여금 서로 대적하도록 만들어 놓았고, 또 사회의 기본적인 요인을 부패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마태복음1:21)’위해서 땅에 오셨습니다. 또 여기에는 죄의 파괴적인 결과들을 고치시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혼인이 하나님께서 사람과 관계하여 행하시는 사역 처음부터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듯이(창세기1,2장), 혼인이 사람들 가운데서 행하시는 예수님의 사역 시작에서부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요한복음2장). 비록 예수님의 사역이 가나 혼인 잔치였다 하더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원래 영광에로 혼인 생활을 포함하여 모든 생활을 회복하셨다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이 메시지는 앞의 두 본문을 통해서 확실합니다.

 

1. 죄로 인한 타락과 결핍

 

예수님 당시의 혼인 잔치는 우리에게 친숙한 혼인 예식, 즉 주말에 행해지는 예식보다 더 길었고 또 정교하게 거행되었습니다. 이 특별한 예식이 종료될 즈음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공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핍, 부족은 오직 죄로 인한 것인데, 왜냐하면 에덴동산에는 결핍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타락 후에 사람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저주에 대해 실제적인 맛을 볼 수 있습니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고…(창세기3:17-19)’ 앞으로는 충분히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 싸움이 있게 되었습니다. 결핍은 타락이라는 실체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결핍이 발생했습니다. 여기에서 죄로 인한 타락의 결과들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무엇을 하십니까? 주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먼저 포도주의 (quantity)을 주목하십시오. 다시 말해서 각각 32겔론(90-130리터)을 담은 물 항아리 여섯 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의 550-800리터의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이렇게 풍성하게 포도주를 만드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2. 메시야 시대와 풍성함

 

구약성경에서 메시야 시대는 풍성함의 시대라고 특징짓고 있습니다. 다음의 성경 본문들은 이 풍성함을 엄청난 양의 포도주로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창세기 49:10,11절 :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이 본문은 유다 위에 야곱이 축복하는 본문이네, 은총을 입은 이 아들로부터 구세주(실로)가 오실 것입니다. 메시야의 시대가 얼마나 풍성함으로 특징짓는지를 주목하십시오. 포도주는 너무 풍성해서 옷을 포도즙에 빤다고 했습니다.

 

아모스 9:11-15 : 이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키고 옛적과 같이 세우고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야웨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그 때에 밭가는 자가 곡식 베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 저희가 황무한 성읍을 건축하고 거하며 포도원들을 심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으리라. 내가 저희를 그 본토에 심으리니 저희가 나의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이는 네 하나님 야웨의 말씀이니라.

 

곡식이 너무도 풍성해서 쟁기꾼들이 다음 추수를 위해서 쟁기질을 하기 전에 추수꾼들이 땅에서 다 거두어들이지를 못합니다.

 

예레미야 31:12 :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야웨의 선하심으로 함께 흘러가리니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양의 떼와 소 떼에 모일 것이라 그 심령은 물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넘치는 선하심을 보게 될 것이며 또 많은 사람들이 풍성한 음식을 마음껏 먹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말 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음식은 필요한 만큼 채워질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레미야는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으로 기뻐하고 웃고 풍성하게 먹을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연회장에서 아주 많은 양의 포도주를 만드셨는데, 그 이유는 주님께서 메시야 시대가 이미 도래하였다는 사실을 납득시키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혼인 잔치에서 행하신 것은 자신에 관한 구약 예언들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구세주께서 이제 당도하셨습니다. 그분은 죄의 결과들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께서 공급하셨던 포도주의 질(quality)에 대한 기사를 살펴볼 때에 더욱 뚜렷해집니다. 요2:10에서 우리는 연회장이 신랑을 얼마나 호되게 꾸짖는지 읽을 수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이 연회가 끝이 날 때까지 최상의 포도주를 저장해두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이것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창조사역에 대한 평가를 되돌아보도록 만듭니다. 날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것을 평가하시기를 ‘보시기에 좋았더라(saw that it was good)’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날 여섯째 날에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결혼 제도를 제정하신 뒤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매우 좋았더라(indeed it was very good)’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를 필두로 하여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곧바로 주님의 사역은 창조 시에 하나님의 사역만큼이나 선한 사역으로 특징을 짓습니다. 이것이 말하는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로 인하여 발생한 재해를 고치셨고, 또 그분의 사역은 ‘선한 것’으로 평가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 창조사역은 하나님의 사역과 같이 선한 사역이셨습니다!

 

 

혼인에 대한 그리스도의 복음

 

가나 혼인 잔치에서 그리스도의 행동에서 혼인(삶에 가장 기본이 되는 것으로서)에 대한 복음이 주어져 있고, 또 이러하기에 모든 삶에 대한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시작에서부터,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에서 행하시고자 하는 것, 다시 말해서 그분이 죄를 정복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정말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피로 죄를 깨끗하게 씻으시기를 원하셨고 또 당신의 성신으로 죄인들을 새롭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혼인 생활에도 역시 영향을 끼쳤는데, 이는 남편과 아내가 하나 되는 것(창2장) 즉 죄로 인해서 파괴되었던 것(창3장)이 회복될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죄로 인하여 타락함으로 혼인생활에 엄청난 타격이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더라도 성경이 남편과 아내가 창세기 2장의 규범에 따라서 살도록 계속해서 주장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최고의 이상적인 남편의 모습에 대한 말씀을 숙고하시기 바랍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동일하게 그리스도께서 아내들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현숙한 아내를 잠언31:12에서 묘사하고 있는 바를 상고해봅시다. ‘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치 아니하느니라.’ 아내가 취해야 할 태도는 남편을 위해서 즉 창세기 2장의 연합을 회복하기 위해서 자신을 부인하는 태도(delf-denial)를 취해야 합니다. 바울은 똑같은 메시지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으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5:23-24)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하여, 창세기 2장의 규범을 지속시키셨음을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스도의 성신의 능력 안에서,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의도하셨던 놀라운 혼인 생활에 따라서 다시 함께 살수 있게 되었습니다. 타락의 한 가운데서도 우리는 혼인을 알고 경험하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고수하는 복음입니다.

 

 

 

 

 

 

 

 

 

 

 

 

 

 

 

 

 

 

 

 

 

 

 

 

 

 

 

 

 

 

혼인의 영속성

(마태복음19:6)

예수님께서 혼인을 존귀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언급한 뒤에, 혼인 예식서는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혼인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다는 사실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실 때에, 우리에게 혼인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기에 결코 파기될 수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서 이 예식서는 마태복음19:6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혼하는 것을 혼인하는 것만큼이나 쉽게 관용하는 풍토가 배양되어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혼인한 사람들 중에 평균 1/3이 이혼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주 슬프게도, 교회도 교회 주위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서 더 이상 무풍지대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혼인 생활이 파경에 이르는 것을 더 많이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 가운데 혼인을 일종의 탈출구(escape door)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서 혼인하는 사람들의 수가 더 증가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낭비하는 정신(throw-away-mentality)’이 매력적이고 아주 정상적인 것처럼 힘 있게 퍼지면서 심지어 혼인도 일회용품처럼 취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전혀 성격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혼인 제도를 제정하시면서 혼인한 배우자 중의 한 사람이 혼인 생활의 압력이 너무 크게 작용할 때에 사용할 수 있는 탈출구(escape hatch)를 만드시지 않으셨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스라엘의 신실하신 남편

성경이 혼인의 영속성에 관하여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이해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사실은 성경의 하나님이 누구시며 우리 하나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백성과 언약 혹은 ‘혼인’관계로 결속하시는가를 바르게 아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혼인에서 하나님의 참된 형상을 담지한 사람 즉 그의 모습을 반영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면(이것을 언약적 관계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모범으로서 하나님을 주시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죄를 지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스라엘에게 충실하셨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아주 시사적입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느 날 땅에 오시어서,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에게 당신의 관심을 쏟으셨습니다. 이 사람에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야웨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창12: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계속 상고하기 전에 반드시 쉬면서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거룩하시고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죄를 가진 사람과 한 관계(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목하십시오. 아브람은 짐을 챙겨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여주신 땅으로 여행길에 오르는 것으로 응답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 같은 명령에 아브라함의 반응은 바로 순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목하여 보십시오. 재난으로 인하여 아브람(그의 아내 사래와 함께) 이집트로 전환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브람은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나타내 보였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애굽에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창12:11-13).’ 이와 같은 말은 전혀 믿음에서 나오거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사실상 자신의 아내가 자기의 누이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거짓말은 거짓의 아비인 사탄에게 속한 것입니다(요한복음8:44을 참조하라).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가장 의로우시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거부하시는 것으로 반응하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잘 보십시오. 이것이 하나님께서 반응하시는 방법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나중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꿈속에 나타나시어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나는 너의 피난처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창세기15:1).’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관계를 시작하셨고, 또 아브람의 약함과 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성취해 가시는 것입니다.

 

비슷하게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람에게 열국의 아비가 되게 만드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15장). 아브람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했어, 스스로 많은 문제들을 만들어 곤경에 빠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하갈을 통해서 한 아이를 얻어 아버지가 되었습니다(창16장). 다시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죄인을 더 이상 다루지 않겠노라고 선언하시면서 아브람을 포기하시지 아니하셨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어떻게 언약을 체결하셨는지에 대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죄인이며 거짓말장이고, 또 간음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나 사이에 나의 언약을 체결할 것이라(창17:2)’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신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다음의 말씀과 같이 신실하십니다. ‘야웨의 언약은 영원토록 파기되지 않고 견고하게 서리니; 그는 하나님이시며, 진리와 믿음으로 안전하리라(시편12:4; Book of Praise).’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아브람의 죄성에서 나오는 모든 ‘곡예(gymnastics)’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결코 당신의 말씀을 취소하시지 않습니다. 아브람은 여전히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과 야곱

 

아니면, 아주 약삭빠른 야곱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야곱은 그의 아비 이삭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속였습니다. 그 결과로 그는 형님 에서(Esu)의 이글거리는 복수를 피하기 위해서 고향에서 달아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하나님께서 꿈속에 그에게 나타나시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야웨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창28:13-15).’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죄인인 야곱에게, 그의 타락과 죄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킬 것이고 또 항상 그와 함께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야곱과 함께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그들의 후손들인 애굽에서 종살이 했던 이스라엘과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다른 신을 섬기는 배교로 묘사될 정도였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다음과 같이 말씀해주셨습니다. ‘야웨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리라…(출3:7f).’ 이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주셨고, 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은 나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하나님은 이 말씀을 지키셨고, 이 백성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제 7 계명

 

당신이 하신 말씀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건져내셔서, 시내산 밑에 그들을 모이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낸 너의 야웨 하나님이니라(출20:2).’ ‘너의 하나님’이라는 말로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혼인하심으로서 자신을 이스라엘과 동일시하셨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혼인이라는 말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나타낸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에게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렘3:14)’라는 말로 하나님을 언급하였습니다. 거듭해서,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셨다고 말씀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비록 내가 그들의 남편이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야웨의 말이니라(렘31:22).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혼인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제 7 계명을 그들이 어겼다고 징계하셨을 때에도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혼인관계에서 ‘간음하지(출20:14)’ 말라는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과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신의 행위는 계속 나오는 백성들에게도 최고의 모범(ultimate paradiam)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스라엘의 죄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랑(bride)’으로서 항상 신실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도 한 분 배우자(하나님)에게 항상 신실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간단하게 말해서 오직 한 배우자와 함께 ‘한 몸(one flesh)’으로 항상 남아 있을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신실하지 못한 하나님의 아내

소위 하나님의 신부는 자기 남편이신 야웨께 전혀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구약성경은 반복해서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행위를 묘사하기 위해서 ‘창기(harlotry)’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거듭해서 이스라엘은 자신을 이방신들에게 주어 음행을 저질렀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혼인하셨음에도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영적인 음행으로서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혼인관계를 깨뜨렸습니다. 다음의 두 성경 본문들은 하나님께서 다른 신들에게 창기 노릇한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경고하셨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레위기 20:4,5

그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는 것을 그 지방 사람이 못 본 체하고 그를 죽이지 아니하면 내가 그 사람과 그 권속에게 진노하여 그와 무릇 그를 본받아 몰렉을 음란(淫亂)히 섬기는 모든 사람들을 그 백성 중에 끊으리라.

 

여기에서 우리는 영적인 간음에 대한 구약성경의 첫 번째 말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모여 있을 동안 그들과 언약을 세워 이 백성들과 ‘혼인’하신 직후에 레위기를 이스라엘에게 주셨습니다. 그 다음 하나님께서 혼인을 아련하게 위협하는 것에 대해서 이스라엘에게 직접적으로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에 암몬 족속들의 우상인 몰렉(Molech)과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언약의 하나님과의 혼인관계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누구든지 몰렉에게 자녀를 희생 제물로 준다면, 그들은 그들에게 부어질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 즉 그들은 백성 가운데서 끊쳐 나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민수기15:37-40

야웨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의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를 보고 야웨의 모든 계명을 다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 마음의 눈의 음욕(harlotry)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면 너희가 나의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여 너희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여기에 이스라엘이 그들의 언약의 하나님께 부부간에 지켜야 할 정절을 지키지 못한 죄를 막을 수 있는 방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하나님께만 신실하라고 하신 그들의 언약의 하나님의 가르침에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다음 성경 본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제적으로 간음하였던 곳을 예로 들었습니다.

 

민수기 25:1,2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니라.

 

언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동반자가 된 이스라엘은 모압의 신들과 놀아나 음행을 자행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이스라엘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세운 혼인 언약관계를 깨뜨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행위는 배우자이신 남편의 타오르는 진노를 촉발시켰습니다.

 

사사기 2:17

…그들이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좇아 그들에게 절하고…

 

유다 백성들과 모든 장로들이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를 증거하고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배우자가 하나님께 신실하며 또 그분만을 섬겼습니다(7절을 보라). 그러나 이 영적인 지도자들이 모두 죽은 후에, 이스라엘은 신실하지 못한 배우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신 남편에게 지속적으로 충성하는 대신에, 그들은 그분을 버리고 스스로 바알과 아스다롯에게 예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더 나아가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신부가 우상을 섬기는 것을 좋아하여 자신의 남편을 피했던 더 많은 예를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거듭해서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행위를 ‘음행’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실하심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우리가 놀라는 것은 주님께서 당신의 신부의 행위를 특징짓는 영적인 간음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호세아의 예언이 여기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줍니다.

 

로암미에서 암미 - 호세아 1,2장

 

주님께서 호세아 선지자에게 창기와 혼인하도록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습니다. ‘야웨께서 비로소 호세아에게 말씀하시니라 야웨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호1:2a).’ 이 본문을 읽는 누구나가 호세아가 과히 혐오감을 일으킬만한 일을 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지 못합니다. 주님의 답변이 곧바로 따로 옵니다. ‘이는 이 나라가 야웨를 떠나 행음하였음이라(호1:2b).’ 호세아는 이 백성들 스스로가 행하고 있는 것 즉 자신들의 언약의 하나님이자 자신의 남편을 대적하는 영적인 간음을 저지르는 것과 같은 생활을 과시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디블라임의 딸 고멜’이라는 창기와 혼인하였고, 또 이로부터 자녀들을 생산했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자녀들에게 주어질 이름들을 지어주셨습니다. 호세아는 첫 번째 남자 아이를 ‘하나님이 흩으시리라(God scatter)’는 의미를 가진 이스르엘(Jezreel)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두 번째 아이는 딸인데 ‘사랑받지 못한다(not loved)’는 의미를 지닌 로루하마(Lo-Ruhamah)라고 불렀습니다. 세 번째 아이는 아들인데, 이름을 로암미(Lo-Ammi)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히브리어로 ‘Lo(=not),’ ‘am(=people),’ 그리고 ‘mi(=my/I)’구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인 호세아가 세 번째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내 백성이 아니다!’는 말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와 같은 이름을 들을 때에 그들의 얼굴에 나타나는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의심의 여지없이 그들은 스스로 ‘도대체 왜 이런 이름을 지었을까?’하고 물어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왜 일까요?’ 이 이름이 자신들에게 향한 예언을 포함하고 있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호세아의 세 번째 아들의 이름에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언약으로 혼인하였음(marriage-by-covenant)에도 그들의 불신실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없게 되었는지를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간음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됨이라는 특권을 포기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라는 신분을 박탈하거나, 언약관계를 영원히 단절시키려는 것이 하나님의 동기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마치 호세아가 고멜을 계속해서 사랑할 것과 동시에 고멜이 호세아에게 신실하지 못했을 때에도 호세아가 그녀를 데리러 가라고 명령을 받았듯이,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백성들을 꾸준하게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꾸준하신 사랑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유익을 위해서 즉 그들이 돌이켜서 당신께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혼인하신 것을 영원한 관계로 규정하신 것은 우리가 호세아2:16을 읽을 때에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만일 이것이 이스라엘을 회개하도록 만들고 또 포로로 보낸 것이 이혼을 요구한 것이라면,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부를 자신에게로 돌이켜서 당신의 팔로 감싸 안아 회복시키리라고 하셨습니다. 호세아는 심판과 ‘이혼’에 대한 예언만 하였을 뿐 아니라, 회개를 촉구하고 또 회개한 결과로서 혼인의 회복까지도 예언하였습니다. 호세아가 진노의 날 뒤에 올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해서 예언하면서,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주인이라 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주인’이라는 말은 언어유희라 할 수 있습니다. 남편이라는 두 개의 히브리어 단어 중에 하나가 ‘주인(master)’을 의미하는 바알(Baal)입니다. 호세아의 예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바알의 이름을 저의 입에서 제하여 다시는 그 이름을 기억하여 일컬음이 없게 하리라 그 날에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꺽어 전쟁을 없이하고 저희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야웨를 알리라… 네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들 긍휼히 여기리니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고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호세아2:17-23).

 

이스라엘은 바알로 더불어 음행을 저질렀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비열한 창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전적으로 창기가 되었고 또 ‘나의 백성이 아닌 자’로 낙인 찍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부를 향해서 하신 마지막 말씀은 ‘내 백성(Ammi)’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온전한 의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궁극적으로 내어 쫓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행하신 혼인 관계를 유지시키셨습니다. 심지어 그들을 ‘내 백성이 아닌 자’라고 부를 실 때조차도, 혼인관계를 청산하시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시려는(save) 의도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돌아오라… 이는 내가 너와 혼인하였음이라.’ - 예레미야2,3

 

예레미야는 호세아 선지자보다 수년 뒤에 예언자로서 활동했습니다. 이제 예레미야2:20절에서 호세아와 동일한 주제를 어떻게 선택했는지를 주목합시다. ‘네가 옛적부터 네 멍에를 꺽고 네 결박을 끊으며 말하기를 나는 순복지 아니하리라 하고 모든 높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몸을 굽혀 행음하는도다.’ 예레미야는 수십 년 수백 년이 지나 행음이라는 견지에서 이스라엘의 행위를 묘사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주제에 대해서 분명하게 그림을 그리듯이 말했습니다.

 

네가 어찌 말하기를 나는 더립히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을 좇지 아니하였다 하겠느냐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보라. 네 행한 바를 알 것이니라. 너는 발이 빠른 젊은 암약대가 그 길에 어지러이 달림 같았으며 너는 광야에 익숙한 들 암나귀가 그 성욕이 동하므로 헐떡거림 같았도다. 그 성욕의 때에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 그것을 찾는 자들이 수고하지 아니하고 그것의 달에 만나리라. 내가 또 말하기를 네 발을 제어하여 벗은 발이 되게 말며 목을 갈하게 말라 하였으나 오는 너는 말하기를 아니라 이는 헛된 말이라. 내가 이방 신을 사랑하였은즉 그를 따라 가겠노라 하도다(렘2:23-25).

 

예레미야는 유다의 행동을 암내를 맡은 들 나귀와 같은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유다는 이방신들에게 자신들의 욕정을 발산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이 문맥에서 하나님께서 이혼이라는 주제를 상기시키셨습니다. 예레미야3:1에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가령 한 사람이 그 아내를 버리므로(이혼하므로) 그가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조강지처가가 그를 다시 받겠느냐.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않겠느냐 하느니라. 나 야웨가 말하노라.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인용 구절 안에 있는 인용구(만일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버리면…)는 신명기 24장에 있는 주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가지고 온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주님은 이스라엘에게 만일 한 사람이 자기 아내를 버리고 이혼하거나, 또 만일 두 번째 남편이 죽거나 아니면 그의 아내를 버린다면, 그 다음 첫 번째 남편이 그녀를 다시 받아주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1-4절). 그러므로 예레미야가 인용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아내를 버린 남자는, 이혼한 아내가 다른 남자와 혼인하고 난 뒤에, 다시 그녀에게 자신의 사랑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금기사항(다른 남자에게 가지 말라는)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록 이스라엘이 여러 정부들과 행음을 하였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나에게로 돌아오라(return to Me)’고 간청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간청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막에 내어 던져버리시고, 다른 언약의 동반자를 찾지 아니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기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에 대한 신실하심(God's faithfulness to His promise) 안에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은 언약에 의해서 하나로 영원토록 결속되었습니다(창17:7).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편에서 이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네 눈을 들어 자산(資産)을 보라 너의 행음치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 가에 앉아 사람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렘3:2).’ 이스라엘은 간음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결속(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랫동안 이방신들에게 자신들을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신실하신 주님은 정절치 못한 신부를 향해 ‘나에게로 돌아오라’고 일관되게 불러내셨습니다.

 

사실상 예레미야 당대에, 북쪽의 열 지파는 이미 앗시리아(Assyrians)로 포로로 끌려간 뒤였습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포로로 보내신 것은 이스라엘을 이혼증서까지 써 주어서 내어 쫓아내셨다는 뜻입니다(렘3:8). 그러나 주님께서 당신을 북쪽 열 지파를 상관없는 자들로 치부하셨다고 생각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이혼증서까지 써주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회개하여 돌아오도록 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너는 가서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야웨께서 가라사대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야웨의 말이니라. 나 야웨가 말하노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시온에 데려 오겠고…(12,14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랄만합니까! 비록 이스라엘이 간음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이혼하셨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제 이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모든 것이 끝났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우리 언약관계가 끝났다는 말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와는 정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돌아오라… 이는 내가 너와 혼인하였음이라’고 호소하셨습니다. 이혼이 하나님과의 혼인관계가 종식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장은 당신의 신부를 회개케 하시고 다시 돌이키시려는 일종의 간청(懇請)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여전히 당신의 아내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우리는 끝을 알 수 없는 혼인 서약에 대한 신실함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사실상 심지어 포로로 보내는 것(이것은 이혼과 같은 말입니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스라엘의 합법적인 남편에게로 돌이키시려고 부르시는 것을 의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과의 혼인에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을 본보기로 삼아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 인내하지 못함에 대해서 남겨 놓아야 할 여지가 무엇입니까? 확실하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이 예증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배우자로부터 확실하게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식의 탈출구를 만들어 놓으셨다고 생각하는 여지를 전혀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께서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혼인 관계가 영속적이도록 의도하셨습니다. 심지어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행해지는 혼인이 이혼으로 치달았다할지라도, 이혼의 목적은 ‘상대편을 다시 돌이키도록 하는데(to call the other back)’, 여기에 여지를 항상 남겨두어야 합니다.

 

 

이 주제는 신약에서도 계속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죽음 가운데 내어주신 것도 바로 이 음란한 백성을 위해서이셨습니다. 이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닌데, 그 이유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the Father)께서 행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드님을 거절하신 것은 당신을 향하여 돌이킨 사랑하신 자들을 다시 받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의 동반자를 영원히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때문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그들의 구세주가 태어날 수 있도록 회개한 남은 자들(a repentant remnant)을 보존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신부의 음란스러운 성향과 죄 때문에 오직 심판과 추방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내하시면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구세주이신 예수님은 자신을 양과 시부로서 죄인들에게 계시하셨습니다. 신약에서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자신의 교회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서 혼인이라는 동일한 주제를 취하셨는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분은 희생 양이셨습니다.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피로서 신부의 죄가 속량을 받았습니다. 그 피는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 흠 없는 신부인 당신의 교회를 받으시기 위해서 지불하신 최고의 값어치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의 성경 본문들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신약 성경이 사용했던 혼인 주제에 대한 예증들입니다.

 

마태복음 9:14,15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금식하리라.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신랑으로 묘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필히 거기에는 신부가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히 너희를 위하여 열심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신실하고도 흠이 없도록 하여 그리스도를 섬기도록 호소하면서, 남편으로서 그리스도와 ‘순결한 아내’로서 교회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사이의 관계를 혼인이라는 심상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5:25-27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한 당신의 사랑을 남편이 아내에게 마땅히 해야 할 사랑의 모델로서 제시하셨습니다. 이 가르침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다시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혼인이라는 심상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한계시록 19:6-9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에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 하더라.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로다.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신랑이시며 또 교회는 그의 신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때에 혼인잔치와 똑같은 예식이 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2,9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그때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야고보가 사용하고 있는 굵직한 용어 뒤에는 바로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 있는 관계를 묘사하는 혼인이라는 주제가 있습니다. 야고보는 ‘해외로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들(약1:1)’ 가운데 발생한 죄를 보면서, 또 그의 독자들에게 ‘간통한 남자들과 간통한 여자들(약4:3)’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단지 그들의 주님이시며 구세주와 맺은 혼인 언약관계 때문에 ‘간통한 남자들과 간통한 여자들’라고 불려질 수 있습니다.

 

혼인이라는 주제가 신약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신부에게 신실하시다는 본보기(example)가 혼인을 앞둔 그리스도인 남녀에게 계속적으로 범례(paradigm)가 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의 원리가 오늘 역시 여전히 타당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남편과 아내 중에 어느 쪽이든 적적으로 상대방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탈출구를 혼인제도 안에 끼워 넣지 아니하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이론

 

이것은 성경이 실제적으로 이혼과 관계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 분명해집니다.

 

이혼 : 허용이지 명령이 아님

 

주님의 말씀에서 이혼하라고 명령하는 곳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하게 강조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고로 중요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이혼의 여지를 남겨두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명기24:1-4에서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취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 후부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증서를 써서 그를 자기 집에 내어보내었거나 혹시 그 아래로 취한 후부가 죽었다 하자 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렵혔은즉 그를 전부가 다시 아내로 취하지 말지니 이 일은 야웨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으로 너는 범죄케 하지 말지니라.

 

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 한 문장이 함께 기록되었는지를 주의 깊게 주목하십시오. 네 구절로 된 이 명령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명령은 이혼증서를 써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혼한 후에 그 누구와도 혼인하라고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이 명령에 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렵혔은즉 그를 전부가 다시 아내로 취하지 말라.’ 1-3절은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반면에, 4절은 남편은 이혼한 아내가, 만일 그녀가 다른 남자와 혼인하였더라면, 다시 취하지 말라는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무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마19:3)’라고 질문했습니다. 이 질문은 이혼하는 것이 합당한 지에 관하여 샴마이(Shammai)와 힐렐(Hillel)이라는 두 랍비 사이에 있었던 논쟁을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창세기1:27과 2:24에 호소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19:4-6).’ 예수님께서 하신 마지막 말씀은 태초[창조]의 원리를 요약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혼인제도에 탈출구를 끼워 넣지 아니하셨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