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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화란 개혁교회의 영성과 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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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란 개혁 교회의 영성과 경건

- Gisbertus Voetius를 중심으로 -

 

 

변 종 길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I. 서론

 

본 논문에서 필자는 화란 개혁 교회의 영성과 경건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그 범위가 너무 넓기 때문에 17세기의 푸치우스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푸치우스를 살펴보는 것도 쉽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의 글들은 거의 다 라틴어로 쓰여졌으며, 이것마저도 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의 글들 중에서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몇 편이 화란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으며, 그에 대한 연구가 화란에서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이러한 것들의 도움을 받아 푸치우스의 경건에 대한 견해를 조금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 교회에서는 아직 그에 대한 소개나 연구가 미진하기 때문에 이것은 의미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그의 경건에 대한 이해는 한국 교회에도 매우 의미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먼저 ‘영성’과 ‘개혁주의 영성’이 무엇인지 간단히 그 개념을 살펴본 후에 푸치우스의 경건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이에 대한 평가를 하고자 한다.

 

II. 영성

 

영성(靈性, 영: spirituality, 독: Spiritualit?t, 화: spiritualiteit)이란 단어가 요즘 인기리에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는 원래 불어 spiritualit?에서 온 것으로 카톨릭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개신교에서도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 단어의 개념은 아주 모호하다. 어쩌면 이 단어는 그 개념의 모호성으로 인해 더욱 인기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각자 자기의 원하는 바를 이 단어 속에 집어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펠러마(W. H. Velema) 교수에 의하면 영성이란 원래 ‘어떤 특정한 형태의 영적 생활’(een bepaalde vorm van geestelijke leven)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뿌리박고 있는 기본적 태도’에 대한 것이다. 곧 영성은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고 그의 일에 헌신하는, 영혼의 특정한 태도’를 나타낸다. 그렇지만 그 구체적인 개념은 여전히 모호하다. ?영성에 대한 실천적 사전?을 편찬한 크리스티안 쉬츠(Christian Sch?tz)에 의하면, 영성이란 단어를 어의적 의미 그대로, 곧 ‘영적인 생활 양식’(geistliche Lebensform)으로 보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러면 ‘영적인’(geistliche)이란 것이 무엇을 뜻하느냐 하는 것이 또 문제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질’에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고, ‘이 세상의 실재’에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고, ‘인본주의적 세계관’에 반대되는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으며, 또 다른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따라서 ‘영성’이란 단어는 그 단어가 사용된 문맥에 의해서만 그 정확한 의미가 밝혀질 수 있을 따름이다. 많은 경우에 이 단어는 ‘성령의 역사’와 관계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성령’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 각자마다 다를 수 있다.

그래서 화란 개혁교회의 어떤 이들은 ‘영성’이란 단어 대신에 ‘개혁주의 구원 체험’(gereformeerde bevinding)이란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우트레흐트 대학의 은퇴교수인 흐라플란트(C. Graafland)는, 이 ‘구원 체험’(bevinding)이란 단어는 ‘영성’(spiritualiteit)보다는 훨씬 분명한 개념이긴 하지만 영성을 ‘구원 체험’보다 더 넓은 개념으로 본다. 영성은 하나님을 만남에 있어서 마음의 내적 구원 체험뿐만 아니라 성향이나 행동에 있어서 전체적인 삶의 분위기를 포함한다. 예를 들어 사회 생활에서의 태도나 윤리적, 사회적 행동들까지 포함한다. 따라서 ‘개혁주의 영성’(gereformeerde spiritualiteit)은 전체 개혁주의적 생활 방식(way of life)과 관계된다. 즉 전체 문화 생활과 관계된다.

그래서 흐라플란트 교수는 그 개념의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영성’이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하고 있다. 펠러마 교수도 이와 마찬가지로 ‘영성’이란 단어가 대단히 모호하고 문제가 많은 용어이긴 하지만 이 단어가 지금은 개신교 안에서도 워낙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이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면서 ‘개혁주의 영성’이 무엇인가를 좀더 분명히 정의하는 입장을 취한다.

필자도 펠러마 교수의 견해와 비슷하게 생각한다. ‘영성’이란 단어가 대단히 모호한 개념이며, 카톨릭적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혁주의 입장에서 볼 때 합당치 않은 용어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용어가 오늘날 워낙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이 현실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개혁주의적’이라는 형용사를 앞에 붙여서 ‘개혁주의 영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하지만 필자는 ‘영성’이라는 용어보다 ‘경건’(pietas)이라는 용어가 우리의 입장을 나타내는 데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이 단어는 역사적 맥락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의 ‘영성’과 비슷한 용어로 중세에 ‘헌신’(devotio)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을 종교개혁자들은 ‘경건’(pietas)으로 대체하였다. ‘헌신’은 기도, 묵상, 영적인 것에 대한 관심, 마음의 통일 등을 가리키는 총칭인데, 카톨릭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이 사용한 ‘경건’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그 중심에 가지고 있다. 칼빈은 ‘하나님의 은덕을 알도록 일깨워 주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묶어진 경외’를 경건이라고 불렀다. “경건은 우리를 세상의 더러운 것들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며 참 거룩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종교개혁자들이 사용한 ‘경건’(pietas)이라는 단어가 우리의 믿음의 대상을 분명히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에 나오는 헬라어 ‘eusebeia’의 번역이라는 점에서, ‘경건’이라는 단어가 ‘영성’보다 개혁주의 영성을 나타내는 데 더 나은 단어라고 생각된다.

 

III. 개혁주의 영성

 

그렇다면 ‘개혁주의 영성’(gereformeerde spiritualiteit)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가 ‘개혁주의적’(gereformeerde)이란 단어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의해 규정될 것이다. 흐라플란트는 개혁주의의 의미를 종교개혁 신앙의 3대 ‘솔라’(sola)에서 찾는다. 곧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오직 믿음으로”(sola fide)가 종교개혁 신앙의 특징이다. 따라서 개혁주의 경건(gereformeerde vroomheid)은 첫째로 성경적 경건이다. 오직 성경에 기초하고 성경에서 나오는 경건만이 참 경건이다. 그러나 이로써 끝나지 않는다. 개혁주의 경건은 성경에 근거하되, 그것이 개혁주의 신앙고백들로 표현된 것을 존중한다. 그래서 개혁주의 경건은 성경과 개혁교회의 신앙고백 문서들과 개혁주의 전통을 토대로 한 경건을 의미한다고 본다.

한편 펠러마 교수는 ‘개혁주의 영성’을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나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신지식)과 ‘자기를 아는 지식’(자기 지식)을 가지고 정의한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것’과 ‘이에 대해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따라서 개혁주의 영성의 주요 부분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과 우리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 사람이 반응하는 것’(de reactie van mensen op wat God zegt omtrent Zichzelf en omtrent ons)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개혁주의’란 무엇인가? 펠러마 교수는 개혁주의의 핵심을 다음 다섯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1) 하나님의 주권, 2) 하나님의 계시, 3) 인간의 전적 타락(은혜의 절대적 필요), 4) 구원의 적용(성령론), 5) 그리스도의 재림 대망.

어떤 관점에서 보든 개혁주의 영성 또는 경건의 특징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또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존중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반응이다. 이것을 우리는 17세기가 나은 화란 개혁교회의 대표적 신학자인 푸치우스(Voetius)에게서 살펴보고자 한다.

 

IV. 푸치우스에 있어서의 경건

 

1. 푸치우스의 생애

 

기스베르투스 푸치우스(Gisbertus Voetius)는 1589년 3월 3일 화란의 허이스던(Heusden)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빠울루스 푸트(Paulus Voet)는 국가에 봉사하다가 죽었는데, 허이스던 시(市)가 그의 아들을 교육시켜 주었다. 아들 푸치우스는 학생 시절부터 수많은 책을 읽었는데, 이로 인해 그는 “helluo librorum”(탐독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1604년에 레이던(Leiden) 대학에 입학하여 유명한 프란시스쿠스 고마루스(Fransiscus Gomarus) 밑에서 정통 신학을 배웠으며, 재학 시절 중에 알미니안 논쟁을 경험하였다.

7년간의 신학 공부 후 그가 플레이먼(Vlijmen)에서 목사가 되었을 때 그는 이미 확고한 반(反)알미니안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정통 신학을 옹호하며 도르트 총회의 결정을 지지하였다. 1617년에 그는 출생지인 허이스던의 교회로 청빙받아 갔다. 그가 45세 되던 해인 1634년에 그는 갓 설립된 Illustre School(Utrecht 대학의 전신)의 신학 및 히브리어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 해 8월 21일 그가 행한 취임 강연의 제목은 “학문과 결합되어야 하는 경건”(De pietate cum scientia conjungenda)이었다. 그는 1676년에 죽을 때까지 평생 이 목표를 위해 진력하였으며, 이를 통해 그는 우트레흐트 대학과 화란 교회 및 신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는 강의 시간에 경건에 대해 많은 강조를 하였다. 그는 실천 신학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묵상 훈련을 시켰으며, 기도에 대한 지침들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목회상담을 하는 법과 설교를 전달하는 법 등을 가르쳤다.

푸치우스는 당대의 신학생들과 신학자들, 그리고 교역자들의 방종과 도덕적 해이를 개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경건한 생활을 촉구하였다. 그는 화란 젤란트(Zeeland) 주 미들버르흐(Middelburg)의 목사였던 청교도주의자 빌럼 텔링크(Willem Teelinck)의 서적들을 좋아하였으며, 그와 연결된 영국 청교도들의 책들을 많이 읽었다. 그래서 그는 종교개혁 후 화란에서 전개된 소위 ‘제 2의 종교개혁’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더 나아가는 개혁’(Nadere Reformatie) 운동의 중요한 한 인물로 자리잡고 있다. 이 운동은 16세기의 종교개혁에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의 원리들이 교회와 사회 전체에서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 개인의 삶에 이르기까지 적용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이 운동은 형식화된 17세기의 개혁교회에 종교개혁적인 생활을 실현하려는 몸부림이었다.

학문적으로 그는 스콜라주의적 방법을 사용하였다. 판 꼬이(F. van Kooij)는 그를 ‘스콜라주의 학문의 일등급’(bij een geleerd scholastiek van den eersten rang)이며, ‘참 경건의 표본’(aller voorbeeld in ware godzaligheid)이며, ‘뼈와 골수에 이르기까지 칼빈주의자’(Calvinist in merg en been)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는 어떤 문제를 다룰 때에 먼저 문제 제기를 하고 나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한 다음 이를 세밀하게 분석하고 비판하며, 그 다음에 자기의 주장을 제시하고 이것을 증명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2. 푸치우스의 경건에 대한 견해

 

푸치우스의 경건에 대한 견해는 앞에서 말한 그의 “취임 강연”(De pietate cum scientia conjungenda, 1634년)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강연의 제목이 말해 주듯이, 이것은 경건과 학문이 분리되어서는 안 되며, 신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은 경건의 토대 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수행되어야 함을 역설한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어보면 경건과 학문의 관계에 대한 학문적인 논문이라기보다도 경건을 강조하는 하나의 설교라는 느낌이 든다. 이것은 원래 청중들 앞에서 실제로 행해진 강연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푸치우스가 무엇보다도 학생들, 특히 신학생들의 경건한 생활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푸치우스의 경건에 대한 견해를 체계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그의 다른 책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행히 그의 취임 강연 이전에 출판한 두 권의 책이 있다. 그것은 “경건의 능력의 모범”(Proeve vande Cracht der Godtsalicheyt)과 “선행의 참 실천에 대한 명상”(Eene Meditatie van de ware Practijcke der goede wercken)인데, 이 두 책은 1628년에 암스테르담에서 한 권으로 묶어져 출판되었다.

1) 경건의 개념

 

경건(pietas, godzaligheid)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푸치우스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경건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het door de liefde werkzame geloof)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경건의 핵심은 ‘믿음, 소망, 사랑’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경건의 특징에 대해 그는 교부 키프리안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의 겸손, 믿음에 굳게 섬, 언어에 있어서의 조심성, 행동에 있어서의 의로움, 행함에 있어서의 자비, 생활에 있어서의 절제; 불의 행하는 것을 알지 아니하고 내가 받은 불의에 대해서는 참고 견딤, 형제들과 평화를 유지함,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함, 그를 아버지로 사랑함, 그를 하나님으로 경외함;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에 아무 것도 두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 위에 아무 것도 두지 아니하는 것, 그의 사랑을 결코 떨어지지 않고 붙드는 것.”(Nederigheid in de omgang, standvastigheid in het geloof, bescheidenheid in woorden, rechtvaardigheid in daden, in de werken barmhartigheid, in levenswandel tucht; geen kennis hebben aan het bedrijven van onrecht, maar het haar aangedane [onrecht] verdragen; vrede houden met de broeders, God liefhebben van ganser harte, Hem beminnen als Vader, Hem vrezen als God; niets boven Christus stellen, omdat Hij ook niets boven ons gesteld heeft; zijn liefde onafscheidelijk aanhangen. …)”

이를 볼 때 ‘경건’이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행하는 모든 합당한 행동들을 다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덕목들(겸손, 온유, 평화, 인내, 의로움 등)을 가리키지만,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한 것(절제)과 하나님에 대한 관계(하나님을 사랑함, 경외함)에도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경건에 대한 넓은 이해는 17세기의 청교도들에게 보편화된 것이었다. 한편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것을 ‘경건’(pietas) 또는 ‘종교’(religio)로 보고 사람에 대한 것을 ‘의’(iustitia)로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경건은 곧 사람들에 대한 태도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에 실제로 이러한 구별이 정확하게 유지되기는 어렵다. 그래서 야고보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thr?skeia)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약 1:27).

 

2) 은혜의 열매

 

푸치우스는 경건은 ‘하나님의 선택하시는 은혜의 열매’(vrucht van Gods verkiezende genade)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도르트 신경의 가르침은 경건의 실천을 사라지게 한다는 어떤 이들의 주장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는 경건을 제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옹호하였다. 은혜의 교리는 항상 참 경건의 능력이 된다. “경건은 주로 내적 능력의 문제이다. 참된 경건은 마음의 깊은 곳에 심겨져 있다. … 능력 있게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없이는 어떤 표면적인 행동도 다 죄들에 불과하다. 이성의 조명, 참되고 견고한 믿음, 그리고 정직한 회개는 경건의 요소들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경건의 요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경건의 실천의 첫째 요소인 ‘순수한 교리’는 건전한 지식을 통해 생각을 조명한다. 이 건전한 지식은 영적인 지혜를 주며, 동시에 판단을 지도하며, 감정을 통해 양심을 성결케 하며, 체험을 통해 기억을 강화한다. 2) 두 번째 요소는 ‘믿음’인데, 이것은 신뢰와 확신을 가져다 주며, 이것에서부터 모든 생각을 뛰어넘는 위로가 나온다. 3) 세 번째 요소는 ‘삶의 회개, 새로운 순종’인데, 이에서 참 경건의 진실성이 나타난다. 이 세 요소는 서로 함께 연결되어 있다.

푸치우스는 그의 우트레흐트 대학 강의 중에서 경건은 ‘마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vrucht van Gods genade, die het hart verandert)라고 하였다. 그는 도르트 총회의 전통을 이어받아 모든 경건의 원리로서 ‘중생’(wedergeboorte)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푸치우스는 중생 시에 사람에게 일어나는 ‘체험’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 삶에 있어서의 ‘중생의 열매’에 더 강조점을 둔다. 왜냐하면 중생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 안에서 우리가 걸어갈 수 있는, 그리고 그 안에서 감정의 평화가 보장되는 ‘안전한 울타리’(veilige omheining)이다.

 

3) 정확성

 

푸치우스는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 ‘정확성’(praecisitas)을 강조했다. 그는 중립과 관용이라는 구실 아래 행동에 있어서 정확성을 기하지 않는 자들을 ‘니고데모주의자들’(Nicodemisten), ‘중립주의자들’(Neutralisten), ‘어중간한 자들’(Onderen-tusschenaers), ‘정치적 신학자들’(Politique Theologanten)이라 부르면서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들은 아마도 그가 그의 취임강연에서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는 ‘자유방임주의’(libertinisme), ‘쾌락주의’(epicurisme), ‘부주의’(zorgeloosheid), ‘방탕함’(losbandigheid)과 동일한 부류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정확성’이란 인간의 행동을 하나님의 법에 정확하게 완전히 일치시키는 것을 뜻한다. 이 법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졌으며, 참된 신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지켜지고 있다. 푸치우스에 의하면, 우리는 모든 구체적인 경우에 있어서 정확성을 가지고 정직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성경은 이에 대한 유일한 표준이다. 푸치우스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확성과 단순성은 하나님의 율법의 엄밀성으로 인하여 경건과 분리될 수 없는 방식이다”(Praecisitas et singularitas est modus a pietate inseparabilis, propter divina legis akribodikaion). 만일 계명의 저자가 하나님이시라면, 어느 누구도 그것을 지킴에 있어서 조심성 없이 행할 수 없다. 하나님 자신이 ‘정확성’의 ‘효과적인 제일원인’(prima causa efficiens)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유일한 표준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개혁교회의 경건에 있어서 핵심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경건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 후의 참된 개혁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삶과 행위의 표준으로 삼고,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사는 참 경건의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물론 푸치우스에게 있어서의 ‘정확성’은 자칫하면 율법주의로 오해될 수 있는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 하나님의 말씀을 표준으로 삼고 이것을 엄밀하게 지키고자 하는 노력은 개혁교회의 경건의 한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4) 경건의 실천

 

경건은 ‘실천’(praktijk)과 관계된다. 그래서 푸치우스는 ‘경건의 실천’(praxis pietatis 또는 exercitia pietatis)을 학문적으로 강조할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실천하였다. 오히려 그의 경건에 대한 모든 강조는 실천을 지향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이것을 다르게는 아스케티카’(asketika)라고도 불렀는데, 1664년에 출판된 그의 책 제목(Ta Asketika sive Exercitia pietatis)이 또한 이것을 나타내 준다. 여기서 ‘아스케티카’란 말의 의미는 오늘날의 ‘금욕’이란 것과 전혀 다르다. 그에게 있어서 ‘아스케티카’는 ‘경건의 실천들에 대한 방법과 서술을 포함하는 신학 분과’(pars theologiae quae continet methodum ac descriptionem exercitiorum pietatis)를 의미한다.

푸치우스는 그의 취임강연에서 학생들, 특히 신학생들의 방종에 대해 탄식하고 있다. “학생들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경건과 헌신의 훈련이 없이, 덕을 뿌리거나 거둠이 없이, 세상의 자녀들로서 세상을 위해 부름받아 세상에 굴복하고, 육신과 헛된 것을 섬긴다면 … 이 얼마나 불명예스럽고 가증스러우며 눈물의 바다로 탄식해야만 할 것인가!” 그래서 그는 예부터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배운 자들 곧 잘못된 자들”(de geleerden - de verkeerden!)이라는 말이 영원히 묻혀 버렸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는 또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에 나오는 탄식을 인용하고 있다: “보라. 배우지 못한 자들은 일어나서 천국을 취하지만 우리는 혈과 육에 속한 논쟁들 가운데 방황하고 있구나.”

푸치우스는 먼저 법학도들, 의학도들, 철학도들, 비평가들, 시인들, 논리학자들, 역사?고고학도들에게 그들의 모든 학문을 경건의 토대 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할 것을 촉구한 후에 ‘신학도들’(신학생과 신학교수들)에게 경건한 생활을 강력하게 촉구한다. 그는 신학을 천상적인 철학, 신적인 법, 영적인 의학, 거룩한 글들, 가장 오래되고 정통한 역사, 숭고한 웅변이라고 부르면서, 이러한 신학에 종사하는 신학도들을 ‘기초인 동시에 정상’이며, ‘총합과 완전’이며, ‘모든 공부와 학생들의 규칙과 기준’이며,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말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땅에 떨어진 신학교와 신학생들의 명예를 회복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내가 여러분에게 비노니, 우리의 이름과 지위를 수욕과 더욱 악화되어 가는 오명에서 해방시키시오. 경건한 학문(godzalige geleerdheid)과 학적인 경건(geleerde godzaligheid)을 증명해 보이시오.” 그리고 그는 또한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드(Bernard of Clairvaux)의 다음 말을 인용한다. “설교는 정통이지만 행위는 이단인 자들이 많다. 이단들이 나쁜 가르침을 통해 행했던 것을 오늘날에는 나쁜 모범을 통해 그렇게 하고 있다. 곧 그들은 백성을 미혹하며 잘못으로 인도하고 있다. 그들은 이단들보다 더 위험한데, 이는 행위가 말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면서 푸치우스는 당대의 성직자들의 타락상을 당대 민중의 말들을 통해 지적하고 있다. 곧 “평신도의 신앙이 최고다” 또는 “목사는 게으르다” 또는 “수도승의 배는 박커스의 잔이다”는 말들이 그것이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또한 이렇게 말했다. “마귀는 성직자들에게 세 딸을 주었는데, 곧 교만(trotsheid)과 탐식(vraatzucht)과 탐욕(gierigheid)이다.”

그러면서 성직을 바라는 ‘선지자의 아들들’(신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고 있다. “청년의 정욕, 부도덕한 자극들, 세상의 유혹, 화려한 식탁과 여관에 자주 나타나는 것, 밤낮으로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고 내뿜고 삼키는 것, 합당치 못한 춤, 할 일 없이 돌아다니는 것에 대해 모든 힘을 다해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 여러분의 의무입니다. 이 모든 것은 귀중한 공부 시간을 빼앗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우리가 종교를 위해 애쓰고 다른 사람에게 경건을 강요하면서도 우리 자신이 경건의 맛을 한번도 맛보지 못했다면, 여러분과 나와 모든 신학자들에게 화가 있을찌로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외적(ad extra), 내적(ad intra) 사역에 대해, 그리고 위격들의 삼위일체와 그러한 신비들에 대해 세밀하게 논의하면서도 막상 우리에게 참 겸손이 없고,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했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죄에 대한 정의들과 구별들을 논하면서도 죄에서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래서 푸치우스는 우리가 날마다 성경 읽기와 기도와 묵상과 회개와 믿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치자고 권면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그레고리의 말을 표어로 내세우면서 이것이 없이는 하루가 지나가지 말게 하자고 한다. 곧 “우리가 취하는 모든 일들에 있어서 최선의 질서는, 우리가 말하든지 행하든지간에,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고 하나님 안에서 마치는 것이다.”

 

5) 요약

 

이제 푸치우스의 경건에 대한 견해를 간단히 요약해 보기로 하자. 아뻘도른의 스뻬이꺼(W. van 't Spijker) 교수가 이것을 잘 요약해 주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여기에 그대로 인용하고자 한다. “푸치우스의 경건(pietas)에 대한 이해는 은혜의 우선성으로부터 출발하며, 중생에서 일정한 상태(habitus)를 가지게 하며, 거기서부터 경건의 실천(praxis pietatis)이 나온다. 경건은 전체 삶의 성화를 포함한다. 여기에 율법이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것은 우리가 정확성에 이르도록 도와준다. … 경건의 실천은 따라서 전체 삶의 성화를 지향하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참된 헌신을 위해 훈련되어질 수 있는 정서적 생활의 내면성에도 강조점을 둔다. 이 둘은 서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경건의 본질에 속한다.”

 

V. 평가와 교훈

 

이상에서 우리는 17세기 화란의 개혁신학자인 푸치우스의 경건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았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이 지난 후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서 열정이 식어지고 신앙생활이 형식화되어 가던 시대에 살았던 그가 그 시대 교회의 실상을 정확히 보고 모든 삶과 학문에 있어서 ‘경건’을 강조하고 실천했다는 것은 화란 개혁교회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에도 큰 교훈을 주고 있다. 선교 1 세기를 지나면서 한국 교회는 외형적 성장과 사업의 부요를 자랑하지만 내면적으로는 경건의 능력을 상실하고 참된 경건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손가락질을 당하는 수모를 당하고 있다. “예수 믿어라”고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평신도들, “교회를 부흥시켜라”고 강요만 하고 베풀 줄 모르는 교역자들, 안일한 성공을 바라면서 받기만 좋아하고 줄 줄 모르는 신학생들, 그리고 자기의 지적 실력을 자랑하기에 급급하면서 경건을 등한히 하고 조롱하는 신학자들이 편만해 있는 현금의 한국 교회의 상황은 360여년전의 화란 개혁교회의 모습보다 훨씬 더 열악한 형편에 처해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360여년전에 우트레흐트에서 외쳤던 푸치우스의 호소는 오늘날의 한국 교회를 위해서도 매우 절박한 외침이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푸치우스의 견해가 지닌 의미가 무엇인지 몇 가지로 정리해 보자.

 

1)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경건의 표준으로 삼은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오늘날의 ‘영성’ 주장자들 중에는 성경과 관계없는 영성 또는 성경에서 떠난 영성을 주장하는 자들이 많다. 이러한 오늘날의 시대적 분위기에서 생각해 볼 때, 객관적인 성경의 권위를 가감 없이 그대로 다 인정하고서 그것을 경건의 표준으로 삼고 그 하나님의 법을 엄밀하게 지키려고 한 푸치우스의 경건은 성경적인 참 경건의 한 전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개혁교회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유일무이한 최고의 궁극적인 권위로 받아들이는 것을 그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학문적’이라는 미명 아래 성경의 영감을 부인하고 비평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서 참 경건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2) 이와 같은 맥락에서 푸치우스가 개혁교회의 ‘전통적인 교리’를 철저하게 옹호하는 가운데서 경건을 강조했다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푸치우스는 잘 알려진 대로 정통신학의 옹호자이며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다. 그는 고마루스(F. Gomarus) 밑에서 정통신학을 배웠으며, 목사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 도르트 총회에 소속 노회의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단지 그들의 신학 이론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도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평생 알미니안주의를 반대하며 도르트의 결정을 옹호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후에 요하네스 꼭께이우스(Johannes Coccejus)가 신약 시대에는 안식일이 폐지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그것이 신약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함을 옹호하였다. 또한 철학자 데까르트(Descartes)가 화란에 들어와 머물면서 그의 회의론적 방법으로 개혁교회를 혼란케 할 때 이에 대항해서 전통적인 신학을 파수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처럼 푸치우스는 종교개혁의 귀중한 유산인 전통적인 교리와 신학을 그대로 파수하는 가운데 경건을 추구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요즈음 영성을 추구하는 신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전통적인 교리를 희생시키는 가운데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리의 희생 위에 구축한 영성은 올바른 토대가 없을 뿐만 아니라 결국 성경이 말하는 참 경건과는 관계없는 이상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3) 푸치우스는 경건을 하나의 신학 이론으로 끝내지 아니하고 실제 생활을 강조하고 스스로 힘썼다는 데 또한 큰 의미가 있다. 판 데르 린더(S. van der Linde)는 이것이야말로 개혁주의 전통의 뚜렷한 특징이라고 보았다. 개혁주의의 특징은 주지주의나 신비주의가 아니라 경건의 실천에 있었다. 만일 개혁주의 경건에 대해 아무리 좋은 글을 쓰고 이론을 정립했다 할지라도 구체적인 경건의 실천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예를 들어 기도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해서 좋은 글들을 써낸다 할지라도 막상 자기 자신은 기도 생활을 등한히 하거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다면, 그 모든 연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실제로 필자가 화란에 유학하고 있을 때 기도에 대해 여러 학자들이 연구한 것을 묶어서 편집한 한 책을 발견하고서 그 학적 연구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그 기고자들의 기도 생활에 대해서는 별로 인상을 받지 못한 적이 있다. 이처럼 오늘날의 신학자들은 비록 영성이나 경건에 대해 강조하고 연구를 한다 할지라도 막상 경건의 실천에 있어서는 부족한 점이 많다. 심지어는 그런 실천적인 경건을 내심 조롱하는 경향마저 있다. 이러한 오늘날의 시대 상황에 비추어 생각해 볼 때 학문적으로 경건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평생을 그렇게 살았던 17세기의 푸치우스는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귀한 경종과 귀감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푸치우스가 경건의 영역을 단지 내적 체험에만 국한시키지 아니하고 ‘전체 삶의 영역’으로 확장한 것도 대단히 의미 있다. 물론 이것은 개혁교회의 전통이기는 하지만, 경건주의자들이나 오늘날 영성이나 경건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대개 개인의 내적 체험이나 감정에 치우치고 있는 것을 볼 때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푸치우스는 물론 개인의 내적 상태인 겸손, 온유, 절제 등을 강조하기는 하였지만, 경건이 단지 이런 내적인 것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우리의 전체 삶이 하나님의 법을 따라 순종하는 삶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런 점에서 푸치우스의 경건은 후기 영국의 청교도들이나 후기 독일의 경건주의자들에게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내적 체험 또는 감정적 체험에 치우치는 오류를 범하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푸치우스에 있어서의 경건은 개인의 삶의 한 구석으로 후퇴하지 아니하고 전체 삶의 영역에서 경건을 실천하는 성경적인 경건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약 1:27 참조). 이것은 학문의 영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신학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법학, 의학, 철학, 비평, 시, 논리학, 역사와 고고학 등 모든 학문의 영역에서 경건함으로 학문에 임해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푸치우스의 경건은 개혁교회의 전통으로 계속 이어져서 19세기말과 20세기에 조금 다른 뉘앙스를 가지기만 하지만 아브라함 카이퍼의 문화관과 클라스 스킬더의 문화관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화란 개혁교회의 한 중요한 모습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VI. 아쉬움과 바람

 

물론 푸치우스의 경건 이해에 있어서 아쉬운 점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 하는 일에 완전함은 있을 수 없으며 한 시대에 속한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는 치우침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그의 ‘정확성’의 개념은 자칫하면 앞에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율법주의로 흐를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따르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대충대충’ 하거나 ‘적당히’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법에 대한 ‘정확성’은 올바른 태도이다. 하지만 이렇게 매사에 정확성을 강조할 때 자칫하면 관용(빌 4:6)과 사랑(골 3:14)을 등한히 하기 쉽고 남을 정죄하는 잘못(롬 14:14)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이것은 우리 인간으로서 범하기 쉬운 일반적 개연성을 말하는 것일 따름이며, 푸치우스가 정말로 그러한 잘못에 빠졌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푸치우스의 ‘스콜라주의적 방법’(scholastic method)도 생각해 볼 만한 문제이다. 매사에 모든 문제를 너무 분석적으로, 합리적으로 따지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문제이다. 물론 어떤 것이 문제로 대두될 때에는 그 문제에 대해 조목조목 따져 보고 그 잘잘못을 분석 평가하고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고 그것을 증명하려는 노력은 불가피하다고 생각된다. 이것 자체를 나무라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푸치우스의 이런 학문적 방법을 주지주의(主知主義)라고 비판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겸손하에 그에게 주어진 이성(理性)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성은 도구였을 뿐 경건이 우선이었다. 따라서 그가 어떤 주제를 세밀하게 따지고 분석했다고 해서 주지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은 그의 논증들이 과연 성경에 부합한가 하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는 성경에 근거한 합당한 논증이라고 믿지만, 혹 어떤 경우에 있어서 그렇지 못한 것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 완전한 신학자란 없기 때문에 누구에게서나 발견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좀더 엄밀한 주석에 근거한 신학 작업을 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지적한다면 ‘기도’에 관한 것이다. 물론 푸치우스 자신은 기도에 대해 강조하고 실제로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그 후 개혁교회의 역사에서 볼 때 기도에 대한 강조가 말씀에 대한 강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물론 개혁교회 성도들은 성경 읽기 전후에 기도하고 취침 전과 취침 후에 간단히 기도하는 전통이 있기는 하지만 한국 교회에서와 같은 강력한 기도 운동을 체험하지는 못하였다. 곧 개혁교회의 기도는 개인적 기도가 거의 대부분이며 단체적인 기도는 매우 희소하다. 물론 19세기 이후에 일부 경건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기도회’ 모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개혁교회 전체를 두고 볼 때 한국 교회에서와 같이 일반화된 기도회 모임은 알지 못하였다. 따라서 20세기 후반기에 들어와서 세속화의 물결이 거세게 밀어닥칠 때 그들은 개혁주의의 정통 교리와 문화관을 가지고 있었지만 세속화를 막을 힘을 얻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1980년대 이후로 ‘교회 이탈’(kerkverlating), ‘탈기독교화’(ontkerstening), ‘신 일식’(Godsverduistering), ‘후기 기독교 시대’(post-christelijke periode) 등의 말들을 하면서도 무너져 가는 개혁교회를 다시 세우지는 못했던 것이다. 혹자는 ‘은사 운동’에서 돌파구를 찾으려고 하지만, 이것은 본질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VII. 결론

 

결론적으로 필자가 보기에 현재 개혁교회가 활력을 되찾는 데 가장 중요한 지름길은 ‘기도회’를 조직하고 기도를 활성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성령은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하는 자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눅 11:13). 물론 이러한 기도 운동은 하나님의 말씀과 이에 기초한 전통적인 교리를 붙드는 바탕 위에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은 자신의 감동으로 쓰여진 말씀을 벗어나서 역사하시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객관적 진리와 생활의 규범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과 이에 기초한 교리들을 붙는 것은 참된 영성을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17세기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자요 목사였던 푸치우스의 경건은 오늘날에도 큰 의미가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브라함 카이퍼가 1898년에 미국의 프린스턴 강연에서 말한 것처럼, ‘에올루스하프’(Aeolusharp)를 잘 준비해서 거룩한 시온의 창가에 놓아둔 후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서 아름다운 소리를 낼 때까지 그 앞에 꿇어앉아 기도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무장한 후에 열심히 기도할 때 성령의 큰 역사가 있을 것이며 참 경건이 실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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