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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어린이 신학 - 이신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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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신학

(Theology of Child)

하나님을 ‘어린이’로서 말하기

이신건

나의 스승 몰트만(J. Moltmann)에게

감사와 존경의 뜻으로 바칩니다.

 

차례

머리말: 왜 어린이 신학인가?

1. 학대받는 어린이

1) 어린이 유기(遺棄)

2) 신체적 학대

3) 성폭력

2. 학대받는 어린이에게 하나님은 누구신가?

1) 무력(無力) 속에 전능하신 하나님

2) 양성적(兩性的)이신 하나님

3) 하나님은 어린이의 얼굴도 지니신다

 

3. 어린이 예수

1) 어린이로 오신 하나님

2) 예수의 ‘어린이 신학’

3) 어린이다운 예수

(1)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

(2)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깊은 동정심

(3) 진실한 마음

(4) 온유한 인격

(5) 놀이하는 삶

4. 어린이 하나님

1) 하나님을 ‘어린이’로서 말하기

(1) 실존론적 관점

(2) 그리스도론적 관점

(3) 삼위일체론적 관점

 

2) 어린이의 얼굴을 지니시는 하나님

(1) 순수하신 하나님

(2) 온유하신 하나님

(3) 놀이하시는 하나님

 

3) 어린이다운 성령경험

5. 하나님의 형상과 어린이

1) 어린이도 하나님의 형상인가?

2) 제 견해의 재평가

3) 하나님의 형상과 어린이

6. 낙원의 비전

꼬리말: 실천적 함의(含意)들

후기

머리말: 왜 어린이 신학인가?

 

 

어린이가 무차별하게 학대받고 있다. 바야흐르 이 시대는 ‘어린이 수난시대’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대의 주요 피해자는 여자였다. 그래서 “여자는 인류 최후의 식민지”라는 말이 설득력을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린이가 인류 최후의 식민지”라고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물론 어린이 중에서도 주로 여자 어린이가 성폭력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 해방은 여전히 인류의 큰 숙제이다. 그러나 성인 여자들은 자신들을 방어할 능력을 점점 더 크게 갖추고 있고, 이제는 그들의 공격력도 만만치 않다. 그들은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고, 힘을 결집하여 공동전선을 펼 수도 있다. 하지만 여자 어린이들은 그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어린 여자들은 오늘 날에 엄청난 학대와 폭력 아래 신음하고 있다.

비록 주로 여자 어린이들이 야만적인 성인, 그 중에서도 주로 남자들의 폭력적인 쾌락추구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남자 어린이들이라고 해서 안전지역 안에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점차로 더 많은 어린이들이 어른들에게 학대당하고 있다. 이미 뱃속에서부터 셀 수 없이 많은 생명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선사받은 거룩한 생존권을 박탈당하고 있다. 한국에서만 해마다 50만명의 태아가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낙태당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온 세계에서 살해당하는 태아의 숫자는 그 얼마나 많을까? 단지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생계에 위협이 되기 때문에, 엄마의 건강과 사회생활 때문에, 약물오용과 기형아 출산의 위험 때문에, 등등 온갖 이유로 말미암아 뱃속에서 살해당한 생명들의 숫자는 전쟁과 재해로 죽은 사람들의 숫자보다 훨씬 더 많다고 한다. 연한 순(筍)과 같은 생명들이 단지 어리다는 이유 때문에, 힘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쓸모가 없다는 이유 때문에, 쾌락추구의 대상이라는 이유 때문에 자신의 가치와 생존을 누리기도 전에 냉혹하고 탐욕스러운 성인들의 발 아래 짓밟혀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다.

아, 어찌 할 것인가? 어린이들의 탄식소리를 어른들은 듣고 있는가? 그들도 한 때는 어린이지 않았는가? 그들도 언젠가는 힘없이 늙어갈 것이 아닌가? 그들도 결국 어린이처럼 나약해지고 쪼그라들어서 죽을 것이 아닌가? 왜 어른들은 자신의 분신(分身), 아니 자기 자신들을 학대하고 있는가?

어린이 학대는 인류사 이후로 지금까지 줄곧 온갖 형태로 자행되어 왔지만,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도 어린이들이 학대당하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1996년도 만큼 어린이 폭력, 특히 어린이 성폭력이 언론을 떠들썩하게 장식하고 기성세대들을 심하게 질타하게 한 때는 일찍 없었던 것 같다. 이로 인해 성폭력 방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고, 성폭력방지법 뿐만 아니라 청소년보호법, 가정폭력방지법이 제정되는 등, 얼마 간의 결실이라도 맺은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도 많은 어린이들이 지구 곳곳에서 어른들의 버림, 냉대, 학대와 폭력 아래서 울고 있고, 병들어가고 있으며, 또 죽어가고 있다. 그 얼마나 많은 어린이들, 아니 자신들의 귀중한 자녀들, 아니 인류의 희망들을 짓밟고 나서야 인간은 참회할 것인가? 점점 더 돈과 힘이 지배하는 세상, 성장과 성숙과 성공이 숭배되는 세상, 어른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인간생명인 어린이들이 설 곳이 어디며, 갈 곳이 어디냐?

제3세계에 대한 제1세계의 폭력, 민중에 대한 권력자들의 폭력, 가난한 자들에 대한 부자들의 폭력, 장애자들에 대한 건강한 자들의 폭력, 그리고 이제는 자연생명에 대한 인간들의 폭력도 여전히 지구 곳곳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해방과 자연해방은 오늘 날에 인류가 풀어야 할 가장 어려운 숙제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제는 특히 어린이들에 대한 어른들의(때로는 어린이들의) 무자비한 폭력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어야 할 때가 무르익었다. 다른 폭력들은 폭력을 당하는 자들에 의해 어느 정도 극복될 수가 있다. 말없는 자연조차도 드디어 인간에게 반격을 가하고 있지 않는가? 하지만 어린이들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반격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오직 신음소리만을 낼 뿐이지만, 이 신음소리조차도 어른들에 의해 쉽게 차단당한다. 어린이들이 스스로 이 폭력의 고리과 구조를 끊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른들이 이를 끊어야 한다. 어린이들이 폭력에서 해방되자면, 먼저 어른들이 해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글은 단순히 어린이를 보호하고 사랑하자는 감성적 호소가 아니라 어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질타이다. “어른들이여, 힘없는 것들을 멸시하는 가학증세로부터 해방되어라!” 하지만 어른들이 어린이들을 해방시킨다고 해서, 스스로 해방자가 되는 것만은 아니다. 어른들도 역시 참된 인간으로 거듭나고 해방될 것이다. “어른들이여, 힘있는 것들 앞에서 굽신거리는 우상숭배로부터 돌아서라!” 더 나아가 새로운 세기를 바라보면서 어린이 해방, 인간해방은 새로운 삶의 스타일, 사고와 실천의 새로운 모형(패러다임)을 요구하고 불러들일 것이다.

이런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나는 먼저 한국사회에서 최근에 일어난 ‘어린이 학대의 실상’을 간단하게나마 살펴보고, “학대받는 어린이들에게 하나님은 누구신지?”를 물을 것이다.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하여 나는 특히 현대신학에 와서 혁명적으로 변화된 하나님의 개념들을 추적해 보고, 그런 후에 “이 개념들이 어린이 해방에 얼마나 유용한지?”를 탐구할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특히 어린이 학대의 시대에 본인에게 지워진 시대적 소명, 아니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한다. 어린이들, 특히 학대받는 어린이들에게 하나님이 단순히 아버지나 어머니만이 아니라 ‘어린이’시기도 하다는 결론을 나는 내릴 것이다.

기독교 신학사에서 흔치 않는 이런 결론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나는 “어린이들에게, 아니 성인이 된 우리들에게도 예수가 누구인지?”를 물을 것이며, 예수에게 나타난 어린이 이미지를 추적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나는 “예수의 아버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물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성령에 대한 어린이적 이미지’를 살펴보고, 이어서 ‘하나님의 형상과 어린이’의 관계를 고찰할 것이다. 끝으로 나는 ‘성서의 종말론적 비전에 나타난 어린이 이미지’, 즉 ‘종말론을 위한 어린이 신학의 유용성’을 검토할 것이며, 이를 통하여 결론적으로 위기에 빠진 인류문명이 나아가야 할 미래, 새로운 삶의 유형을 제안할 것이다.

애초에 나는 이 책을 쓰기 위하여 장기간의 준비기간을 가지려고 했다. 새로운 지적 탐험을 성공리에 끝내기 위하여 많은 참고서들을 읽고 해석하려고 생각했다. 오해와 공격도 효율적으로 막아야 하겠지만, 누구에게 내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체계적인 이론을 수립해야 하겠다는 의욕도 은근히 발동했다. 그러나 복잡하고 현란한 지식의 탑을 높이 쌓으려고 공을 들이는 사이에 또 얼마나 많은 어린이들이 희생되어 가겠는가? 그리고 나의 시도가 제 아무리 참신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어렵고 복잡한 글이 어떻게 어른들을 감동시키겠으며, 그래서 어떻게 그들이 진정으로 참회하도록 도울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뭇매를 맞을 각오를 하면서라도 어설픈 체계와 낯설은 이론을 얼기설기 엮어서 성급히 내어놓게 되었다. “지식은 온전하지 못하지만 사랑은 온전하다”고 이미 바울도 말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옹색하지만 나는 이 이론을 스스로 방어할 조금의 책임은 있다고 생각한다. 선의에서든지 악의에서든지 간에, 혹시 사람들이 이 이론의 한 부분만을 성급히 골라서, 혹은 여기저기서 약점들만을 취사선택하여 이 신학에다가 온갖 위험한(?) 선전적 수식어를 붙이려 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간절하게 기도하면서 이 책을 써내려 갔으며, 그 어느 때보다 더 철저하게 성서의 말씀을 경청하려고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진지하게 고난당하는 어린 피조물의 신음소리를 들으면서 신학하려고 했다. 그러기에 나는 이 ‘어린이 신학’을 철두철미하게 ‘성서적, 복음적인 신학’이면서도 철두철미하게 ‘현대적, 실천적인’ 신학이라고 부른다. 이론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이 서로 배치될 필요가 없듯이, 성서(복음)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이 굳이 배치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이론을 검증하기 위하여 여러 각도로 성서와 신학이론을 새롭게 읽어 보았다. 그 결과로 나는 여기서 ‘남성(적) 신학’과 ‘여성(적) 신학’을 넘어서 ‘어린이 신학’으로부터 “그리스도교의 기원을 새로이 재건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나의 이론이 모든 공격을 견뎌낼 수 있는 철옹성(鐵擁城)과 같은 것이라고는 감히 공언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 스스로 이론을 철저히 검증하고 비판하면서 더 견고한 이론을 세워 나갈 마음이다. 그 누가 인간생존의 필연적 조건인 시간과 공간의 제약성을 뛰어넘어 영원히 안식하는 신학을 수립했다고 교만되이 말하겠는가?

그리고 어차피 ‘어린이 신학’을 하는 마당에 나는 굳이 어른들처럼 객관적 명증(明證)을 거치지 않는 말은 절대로 내뱉지 않겠다는 허세(虛勢)를 부리진 않겠다. 다시 말하면, 나는 때로는 마치 호기심과 상상력이 왕성하게 발동하는 어린이처럼 순진하게 이런저런 물음을 던질 것이며, 때로는 스스로 던진 물음에 대해 어설픈 대답을 내리기보다는 그냥 ‘물음은 물음으로’ 머물게 할 것이다. 대답 여부와 대답의 진위를 넘어서 물음이 존재한다는 그 자체는 이미 하나님과 세계의 신비를 가장 잘 드러낸다고 나는 믿는다. 하나님과 세계를 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자는 이미 하나님과 세계만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엄청난 폭력을 자행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물음을 정지한 인간은 이미 비인간, 아니 화석화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나는 내가 내릴 수 없는 대답을 독자에게 떠맡길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상대성을 인정하고 그래서 상대방의 우월성을 더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는 대화를 필요로 하고 대화를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때로는 나는 대답하기 어려워 보이는 곳에서도 감히 용감한 결론을 내리는 모험을 시도할 것이다. 이처럼 때로는 그저 묻기만 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답을 떠맡기기도 하고 때로는 확신에 차서 혼자서 소리치기도 하는 것은 어린이의 마음과도 일치하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나는 어린이처럼 지적 호기심과 상상력을 최대한도로 동원하여 하나님과 세계의 신비를 탐구해 나갈 것이다. 무릇 인류의 모든 위대한 사상들과 실천들은 다 처음에는 그 얼마나 “어린이 생각처럼 유치하다”고 비난받거나 오해를 받았는가? 예를 들면, 인간이 새처럼 하늘을 날 수 있다거나 달나라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 자들은 다들 어린이와 같이 모험심과 상상력이 뛰어난 자들이 아니었는가? 모험심과 상상력이 꼭 어린이의 전유물은 아니지만, 이것은 참으로 어린이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은 어른과 달리 무한히 열려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대 중반의 성인으로서, 책임적인 학자로서 “내가 너무 유치하게 지나친 모험과 상상을 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자문하면서 여러 형제들에게 나의 생각들을 조심스럽게 개진해 보았다. 그러나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놀라면서 나의 생각에 동의를 표해 주었고, 때로는 조속한 집필을 촉구했다. 그러나 내게 가장 큰 자극을 주었던 자는 바로 나의 스승 몰트만(J. Moltmann)이었다. 나는 그분에게 편지를 띄워 다음과 같이 물었다.

... 당신의 저서 ‘Wer ist Christus f?r uns heute?’(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신가?)가 출판되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한 권을 보내 드립니다. 그리고 당신의 저서 ‘In der Geschichte des dreieinigen Gottes’(삼위일체와 하나님의 歷史)도 이미 다 번역하였으며, 늦어도 올해 말까지는 출판되리라고 희망합니다. 이 책으로부터 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하여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당신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바로 즉시 나는 당신의 결론을 넘어서서 새로운 그 무엇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즉 “왜 우리가 하나님을 가부장주의적으로 아버지라고 부르거나 여성신학적으로 어머니라고 부르면서, 감히 어린이라고도 부를 수는 없는지?” 갑자기 자문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나는 요즈음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 안에서 어린이의 얼굴도 갖고 계시다는 흔치 않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특히 오늘 날에 성적으로 학대당하고 육체적으로 억압당하며 착취당하는, 종종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어린이들을 위로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예수가 “너희는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아버지의 나라와 어머니의 나라일 수는 있어도 어린이의 나라는 아닐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는 오로지 성인들만을 위해서 고난당하셨고 어린이들을 위해서는 고난당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은 나의 이런 생각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생각을 신학적으로 심화시킬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1997년 3월 21일)

 

얼마 후에 몰트만 교수는 고맙게도 아래와 같은 답신을 보내 주셨다.

 

...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메시야적인 어린이의 모습을 취하셨다는 당신의 생각을 나는 탁월하게 생각합니다. 이 생각을 주저하지 마시고 신학적으로 심화시키시고, 그것에 관해 글을 쓰십시오. 나의 그리스도론 ‘Der Weg Jesu Christi’(예수 그리스도의 길)에서 당신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던 메시야적인 어린이를 발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 아버지라는 나의 논문 끝부분에서 나는 이것도 언급하였습니다. 이런 생각 안에는 특히 하나님의 나라가 약속되어 있는 어린이들에게 시사하는 점들이 더 많이 있습니다.(1997년 4월 2일, 튀빙엔에서)

 

이 격려는 이 책을 집필하는 데 가장 큰 용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분의 신학에 나타난 어린이 신학적 모티브도 내게 큰 도움을 주었다. 이 자리를 빌려 그분의 격려와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무엇보다도 아직도 어린이 학대가 공공연히 자행되는 오늘 날에 또 하나의 어린이 학대의 주범자요 공범자인 나를 각성시키셔서 어린이들을 좀 더 사랑할 수 있도록, 아니 스스로 어린이와 같이 될 수 있도록, 아니 어린이의 얼굴도 지니고 계실 당신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도록 크신 은혜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하나님의 어린이와 같은 얼굴을 볼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과 함께 어린이처럼 뛰놀 수 있다면, 그 얼마나 행복할까!

어린이 나라, 천국이여 속히 이 땅에 오소서!

이 세계가 그 나라를 믿고 받아들이기를!

어린이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1997년 12월 4일

부천 성주산 아래서

이 신 건

 

 

1. 학대받는 어린이

사람들은 흔히 어려움을 겪는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먼저 욥의 친구들처럼 “누구 탓인가?”라고 묻고서 그 원인을 요모조모로 따지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시급한 일은 고통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고통의 극복이다. 고통의 현실 앞에서 그 이유를 먼저 따지는 질문은 아마도 대개는 아직 고통의 깊이를 체험하지 못한 제삼자, 아니 방관자의 질문일 것이다. 그러나 고통을 직접 당하는 당사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고통을 초래한 복잡한 원인을 설명하는 것보다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을 찾는 것이다.

나도 여기서 어린이 학대의 원인을 추적하기보다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일어나는 어린이 학대의 양상을 설명하고, 궁극적으로 이를 극복하는 길이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한다. 물론 내가 찾는 해결책은 우선은 신학적 해결책이다. 그것은 내가 신학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인간의 문제는 은밀한 인간의 마음에서부터 나온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며, 또 인간의 마음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의지하고 있는 그 어떤 종류의 절대자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나온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어린이 학대란 무엇을 말하는가? ‘어린이 학대’란 일반적으로 소아나 청소년이 부모나 주위의 성인으로부터 성장발육에 필요한 보호,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경우뿐만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상처를 자주 받거나 심지어는 살해를 당하는 경우를 통털어 의미한다. 이러한 어린이 학대의 폭넓은 양상을 여기서 다 열거하는 것은 나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겠거니와, 또한 그럴 필요도 없다고 본다. 다만 나는 1996년 한해 동안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어린이 학대(어린이 유기, 신체적 학대 그리고 성폭력)의 사례를 일간 언론지(중앙일보, 한겨례)의 보도를 근거로 삼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1) 어린이 유기(遺棄)

 

어린이 학대의 가장 흔한 사례는 부모가 자신의 자녀들에 대한 보호와 양육의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다. 어린이가 버려지는 가장 큰 이유는 부모의 이혼이다. 95년에 전국 가정법원에 접수된 재판, 합의 이혼신청은 104,062건이라고 한다. 실제로 이혼한 건수는 73,000여건이지만, 이혼신청은 곧 파경(破鏡)을 의미한다. 각 가정의 자녀수가 평균해서 2명쯤이라고 계산하면, 매년 200,000명 내외의 아이들이 자신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어머니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다고 할 수 있다.

고아원에 버려진 아이들 가운데 74.2%가 살아있는 부모로부터 버려진 ‘고아 아닌 고아’라는 통계이다. 전통적으로 가정윤리와 사회체면을 중시해 왔던 한국에서 부모가 심각한 갈등에 빠지더라도 자식 때문에 이혼하기를 꺼려왔다. 그러나 요즈음엔 윤리의식의 변화와 여권신장 등으로 인해서 한국에서도 선진국처럼 이혼이 급속도로 증가하는 추세이다. 그리고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이혼할 때 부부가 서로 아이를 맡으려고 싸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요즘엔 서로 자식을 안 맡으려고 싸운다고 한다.

부모가 없는 아이들을 모아 기르는 아동복지시설은 전국에 269개가 있다. 그러나 이 시설엔 사망한 부모나 미혼모의 아이들보다는 가출이나 이혼으로 버려진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95년에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189개 아동복지시설의 어린이 14,127명을 대상으로 부모의 생존여부를 조사한 결과, 74.2%가 부모나 편부모가 생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 신체적 학대

 

학교나 거리에서 학생이나 불량배가 어린이를 폭행하는 사례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 이는 지나친 학업 스트레스와 상업적 폭력문화, 가정의 해체 등이 빚은 현대문명의 안타까운 소산이다. 또 가끔은 선생의 심한 체벌이 사회적 물의을 빚기도 한다. 교육의 한 수단이라는 ‘사랑의 매’가 때로는 불행한 결과를 빚기도 한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폭력 못지 않게 가정에서 일어나는 어린이 학대도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남편의 아내폭력이라는 불행한 현상 가운데 또 하나의 불행한 폭력의 그림자가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니라 어른에 의한 자녀폭력, 이른바 아동학대(신체적 학대와 성적 학대 )이다. 소아정신과 의사들은 이같은 아동학대가 대부분 근친 간에 이루어져 실상이 숨기어지고 있을 뿐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고 말한다.

소아청소년 정신의학회지에 따르면 ‘심하게 매를 맞아본 적이 있다’는 청소년이 86년 조사에서는 66.2%였으나, 92년에는 96.4%나 됐다. 그 이후에는 조사조차 한 적이 없다고 한다. 또 다른 조사에서는 “자녀가 잘못했을 때 체벌하는가?”라는 물음에 72%의 어머니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것은 태국 23%, 미국 26%, 일본 33%, 영국 28%, 프랑스 30%에 비하면 엄청 높은 수치다.

아동학대 보호법이 잘 발달된 미국에서도 학대로 사망하는 어린이를 연간 4,000명 이상으로 추정하며, 응급실을 방문하는 5세 이하 환자의 10%가 아동학대 환자로 밝혀져 있다. 우리 나라는 정확한 통계가 없는 실정이나, 종합병원 응급실에서는 학대받은 아동이 뇌출혈, 혼수, 실명, 다발성 골절 등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실려 오는 일을 종종 볼 수 있다고 한다.

아동학대는 여러 군데 담뱃불로 지진 화상, 손, 발 회음부, 엉덩이 등이 끓는 물에 덴 화상이 있으며, 전신 X선 뼈사진에서 발생시기가 다른 골절흔적이 여러 곳에 나타나며, 간, 비장이 파열되는 복부외상 또는 망막분리, 출혈 같은 안구손상 등의 소견이 흔히 나타난다고 한다.

학대가 일어나는 원인은 비정상적 성격의 부모에게 있는 경우가 많다. 가해자 중 10% 정도는 정신질환을 갖고 있으며, 나머지는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거나 화난 상태에서 사소한 아이의 실수에 순간적으로 학대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서울의대 홍강의(洪剛義, 소아정신) 교수는 “신체적 학대를 받는 아이는 3명 중 1명이 뇌손상을 받고, 3분의 1은 정신지체를 보이는 등 심각한 후유증을 남긴다”며 문제의 심각성을 강조했다.

 

(3) 성폭력

 

육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되돌이키기 어려운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은 성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남성중심적인 성윤리, 유교적-보수적인 성문화, 사회적-법적 장치의 미비 등은 성폭력의 피해 당사자들과 주위의 사람들의 고통과 상처를 더욱 가중시킨다. 한국사회의 성범죄는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택가와 농촌까지 만연하는 향락-퇴패문화의 희생자는 비단 여성들만이 아니겠지만, 여성 중에서도 특히 어린 여성, 여자 어린이는 그 폐해를 가장 크게 입는 희생자들이다.

우리 나라 청소년 100명 가운데 6명이 강간 등 성폭행을 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은 ‘청소년대화의 광장’이 최근 청소년 1,54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청소년 폭력 및 성폭력 실태조사’ 결과로 드러났다. 이 조사에 따르면, 청소년 34.4%가 성폭력을 당했으며, 이 중에서 강제적인 키스와 성관계 등 성폭행을 당한 경우도 18.4%(전체 응답자의 6.7%)에 이르러, 성폭력이 청소년들 사이에서 만연해 있음을 보여줬다.

자기 방어 및 표현능력이 없거나 부족하다는 약점을 이용한 미성년자 성폭력이 해마다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소장 崔永愛)에 신고된 청소년, 어린이 성폭력 건수는 93년 550건, 94년 1,300건, 95년 1,500건 등으로 매년 폭발적인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崔소장은 “신고된 성폭력 건수 중 미성년자 성폭력이 30%를 차지한다”며 “이 중 얼굴을 알고 지내는 친, 인척이나 동네주민 등이 절반을 넘는다”고 설명했다. 여성민우회 가족과 성상담소측은 “어린이 성폭력은 피해자가 고발하기 어려운 점 때문에 연간 10만 건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고 밝혔다.

경찰청에 따르면, 성폭력 사건(미성년자 간음, 미성년자의제 강간)과 성착취 사건(아동복지 위반)은 최근 수치상으로는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미성년자 간음은 92년 274건에서 95년 143건으로, 미성년자의제 강간은 174건에서 77건으로 감소했다. 아동복지 위반사건도 92년 231건에서 95년 147건으로 줄어들었다. 또 보건복지부는 전국 윤락여성수가 4,800명에 불과하다고 지난 해 국정감사에서 보고했다.

그러나 이같은 정부 통계는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며, 미성년자 성학대에 대한 정부차원의 대책도 별다른 게 없어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여성민우회 등 여성단체들은 유흥접객업소, 숙박업소, 안마시술소 등 41만개 유흥업소에서 80만-120만 명의 여성들이 일하며, 이 가운데 20-30%가 미성년자인 것으로 추산한다.

 

 

2. 학대받는 어린이에게 하나님은 누구신가?

이해할 수 없고 해결할 수도 없는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고난의 벼랑에 서서 그가 믿는 온갖 신들에게 소리친다. “왜 나에게 이런 가혹한 형벌을 허락하시느냐?” “이러한 고통을 허락하시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시냐?” 평소에는 자신을 철저한 무신론자로 이해하는 사람들조차도 끝이 보이지 않는 고난 앞에서는 흔히 그동안 억압해왔던 자신의 신들을 부르고 그에게 항의하곤 하는 모습을 우리는 종종 볼 수 있다. 비록 그 신이 차가운 운명의 신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그 이름없는 신에게조차 항의하는 자유를 갖는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난 한가운데서 그 누구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부른다. 탄원시를 읊었던 많은 신앙인들, 경건하고 의로운 욥, 무엇보다도 십자가에 달렸던 예수는 고통 중에서 하나님을 불렀던 수많은 사람들의 대변자이다. 예수는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절명의 외마디를 외치며 죽었다. 인간이 고통 중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소리지를 수 있다는 것은 그나마 인간에게 허용된 특권, 아니 하나님의 은혜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자궁에서 살해당하는 태아는 ‘모태에서 그를 조성하신 하나님’(시편 139)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혹시 알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에게 어떻게 소리칠 수 있을까? 여기저기서 어른들에게 학대당하고 짓밟히고 죽임당하는 어린이들은 아직 듣지도 배우지도 못한 하나님을 향하여 어떻게 탄식소리를 낼 수 있을까? 혹시 하나님의 존재와 이름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해 소리칠 수나 있을까? 그에게는 차라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 하나님과 같은 존재인 부모에게 버림받고 학대받고 심지어는 폭력까지 당할 때, 그는 누구에게 소리쳐야 할까?

그러나 비록 어린이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소리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귀를 만드신 하나님이 분명히 소리없는 아우성을 듣고 계실 것이며, 인간의 눈을 만드신 하나님이 불꽃같은 눈동자로 이를 보고 계실 것이다. 이것만이 고난 중에 있는 인간의 최후의 위로와 구원의 희망이 될 것이다. 욥처럼 고난 중에라도 구원자가 살아계심을 확신하는 것 자체가 이미 구원일 것이며, 그래서 하박국처럼 기뻐하고 노래할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불의와 고난 중에서 여전히 침묵하고 계신다는 사실은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에게조차 늘 고통의 가시였고, 그래서 무신론자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당신들이 믿는 하나님은 어디로 갔는가?” “당신들의 하나님은 귀가 먹었는가?” “당신들의 하나님은 죽었는가?” 그래서 고난은 하나님을 찾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을 부정하게 만든다. 고통 중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구를 찾겠는가? 그러나 계속되는 불의한 고통 중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겠는가? 힘없는 어린이들이 힘있는 어른들에게 학대받고 상처받고 죽도록 마냥 방치하시는 하나님, 연약한 어린이들이 포악한 어른들에 의해 학대와 쾌락의 속죄양이 되어 순한 피를 흘리도록 내버려 두시는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신가? 나는 어린이들을 대신하여, 어린이 고난의 현장인 한국에서 이 물음을 던진다.

그런데 이 물음은 지구 저편, 벨기에서도 들려 왔다. 1996년 벨기에의 한 마을에서 8개월이 넘도록 어두운 지하실에 갇혀서 성폭행을 당하며 매춘지로 팔리려던 두 소녀가 끝내는 굶주림으로 죽은 끔직스러운 사건이 발생했다. 나는 여기서 ‘뉴스위크’(Newsweek)지의 한국판(중앙일보사, 1996, 9. 4)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1996년 8월 9일 밤, 벨기에의 작은 마을 베르트릭스 읍에 사는 14세 소녀 라에티티아 델헤츠는 수영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하얀 승합차가 그녀 옆에 와 멈췄다. 그녀가 차에 올라타는 것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 누군가가 그날 밤 낯선 차량이 돌아다니는 것은 수상히 여겨 차량번호를 적어두었다가 경찰에 신고했고, 라에티티아는 그 덕분으로 살아났다.

당국의 조회 결과로 승합차는 아동강간 전과가 있으며 현재 실직 중인 전공 마르크 뒤트루(40)의 것이었다. 경찰은 프랑스 국경 근처 마르시넬에 있는 그의 집을 수색했으나 아무 단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뒤트루는 이틀 간의 심문 끝에 결국 범행을 자백했다. “두 계집애를 내주겠다”고 말한 것이다. 금속 캐비넷을 치우니 지하실로 통하는 문이 나왔고 그곳엔 라에티티아 외에 석달 전 자전거를 타다 실종됐던 소녀 다르덴(12)도 있었다. 둘 다 성폭행을 당한 뒤였다. 경찰은 포르노 비디오와 사진도 찾아냈는데, 대부분 뒤트루가 어린 소녀들과 찍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공포의 서막에 불과했다. 경찰은 뒤트루의 자백에 따라 그의 시골집에서 작년 6월 실종된 여덟 살짜리 동갑내기 친구 멜리사 뤼소와 쥘리 르죈의 시신을 찾아냈다. 집 근처에서 놀다 실종됐던 그 두 소녀도 뒤트루의 지하감옥에 갇혀 있었다. 8개월이 넘도록 성폭행을 당한 그들에게 최악의 운명이 닥친 것은 뒤트루가 그들을 내버려두고 떠난 뒤였다. 그가 별도의 절도죄로 복역하는 동안 굶어 죽은 것이다.

수천 명의 벨기에인들은 리에주에 나란히 묻힌 두 소녀에게 조의를 표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가스통 숀브로드 목사는 애도사에서 말했다. “하나님은 귀가 먹었는가? 우리의 기도는 다 어디로 갔는가?” 길가에서 도열한 사람들은 곰인형이 가득 차 있고 꽃으로 뒤덮인 운구행렬이 지나갈 때 눈물을 흘렸다.

 

 

학대받는 어린이에게 하나님은 누구신가? 그는 힘있는 자가 부러워하는, 아니 힘없는 어린이가 고난당하도록 내버려 두는, 아니 힘있는 자를 두둔하는 전능한 하나님이신가? 그는 여성에 대한 온갖 지배와 억압, 폭력을 조장하고 두둔하는 남성적인 하나님이신가? 나는 고난 때문에 이런 물음을 묻는다. “학대받는 어린이에게 하나님은 대관절 누구시냐?”

이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하여 나는 무엇보다도 전통적인 하나님 개념을 혁명적으로 뒤집은 몇몇 현대신학자들의 신이해의 도움을 받고자 한다. 나는 단순히 이를 소개할 뿐만 아니라 그 한계성도 지적하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나는 학대받는 어린이의 하나님을 용감하게 붙잡으려고 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투쟁만이 아니라 시련 중에 있는 신앙의 투쟁이요, 신앙의 모험이기도 하다.

 

1) 무력(無力) 속에 전능하신 하나님

 

루터가 말한 대로, 사람은 언제나 제각기 자신의 하나님에게 마음을 걸고 있다. 그가 자신의 최후의 확신, 희망의 근거, 생활의 원동력, 삶의 안식의 근거를 두는 바로 그곳에, 그의 하나님은 가장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적으로 애써 부인하는 자라도 제각기 절대자의 대용물을 갖기 마련이다. 즉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현대인에게도 절대적 미래, 이성, 의미, 자유, 평화 등과 같은 절대자의 대용물이 초자아적 힘으로서 등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인은 비록 우상숭배의 형태로나마 대체된 절대자에게 거룩한 경배를 올린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믿음과 행동의 최후의 거점을 그 절대자에게 두고, 그의 이름으로 믿음과 행동을 정당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종교적 표상은 그가 맺는 제반 관계들을 규정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그는 우주의 모든 힘의 원천, 그 힘의 총화일까? 그는 권세의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앉아서 온 우주를 호령하면서, 때때로 그의 충직한 신하들에게는 권력의 은혜를 베푸는 지엄하고 전능한 하나님일까? 만약 그렇다면, 이 하나님은 이 땅의 모든 권력자들이 모방하고 반사하고 싶은 존재일 것이며, 그들은 자칭 그런 하나님의 대리자, 전권자로 등장하려고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힘이 약한 존재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런 권력자들을 섬겨야 할 것이며, 지배와 억압을 영원한 신의 섭리로 받아들일 것이다. 설령 권좌는 자주 찬탈되고 전복되는 한이 있더라도, 권력질서 자체는 결코 전복될 수가 없고,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이것은 신성모독이다. 왜냐하면 이 질서는 하나님이 영원히 재가한 신성한 우주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로마인의 권력의 신(황제), 유대인의 기적과 권능의 야훼 하나님이 열렬히 숭배되는 한 가운데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들에 의해 힘없이 십자가에 못박혔던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했다. 이로써 비록 우상적인 신들이 당장 전복되지는 않았지만, 그 내적인 정당성은 비틀거리기 시작했으며, 그리하여 내부로부터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기독교가 이 세상에 가져온 거대한 혁명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다시금 로마-헬라권으로 진입하면서, 그리고 억압당하는 종교가 이제 지배자의 종교로 승격됨으로써, 그리스도는 다시금 세상 통치자의 형상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통치를 섭정하는 전능한 신이 되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어느 새 로마 황제의 하나님, 히틀러의 하나님이 되었고, 이런 하나님을 경배하는 이 세상의 통치자들과 또 이를 흉내낸 교회의 지도자들은 바로 그 하나님의 이름으로 계급지배를 확장하려고 했다. 양대 세계대전과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등의 참화는 그 당연한 귀결이었다.

양대 세계전쟁의 참화와 또 이를 정당화하던 자유주의 신학의 붕괴 속에서 스위스의 작은 마을 쟈펜빌Safenwil)에서 목회하던 칼 바르트(K. Barth)는 서구인들이 지금껏 섬겨 온 이런 우상도 붕괴하는 소리를 함께 들었다. 이날 이후로 평생 동안 바르트는 자연신학이 스스로 고안한 전능의 하나님, 이 세상의 영광과 힘의 투사(投射)와 연장(延長)으로서의 하나님을 열렬히 배격했다. 그의 ‘그리스도론적 보편주의’(Christlicher Universalismus) 혹은 ‘그리스도론적 일원론’(Christlicher Monismus)은 무엇보다도 하나님 개념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선택론(KD Ⅱ/2)에서 바르트는 구체적인 인간 예수 그리스도를 지나쳐서 전능자로서 신개념 안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인식하고 정초(定礎)하려는 시도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의 신학의 ‘그리스도론적 집중(集中)’은 화해론(KD Ⅳ/1-3)에서 그리스도의 두 본성, 즉 신성과 인성에 대한 전통적 교리와 그리스도의 두 직분, 즉 비하(卑下)의 직분과 고양(高揚)의 직분을 함께 결합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르면, 예수의 신성은 그의 비하에서 계시되고, 그의 인간성은 그의 고양에서 계시된다. 이로써 바르트는 하나님 개념과 십자가의 냉혹성을 철저히 관련시켰다.

전통적인 신학, 특히 ‘부동(不動)의 원동자(原動者)’로서의 하나님 개념에 따라서 하나님은 철저히 불변하고 그래서 고난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신학적 공리(公理)로 여겨 오던 서구신학과는 달리, 그리고 이에 분명히 맞서면서, 바르트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고난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바르트는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와의 모순에 빠지지 않고는 고난당하실 수 없다는 전통적이고도 형이상학적인 하나님 개념을 비판하였다. 그리스의 형이상학적인 하나님 개념을 이끌어들인 일부 고대 교부들이 주장한 대로, 만약 하나님이 그의 본질상 고난당하실 수 없는 분이라고 한다면, 고난당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은 역설이 된다. 하지만 하나님이 고난을 당하신다고 말할 때, 이것은 하나님 존재규정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고난은 ‘행동 속에 있는 하나님의 존재’와 일치하고 있다. 하나님의 고난은 행동 속에 있는 하나님의 존재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고난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행동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의 이러한 비판에서 우리는 모든 형태의 자연신학에 대한 그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반대입장을 경험할 수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성과는 동떨어진 하나님을 표상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서 무엇이 가능하며 무엇이 불가능한지를 결정할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으로 존재하시고 행동하시고 고난당하신다는 것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타당성을 알게 된다. 그래서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취하셨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자기 낮춤(卑下)을 뜻한다... 하나님이 이처럼 자신을 낮추실 수 있고, 또 그러길 원하시며 기꺼이 그러하신다는 바로 이 사실 때문에 하나님은 위대하시며, 바로 그러한 사실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진정한 하나님으로 입증하신다. 바로 이 점에서 하나님은 모든 다른 신들과 구분되며 그들보다 뛰어나시다. 바로 이러한 높은 겸손 안에서 하나님은 세상과 화해하시는 하나님으로서 말하시고 행동하신다.

 

그리하여 바르트는 일반적인 신학전통처럼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조차도 그의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지는 고양(高揚: 높이들림)의 신분에서 인식하지 않고, 도리어 성육신과 고난으로 이어지는 그의 비하(卑下: 자기낮춤)의 신분에서 인식함으로써, 현대신학의 하나님 이해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의 신성이 무엇인가는 이러저러한 가장 높고 절대적이며 비세상적인 피안적 존재의 총괄개념으로부터 취해질 수 없고, 그리스도 사건 자체와의 관련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의 신성의 비밀은 임의적으로 생각해 낸, 잘못된 비밀이 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를 통하여 그 성서적 증언 안에서 주어진 비밀이 아닐 것이다. 교의학은 오로지 이것에 관해만 관심을 가져야 한다. 진정한 하나님이 누구신가, 그분,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그분의 신성으로서의 그분의 존재, ‘신적인 본질’이 무엇인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하나님이라고 할 때 그분의 본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그분이 인간의 본질에 참여하셨다는 사실로부터, 그분의 인간되심, 그분의 성육신으로부터, 그분이 인간으로서 육신 가운데서 행하셨고 고난당하셨던 것으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며 신적인 분이시다는 사실이 인식될 수 있고 또 인식되는 거울은 바로 그분의 성육신과 육신 안의 그분의 존재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고난은 하나님의 본질에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비하 가운데서도 여전히 하나님이시다. 여기서 하나님의 본질은 다른 본질로 변화, 축소, 변형되지 않았으며, 다른 본질과 섞이지도 않았다. 더욱이 하나님의 본질이 폐기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신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본질, 신성의 본질을 계시하신 바로 그곳에서 배우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자신을 그러한 것을 행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신다면, 그분보다 더 지혜있는 자가 되려고 하는 것과 그러한 일이 신적인 본질과 모순된다고 우리는 주장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너무나 작게 그리고 너무나 비뚤어지게, 잘못된 하나님 개념의 틀 안에서 그분을 생각했다는 사실을 그분 자신을 통하여 배워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중하게 하나님의 본질 안의 모순과 분열을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수정하려고 마음을 바꾸기보다는, 차라리 그분이 그러한 일을 행하신다는 점을 고려하면서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새롭게 정리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상대적인 것과 대립하면서 오로지 절대적으로, 모든 유한성을 배제하면서 오로지 무한하게, 모든 낮은 것과 대립하면서 오로지 높은 곳에서, 모든 고난과 대립하면서 오로지 활동적으로, 모든 시련과 대립하면서 오로지 초연히, 모든 내재성과 대립하면서 오로지 초월적으로, 그리고 또한 모든 인간적인 것과 대립하면서 오로지 신적으로, 짤막하게 말하자면, 오로지 ‘전적으로 다른’ 자일 수가 있고 또 그럴지도 모른다는 이러한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실제로 바로 그러한 자이시고 그러한 것을 행하신다는 점을 고려할 때, 지탱될 수 없고 왜곡되며 이교도적인 것임이 드러난다.

 

모든 다른 추상적인 권능(M?chtigkeit)과는 달리 하나님의 전능(Allmacht)이 약함과 무력함의 형상을 취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바로 이 형상 안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적인 권능으로서 위대하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일에서 낯선 곳으로 나아가심으로써, 그분의 영광을 가리심으로써, 자신을 욕되게 하실 필요는 없다. 오히려 하나님은 바로 이 은폐성 안에서 진정으로 영광스러우시다. 그분의 비하는 우리가 그분을 그분의 존재 그대로 볼 수 있는 거울이다. 인간들이 만들어 낸 모든 신들의 자유스럽지 못한, 사랑없는 영광과는 달리 그분의 사랑의 자유는 그분의 영광이다. 모든 것은 바로 이 안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위엄에 찬 본질을 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현대신학계에서 그 누구보다도 더 철두철미하게 ‘하나님의 고난’을 자신의 신학과 생애 안으로 이끌어들인 자는 디트리히 본회퍼(D. Bonhoeffer)이다. 그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을 배제한 하나님 인식을 철저히 배격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그의 성육신, 고난과 무관하게 진술할 수 없음을 강조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서 묘사하려고 한다면, 신적인 본질, 그분의 전능과 전지를 말해서는 안 되고, 죄 아래 있는 연약한 인간, 그의 구유와 그의 십자가를 말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예수의 하나님됨을 말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바로 그의 약함을 말해야 한다...

구유에 누워 있는 어린이는 온전한 하나님이시다... 구유는 하나님이신 인간을 가리킨다...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서 말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를 전지와 전능의 속성들을 소유하고 있는, 어떤 신이념의 대변자로 말해서는 안 되고 -이런 추상적인 신의 존재란 없다.- 그의 연약함, 구유와 십자가를 말해야 한다. 이 사람은 결코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니다...

낮아진 바로 이 사람이 하나님이시다. 그는 죽음 속에서 그 어떤 신적인 속성들도 보여 주지 않았다. 그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 때문에 절망하고 죽어 가는 사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가 하나님이시라고 우리는 말한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한다. 성육신 안에서 하나님은 숨김이 없이 자신을 계시하신다.

 

본회퍼가 테겔(Tegel) 감옥에서 확신했던 하나님은 세상에서 무력하지만 그 무력함을 통해서 자신의 힘을 실증하시는 하나님이었다. 본회퍼에게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고통과 무력성을 통해서 존재한다. 그는 구체적인 세상 한가운데서 인간사의 중심에서 무력의 힘이다. 히틀러의 살인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감옥에 갇혔던 본회퍼는 성숙한 세상과 무신론 시대의 도래를 예견하면서, 해결불가능한 것을 해결해 주는 종교적인 하나님에 대한 환상을 가지려 하기보다는 세상에서 그와 고통을 함께 나누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붙들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걸어나와 십자가로 향하신다. 하나님은 세상 안에서 무력하시고 약하시다. 오직 그러한 분으로서만 그분은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를 도우신다. 그리스도가 그의 전능의 힘으로가 아니라 그의 약함, 그의 고난의 힘으로 도우시는 사실이 마태복음 8장 17절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여기에 다른 종교들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놓여 있다. 인간의 종교성은 고난 속에 있는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 안에 있는 하나님의 권능을 바라보도록 한다. 하나님은 기계장치의 하나님(deus ex machina)이다. 성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무력함과 고난을 바라보도록 한다. 오직 고난당하시는 하나님만이 도우실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릇된 하나님 표상을 제거해 버린, 앞에서 이미 말한 세상의 성숙함은 세상 안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통하여 힘과 공간을 얻는 성서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을 열어 준다는 사실을 우리는 말해야 한다.

 

‘하나님의 죽음의 신학’이라는 음울한 음조 위에 갑자기 부활의 희망을 알리는 트럼펱 소리를 우렁차게 터뜨렸던 ‘희망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뒷면, 즉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의 고난에 대해 명상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신학이 결코 고난에 대해서 눈을 감는 맹목적인 ‘희망의 신학’이 아니라 바로 고난의 한복판에서 희망을 증언하려는 신학임이 드러났다. 그는 특히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에 착안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계의 고난에 참여하시는 하나님을 보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그분의 격정적이고 자발적인 고난 안에서 보려고 하였다.

루터에게서 하나님의 가시적 존재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를 말한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한 분만이 ‘진정한 신학이며 인간의 하나님 인식’이다... 하나님을 비하와 연약함과 그리스도의 죽음 가운데서 인식하는 자는 인간이 꿈꾸는 존귀와 신성 가운데서 그분을 인식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 자신에 의해 버림받고 배척받고 경멸받은 인간성 가운데서 인식한다. 이것은... 그가 꿈꾸는 하나님과의 유사성을 무로 만들어 버리며, 참된 하나님 자신만이 소유할 수 있는 인간성을 그에게 다시 회복시켜 준다.

 

몰트만도 바르트와 본회퍼처럼 그리스도의 무능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의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를 보았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다”(요일 4:8)는 명제로부터 몰트만은 하나님의 내적인 본질로서의 고난을 이끌어내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시는 하나님의 인간되심 가운데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폐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한 자기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완전히 타인 가운데, 비인간 가운데 자기를 넘겨주는 비하가 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이르는 비하는... 하나님의 존재에 상응하는 것이다. 만일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하나님은 이 비하 가운데서보다 더 위대하시지 않다. 하나님은 이 희생 가운에서보다 더 영광스럽지 않다. 하나님은 이 무능 가운데서보다 더 능력있으시지 않다. 하나님은 이 인간성 가운데서보다 더 신적이지 않다...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사건은 하나님의 사건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그의 접촉할 수 없는 영광과 영원으로부터 단지 바깥을 향해 행동하신 것이 아니다. 여기서 그분은 자기 자신에게서 행동하셨고, 그리고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셨다. 여기서 하나님은 그분의 존재와 더불어 사랑이시다.

 

하나님의 고난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의 모순이나 은폐가 아니라 그 계시를 보려고 한 몰트만은 당연히 지금까지 서구의 신이해를 지배해 왔던 ‘하나님의 무감정, 수난불가능성’의 명제를 반박하는 것을 자신의 중요한 임무로 보았다.

 

지금까지도 무감정(Apathie)의 명제가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보다 더 강하게 신론의 기본개념을 결정지어 왔다. 수난 불가능성이 분명히 하나님의 완전성과 축복의 양도불가한 속성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학이 지금까지 철저히 그리스도교적인 신개념(神槪念)을 발전시켜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리스 철학의 형이상학적 전통에 의지해 왔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신론에서 무감정의 명제가 강하게 존중되면 될수록, 하나님을 그리스도의 수난과 동일시할 수 있는 능력도 그만큼 더 약해진다. 만약 하나님이 고난받을 수 없다면, 그리스도의 수난은 철저히 단지 인간적인 비극으로만 여겨질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단지 나사렛 출신의 선한 인간의 고난만을 인식할 수 밖에 없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불가피하게 차갑고 침묵하며 사랑받지 못하는 하늘의 권세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종말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앙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인식하고, 그리스도의 수난을 하나님 자신에게서 발견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하나님이 모든 관점에서 고난받을 수 없다면, 그는 또한 사랑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는 기껏해야 자기 자신만을 사랑할 수 있을 뿐이고,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자는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다른 자를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자신으로 하여금 다른 자를 사랑할 수 있게 하는 그 고난에 대해 스스로 개방하며, 이로 인해 생겨나는 고통을 자신의 사랑의 힘으로 극복한다. 하나님이 고난받는 것은 피조물처럼 존재의 결핍 때문이 아니다. 그는 그의 존재의 충만함인 그의 사랑 때문에 고난받는다.

 

만약 우리가 바르트와 본회퍼, 몰트만처럼 이제 하나님의 본질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려고 하고, 또 하나님의 전능을 그리스도의 고난 안에서 보려고 한다면, 단순히 전통적인 신개념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사고와 행동까지도 혁명적으로 뒤바뀌는 결과가 생길 것이다. 즉 만약 우리가 ‘갈보리 산 위에’(한국찬송가 135장) 있는 그리스도의 “험한 십자가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권세를 부리는 인간을 사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받고 죽기까지 사랑하신 대상인 연약한 인간, 고통당하고 억눌리고 죽임당하는 인간을 사랑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그의 연약함을 본받아야 할 것이며, 그래서 그의 연약함으로써 연약한 자들을 도와야 할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강한 자를 흠모하고 자랑하면서 은근히 혹은 공공연히 약한 자를 멸시하거나 배척하지 말아야 한다. 도리어 우리는 약함이야말로 가장 강한 힘(사랑의 힘)임을 깨닫고, 연약한 인간 생명인 어린이를 사랑하고, 스스로 연약한 자, 어린이처럼 되려고 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폭력에 오염된 우리에게 오늘도 가르치신다. “힘있는 자가 되지 말고 힘없는 자가 되라.” “힘있는 우상적 하나님을 바라보지 말고 십자가에 달리신 참 하나님을 바라보라.” “오직 약함만을 자랑하고, 약함 속에서 진정 강한 사람이 되라.” 그리스도는 우리 세계 안으로 바로 이러한 영원한 혁명의 불을 던지시지 않았는가?

2) 양성적(兩性的)이신 하나님

 

‘연약한’ 어린이에 대한 학대는 단순히 보편적으로 이른바 ‘힘있는’ 인간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힘있는 아버지만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힘없는 어머니조차도 때때로는 자신보다 더 힘없는 자녀들을 버리고 폭행하는 일에 종종 가담한다. 하지만 어린이 학대는 주로 ‘힘있는 남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어린이 학대가 흔히 남성에 의한 여성폭력의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점은 더욱 더 타당하다. 이런 점에서 어린이 학대는 이중적 폭력구조, 즉 ‘힘있는 자의 폭력’과 ‘남자의 폭력’이라는 양면적인 구조를 지닌다. 다시 말하면, 폭력은 무력숭배만이 아니라 남근숭배의 형태 안에서도 근원적으로 이루어진다.

고대 사회에서 여성폭력은 전쟁에서 승리한 남성의 전리품으로서 공공연히 이루어졌다. 자본주의가 발달한 오늘 날에는 이것이 주로 상업적인 거래의 형태로 왜곡되어 합법적, 비합법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적 지배는 여전히 여러 제도적 장치 속에서 여러 형태로 온존하고 있다.

특히 가부장적 사회구조가 아직도 힘을 떨치고 있는 사회에서 여성은 여전히 남성의 지배와 정복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는 남성적인 힘의 과시, 남성지배 이데올로기의 승리로 미화된다. 여성이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망가지든 말든 상관없이, 뭇 남자들이 여성을 비하(卑下)하고 학대하는 일을 여전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심리가 여전히 사회 곳곳에 고착되어 있다. 그러므로 연약한 어린이, 어린 여성 - 물론 성인 여성까지 포함하여 -에 대한 남성의 폭력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는 무력숭배만이 아니라 남근숭배(가부장주의, 남성우월주의)에도 과감한 종말을 선언해야 한다.

그렇다면 현대신학은 남성의 여성지배를 편드는 이러한 가부장주의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얼마나 해방되었는가? 다시 말하면, 현대신학은 고대사회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하나님 신앙을 얼마나 극복했는가? 여기서 나는 다시 한번 더 간단하게나마 현대신학에 나타난 신개념의 중요한 혁명적 변화를 추적하고자 한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여성해방의 신학’ 혹은 ‘여성(적) 신학’이다.

전쟁의 신, 자본의 신, 민족의 신, 혁명의 신이 유럽 전체를 피로써 물들이던 시기에 그 누구보다도 더 민첩하게 이 허구적인 우상들을 꿰뚫어 보고, 이에 대항하여 ‘힘없는 하나님’, ‘힘없는 자들의 하나님’을 선포하면서, 힘없는 자의 편에 서서 혼신을 다해 투쟁하였던 ‘행동하는 신학자’는 바르트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대변자였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과연 그는 남성우월주의를 전파했는가? 그는 여성을 비하하였고, 또 때로는 여성을 지배하려고 했는가? 현대신학계에서 바르트 신학의 가부장적 요소를 가장 분명하게 지적하고 비판하는 자는 몰트만이다.

 

바르트는 질서가 오로지 상위질서와 하위질서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일찍부터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신학적 출발점을 하나님의 주권에 두었고, 또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그리스도의 머리-몸 표상에 따라 그리스도론적으로 정립했기 때문에, 이러한 질서표상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만약 하나님이 지배와 순종의 관계 안에서 자신과 상응한다고 하면, 그와 상응하는 그의 피조물의 모든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창조 안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바르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옛 계급적 상응이론을 취한다. 하늘과 땅의 우주론적 관계와 영혼과 몸, 남자와 여자의 인간론적 관계도 이와 상응하여 배열된다. Ⅲ/2의 441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혼과 몸의 관계는 하늘과 땅의 관계처럼 하나의 창조 안에 존재하고 세계 안에 존재하는 대립이다. 그러나 인간의 혼과 몸은 한 인간이고, 하늘과 땅도 전체로서 하나의 우주이다”. “인간은 뒤따르는 몸의 앞서가는 혼으로서, 성서가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이 이원성 안에서 비로소 완전해지는 인간존재의 하나님의 형상성으로서 설명하는 바로 그 내용의 비유이기도 하다. 물론 이 완전함 가운데서 지배와 섬김은 한 인간의 활동으로서 서로 다르면서도 동시에 완전히 서로 맞물려 있다.” ...

남자와 여자에 관한 바르트의 질서상은 이미 종종 여러 측면들로부터 비판되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나는 남자로서 짤막하게 정리할 수 있다. 나는 바르트의 범세계적 계급질서를 이해하지 못하며, 남자는 혼, 하늘과 그리스도와 상응하지만 여자는 몸, 땅과 교회와 상응하는 질서를 정당화하는 그리스도론적-신학적 근거도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늘 오로지 지배와 섬김만을 지적하는 역할분배도 이해하지 못한다. 만약 바르트가 “A는 B보다 앞서고, B는 A보다 뒤선다. 질서는 단계를 뜻한다. 질서는 선행질서와 후속질서, 상위질서와 하위질서를 뜻한다.”(Ⅲ/4, 189)고만 말한다면, 그의 질서개념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 안으로 평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이것은 가부장주의의 세계질서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몰트만은 1934년에 이루어졌던 바르트와 비셔트 후프트(Henriette Visser't Hooft) 사이에서 오간 대화를 바르트 비판의 중요한 근거로서 인용한다.

 

이미 1934년에 바르트는 여성신학자라고는 말할 수 없어도 자의식 있는 자유로운 여인 앙리에트 비셔트 후프트(Henriette Visser't Hooft)를 만났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남자든 여자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지 않습니까?”라는 그녀의 질문에 바르트는 바울을 변호한답시고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두렵건대, 만약 바울이 당신의 마음에 어른거리는 남자와 여자에 관한 테제의 전제(상호관심, 신뢰적 책임성) 아래 있었다고 한다면, 바울은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을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상호관심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우월성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온 성서는 “실제로 모권주의가 아니라 부권주의를 남자와 여자 관계의 지상적-시간적 질서로서” 전제합니다. 그리스도가 남자였고, 또 남자로서 아담의 우월성을 확증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온갖 “모권주의”는 배제되어야 합니다. 비셔트 후프트는 그에게 대답했다: “우월성과는 전혀 다른 그 무엇, 즉 사랑이 존재합니다. 사랑은 그 어떠한 우월성이나 열등성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스퇴베산트(H. Stoevesandt)와 같은 신학자는 바르트의 신학적 입장을 포괄적인 맥락 안에서 가급적 이해해 보려고 애쓴다. 즉 바르트가 가끔 남성편향적 발언을 한 것은 그의 남성우월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평소에 억압된 진리를 항상 대변하려고 애쓴 그의 기질에서 우발적으로 나온 것이라는 평가다. 그의 소논문 ‘자펜빌의 불편한 목사’(Der unbequeme Pfarrer von Safelwil)에서 스퇴베산트는 다음과 같이 바르트를 변호한다.

 

그 어떠한 대다수의 의견을 추종하고, 모든 사람들이 말했던 것과 그때 그때마다 당연하다고 여겨진 것에 동의하거나 그것을 되풀이하는 것이 그에게 불가능했다. 대다수가 생각했던 것은 바로 그래서 그에게 이미 의심스러운 것이 되었다. 억압당하고 차별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했듯이, 그는 일평생 동안 억압당하고 망각되는 진리들을 옹호했다. 실로 그 자신이 대변했던 견해들조차도 ... 잘못된 맥락 안에 놓여지게 되고 그에게 거슬리는 목적에 이용되는 것을 보았을 때는, 그 견해들은 그를 노엽게 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거부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렸던 세계교회협의회에서 바르트는 어느 오후에 여성위원회의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남자들이 듬성듬성 참석한 가운데 모든 세계에서 모인 많은 교회여성들은 교회여성들과 다른 여성들(단지 여성들만은 아니겠지만)이 지금까지 여러 모임에서 가장 즐겨 말하던 주제, 즉 자신들, 다시 말하면, 사회와 교회 안에서 자신들이 차지하는 위치와 어떻게 이 위치가 개선될 수 있겠는지에 관해 열심히 말하고 있었다. 그 당시 암스테르담에서 사람들은 ... 사도 바울의 갈라디아서 3장 28절(교회 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도 여자도 없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다)을 두둔하였다. 칼 바르트는 이 모임에서 바로 그 바울이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대해 다르게도 말하였다는 사실, 예를 들면, “여자는 그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엡 5:22)고 말했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다른 구절을 쉽사리 내버려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다. 칼 바르트가 앞의 성서구절보다 뒤의 성서구절을 더 좋아했다거나, 심지어는 그가 남자지배를 옹호했다는 말은 아니다(예를 들면, 그는 스위스 남자들의 대부분이 반대하던 일, 즉 교회와 사회에서의 여성 투표권을 단호히 지지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성서의 ‘불편한’ 구절에서 성서가 스스로 말하려는 것을 들으려고 하기보다는 성서를 마음대로 골라잡고 자기 자신들의 견해와 소원을 뒷받침해 줄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재빨리 골라낼 때, 그는 이를 쉽사리 참을 수 없었다. 이 일은 그에게 너무 중요했기 때문에, 며칠 후 역시 암스테르담에서 열렸던 개혁교회협의회의의 참석자들 앞에서 그는 한번 더 이를 언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다. 십년이 지난 1958년에 바트란트(Waadtland) 주(洲) 목사들의 한 단체는 팜플렛(La Femme dans l'Eglise)을 발간했는데, 여기서 그들은 여성들이 교회의 공동의회와 총회에서 선출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성서를 근거로 입증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바르트가 암스테르담에서 강조했던 갈라디아서의 그 구절을 내세웠다. 그리고 한 목사는 자신의 견해를 더 견고하게 하기 위해 바르트가 암스테르담에서 행한 연설의 몇 문장들을 인용했다. 이 쪽지를 받자마자 화가 난 바르트는 자신의 입장을 편지로 설명했다. 자신은 그런 사람들의 견해에 전혀 동의할 수 없으며, 그들이 자신을 근거로 끌어댄 것은 완전히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암스테르담으로부터 인용한 문장들은 그 맥락에서 벗어났고, ‘어떤 보고자에 의해 정리된’ 문장들이었다는 것이었다... 바트란트 주의 목사들이 계획했던 목적이 그에게는 매우 언짢은 것이었기 때문에, 그가 팜플렛에서 쓰여진 그 문장 그대로 말했고 인쇄했다는 기억조차 전혀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대한 바르트의 입장을 그의 ‘교회교의학’(KD Ⅲ/4)에서 가장 분명히 볼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바르트 자신의 명확한 입장을 그의 진술의 전체적 맥락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분명히 남자와 여자의 일치성(Einheit), 평등성(Gleichkeit)를 강조한다.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 안에서 남자는 여자와 하나가 되고, 여자에게 속하고 여자를 사랑하며, 여자도 그처럼 남자와 하나가 되고 여자에게 속하고 남자를 사랑한다. “주 안에서 남자가 없이는 여자도 없고 여자가 없이는 남자도 없다”(고후 11:11).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는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다는 말은 ... 양자가 ... 평등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자유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오로지 사귐 안에서만 자신의 모습을 가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는, 몰트만이 비판하는 대로, 가부장적 세계질서를 옹호하는 자로 이해될 수 있는 말을 한다. 즉 바르트는 알파벳 순서에 따라서 남자를 A라는 철자로, 여자를 B라는 철자로 표기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미 여기서부터 남녀 간에 순서, 질서, 아니 남자의 우월적 지위를 기정사실로 만들려던 바르트의 은밀한 의도가 여기서는 공공연히 드러나지 않는가?

남자의 위치와 기능이 여자의 그것과 혼동되거나 섞여서는 안 되고 상호 간에 신실히 인정되어야 하듯이, 양자가 서로 분리되거나 대립되어서는 안 되고 상호관련성 안에서 이해되고 실현되어야 하듯이, 양자는 단순히 동일시될 수도 없고 그 관계도 뒤집어질 수 없다. 양자는 순서(단계) 안에 있다...

남자와 여자는 A와 B이고, 그래서 단순히 동일시될 수 없다. 내면적인 품위나 가치에서, 내면적인 권리에서, 인간의 품위와 인간의 권리에서 A는 B보다 조금도 앞서거나 뒤지지 않는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의 평등성을... 고려해야 하며 조금도 망각하거나 취소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A는 B가 아니고 A이다. 그리고 B는 A가 아니라 B이다...

이 단어는 오해될 수 있고 위험하지만... 질서가 존재한다! 만약 남자와 여자의 존재와 공존에서...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질서가 존재한다...

A는 B보다 앞서고, B는 A를 뒤따른다. 질서는 단계를 뜻한다. 질서는 선행질서와 후속질서, 상위질서와 하위질서를 뜻한다.

 

물론 바르트가 이로써 남성에 대한 여성의 지배를 정당화했다고 성급히 비판해서는 안 된다. 비록 그에 의하면 남성이 여성보다 앞서는 질서가 존재하긴 하지만, 이 질서가 결코 지배-섬김의 질서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는 강조한다. 즉 그는 자신의 ‘질서론’이 ‘지배론’으로 오용될 수 없도록 경고한다. 그는 평생 동안 사회와 교회 안에서 일반계시에서 추론한 계급질서가 우세해지는 것, 예를 들면, 독일 제3제국에서 히틀러와 같은 영도자(F?hrer)의 원리가 사회와 교회 안으로까지 파급되는 것에 열렬히 저항했다. 그는 분명히 말한다.

 

이 질서가 복종과 순종을 요구하는 한, 이것은 실로 동등하게 이와 관련된 모든 자들에게 적용된다. 이것은 그 누구에게도 우월권을 주지 않으며, 그 누구에게도 불의를 행치 않는다. 이것은 모든 자들에게 의무를 주며, 또한 모든 자들에게 그들의 권리도 준다...

이것은 남자에게 우월성과 특혜를 결코 주지 않는다. 남자가 여자에 대해 상대적으로 앞에 있고 위에 있다고 해서 스스로 명예를 갖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섬김의 우선권으로 이해되지 않는 남자의 선행질서와 후속질서는 하나님의 질서가 아니라 인간의 무질서의 한 특별한 형태일 것이다... 남자가 스스로 여자를 깔보고, 여자의 주인과 관리자가 되고, 여자를 비하하고 모독하며 억압하고 상처를 주는 그러한 질서행사는 분명히 하나님의 질서와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에 의하면 왜 남자가 일방적으로 여자를 주도하고 격려하고 이끌고 각성시키는 역할을 해야 하고, 여자가 그럴 수는 없을까? “남자는 공동존재와 공동행위 안에서 주도성(Initiative)을 가지고 있는 격려자(Anreger), 지도자(F?hrer), 각성자(Erwecker)이다.”라는 그의 말은 여전히 남성우월적 사고방식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이 한 마디 말로써도 바르트가 여전히 가부장주의적 신학, 남성중심적 신학의 주창자라는 것을 넉넉히 입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몰트만의 말대로 그의 질서개념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 안으로 평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가부장주의의 세계질서가 아닐까? 아무리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지배-복종의 관계가 아니고 섬김의 관계라고 하더라도, 남자가 매사에 여자를 주도하고 격려하고 이끌고 각성시킨다고 한다면, 결국에는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는 계급질서를 주도하고 격려하고 이끌고 각성시키지 않을까? 이런 점에서부터 볼 때, 바르트는 여전히 남성지배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아직도 가부장주의적 신학자이다.

내가 아는 한, 현대신학계에서 가부장적 신학-사회구조를 타파하려는 여성신학의 의도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남성 신학자는 몰트만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예수의 아빠(Abba) 기도에서 어머니와 같이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보려고 한다.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에 있어서 특별한 점은 아빠-기도에 나타난다... ‘아빠’(Abba)는 아람어로 아이들이 그들의 본래적 보호자를 부르는 소아언어(Lallform)이다. 이 보호자가 어머니이든 아니면 아버지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어린이가 근원적으로 신뢰하는 안전하고 내적인 가까움이다... 그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비밀을 경험하는 전대미문의 가까움에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이 가까우심을 가난한 사람들과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따뜻함’과 ‘자비’를 통하여 나타내며, 이로써 소위 말하는 하나님의 ‘여성적’ 속성들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몰트만에 의하면 예수에 의해 하나님과의 아빠 관계 안으로 인도되는 메시야적 공동체 안에서는 가부장적 체제가 무너진다.

 

가부장 사회의 하나님 아버지와 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와 차이가 나게 되는 것은 바로 예수 자신 때문이었고, 또 지금도 그러하다. 그를 바라보고 그와 함께 “아빠”를 부르는 자는 가부장주의의 법칙과 권력관계와 결별했다. 아버지의 일방지배와 여자와 어린이의 종속 대신에 예수의 여자친구들과 남자친구들의 메시야적인 연대공동체가 등장한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권력이 정당하게 분배된다.

오늘 날의 “아버지 없는 사회”에서 이 신앙의 경험은 비-가부장주의적인 부성애의 형성을 야기한다. 이 부성애는 나누고 참여하고 자비로우며 책임적인 사랑 안에서 지배주장이나 소유권을 갖지 않는 것을 말한다. 탈인간화하고 또 이로 인해 점차로 책임감을 상실해 가는 사회에서 자비로운 아버지 하나님의 경험은 남자들을 비가부장주의적인 부성애로 인도한다... 남자도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가부장주의의 기형화를 극복해야 한다. 이러한 길을 가다 보면, 남자도 문지방 아래서만 겨우 존재하는 까마득한 과거의 모계사회의 독특성과 장점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몰트만에 의하면 가부장주의가 무너지는 것은 비단 역사적 예수의 언어와 행동에만 근거해 있지 않고, 바로 내재적 삼위일체의 비밀에 있기도 하다. 그에 의하면 아버지라는 이름은 그리스도교 이해에서 삼위일체론적인 이름이지, 일반적으로 종교적, 정치적 혹은 우주론적인 표상이 결코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사랑하시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오로지 아들됨의 영, 자유의 영 안에서만 가능하다(롬 8:15. 고후 3:17). 이러한 영의 자유 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실천적으로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구분된다.

그리고 몰트만은 삼위일체적의 관계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출생’이나 ‘탄생’의 표상으로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을 남성적으로가 아니라 양성적(兩性的)으로나 성을 초월하는 존재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만약 아들이 오직 아버지로부터만 나온다면, 이 과정은 당연히 ‘출산’이나 ‘탄생’으로 표상될 것이다. 그러나 이로써 아버지의 모습은 근본적으로 변화된다. 아들을 출산하고 탄생시키는 아버지는 결코 ‘남성적인’ 아버지만은 아니다. 그는 어머니와 같은 아버지이다. 그는 단성적(單性的)으로 남자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양성적(兩性的)으로 혹은 성을 초월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는 유일하게 출산된 그의 아들의 부성적인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유일하게 탄생된 그의 아들의 모성적인 아버지이기도 하다.

 

오늘 날의 여성신학자들도 대체로 몰트만처럼 양성적 하나님이나 성을 초월하는 하나님 상(像)에 입각하여 일방적인 가부장적 하나님 상을 극복하려고 한다. 뤼터(R. R. Rueth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대-기독교적 전통 속에서 신적 존재에 관해 말할 때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쓴다. 이것은 남성의 총칭적 형태이며, 따라서 이 신학에서 모색하는 신적 존재에 대한 비전을 표현하기에는 부적합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님에 관한 전통적인 유대적 이해와 기독교적 이해 속에는 신성에 관한 유익하고 참된 단초들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완전한 신성에 관해 논의할 때 나는 양성신(God/ess)이라는 용어를 쓰는데, 이는 신성이 하나라고 하는 유대-기독교적 확신을 유지하면서 신적 존재에 대한 남성적 형태와 여성적 형태의 용어를 결합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문자적 상징이다...

하나님은 남성이면서 동시에 여성이며, 또한 남성도 아니면서 동시에 여성도 아니다.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남녀 모두의 이미지들과 경험들에 의거하는 포괄적인 언어가 필요하다... 남성적인 은유들뿐 아니라 여성적인 은유들 속에서 양성신(God/ess)이라고 부름으로써만 포괄성은 생겨날 수 있다.

뤼터는 성서적 전통 중에서 특히 ‘예언자적 하나님’(지배계급의 비판자, 사회적 희생자들의 옹호자로서의 하나님), 예수의 ‘해방지향적 통치’(아빠로서의 하나님 관계에 기초한 지배-예속관계의 철폐, 그리스도인들 간의 상호섬김의 관계), ‘우상숭배의 추방’(남성적인 군주, 교황으로서의 하나님 이미지에 대한 심판)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남성과 여성으로서의 동등한 이미지(잃은 동전을 찾는 여인, 밀가루에 누룩을 넣는 여인의 비유에 나타난 역사의 변혁자로서의 하나님 상징)와 같은 전통에서 가부장제를 초월하는 하나님 언어를 본다.

뤼터는 이 네 가지 전통에 서서 양성신을 여성해방론적으로 재구성하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양성신은 기존의 위계체제적인 사회 질서의 창조자나 인가자(認可者)가 아니라 오히려 그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며 동등인들의 새로운 공동체를 열어주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왕권과 위계체제적인 권력으로부터 나온 양성신에 관한 언어는 그 특권적 지위를 상실하지 않을 수 없다. 양성신의 이미지들은 여성의 경험을 포괄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뤼터는 양성신 언어가 갖는 위험성을 지적할 필요성을 느낀다. 즉 양성신의 언어는 남성의 지배와 여성의 예속을 정당화하는 판에 박힌 방식으로 남녀의 역할을 합리화할 수 없다. 강력한 통치자 아버지의 힘을 매개하면서 사랑을 베풀고 보살펴 주는 어머니로서의 이미지만을 양성신의 이미지에 더하는 것은 결코 충분치 못하다. 그리고 뤼터는 부모로서의 양성신에 대한 부르조아 기독교의 과도한 의존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 일종의 영원한 부모-자식 관계를 시사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장하기를 바라지 않는 신경과민적인 부모가 된다. 하나님에 대한 부모적인 언어는 가부장제적 권력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기보다는 더욱 더 그것을 강화한다. 그러므로 뤼터는 구원자이며 해방자, 우리의 전인성(full personhood)을 육성해주는 존재로서의 신적 존재에 대한 언어로부터 출발하여, 그러한 맥락 속에서 창조자, 존재의 근원 신적 존재로서의 양성신을 말할 필요를 느낀다.

여성신학자 러셀(L. M. Russel)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양면적 인간을 본다.

 

그는 바로 한 남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었으며, 우리가 기다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는 제2의 인간이며 남성과 여성, 양면의 인간성을 보여주었고, 또한 자유의 대가와 약속을 보여 주었다(고전 15:45).

 

러셀은 여성들과 남성들이 모두 성령의 선물을 받고 야웨의 추종자로서 카리스마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초대교회에서 새 인간성의 표징, 새 출발의 표징을 보며, 여성들이 새 삶의 동조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추구한다. 남성주의나 여성중심주의와 같은 맹목적 배타주의가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방식을 인정하는 ‘상호성’(Mutuality)을 여성신학의 목표를 삼는 뤼터처럼 러셀도 ‘다원론적 유형’(Pluralistic model)이나 ‘동화 유형’(Assimilation model)보다는 남녀 상호간의 ‘공동협력’의 형태를 가장 바람직한 인간공동체 유형으로 본다.

앞에서 우리는 가부장주의적 하나님의 퇴위(退位)를 보았다. 그 결과로 남자가 이 땅의 아버지로서 하늘의 더 강한 아버지 하나님을 대리하여 연약한 여성, 어린 여성을 학대하는 일은 그 이론적, 실천적 근거를 완전히 상실한다. 남녀가 지배-섬김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사귐의 관계 안에 놓이게 됨으로써, 여성에 대한 모든 종류의 이론적, 실천적 차별과 억압은 사라진다. 그리고 남자들은 “이제 언제나 아버지의 자리로부터 물러나 자녀들의 친구가 될 자세를 가진다. 이들은 자녀들 속에서 자기 자신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들 속에서 자녀들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녀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녀들과 함께 걷고, 자녀들을 위해 존재하며, 자녀들이 스스로 변해 가는 그대로 그들에게 미래의 가능성과 변화의 능력을 허용할 자세를 갖는다... 이들은 언제나 자녀들을 ‘위해’ 존재하려고 하진 않는다. 그러므로 이들은 언젠가 자녀들과 ‘함께’ 삶을 즐기기 위하여 자녀들을 위해 책임을 지려고만 할뿐이다.” 만약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이 그들의 자녀들에 대해 이런 태도를 갖고 살아간다면, 어찌 자신과 남의 자녀들을 쉽사리 폭행하고 학대할 수 있겠는가?

 

 

 

 

 

 

 

 

 

 

3) 하나님은 어린이의 얼굴도 지니신다.

 

우리는 앞에서 현대신학에서 이루어진 신개념의 혁명적인 변화를 추적해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무능, 무력, 고난 가운데서 자신을 참 하나님으로 계시하신다고 주장하는 바르트, 본회퍼 그리고 몰트만의 견해를 살펴보았으며, 이어서 하나님이 남녀라는 두 성(性)을 지니는 양성신이면서도 또한 이를 초월하는 분이시라고 주장하는 몰트만, 뤼터 그리고 러셀의 견해를 살펴보았다. 또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 이해가 ‘힘이 없다’는 이유로, 또 ‘어리다’는 이유로, 또 ‘여자’라는 이유로 온갖 학대를 받는 어린이에게 매우 적절하고 유용한 것임을 보았다.

다시 부연하건대, 만약 하나님이 힘있는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힘없는 자로서 힘없는 자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무력숭배로부터 해방될 것이고, 그래서 힘없는 어린이도 폭력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남성지배의 옹호자가 아니라 억눌린 자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남근숭배로부터 해방될 것이고, 그래서 학대받는 여자 어린이도 성폭력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묻는다 어린이를 해방하시는 하나님은 단지 ‘무력 중에 전능하신 하나님’, ‘양성적이신 하나님’일 뿐인가? 이 두 하나님은 과연 어린이 해방에 부족할 나위가 없는 하나님이신가? 특히 여성신학을 대변하는 신학자들은 어린이 해방에도 충분한 관심을 보여 주고 있으며, 또 그래서 실제로 어린이 해방에 기여하는 신학체계를 수립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얻기 위하여 나는 여기서 여성 신학을 대변하는 몰트만, 뤼터 그리고 러셀과 대화하려고 한다.

몰트만은 그 어떤 신학자보다 더 분명히 억압받는 자들에게 속하는 어린이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보여 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시대의 고난의 첫 희생물은 누구인가? 그것은 약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이다. 이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세력을 얻기 위한 투쟁 속에서 힘없는 사람들이 가장 크게 고난을 당하며, 억압을 받는 사람들이 첫 번째 사람들로서 희생되며, 어린이들이 죽음을 당한다. 부를 위한 투쟁 속에서 사람들은 힘이 약한 동료 피조물들을 파괴한다. 이리하여 먼저 자연이 말없는 죽음을 당하며, 그 다음에 인간의 종이 죽음을 당한다... 경제와 정치적 헤게모니 속에 숨어 있는 인간의 불의의 체계들로 말미암아 매년 수백만 명 사람들의 생명이 희생되며, 무엇보다 먼저 제3세계의 어린이들의 생명이 희생된다... 이들은 사람의 아들, 세계심판자의 가장 작은 형제와 자매이다(마 25). 이들이 그리스도의 사귐 속에 속한다면, 그들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이기도 하다.

 

만약 어린이의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이기도 하다면, 여기서 그리스도와 어린이를 동일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즉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고난받는 어린이와 동일시한 것에 힘입어, 우리는 고난받는 어린이들 중에서 ‘고난받는 어린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본다. 그래서 나는 몰트만에게서 내가 다음 장에서 재구성할 예정인 ‘어린이 예수, 어린이 기독론’의 출발점을 본다. 또 몰트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에게서 ‘어린이를 향한 당파성’을 분명히 본다.

 

예수는 가난한 자들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했다. 가난한 자들은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 주었다. 어린이들에게도 사정은 마찬가지니,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어린이들의 것”임을 선포했다(마 19:14).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는 사람은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함을 그들에게서 발견했다... 우리로부터 예수의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듣는 자는 다시금 가난한 자들, 여자들과 아이들과의 사귐에서 똑같은 그 나라를 발견한다. 하나님에게서는 이런 꼴찌가 첫째이며, 이런 가장 약한 자들이 가장 강한 자들이다. 누구에게 행동해야 할지를 아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가까이 가져온 자는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과 어린이들도 가까이 데려 왔다. 이들은 그의 가족이요 그의 백성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이 폭력적인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몰트만은 예수의 아빠(Abba) 기도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어린이(Kind)로 경험한 예수를 본다. 이 경험은 분명히 예수의 자기이해를 형성한다고 그는 말한다.

 

아빠-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예수는 자기를 하나님의 ‘어린이’(Kind)로 경험한다. 만일 우리가 이 관계를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아버지 하나님의 관계로 나타낸다면, 아빠와 그 자녀 상호 간의 내적인 친밀성은 사라질 것이다.

이 관계의 내적 친밀성은 인격들을 일차적인 것으로, 이 관계를 이차적인 것으로 보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먼저 저기에 하나님이 있고 여기에 예수가 있은 다음 양자의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빠’와 ‘어린이’ 예수는 서로 하나이다. 예수와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은 ‘아빠’가 되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예수는 ‘어린이’가 된다...

‘아빠’가 지칭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예수의 자기이해를 형성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몰트만에 의하면 예수의 아빠 기도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어머니와 같은 아버지, 자비로운 아버지로 드러내고, 예수는 자신을 그 아버지의 어린이, ‘아빠’로 경험한다. 하지만 몰트만은 자신을 하나님의 어린이로 경험하는 예수의 자기이해가 자비로운 하나님, 어머니와 같은 아버지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에 관해서는 더 이상 성찰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신학이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 인간을 위해’ 어떤 의미를 주는지 주로 물었던 반면에, 몰트만은 그의 고난이 ‘하나님을 위해’ 어떤 의미를 주는지 진지하게 물었고,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안의 자발적 열정, 고난, 비극, 죽음을 보았다. 그리고 몰트만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예수의 자기이해가 그를 뒤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의미도 진지하게 물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몰트만은 예수의 자기이해, 자기경험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어떤 기능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는다.

그러나 한 편으로 만약 우리가 칼케돈 신조에 따라서 예수를 인간,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 즉 하나님의 아들로 이해한다면, 예수의 존재방식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예수가 단순히 인간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아들, ‘어린이’이기도 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왜 우리가 이 아들, 하나님의 제2격의 삶을 말할 수 없겠는가?

또 다른 한편으로 만약 우리가 몰트만처럼 삼위일체의 각 위격들의 관계를 순환(Perichoresis, Circumincessio)과 변용(Manifestatio)으로 본다면, 분명히 어린이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경험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다른 위격들 안으로 침투하고 내주(內住)하며, 그들과 함께 나누고, 그래서 그들도 자신 안에서 이 경험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에게서도 어린이와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 하나님을 ‘어린이의 얼굴을 지니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그분은 아버지의 얼굴, 어머니의 얼굴만이 아니라, 어린이의 얼굴도 지니신다. 종종 민중의 얼굴(해방신학, 민중신학), 흑색 얼굴(흑인신학), 적색 얼굴(인디안 신학), 녹색 얼굴(생태학적 신학)도 갖고 계시는 것처럼.

뤼터도 가부장주의적 지배의 사회적 위계체제에서 아이들도 억압당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아이들이나 종들과 마찬가지로 부인들은 가부장주의적 계급에 의해 지배되고 소유되는 사람들을 대표한다. 그들과 남성과의 간계는 남성과 신과의 관계와 같다.. 신-남성-여성이라고 하는 하나의 상징적 위계체제가 세워진다. 이러한 위계체제적 질서는 구약성서 속의 가부장주의제적 율법구조 속에서 명백히 나타난다 거기에서 하나님은 오직 남성인 가장(家長)에게만 직접적으로 말씀하신다. 여자들, 아이들 그리고 종들은 가부장에 대한 그들의 의무 관계와 재산 관계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언급된다.

이처럼 뤼터는 여성, 종들과 함께 고난받는 어린이들에게도 분명히 연대적인 입장을 보여준다. 하지만 뤼터는 여성들을 ‘피억압자 중의 피억압자’라고 부르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에게 대답하는 사회적, 종교적으로 버림받은 자들을 여성화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상은 어린이들이야말로 ‘피억압자 중의 피억압자’가 아닐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큰 시련을 당하게 되면, 자신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일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쉽다. 이처럼 뤼터는 여성억압의 현실에 대한 연민에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그리고 여성 해방에만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여성보다 더 억압받는 어린이들을 주변화하거나 여성들의 억압만을 너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회적, 종교적으로 버림받은 자들을 ‘여성화했다’기보다는 종종, 아니 훨씬 더 자주 ‘어린이화했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그는 어린이의 이름으로 버림받는 자들을 대변하였고, 어린이를 버림받는 자들의 모델로 삼았다고 본다. 나는 이 주장을 3장의 ‘예수의 어린이 신학’에서 입증하려고 한다. 물론 억압받는 여성들 중에서도 특히 어린 여자 아이들이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는 점을 뤼터가 충분히 고려하고 있다고 전제한다면, 이런 비판은 다소 완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뤼터가 양성동체론적(兩性同體論的) 기독론이나 양성신론(兩性神論)이 남성중심적 편향을 쉽게 가져다 준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을 옳다. 그래서 뤼터는 ‘구원자’, ‘해방자’와 같은 인격적인 언어로부터 출발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인성을 육성해 주는 존재로서의 신적 존재’라는 비인격적 언어로부터 출발하여, 그러한 맥락 안에서도 양성신을 말하려고 한다. 러셀도 우리의 언어를 바꾸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즉 러셀은 하나님에게 모든 생물학적, 문화적인 성차이를 초월하는 표징으로서 남성 대명사보다는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언어를 적용하고,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해방자’와 ‘구속자’라는 언어를 사용하기를 권장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뤼터와 러셀은 양성신의 남성중심적 편향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같다. 그렇다면 뤼터와 러셀은 파울 틸리히(P. Tiliich)로부터 물려받은 존재론적 개념들로써 ‘하나님 아버지 너머에 있는’(beyond God the Father) 하나님을 파악하려고 했던 메리 델리(Mary Daly)처럼 남성에 의해 지배되는 문화를 극복하기 위해서 중성적인 존재론적 개념을 다시금 도입하는가? 분명히 인간과 그리고 자연의 비밀로서의 하나님을 이해하자면, 인격적이고 역사적인 하나님 표상들만으로는 실제로 충분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인격적인 하나님 표상들과 같이 인간중심적이지 않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유용하다고 본다.

하지만 나는 종종 이런 비인격적, 중성적인 개념으로 돌아가지 않고도 하나님의 양성적 인격성을 포괄하면서 남성편향적 위험성을 견제할 수 있는 유용한 하나의 언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어린이’라는 언어이다. ‘어린이’라는 언어는 분명히 남성과 여성을 포괄하면서도 남성과 여성의 구분을 초월할 수 있는 언어이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의 성적 구별이나 차별이 없이 모두에게 친구와 같은 사귐을 가능하게 하는 인격적 언어라고 본다.

물론 그리스도에게 이 단어를 부가하는 시도에는 그다지 어려움과 거부감이 따르진 않을 것이지만, 하나님에게 이 단어를 적용하는 시도에는 상당한 비판과 심리적 거부감이 따를 것이다. 성서와 전통에서 하나님을 여성적, 모성적으로 표상하는 일이 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주의적 문화 속에서 하나님을 권위있는 남성적 초월신으로 경배하는 일에 너무나 익숙하여, 하나님을 여성, 모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역겨워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얼마나 많은가? 비단 남자들만이 아니라 오래 동안 가부장주의적인 문화에 길들여진 여자들에게조차도 그러한 일은 어렵고, 또 때로는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남근숭배, 아니 남성의 저항, 아니 전통의 힘은 이토록 막강한 것인가?

하물며 유구한 성인중심적 전통 속에서 하나님을 ‘어린이’ 이미지로 표상하는 시도는 그 얼마나 무모한 모험처럼 보일 것이며, 심지어는 ‘신성모독’과 같이 여겨지겠는가? 더욱이 성서와 전통에서 하나님에 대한 ‘어린이’ 이미지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아니 지금까지 이런 시도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무례한(?) 시도는 처음부터 거센 비판과 공격에 노출되기가 쉽다.

하지만 각 시대마다 그 시대에 맞는 종교적 표상과 언어를 찾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또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한다. 성서에는 하나님을 ‘바위’니 ‘산성’이니 ‘피난처’니 하는 비인격적인, 아니 참으로 하잘 것없는 피조물의 은유로 부르는 것이 그 얼마나 익숙한가? 하나님을 이런 피조물로 부르는 것도 신성모독인가? 하물며 우리 시대에 ‘어린이’라는 인격적인 용어로 인격적인 하나님을 표상하기가 중성적인 용어보다 그 얼마나 더 적절한가? 단지 “하나님에게 감히 그런 유치하고 파격적인(?) 용어를 갖다 붙이는 것이 구원자, 해방자 하나님에게 적절하겠는가?라는 반문은 나올 듯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늘 일방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해방하시는 분인가? 그분은 우리의 좋은 ‘친구’도 되시지 않는가? 그분은 때로는 친구로서 우리의 구원자, 해방자가 되시지 않는가? 아니 그분이 우리를 참으로 구원하시고 해방하시지 않더라도, 그분이 우리 곁에 오셔서 위로하시거나 그저 곁에 계셔서 함께 아파하시거나 괴로워하시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참으로 구원과 해방을 경험할 수 있지 않는가? 만약 우리가 어린이로서, 그리고 어린이처럼 친구 하나님을 찾고 부른다면, 이 때에는 차라리 어린이로, 어린이처럼 오시는 하나님이 더 우리에게 친숙하고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어린이가 하나님을 ‘우리의 친구’라고 말할 때조차도 하나님은 여전히 지엄하시고 영광스러우신, 수염난 남자 노인과 같으시고 힘센 왕과 같으신 분인가?

더욱이 낡은 종교적 언어와 표상이 우리 시대에 부적절하거나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주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새로운 언어로 대체하는 것은 더욱 더 필요하다. 비록 낡은 언어라고 하더라도 새로운 언어로 대체할 언어가 없거나 그렇게 하기에 무리가 따를 때는, 그 언어를 사용하되 그 의미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는 봉건왕조 시대에 하나님을 ‘왕’, ‘임금’으로 부르고 표상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오늘 날 우리 시대에 왕조체제를 여전히 유지하는 나라가 거의 없으며, 설령 아직도 ‘왕’이라고 불리는 군주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를 고대 봉건시대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왕’으로 이해하기가 거의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 시대의 보편적 통치자 언어인 ‘대통령’이나 ‘수상’ 등의 용어로 하나님을 부르기도 매우 어색할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우리가 성서적이고 전통적인 언어인 ‘하나님의 나라’를 사용하되, 그 의미를 충분히 전달하는 게 좋다고 본다.

그리고 몰트만도 강조했듯이, ‘하나님의 나라’ 개념이 주로 ‘하나님의 지배, 통치’라는 신정체제적(神政體制的) 의미를 갖는 개념으로 이해되어 왔지만, 이제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더 부각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본다. 예수는 모든 피조물이 창조주 안에서 소생한다는 점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그가 말한 하나님의 나라는 더 이상 억압이 존재하지 않는 영역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에게서 발견되는 이런 그리스도교적인 하나님의 나라 이해가 없다면, 그것은 성직주의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오용될 가능성이 생긴다. 만약 우리가 몰트만의 말대로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면, 하나님이 어린이와 같은 우리에게 어린이의 모습으로 오시며, 우리를 어린이와 같은 친구의 사귐 안으로 인도하신다고 믿는 것이 왜 어색하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성인적 이미지를 어린이 이미지로 바꾸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통치적 이미지를 친교적 이미지로 바꾸는 것과도 밀접한 관련성을 맺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시대에 하나님에게서 고난당하는 민중의 일그러진 얼굴, 차별받는 여성의 모성적인 얼굴, 억압당하는 흑인의 검은 얼굴, 파괴당하는 자연의 녹색 얼굴 등을 경험할 수 있다면, 왜 우리가 우리 시대에 학대받는 어린이의 얼굴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나는 ‘하나님에 대한 여성 이미지’처럼 ‘하나님에 대한 어린이 이미지’도 지금까지 남성과 어른에 의해 꾸준히 억압되고 배제되었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성서와 전통에서 어느 정도 이를 찾아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물론 이러한 나의 시도가 얼마나 성공적일지 미리 장담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에 대한 어린이 이미지’의 희미한 그림자만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만족하고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느 정도 하나님에 대한 어린이 이미지를 복원하는 일이 가능하고, 또 우리 시대에 시급히 요구되는 과제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린이든지 어른이든지, 남성이든지 여성이든지 상관없이, 만약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고 ‘아빠’로 경험했던 어린이와 같은 예수의 자기경험을 재발견하고, 또 이 경험에 입각해서 ‘아들 예수를 마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어머니 얼굴만이 아니라 ‘예수 안에 계신 하나님’(요 14:10-11, 17:21)의 어린이 얼굴까지 발견할 수만 있다면, 이런 하나님 경험이야말로 힘있는 자들, 남성들, 어른들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힘없는 여자들과 어린이들을 차별하거나 억압하지 않는 인류의 사귐을 탁월하게 증거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나의 ‘어린이 신학’은 바로 이러한 확신을 표현하려는 새로운 시도이고자 한다. 설령 이 경험이 기존의 하나님 경험을 보완할 뿐만 아니라, 그 변형(變形)이나 심지어는 그 역전(逆轉)까지 초래할지 모른다. 그래서 ‘어린이로서의 하나님 개념’은 현대신학에서 또 하나의 신개념의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다줄지 모른다.

여하튼 그 파급결과는 나의 손 안에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나의 시도가 얼마나 성서적, 복음적이면서도 현실적, 현대적일 수 있겠는가?”에 있으며, 또 “독자가 얼마나 진지하게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나의 이러한 하나님 경험을 나눌 수 있겠는가?”에 있다. 자, 이제 우리 모두 본격적으로 ‘어린이 신학’이라는 낯선 벼랑을 오르는, 아슬하지만 재미있을지 모르는 모험을 다같이 해보지 않으련가?

 

 

 

3. 어린이 예수

1) 어린이로 오신 하나님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의 성육신(成肉身)을 증언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하나님의 성육신은 무엇을 지시하는가? 신과 피조물, 혹은 영과 육의 엄격한 이원론을 주장하던 헬라인이나 영지주의자(靈智主義者)와는 달리, 아니 이에 분명히 저항하면서,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 즉 하나님 자신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을 힘차게 증언한다. 이것은 이 세계가 저급한 악신(惡神)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증언해 온대로, 유일한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이라는 것을 고백함과 아울러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세계, 육의 세계를 긍정하셨다는 것을 뜻한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친히 육신, 피조물이 되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새로운 창조로도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구원활동이 창조활동을 전제하고, 새 창조, 피조물의 궁극적 완성을 목표로 한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자연세계를 배제한 구원은 없다. 그분의 활동의 마지막은 바로 자연성, 육체성이다. 물론 이 자연성, 육체성이란 단순히 허무성과 연약성 아래 예속되고 죄의 힘에 쉽게 굴복당하는 피조물의 상태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으로 변모될 자연성, 육체성을 지시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간화(人間化)를 지시한다. 인간과 같이 질투하고 결혼하고 싸우는, 그리고 현저히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헬라신화의 제신(諸神)들과는 달리 인간과는 전적으로 다르신, 인간을 만드신 창조자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간 긍정, 인간 사랑을 나타낸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본질, 인간의 본성과 형태, 인간의 역사성에 참여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탄생과 죽음 사이의 시간 안에 개별적이고 일회적인 피조물이 되셨다. 그러므로 인간을 배제한 구원도 없다. 그러므로 설령 하나님이 없는 인간은 존재할지 몰라도, 인간이 없는 하나님은 결코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성을 지니고 계신다. 그분의 신성(神性)은 인간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인간의 그 어떤 부분도 결여되어 있지 않다. 그가 취하지 않은 인간의 현실성은 없다. 그는 바로 나와 같은 바로 그 인간이었다. 그에게는 현실적으로 인간적인 그 어떤 것도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 자신이 육신, 인간이 되셨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한 성(性)만을 취하셨다는 것을 의미할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온 인류의 구세주로 오셨고,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인간으로 오셨지, 분명히 남자로나 여자로 오시지 않았다. 설사 우리가 예수를 지금껏 남자의 모습으로 생각하고 그려 왔다손 치더라도, 아니 설사 예수가 남녀 두 성 중에서 불가피하게 하나의 성을 지닐 수 밖에 없었다손 치더라도,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인간을 대표하는 ‘새로운 아담’, 즉 인류의 대표로 오셨지, 그 당시 사회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하던 남자의 모습으로 오시진 않았다. 물론 하나님은 여자로도 오시지 않았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은 분명히 그가 남자나 여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가 육신,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한 인간이라는 구체적인 현실성 안으로 들어오셨다면, 그분은 처음부터 완성된 한 인간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만약 완성된 한 인간이 미리 존재하여 있었고, 하나님의 아들이 이 인간이 되셨다면, 이것은 바로 잘못된 ‘양자(養子) 그리스도론’으로 빠질 위험을 낳는다. 그리고 하나님이 개별적이고 일회적이고 구체적인 한 인간의 본성, 그의 역사성에 참여하셨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여느 인간들처럼 아기로 태어나셨다는 것은 자연스럽고 자명한 일이다. 마태는 이사야의 예언이 아기 예수의 탄생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바로 그의 말(사 7:14)을 인용한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마 1:23). ‘어린이 복음’이라고도 불리는 누가복음은 아기 예수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었다고 소상하게 기록한다. 예수가 처음부터 초인(超人)이나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 등장하거나 성숙한 천사로서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성탄의 기적이나 신비 혹은 그리스도의 독특성을 감소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웅변적으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을 성서는 비교적 소상히 그리고 있다. 예수 탄생 이야기는 마치 동화처럼 순하고 맑게 채색되어 크리스마스를 장식한다. 들 밖에서 양치던 목동이 천사로부터 예수 탄생의 소식을 처음으로 들었으며, 별자리를 연구하던 동방의 세 박사들은 별을 보고, 아니 별의 인도를 받아 강보에 싸인 아기 예수에게 와서 예물을 드리고 경배한다. 만약 이런 유아 시절의 예수 이야기조차 누락되었더라면, 성서는 그 얼마나 성인 어른만이 독점하는 책이 되었을까? 그리고 성탄 전날 밤의 정경은 그 얼마나 삭막했을까? 그리고 오늘 날의 성탄절 행사도 그 얼마나 아기 예수의 추억이 없는 어른들의 싱거운 기념절이 되었을까? 비록 성탄절 이야기는 헤롯의 음모와 어린이 살해라는 어두운 배경 위에서 등장하고는 있지만, 어쩌면 불행했던 이 이야기조차도 예수가 어린 아기로 탄생했음을 역설적으로나마 설명하기 위해 자리잡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하튼 예수의 생애는 처음부터 어린 시절을 빼고는 이야기될 수 없다. 그리고 누가는 특별히 어린 예수의 성장과정을 간단하게 압축하여 표현하고 있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 예수는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아기로 태어나서 어린이로 성장했고, 그래서 점점 성인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까지 궁금하게 만드는 수수께끼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예수의 누락된 어린 시절의 이야기이다. 인간으로 온 예수의 어린이 시절이 어떤 이유로 구두전승과 문헌수집에서 탈락되었거나 배제되었을까? 유감스럽지만 다행스럽게도 오로지 누가복음 2장 41-52절만이 예수의 소년시절에 관해서, 그것도 단 한번만 보도하고 있다. 어느 유대인의 속죄절에 예수의 부모가 어린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예수를 잃어 버렸고, 사흘 후에 성전에서 랍비들 가운데서 듣고도 하고 묻기도 하던 예수를 만난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예수의 어린이다운 모습을 진솔하게 그려주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정신적으로 성숙해진 그의 모습을 부각하려는 것 같이 보인다. 여기서 이미 예수는 랍비들과 함께 대화할 정도로 조숙한, 아니 어쩌면 권위있는 모습으로도 그려지고 있다.

다시금 궁금하거니와, 이것은 예수에 대한 객관적 설명일까? 아니면 누가의 편집의도가 삽입된 설명일까? 이것은 어린이 예수에 관한 자연스러운 설명일까? 아니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교회의 케리그마적 선포에 의해 윤색된 설명일까? 누가는 이미 이 때부터 예수가 서서히 공개적으로 당당히 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을까? 아니면 그가 복잡한 예루살렘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단순한 우발적 사건을 아무런 가감 없이 자신의 문서에 삽입하였을까? 이것은 예수가 복잡한 예수살렘 거리에서 부모의 손을 놓치고 길을 잃었다가, 미아(迷兒)를 발견한 어른들에 의해 순례자를 맞으려고 준비하는 성전 직무자들에게로 안내되어 성전 안에서 일시 보호되었다가 부모에게 넘겨진 일상적인 사건일까? 아니면 어린이 예수가 부모의 손을 떨치고 주도적으로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대담하게 랍비와 토론하느라 부모를 생각할 여념조차 없었을까?

여하튼 이 유일한 본문을 제외하면, 정경화된 문서의 그 어느 곳에서도 예수의 어린이 시절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 당대에 유행하던 어린이 멸시(蔑視) 혹은 어린이 억압(抑壓) 이데올로기가 성서기록에도 막강하게 영향력을 떨치고 있었다는 증거일까? 아니면 위인의 어릴 적의 이야기를 생략하는 것이 그 당대의 인물전(人物傳)의 보편적인 경향이었을까? 예수의 어린이 시절을 신비의 베일 속에 가리는 것에는 그럴 만한 이유와 목적이 있었을까? 예수의 어린이 시절에 관한 모든 기억은 너무나 희미하여서 쉽사리 지워졌거나 구전(口傳)에서 탈락되었을까? 아니면 이에 관한 기록이 우연히 소실되었을까? 자신의 아들이 휼륭하고 위엄있게 변해가는 것을 본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의 어린이 때의 모습을 감추는 것이 여러 모로 나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만약 그랬다면, 왜 그랬을까? 혹시 성서문헌의 저자가 어린이를 싫어한 성인이었기 때문에, 이를 의도적으로 배제했을까? 아니면 그 당시의 사람들이 종교 지도자나 카리스마적 인물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유치하게 생각하거나 그 이야기가 그 인물의 가치와 명예를 현저히 떨어뜨린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저자는 이 시절에 관한 보고를 생략했을까?

이 질문들은 쉽게 대답될 수 있는 성격의 질문은 아니지만, 여하튼 이 질문은 간단히 넘겨 버릴 수 있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놀라운 증언을 고려할 때, 성서가 오직 성인 예수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고 기록하였다는 것은 상당히 모순된 것일 수 밖에 없다. 성인만이 인간인가? 아니 성인만이 참 인간인가? 아니 성인만이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나님은 성인이 되셨는가? 어째서 어린이는 이미 예수의 기록에서부터 심하게 박대당하고 있는가?

그런데 우리의 흥미를 매우 끄는 점은 아기 예수의 탄생과 성전의 예수사건 사이의 예수의 유년 시절의 공백을 외경(外經)이 메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원 후 15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도마의 유아복음’(이것은 1896년에 에집트에서 발견된 ‘도마복음’과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다.)은 예수의 어린 시절에 관한 복음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5세에서 12세까지의 예수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누가가 기록한 예수의 성전 사건으로 끝을 맺고 있다. 그리하여 이것은 잃어버린 예수의 어린 시절을 거의 완벽하게 메꿔주는 것 같이 보인다. 혹시 누가가 성전 사건 이전의 사건을 몰랐을까? 혹시 알았더라도, 이를 고의로 빠뜨렸을까? 만약 그랬다면, 왜 그랬을까? 아니면 ‘도마의 유아복음’이 이 공백을 자기 나름대로 메우고 있는 걸까? 후자가 더 그럴 듯하게 여겨지지만, 여하튼 예수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단순히 외경(外經)에 수록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간단히 무시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것은 초대교회로부터 굉장한 인기를 끌었고, 그래서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도마의 유아복음’에서는 어린 예수가 초능력이나 대단한 지헤를 갖춘 아이로 묘사될 뿐이지,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순진한 어린 아이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이 내용은 대개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채워져 있다. 신적인 능력을 지닌 소년 신동(神童) 예수는 진흙으로 참새를 만들고, 지붕에서 떨어져 죽은 어린이를 소리쳐서 살리며, 도끼에 발이 찍혀 피를 심하게 흘리는 청년을 손으로 고친다. 뱀에 물린 야고보의 손을 입김을 불어 고치고, 죽은 갓난아이를 손을 대어 살리며, 집 짓는 공사 현장에서 죽어 넘어진 사람을 살린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한 알의 밀알로써 백석이나 되는 수확을 거둬들이고, 부친의 목수 일을 거들면서 짧아진 나무 판자를 손으로 잡아당겨 늘린다. 모친의 심부름으로 물을 길어 오다가 물동이가 깨어지자 접은 저고리에 물을 가득 채워 온다.

그렇지만 예수는 칭찬받을 만한 기적을 행하는 것만이 아니라 악동(惡童)으로서도 행세한다. 그는 자신이 모아 놓은 물을 흘려 보낸 어린이를 저주하여 죽어 버리게 만들고, 어깨를 부딪치고 지나가던 어린이를 저주하여 죽인다. 그리고 이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소경으로 만든다. 가르침을 받던 예수의 건방진 태도에 노한 선생이 그의 머리를 때리자, 예수는 그를 저주하여 쓰러지게 한다. 그 밖에도 소년 예수는 자신의 초인간적인 지혜를 과시한다. 자신을 가르치려던 선생을 오히려 훈계하고, 선생은 예수가 창조 전에 태어난 자요, 하나님이 아니면 천사와 같은 위대한 인물이라고 경탄하며 자신의 수치를 부끄러워한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가 성전에서 랍비들과 질문하고 대답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여기서 그는 율법의 요점과 예언자의 비유를 해석하고, 장로들과 선생들의 답변을 막히게 한다. 그리고 율법 학자들과 바리새 사람들은 예수의 부모에게 그의 존엄과 덕과 지혜를 칭찬한다.

그리고 8-9 세기경에 라틴어로 기록되었거나 편찬된 ‘복되신 마리아의 유래와 구세주의 어린 시절에 관한 책’(일명 ‘위명 마태복음’)도 어린 예수가 일으킨 기적 이야기를 전해 준다. 예수가 탄생한 지 사흘째가 되던 날에 황소 한 마리와 당나귀 한 마리가 예수를 경배하였으며, 갑자기 동굴에서 용이 나와 사람들을 놀라게 하자 이에 아기 예수는 모친의 무릎에서 내려와 섰고, 그러자 용들은 예수를 경배하고 물러갔다. 사자와 표범도 예수를 숭배하고 일행과 함께 사막으로 들어갔다. 이들이 여행을 하는 동안 야수들은 전혀 해치지 않았으며, 오히려 사자가 길을 안내하였다. 마리아가 높은 야자나무의 열매를 따먹을 수 없어 안달하자, 그의 품에서 쉬던 아기 예수는 말 한마디로 야자나무를 굽히고 편다. 그리고 나무 뿌리에서 맑은 물이 나오라고 명령하자, 샘이 터져 물이 솟아나기 시작한다. 그 밖에 예수는 30일 걸려서 갈 길을 하루만에 가도록 단축시킨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이집트의 신전(神殿)에 들어가자 우상들이 넘어지고 부들부들 떨면서 부서졌다. 이를 본 성주는 아기 예수를 경배했고, 모든 백성이 예수로 인하여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얼마 후에 요셉은 천사의 명령대로 안전한 유다 땅으로 돌아갔다.

얼핏 보기에도, 앞의 이야기는 황당하고 조잡하며, 도덕적인 차원이 결핍되어 있다. 어린이의 순수한 모습은 두 말할 것도 없고 성서의 자비로운 예수의 모습도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오히려 그는 작은 일로 화내고 복수하는 잔인한 어린이로 나타난다. 더욱이 어린 예수의 초능력과 대단한 지혜능력은, 아무리 공생애 기간 동안의 예수의 기적 이야기에 의해 윤색되었다고 생각하더라도, 지나칠 정도로 허황하고 과장되어 있다. 더욱이 진흙으로 참새를 만든 이야기는 이집트의 이야기에도 나오며, 예수와 교사에 대한 이야기는 불교의 전설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아무리 이 이야기가 예수의 신성(神性)을 증명하려는 호교적(護敎的)인 의도에서 쓰여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구체적이고도 역사적인 한 인간의 성장, 발전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것은 육신으로 온 ‘참 인간’(Vere Homo) 예수를 부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이것은 영지주의(靈智主義)의 가현론(假現論)과 일치한다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잃어버렸을지도 모를, 아니 혹시 베제되었거나 억압되었을지도 모를 예수의 어린이 시절에 관한 기억을 되살리려고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다시금 우리는 대답 없는 질문을 계속 던질 수 밖에 없다. 어떤 경로로, 어디서, 언제 예수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실종되었을까? 예수의 어린 시절을 허구와 상상으로 채우게 한 원인을 제공한 자는 누구일까? 그는 혼자일까? 아니면 특정 집단일까? 아니면 성숙과 성공의 신화에 심취하여 유아 이미지를 억눌러 온 인류 전체의 공동책임일까? 왜 인간으로 온 예수의 어린 시절의 인간적인 면모가 가려질 수 밖에 없었을까? 여기에는 그의 인간성을 억압하고 그의 신성(神性)만을 강조하려는 신비주의자, 영지주의자의 음모가 숨어 있을까? 아니면 정통교회를 장악하고 지배하려던 남자-어른들의 전략이 숨어 있을까? 인간 예수의 순수하고 진실한 어린 모습의 기억들이 사라진 사건은 오늘 날에도 여전히 사회와 종교의 영역에서 지배적인 권리를 누리는 남자 성인에게 여전히 유익한 일로 기억될까? 아니면 모든 사람들이 형제와 자매가 되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기억될까? 조잡하고 황당하게라도 어린 예수를 복원시키려고 했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또 그들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온갖 기적같은 이야기를 퍼뜨리고 실제로 기적과 같은 마술을 행하면서 안정되어가는 정통교회를 동요시키고 어지럽혔던 이단자들이었을까? 아니면 거꾸로 그들은 초인적이고 신적인 권능을 예수의 어린 시절에까지 투영시킴으로써, 이런 막강한 예수의 권위를 끌어와 권세와 안정을 공고히 하려던 교회 지도자나 세속 권력자의 음모에 영합한 자들이었을까?

여하튼 무슨 이유에서든 간에, 온갖 허황한 말을 거짓으로 꾸며대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실재하는 사실을 덮어버리는 행위도 진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 성급한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이 나의 의도는 아니다. 단지 인류의 정신사에서 어린 예수의 기억들이 실종되어버린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또 그래서 ‘어린이 예수’를 복원하고 싶은 어린이와 같은 나의 마음에 내내 아쉬움을 남길 뿐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성급히 실망하기보다는, 비록 또 하나의 허구일망정, 시인의 문학적 상상력을 빌려서라도 아깝게 사라진 예수의 어린 시절의 빈틈을 메꾸어 보련다. 이것마저도 너무 허무맹랑하다고 하늘의 그리스도가 심히 나무라실까 아니면 너무 고마워 하실까?

프랜시스 톰슨(Francis Thompson)은 그의 시(詩) ‘작은 예수’(Little Jesus)에서 다음과 같이 어린 예수를 그린다.

작은 예수님, 당신도 한때는 부끄러움을 타셨나요?

나처럼 그렇게 작은 분이셨나요?

.............................................

당신도 언젠가 우리 꼬마들처럼

장난감을 가지고 놀으셨나요?

당신은 작은 천사들과

하늘에서 놀이를 하셨나요?

별들과 구슬놀이를 하셨나요?

온갖 것들이 날개를 치며

당신과 숨바꼭질 놀이를 하였나요?...

알버트 페인(Albert Bigelow Paine. 미상)도 ‘어린이 예수’에서 다음과 같이 어린 예수를 그린다.

그는 티 없이 어린이였습니다.

여름 날, 너나 또 나처럼

아버지가 일하고 계신 동안에

문 밖에서 놀기도 하였고,

마루에서 대팻밥을 모으기도 하던

그는 티 없는 어린이였습니다.

너나 또 나와 다름이 없이

때로는 풀밭 위에 딩굴면서,

푸른 하늘에 떠오른 까만 점같은

매가 머리 위에 나는 것을 보았고,

문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낯모를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티 없는 어린이였습니다...

 

이런 시들도 분명히 어린 예수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정보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시들이야말로 어린 예수를 신동(神童)과 악동(惡童)으로 그렸던 앞의 이상한 문서들보다 훨씬 더 가까이 어린 예수의 모습으로 다가간 것이 아닐까? 만약 이런 묘사들이 아기 예수 탄생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그의 어린 시절을 그려 주었더라면, 모든 시대의 어린이들은 그 얼마나 즐거이 어린 예수의 친구가 되었을까? 또 포악하고 교만한 우리 어른들은 이런 예수 앞에서 그 얼마나 친절하고 포근한 어린이의 친구가 되었을까?

 

 

2) 예수의 ‘어린이 신학’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까이 가져왔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예고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인격’(Person des Reiches Gottes)으로서 그 나라를 이 세상에 가까이 가져왔다. 그러므로 그의 인격 안에서 이전의 것은 철저히 전복되고 급진적으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혁명이라고 불리는 것까지 철저히 전복하는 혁명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온 하나님 나라의 혁명은 우리에게 새로운 현실만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도 가져 왔다. 이전의 관계는 낡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전의 모든 가치는 전복되었다. 지금까지의 체계는 이미 그 구원적 효력을 상실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 앞에서 오직 타당한 태도는 회개일 뿐이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왔다”(마 4:17).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4-15).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한 제자들을 부른다. 하나님의 나라는 새로운 제자 공동체, 하나님의 백성을 소집한다. 이 공동체로 부름받은 사람은 이제 당연히 만사를 이전과 달리 보고, 이전과 다른 삶을 살며, 이전과 다른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기존하는 것과의 철저한 단절, 그것의 급진적 전복은 바로 ‘작은 자’에 대한 지금까지의 가치평가의 전환, 가치역전(價値逆轉)의 형태 안에서도 드러난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 옴으로써, 바로 ‘작은 자’도 우리 곁으로 데려다 주었고, 바로 그래서 우리에게 ‘어린이’를 가까이 데려왔다. 다시 말하면, 그에게서 ‘작은 자’는 무엇보다도 ‘어린이’라는 인격 안에서 구체화되었다. 즉 예수에게서 ‘어린이’는 바로 ‘작은 자’의 인격적, 구체적 모델이었다. 그래서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작은 자, 어린이로서 살아가기를 촉구하였다. 예수의 ‘어린이 신학’의 특징은 바로 이러한 관점 아래서 가장 확연하게 드러난다고 여겨진다.

어린이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어린이에 대한 동시대인들의 태도와 비교할 때 비로소 확연하게 드러난다. 유대 사회에서 과연 어린이는 누구였는가? 어린이는 어떠한 존재로 여겨졌는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느 사회에서나 일반적으로 그러하듯이, 유대 사회에서도 어린이는 매우 소중한 존재였다. 특히 어린이는 이스라엘과 맺어진 계약에 대한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과 보증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다른 선물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자녀가 없다는 사실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계약의 바탕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주신 수많은 자손의 번영에 대한 약속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여느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서도 어린이는 바로 희망의 원천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많은 자녀들이 한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을 상징하였다. 그리고 초기 이스라엘 사람들은 부모의 이름을 계승한 자녀들의 번식을 통하여 영생이 실현된다고 여겼다. 또한 남자가 아들을 남기지 못한 채 죽으면, 그 남편의 형제가 그 아내를 취하여 아들을 낳게 할뿐만 아니라, 그 아들이 죽은 남자의 이름을 계승할 수 있도록 레위기의 율법은 보장하였다(신 25:5-10 참조).

그리고 우리는 예배, 기도와 제의 등에서 어린이들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유월절 규례는 어른들이 자녀들에게 이 규례의 유래를 가르쳐야 하며, 또 장래에도 자녀들이 그 유래를 물을 경우에 그 의미를 가르쳐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다(출 13:8, 14, 신 6:20-25 참조). 그리고 신명기(모세의 기도)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행동과 말씀을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칠 것을 명령하고 있다. 특히 부모들은 죽기 전에 어린이들을 축복하는 일을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했다(창 27, 48, 49 참조).

어린이들에 대한 이러한 특별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인들의 밑바탕과 다른 고대 사회에서 어린이들은 ‘힘이 없는 자들’이었다. 전통과 관습은 노인들에게 가장 큰 중요한 자리를 부여하였다. 부모들은 자녀들에 대해서 거의 절대적인 권위를 가졌으며, 자녀들은 종종 심한 육체적 형벌에 의해 강제되는 엄격한 순종을 통해 교육되었다. 그리고 율법은 부모의 권위를 강하게 승인해 줌으로써 그 권위를 강화하였다. 12세에 율법교육을 받기 이전의 어린이는 종교적으로 미성숙한 자였고, 여자, 이방인, 병자, 가난한 자와 마찬가지로 주목받지 못하고 권리를 갖지 못하는 사회 변두리 집단에 속했다. 비록 고대 사회에서 어린이들이 중요했지만, 노인들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될 수 없었으며, 자신들의 의견을 자유스럽게 표현할 수 없었다. 어린이의 종교사적 신분은 늘 반복되는 ‘귀머거리, 백치(白痴), 나이가 어린 자’라는 삼중도식(Trias)을 통해서 묘사되었고,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은 영적인 능력을 온전히 갖고 있지 못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어린이를 데려와 예수의 안수를 요청했을 때, 이를 꾸짖었던 제자들의 행동은 이해할 만하다(마 19:13, 막 10:13, 눅 18:15). 종교적인 귀머거리, 아니 종교적인 백치가 어찌 예수의 고귀한 말씀을 귀동냥할 자격조차 갖겠는가? 어른들이 노는 마당에서 꼬마들은 저리 가라! 그러나 마가복음의 어린이 축복말씀에 따르면, 예수는 말씀과 행위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린이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어린이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고 있음을 천명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행동을 꾸짖고, 어린이를 어른의 ‘한복판에’(막 9:36) 세운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어린이를 ‘중심위치’에 세운다. 변두리에서 복판으로, 아니 어른의 주변에서 어른의 중심으로 위치를 뒤바꾼다. 예수가 어린이를 “껴안았다”(막 9:36 이하, 10:16)는 것은 용납, 신뢰의 경험, 보호와 안전을 의미하고 전달한다. 이로써 예수는 어린이를 용납하였고 어린이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음을 몸짓으로 천명하였다.

왜 어린이는 이런 대접을 받는가? 라흐만(R. Lachmannn)은 말한다.

 

이 본문의 해석사와 영향사는 항상 무죄성, 겸손, 죄없는 순수성, 고민없는 순진성 등의 술어들로써 어린이를 장식하려고 했다. 본문은 이에 관해 전혀 말하지 않는다. 어린이를 매우 현실주의적으로 그리고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었던 예수(마 11:16-19 참조)에게 이러한 이상주의적인 어린이 이해 만큼 낯선 것은 없다. 어린이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특별한 자질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어린이가 용납과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도움의 필요성과 의존 속에서 어린이가 제공할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그 어떤 공적과 업적도, 그 어떤 율법성취와 행위도 없다. 예수가 용납한 가난한 자, 병자와 죄인처럼 어린이는 하나님 앞에 빈손으로 서 있고, 신뢰 속에서 모든 것을 그의 사랑하는 아버지, ‘아빠’로부터 기대할 것 밖에는 달리 할 도리가 없다. 이로써 어린이는 그리스도인의 근본태도와 복음적인 칭의신앙의 전형적인 표현이 된다. 즉 빈손으로 온전히 은혜만을 의지하고, 아무런 공로 없이 용납되는 것을 말한다.

 

예수는 분명히 낭만적인 어린이 상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현실주의자로서 근본적으로 어린이들이 어른들보다 더 쉽게 신뢰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어린이들은 자신들의 부모가 돌멩이가 아니라 떡을 줄 것임을 신뢰한다. 예수는 어른들도 바로 어린이들처럼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 신뢰 가운데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슈바이쳐(E. Schweizer)도 이와 비슷하게 말한다.

 

어린이들의 무죄함이나 순수함에 관한 언급은 아니며, 어린이가 금욕주의자들의 상징도 아니다... 어린이들은 아무 것도 내어놓을 수 없는 자들, 아무런 공적도 세울 수 없는 자들로서 축복의 대상이 된다. 예수는 약속을 모든 사람들에게 확대시키며, 빈털터리 거지와 같은 신앙을 갖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질 것임을 권위 있게 선포한다. 왜냐하면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는 그 어떠한 자신들의 공적이나 하나님 표상들이 개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받아들이거나 들어가는 대상이 된다고 말한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의 전제조건과 공적, 대가를 바라는 요구가 없이 주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그닐카(J. Gnilka)의 입장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예수의 발언은 제자들이 편견과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바로 잡으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조건 없이 어린이들에게 허락된 것은... 첫 번째 축복선언을 연상케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총이며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려는 선물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로 이런 어린이들에게 약속함으로써, 예수는 가부장적인 사회에 팽배해 있던 신학적 공적사상을 공격하고, 하나님을 깊은 신뢰 가운데서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어린이의 능력을 중요한 것으로 선언한다.

만약 어린이가 아무런 공적도 없이 오로지 용납과 은혜만을 의지하는 자로서 축복의 대상이 된다면, 그렇지 않은 자들은 누구인가? 비록 그닐카는 예수의 공격대상을 ‘가부장적인 사회에 팽배해 있던 신학적 공적사상’이라고 지목하여 추상적으로 정의하였지만, 예수의 구체적인 공격대상은 분명히 가부장적인 사회에 공적을 자랑하던 어른들임이 분명하다. 이들은 바로 어린이를 미성숙한 자, 작은 자로 판단했던 자들이었다. 이들은 공로 위에 사회와 종교를 세우려던 사람들, 아니 은혜를 공적으로 바꾸었던 자들이었다. 이리하여 이들은 공로와 성취 면에서 자신들보다 못하다고 여기던 모든 ‘작은 자들’을 비웃고 죄인으로 취급하였던 자들이었다. 어린이는 바로 이런 ‘작은 자들’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공적이 없는, 그래서 공적있는 자들의 눈에는 쓸모없고 미천한 자에 불과했던 어린이들에게 아무런 조건도 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였다.

오늘 날에도 어린이가 어른들에게 학대를 받는 주된 이유는 그들이 약자요 여자라는 사실에 있기도 하겠지만, 그들이 또한 세상에서 쓸모가 없거나 쓸모가 가장 적다는 사실에도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살벌한 생존경쟁 사회에서 무한경쟁을 강요당하고 있으며, 이 경쟁에 순응하지 못하면 짓밟히고 도태된다. 바로 이런 쓸모 없는 자, 사회에서 가장 작은 자인 어린이를 예수는 사회의 중심, 아니 하나님 나라의 입구에 세운다. 이것은 예수가 가져온 혁명의 하나이다. 공적과 업적 위에 사회와 종교를 수립하는 어른들 아래서 신음하는 어린이들은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만을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일차적인 수혜자들이다.

깊은 신뢰 가운데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오로지 하나님의 선물만을 의지하는 것은 어린이의 ‘능력’(그닐카)인가? 만약 이것을 능력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또 하나의 공적사상을 말하는 것에 다름이 없다. 마치 믿음조차도 인간의 공적으로 간주될 수 없듯이, 어린이의 전적인 신뢰도 그의 공로나 능력으로 간주될 수 없다. 그것조차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 은혜일 수 밖에 없다. 인간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그분에게 용납된다. 이것을 어린이는 웅변적으로 증언한다. 그는 바울이 ‘칭의론’(오직 믿음으로 인한 하나님의 義)을 말하기 전에 이미 칭의신학자였고, 루터가 ‘오직 은총으로’(sola gratia)를 말하기 전에 이미 오로지 은총을 의지하던 자였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이 본문의 영향사(影響史) 아래서 사람들은 어린이의 여러 속성들, 즉 노여움을 오래 품지 않는 점, 자기 생각과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점, 무죄함, 겸손함, 순수함, 순진함, 통일성(평온성), 정직성, 심원성(深遠性) 등을 지적하려고 했다. 물론 이런 견해는 본문으로부터 직접적인 지지를 받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우리가 이런 속성들을 다시금 어린이의 능력이나 공적으로 평가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어린이의 이런 면들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어린이가 죄가 있느냐 없느냐?”는 물음은 다른 차원에 속한다. 여기서 우선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어린이의 순수함, 진솔함이다. 어린이들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만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의 마음이 나누어지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이 아니겠으며, 아무런 거짓이나 위선이 없이 순수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나누어진 마음, 거짓있는 믿음으로 어떻게 하나님만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가?

예수의 산상축복도 이런 맥락 안에서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만약 우리가 슈바이처(E. Schweizer)처럼 산상설교에서 축복받은 ‘가난한 자’와 ‘애통하는 자’를 모든 희망을 하나님에게 거는 자,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에 대해 자만하지 않고 봉사하려고 하는 힘없는 자로 생각한다면, 바로 어린이야말로 이런 자가 아니겠으며, 그래서 우선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온유한 자’를 ‘가난한 자’, ‘비천한 자’, ‘힘없는 자’로 번역할 수 있고, 바로 이런 자들이 땅, 즉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遺業)으로 받을 수 있다면, 바로 어린이야말로 역사적으로 가장 가난한 자, 비천한 자, 힘없는 자가 아니겠으며, 그래서 바로 온유한 어린이야말로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자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만약 우리가 아이히홀츠(G. Eichholz)처럼 산상설교의 ‘마음이 청결한 자’를 생활의 은밀한 내면에 이르기까지 순수한 자, 개방성과 순진성을 지닌 자, 가면(위선)과 이중성을 지니지 않는 자, 어떤 연극도 하지 않는 자, 아무도 자신의 카드를 보아서는 안되기 때문에 자신을 숨겨야 할 숨바꼭질도 하지 않고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속이는 가장무도회도 하지 않는 자로 생각한다면, 그래서 축복선언은 모든 엉큼함(비투명성)과 위선(연극놀이)으로부터 떠날 것과 개방성, 정직함, 올바름과 분명함을 요구한다면, 바로 어린이가 이런 자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이겠으며, 그래서 바로 어린이말로 하나님의 (어린이 같은?) 얼굴을 볼 수 있는 자가 아니겠는가?

어른은 어린이에 비해서, 그리고 어린이도 점점 더 성장할수록, 더 많은 정신적 조작능력을 갖게 되고, 그래서 인위적이고 문화적인 활동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만약 인위성(人爲性)이 쉽사리 조작성(操作性)으로 연결되고, 또 조작성이 달콤한 사기성(詐欺性)으로 연결된다면, 자유민주주의가 궁극적으로 승리했다는 도취감(F. 후쿠야마: ‘역사의 종말’) 속에서 온갖 불법과 사기를 행하는 어른들의 문화가 인류의 행복에 무슨 큰 보탬이 되겠는가? 라인홀드 니버(R. Niehber)가 일찍이 지적하였듯이, 어른의 모든 도덕적 행동에는 부정직과 불성실의 요소가 개재되어 있다. 어른은 자신과 다른 그 무엇인 것처럼 자처하려는 모순적 성격을 갖고 있다. 어른의 생활에 나타나는 이러한 불성실과 부정직은 타락의 일부이다. 그리고 어린 아이의 단순성, 통일성, 심원성이 끊임없이 재획득되지 않는다면, 성숙의 더 큰 복잡성, 더 넓은 지적인 범위, 더 자세한 지식은 죽음을 뜻하게 된다.

그리고 인위성(人爲性)이 쉽사리 반자연성(反自然性)으로 이어진다면, 자연을 무차별적으로 착취하고 오염시키는 어른들의 문화가 인류의 생존조건에 어떤 희망을 줄 수 있겠는가? 제레미 리프킨(J. Rifkin)이 예리하게 간파하였듯이, 인간이 그 자신을 자연으로부터 분리하여 그 비밀을 발견하고, 자연을 인공적으로 조작(操作)하기 위해 이 비밀을 고정된 진리의 집성(集成)으로서 사용할 수 있다는 종래의 사고방식은 잘못된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과학기술에 의해 더 질서있는 세계가 이루어진다는 ‘현대의 신화’는 ‘엔트로피의 법칙’에 의하여 깨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비록 어리석고 연약할 망정 남을 속이거나 짓밟지 않고 자연 속에서 천진스럽게 뛰노는 어린이가 차라리 더 바람직한 인류의 모델이 아니겠으며, 그래서 인류의 희망의 표상도 아니겠는가?

그리고 어른이 되어가는 인간은 세계에 대한 경이감을 점점 더 상실한다. 어린이의 세계는 온통 무한한 경이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어린이가 점점 더 성인이 되어갈수록, 이 세계는 시시한 세계로 변한다. 그리고 이 세계는 아무 것도 그냥 얻을 수 없는 가혹하고 무자비한 세계로 변한다. 그리하여 경이감을 상실한 인간은 죽기 시작한다. 그는 무기력의 수렁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게 된다. 정년퇴직한 사람이 곧바로 죽는 경우가 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한다. 그에 반해 어린이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외부세계에 대한 경외감을 간직한 채, 이 세계의 비밀을 무한히 자신 안으로 흡수하고 있으며, 이 세계에 대하여 무한히 열려 있다. 그는 세계에 대한 경외심, 경이감으로 충만하다. 예수가 어린이를 옹호한 것도 바로 어른들의 고착되고 경직된 사고에 대한 공격이라고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물은 언제나 계산될 수 없고, 언제나 인간의 기대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율법은 한계선을 긋지만, 은혜는 한계를 모른다. 율법주의자는 자신의 한계 안에 들어온 사람, 즉 같은 전통(傳統)과 의식(儀式)을 같이 하는 사람, 유대적으로 말하면, 순수히 유대적인 혈통을 갖는 사람, 자신의 형제들만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 즉 사마리아인, 죄인, 어린이를 깔보고 죄인시한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런 자를 찾으시는, 무한히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선포한다. 율법주의자는 기존하는 율법기준에 따라 의로운 사람들만을 받아들이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렇지 못한 자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전혀 새롭고 창조적이며 구원하는 의(義)를 드러내신다. 어른은 계산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수량화할 수 있는 것에 의지하여 살아가지만, 어린이는 계산할 수 없고 예상조차 할 수 없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것, 은총으로부터 살기 때문에,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전적으로, 순수하게,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어린이의 것이 된다.

“하늘과 땅의 주재가 되시는 아버지, 이것을 지혜롭고 총명한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이 같은 자에게는 나타내 보이시니 찬양합니다”(마 11:25, 눅 10:21)라는 예수의 말도 이런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한편으로 하나님이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의 편에 계시다는 구약성서의 통찰을 고려할 때,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기대하는,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주어졌다. 약속은 지혜 있는 자와 율법 학자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에게 주어졌다. 다른 한편으로 영리한 자들과 지식인들은 문자로써 자신의 가슴을 동여매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지만, 어린이들과 어린이와 같은 자들은 하나님을 가슴으로 느끼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더욱이 예수는 어린아이들조차도 하나님의 우주의 기적을 깨달을 수 있고 찬양할 수 있다고 고백한 시편 기자의 말을 인용하여, 하나님이 “어린이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다”(마 21:16)고 말한다.

어린이에 대한 예수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또 다른 내용은 제자들 사이에서 서열논쟁이 일어났을 때에 예수가 가르치고 보여준 행동에 나타나 있다. 특히 마가와 누가는 이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마가와 누가도 마태와 같이 ‘제자도’의 모델을 제시하려고 하지만, 마태와 달리 제자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첨예한 대립(논쟁, 분쟁)의 상황을 분명히 제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가져온 모든 가치의 급진적 전환(역전)을 분명히 보여준다. 여기서 예수는 자신을 둘러싸고 위대함과 영광, 세상적 명예와 권세를 차지하려고 싸우던 제자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가치를 제시한다. 즉 예수는 높음과 낮음, 영광과 수치의 척도를 완전히 뒤바꾸어 버린다. 아니 그는 기존의 관계와 가치체계를 완전히 무너뜨린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예수는 어린이를 모델로 삼는다.

마가복음에서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9:35)는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예수는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고 품에 안는다(9:36). 그리고 예수는 소자(어린이)를 죄로 이끄는(실족케 하는) 위험성을 강조함으로써, 다시 한번 더 어린이를 우대한다(9:42).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이다”(눅 9:48)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어린이를 데려다가 곁에 세운다(눅 9:47).

이처럼 예수는 가장 작은 자, 가장 억압당하는 어린이들과 연대한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 어린이와 같은 자, 아니 어린이가 됨으로써만,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수 있고 또 그 나라에서 가장 ‘큰 자’, 가장 위대한 자가 될 수 있음을 가르친다. 예수는 가장 ‘작은 자’로 업신여김을 당하는 어린이를 가장 ‘큰 자’의 모델로, 아니 실상은 ‘가장 큰 자’로 제시한다. 그런 면에서 어린이는 어른이 따라야 할 삶의 규범이요, 어른의 아버지이다. 더욱이 어린이는 하나님을 계시하는 자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천사이다. 예수는 바로 이런 어린이를 자신과 동일시하였고, 순결하고 거룩한 마음으로 끌어안았다. 인류의 역사에서 어린이를 이토록 위대하게 평가하고 사랑한 자, 아니 큰 목소리로 어린이를 찬양한 자가 또 있었던가? 예수처럼 위대한 ‘어린이 신학자’가 어디에 있는가?

 

3) 어린이다운 예수

 

우리는 앞장에서 예수가 어린이를 억압하여야 할 유치한 인간상으로 보지 않고, 도리어 모든 인간들이 본받아야 할 성숙의 본래적 표본으로 제시하였음을 보았다. 예수는 어른들의 삶에서 어린이들로부터 배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즉 인류의 위대한 교사 예수는 당대에서 가장 작은 자로 취급받던 어린이를 오히려 위대한 인간의 모범으로 삼음으로써, 실로 어린이를 인류의 위대한 교사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는 말로만 가르친 교사였는가? 그 자신은 단순히 위대한 스승이기만 했는가? 아니다. 그는 단순히 어린이와 연대할 뿐만이 아니라, 어린이를 새로운 인간의 모범으로 제시하였다. 어디 그뿐인가? 예수는 어린이를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였다(마 18:5).

그렇다면 예수는 스스로 어린이와 같은 자, 아니 어린이가 되었다고 우리는 판단하여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하나님 나라의 새로움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이를 가져온 예수가 다른 교사들, 지도자들과 다른 점이 도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그리고 다른 이들과 비교할 때, 예수의 독특함과 새로움 혹은 진정한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단지 그의 가르침에만 있지 않고, 무엇보다도 그의 삶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삶은 바로 그의 말의 표현이 아니었으며, 그의 말은 그의 인격의 표현이 아니었는가? 예수는 언행일치(言行一致)의 교사요 그 표본이었다. 그는 올바른 가르침보다 올바른 실천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예수는 당대의 지도자들, 교사들에 대한 자신의 차별성을 부각함으로써, 바로 이 점을 그의 제자들에게 분명히 각인하여 주었다: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가 말하는 바는 행하고, 저희가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마 23:2-3).

그렇다면 우리는 어린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특징들을 예수에게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어린이들의 특징이란 것은 무엇인가? 앞장에서 이미 지적했다시피, 많은 사람들은 순진함과 소박함, 노여움을 오래 품지 않는 점, 자기 생각과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점, 무죄성, 겸손, 죄없는 순수성, 고민없는 순진성, 통일성(평온성), 정직성, 심원성(深遠性) 등을 어린이의 속성들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알트(F. Alt)는 “지식욕과 개방성, 상상력과 실험욕, 즉흥성과 유연성과 같은 것은 성장하는 어린이들의 특징인데, 우리는 이것들을 예수의 삶에서 본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린이를 통하여 예수를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예수를 통하여 어린이를 보아야 할 것인가? 이것은 물론 단순한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예수가 분명히 어린이를 인류의 모범으로 삼았고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였다면, 우리는 보편적인 어린이들의 모습에게서 예수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어린이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시대와 환경, 문화에 따라서 다양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어린이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보편적인 어린이 상을 우리가 집약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설령 모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만인이 확신하고 공유할 수 있는 어린이 상이 집약되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예수 자신에게 바로 투영(投影)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이겠는가? 칼 바르트가 일찍이 비판한 대로, 이런 시도는 또 하나의 ‘자연신학’(自然神學)을 불러들일 위험성을 다분하게 갖지 않겠는가? 우리는 비단 특정한 어린이나 어린이 상을 일반화하고 우상화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우상적인 예수상 혹은 예수에 대한 고착된 이미지를 만들어 강요하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성서의 증언에 충실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가 성서를 인용하여 결국에는 우리 자신의 말을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식의 한계성과 오류에도 불구하고 성서가 우리를 압도하면서 친히 우리에게 말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의 내용이 우리 시대의 경험과 언어, 표상과 상징 등을 통하여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 더욱 생생하고 풍부하게 다가올 수 있도록 하는 일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요구되고 있다고 믿는다. 이런 점을 유의하면서, 나는 특히 다음과 같은 특징들 가운데서 어린이다운 예수, ‘어린이 예수’를 보려고 한다.

 

(1)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

 

어린이의 가장 분명한 심리적, 정신적 특징은 부모에 대한 원초적이고도 절대적인 신뢰일 것이다. 이 절대적 신뢰를 우리는 바로 예수에게서 분명히 본다. “예수에 의하면 종교는 결코 업적이 아니라 신뢰다. 그가 말하고 행동한 것은 모두가 거듭해서 사랑하는 아버지에 대한 어린이와 같은 신뢰다.”라는 알트(F. Alt)의 주장은 예수의 자의식(自意識)을 정확히 묘사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예수의 천진스러운 신뢰는 무엇보다도 “염려하지 말라”(마 6:25-34, 눅 12:22-31)는 교훈 안에서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자비로우신 하늘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통한 일상적인 염려의 극복은 여기서도 ‘지극히 작은 것’에 대한 깨달음과 연결되어 있다. 인간 중에서 ‘가장 작은 자’(소자)인 어린이를 용납하시는 하나님은 세상사에서 ‘가장 작은 것’을 위해서도 배려하신다. 아니 인간은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작은 것’ 때문에 염려하지 말고, ‘가장 큰 것’(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을 먼저 구하면서 살아야 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면서 단 한순간이라도 자신의 일을 염려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요 14:27)을 가지고 있었다. 이 평안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전적인 신뢰에 근거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다”(요 14:10-11, 20)고 말하는 예수는 제자들에게도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16-27)고 권면한다. 예수는 어린이와 같은 믿음, 즉 천진스러운 절대적 신뢰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예수의 천진스러운 신뢰는 특히 ‘나의 아버지’와 ‘아빠’라는 그의 어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례미아스(J. Jeremias)는 말한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고대 팔레스틴 유대교의 문헌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새로운 사실이다. 그리고 헬라적 유대교의 범위 안에서 하나님이 그리스의 영향 아래 부분적으로나마 ‘아버지’로 불리었다는 증거는 있다. 하지만 유대교의 모든 기도문헌에서 하나님이 ‘아빠’와 비슷한 칭호로 불린 사실은 분명히 없다. 유대교의 기도문헌에서 하나님을 ‘아빠’로 부른 그 어떠한 증거도 없는 반면에, 예수는 -마가복음 15장 34절 병행절을 제외하고서는- 하나님을 항상 그렇게 불렀다. 이것은 완전히 예수의 원래적인 음성(ipsissima vox)의 분명한 표시다. ‘아빠’는 그 어원상 생각없이 나오는 순수한 어린이 언어이다...

하나님을 이런 가족적인 언어로 부르는 것은 유대교인들의 정서 상으로는 무례한 것이었고, 그래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예수가 이런 일을 감행했다는 사실은 새롭고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것이었다. 어린이가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듯이 그렇게 순진하게, 그렇게 마음 깊이로부터, 그렇게 평안하게, 예수는 하나님을 불렀다. 예수가 하나님을 부르면서 사용한 ‘아빠’는 그의 하나님 관계의 핵심을 드러낸다.

 

일상적인 유아언어에서 취해 온 언어인 ‘아빠’라는 말로 말하고 기도함으로써,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배타적인 관계나 그의 권위만을 드러내지 않고, 이 땅의 어린이들이 그들의 부모들과 맺는 친밀한 관계의 경험을 그의 아버지 관계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로써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어린이’와 같이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예수는 어린이처럼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하였다(눅 23:46). 예수는 전적으로 하나님과 일치하였다(요 10:30, 17:10 등).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였고(롬 5:19, 빌 2:8, 히 5:7-9, 12:2) 하나님만을 신뢰하였으며, 하나님의 뜻(나라)에 따라 살았다. 예수는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였으며(마 26:39/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철저히 하나님을 신뢰하였다(눅 23:46/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의 삶과 죽음 전체는 바로 “어린이와 같이 천진스럽고 절대적이다”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원초적이고도 절대적인 신뢰감에 의해 지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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