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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예은자들의 영성 - 김이곤

첨부 1


예언자(預言者)들의 영성(靈性)

 

김이곤 박사 / 한신대 신학대학원장

 

도입(導入)

 

예언자의 영성을 말하려고 할 때 우리는 가장 먼저, 성서가 말하는 "예언자" 또는 "선지자"(*지금까지 개역성서 전통은 "예언자"라는 말을 쓰지 않고 "선지자"라는 말을 써왔다)라는 말의 의미를 규명, 정의하는 일을 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언자"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 말의 의미는 성서가 보는 시각과는 많이 다른 시각에서 흔히들 보아왔고 또 이해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한 잘못된 시각은 우선 "예언자"라는 한자(漢字) -豫言者- 와 영어 "pro-phet"이라는 말에 대한 선입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예언자"라고 할 때의 한자(漢字) "豫"라는 글자는 시간적 개념의 "미리 내다보는 [豫見] 행위를 생각하게 한다. "선견자"라고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즉 "선견자"(先見者)라고 할 때의 한자(漢字) "先"도 시간적 앞 "시간적 미리"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리하여, "선견자"는 시간적 미래를 "미리" 또는 "앞질러" 내다보는 행위를 하는 자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 되었다. 영어 pro-phet의 pro-는 상당 부분 "시간적 앞" "미리"라는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이 영어 prophet은 또한 희랍어 ???-?????에서 온 말로서 이 희랍어 ???가 또한 "시간적 의미의 <미리> <앞에> 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희랍어 "프로"(???-)는 시간적 의미도 있지만, 그 보다는 "장소적 의미의 <앞> 이라는 의미"를 더 많이 가지고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예언자는 본래 "시간적 의미의 <앞>을 내다보고 말을 하는 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신(神) 앞에서" 말하는 자라는 의미를 더 많이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희랍의 예언자들이 과연 그러한 성격을 가졌는가 하는 문제는 여기서는 논외의 문제로 하고, 놀라운 점은, 구약의 이스라엘 예언자들은 철저히 시간적 의미의 "앞"을 말하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장소적 의미의" 앞에서 말하는 자들, 즉,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委託) 받아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는 자들"이었다는 점이다.

 

만일 우리가 구약의 예언자들을 시간적 의미의 앞을 내다보고 그 시간적 미래를 말하는 자들이라고 본다면, 우리는 이 역사를 "고정된 숙명적(宿命的) 그라프(graph:圖表)"로 보는 것이 될 것이다. 즉 역사는 태초부터 종말까지(알파로부터 오메가까지) 모든 운명이 결정되어 마치 "그라프"처럼 확정적으로 짜여져 있어서 신(神)의 특별한 은사를 받은 자만이, 예컨대, 예언자나, 점성가나, 역학자나, 특별히 도(道)를 닦은 자만이 그 비밀 "그라프"를 들여다 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 것은 성서의 문맥에서 본다면 최대의 신성모독이다. 성서는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성서에 의하면, 이 온 우주와 그 역사는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선(善)하신 뜻에 의하여 창조되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쉬지 않고 창조활동을 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한 5:17)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이 말씀은 예수님의 구원활동의 "신적 특권"(神的特權)을 강조하는 말씀이지만, 이 말씀의 궁극적 의미는 창조 이후 지금까지 하나님은 쉬시지 않고 일하고 계신다는 것과 하나님에게는 휴식의 밤이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편121편 시인도 말씀하기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신다"(시편 121:4)라고 하였다.

 

성서의 증언은 일관되게 이 사실을 증언해 왔다. 창세 이래 하나님의 인류구원 활동은 출애굽 역사, 광야인도 역사, 가나안 입주 역사, 왕수립의 역사, 앗수르와 바벨론 그리고 페르샤와 희랍-로마를 이용하여 이스라엘을 연단(鍊鍛)시키신 역사, 아들 예수를 보내신 역사, 성령을 보내신 역사 등등을 통하여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성서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역사가 이미 창세 때부터 다 그 운명이 결정되어 있었고 단지 우리가 그것을 모를 뿐이라는 것, 즉 신통(神通)한 자만이 알 수 있을 따름이라는 주장은 성서의 근본 가르침과는 어긋난다고 하겠다.

 

실로, 역사는 운명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의 종을 부르셔서 일을 맡기시고, 구원활동을 아직도 하고 계신다는 것, 성령께서는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지금도,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시고 계신다는 것(로마 8:26), 이것이 성서의 주장이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예언자"는 시대 시대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외치도록 부름을 받은 자에 불과할 뿐이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입이 되어(출애굽기 4:16 ;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다." 모세를 대행하는 아론의 경우 참조)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代言]하는 자일뿐이다. 그들은 결코 운명론자이거나, 점술가이거나, 역술가(易術家)이거나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따라서 "예언자"라는 말의 한자(漢字)는 豫言者라기보다는 預言者라고 하는 것이 성서적 개념에 더 부합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영(靈)을 받아 활동하였다는 것도 바로 그것을 말해 준다. 즉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사역자(使役者)였다. 예언자의 영성(靈性)은 바로 이러한 문맥 안에서 논하여야 할 것이다.

 

1. 영(靈)의 사람인 예언자(預言者)

 

예언자들은, 본래, "영(靈)의 사람"이었다. 영(靈)이 임할 때, 영이 임한 그 사람은 예언을 하였다. 이것은 구약 예언 활동의 초기 모습을 보여 주는 예(例)이다. 모세 시대, 야훼의 영(靈)이 임하였던 70인 장로들이 갑자기 그 영이 임하는 동안만은 "예언"을 하였다(민11:25). 그러나, 이 민수기 11장 25절이 민수기 11장의 문맥에서는 매우 부자연스러운 상태에 있어서 그것을 "첨가문"(an addition)이라고 의심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70인 장로에게 영이 임한 이러한 예언현상을 모세 시대의 현상으로까지 소급해 볼 수 있는 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이러한 현상에 대한 역사적 추적을 우리는 적어도 사무엘과 사울 시대 만큼 소급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사무엘 상 10장 9절에서 12절까지의 문맥에서 보면, 영의 임재가 "예언"을 유발하는 직접적 동기가 되는 것을 보여 준다. 즉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사울이 그 예언자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라"(삼상 10:10)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울이 성령에게 사로잡히는 상황은 후일 예레미야 예언자와 에스겔 예언자에게 나타난 성령 임재의 현상과 특히 예언자 요엘(욜 2:28-32)과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 강림 현상과는 불가분리적인 전승사적 연결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즉 성령의 임재와 예언현상 사이의 불가분리적 관계는 구약이 말하는 "예언"이란 그 어떤 점술적/점성술적(占術的/占星術的) 기능이나 역술적(易術的) 기능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부여(使命附與)의 기능에 속한 것임을 보여 준다. 이러한 관찰의 근거는 구약 역사에 나타난 매우 특이한 종교적/정치적 한 현상인 "사사"(士師; Judge; ???=shophet) 출현의 현상으로부터 발견할 수 있다. 사사(士師)의 출현은 전적으로 영(성령=루앗하 ???, 프뉴마??????)의 임재와 더불어서만 가능하였다. "야훼의 영(루앗하)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라는 사사 출현 예고문이 그러한 현실을 웅변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사사는 전적으로 영의 이끌림을 받아 그 영의 힘으로 "구원자"(모쉬아; ?????; Deliverer)의 기능을 수행한다.

 

주목할만한 점은, 영(靈)이 사사(士師)에게 임하는 현상과 예언자에게 임하는 현상 사이에는 그 형식과 그 성격에 있어서 상당한 일치점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 첫째로는, 영이 임하실 때, 사사나 예언자는 모두 그 영의 불가항력적 힘에 사로잡혀서 그 영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다는 그들의 그 수동성(受動性)을 지적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이 수동적이라는 것은 그들이 기계화되어 로봇(robot)화 하였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은 그 영의 의지(意志)에 전적으로 복종한다. 사사도 예언자도 모두 하나님의 종이요 심부름꾼일 뿐이다. 그 둘째는, 영의 임재를 통하여 그들이 받은 과제는 전적으로 "구원사역(救援使役)"이었다는 점이다. 즉 사사(士師)들이 영의 임재와 더불어 받은 과제는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이었다. 마찬가지로, 예언자들이 영의 임재와 더불어 받은 과제도 또한 구원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바벨론 포로기 이전의 심판 예언들도 궁극적으로는 "심판위협"(threat)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예언자의 기본 특성은 결코 점성술적이거나, 역술적(易術的)이거나 한 것은 결코 아니라 하겠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따라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특수한 사명을 수행하는 자일뿐이라고 하겠다. 사사(士師)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그러나, 사사(士師)의 경우와는 달리, 예언자는 백성의 통치(統治)나 해방전쟁(解放戰爭)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말씀선포(宣布)"를 그 사명으로 받았다. 즉 예언자는 전적으로 말씀에 종속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언자를 "영"(靈)의 사람이요 동시에 "말씀"의 사람이라고 정의(定義)하는 것이다. 예언자는 "말씀의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말씀을 선포(宣布)하는 자, 즉 신탁선포자(神託宣布者)가 예언자이다.

 

그리하여, "영이 ~에게 임하였다"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예언 운동이 본격화하기 시작하던 초기, 즉 엘리야 시대의 예언활동을 설명할 때는 "말씀이 ~에게 임하였다"라는 표현으로 대치되었다. 이것은 신명기적 역사가의 신학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긴 하지만, 영(靈)을 말씀[言]으로 대치하는 매우 놀라운 신학적 전이(轉移)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영(靈)은 말씀이고 말씀은 또한 영(靈)이다. 이것은 또한 야훼 하나님은 말씀으로만 자신을 계시(啓示)하시고 그러므로 말씀은 또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유일한 가시적 (可視的) 계시(啓示)가 된다는 말이다. 즉 "말씀"은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하나님 자신"이시다!! 예언자는 이 가시적(可視的) 하나님이신 말씀을 지니고 다니며 그 말씀을 전하며 선포하는 자이다.

 

이런 신학적 전이(轉移)는 기원전 8세기의 문학(文學) 예언자들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에 이르러서는 "말씀이 ~에게 임하셨다"는 표현이 "야훼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 ?? ;코. 아말. 야훼)라는 표현으로 문학적/신학적 전이(轉移)를 하였던 것이다. 실로 예언자는 철저히 "말씀의 종"이었다. 만일 "하나님=영=말씀"이라는 도식이 가능하다면, 예언자는 하나님의 사람, 영의 사람, 그리고 말씀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언자는 결코 점술가이거나 역술가(易術家)는 아니다. 그는 "위탁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대변인(代辯人)"이며 그러므로 "預言者"이지 "豫言者"는 아니다. foreteller, forthteller, fortuneteller가 아니라 God's spokesman일 뿐이다.

 

2. "말씀'의 절대주권을 신앙하는 영성

 

위에서 누누이 강조한 바와 같이, 예언자의 대표적 영성(靈性)은 "말씀의 절대 주권"을 신앙하는 예언자적 활동의 특성을 통하여 인식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의 진정성은 이스라엘 예언자의 비조(鼻祖)라고 할 수 있는 "엘리야"의 예언자적 삶에 관한 보도를 통하여 논의의 여지없는 확실한 증거를 확보할 수 있다.

 

(1) "말씀"의 행로(行路)대로 움직이는 자, 예언자

 

열왕기상 17장-19장, 21장(왕하 1장)은 엘리야의 행로가 전혀 전적으로 말씀의 행로를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열왕기상 17장의 경우 특히, "저가 야훼의 말씀과 같이하여" "야훼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엘리야의 입에 있는 야훼의 말씀이 진실하다!"라는 말들의 고리에 확고하게 연결되어 모든 사건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것은 모든 예언자들이 걸어 간 길의 전형(典型)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특히, 엘리야의 급작스런 출몰(出沒; 왕상 18:12)은 이 사실을 극화(劇化)한 대표적인 문학적 산물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할 곳에는 언제나 거기에 아무런 예고없이 엘리야가 급출현한다(왕상 21장에 나타나는 "나봇의 포도원 탈취 사건" 때의 엘리야 출현은 그 좋은 예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할 곳에 만일 예언자가 거기 있는 데도 말씀 선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곧 예언자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고 하겠다. 이 말은 역(逆)으로 말하자면, 예언자가 있는 곳에는 또한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한다는 말도 된다. 더욱이, 예언자가 말씀을 선포한 다음에 그 선포대로 이루어진 모든 일들은 모두 <말씀의 성취>의 사건으로만 이해하였다는 사실은 "예언자"의 인격과 그의 삶 전부가 하나님께서 위임한 말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예언자의 영(靈)은 그러므로 예언자에게 위임된 그 "말씀"이었다.

 

(2) "말씀"안에서만 신(神)의 계시(啓示)를 보는 자, 예언자

 

예언자의 기본 특징은 "말씀" 안에서만 유일한 신(神) 계시(啓示)를 보는 자이다. 이것이 예언자적 영성의 핵심이다. 이 말의 의미는 말씀을 통하지 않는 신 계시(啓示)의 위험을 경고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것에 대한 가장 분명한 천명은 열왕기상 19장의 호렙산 신 계시(啓示)의 사건에 대한 보도에서 들을 수 있다.

 

열왕기 상 19장은 이세벨의 살기(殺氣) 돋힌 보복 반격을 피하여 하나님의 산인 호렙산으로 도망친 엘리야가 기진맥진 기사회생(起死回生)하여 호렙산의 그 유명한 동굴, 아마도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의 대 지도자 모세가 하나님의 현현(顯現:theophany)을 경험하였었던 그 유서 깊은 동굴, 그 동굴 속으로 숨어들어 좌절과 절망의 상태에 빠져 있었을 때, 야훼 하나님께서 그 엘리야를 동굴 밖으로 불러내어 자신의 뜻을 계시(啓示)하셨을 때의 상황을 자세하게 그리고 매우 분명한 "레토릭"(rhetoric)으로 보도, 증언하고 있는 본문이다.

 

야훼 하나님은 동굴 속에 칩거(蟄居)하고 있는 엘리야에게 그 동굴 밖으로 나올 것을 명령하신다. 그 다음 ,이스라엘의 미래에 관한 구원계시(救援啓示)를 하시기 위하여 엘리야 앞으로 "지나가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 상황은 그 옛날 모세가 그 같은 동일 장소에서 계시 받던 상황과 매우 일치한다. 두 곳 모두에서 야훼 하나님은 인간이 그 얼굴을 포착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지나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모세의 경우, "하나님 의 얼굴을 보고는 살자가 없으므로"(출 33:21) 하나님의 등만 보이셨다고 되어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등"은 주석가들의 의견들을 일별하면, 역사 안에 자신을 계시(啓示)하시는 존재방식 또는 행동방식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본체 또는 그의 외형, 즉 그의 얼굴과는 구분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엘리야의 경우에서도, 하나님의 계시(啓示)는 하나님의 가시화(可視化)를 통하여서는 결단코 이루어지지 않고 단지 "말씀'을 통한 계시(啓示)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동굴 밖, 야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엘리야 앞으로 신속하게 (그 얼굴이 포착되지 않게) 지나가시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啓示)하셨는데, 여기에서는 세 가지의 대표적인 종교현상이 전개되었다. 즉(1)크고 강한 바람(루앗하)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현상,(2)지진 현상, 그리고(3)불의 현상이 엘리야 앞에 전개되었다.

 

"바람"은 히브리어로는 "루앗하"(???)인데, 이 "루앗하"는 일반적으로 "바람"을 의미하지만 많은 경우 "영(靈)"이라고 번역된다. 여기서는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거대한 폭풍, 또는 태풍과 같은 자연 현상을 가리키지만, 현대의 잘못된 성령운동의 대 폐해를 지적하는 유비적 해석도 충분히 가능하게 하는 "열광적 성령운동"(바알주의적 열광주의 종교현상; 왕상 18:26-29참조)을 비유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광적 종교현상 속에는 "야훼"께서 " 계시지 않으셨다"(히브리어의 절대 부정, "로-" ??)!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啓示) 가 아니었다!! "바람" 가운데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셨다.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광적(狂的) 종교현상(바알주의적 "엑스타시"[ecstasy])속에는 하나님도 계시지 않았고, 하나님의 계시(啓示)도 있지 않았다. 이 증언은 오늘날의 "성령운동이 지닌 열광적 성격"에 대한 신학적 경고와 비판의 역할을 한다고 하겠다

 

"지진"은 히브리어로는 "라아쉬"(???)인데, 땅 지반의 흔들림을 가리키는 불가항력적인 자연의 대 파괴, 대 혼란, 거대한 소음과 무질서의 파국을 의미한다. 이것은 신(神)의 분노에 의한 파괴, 산채로 음부에 떨어지는 대 파멸사건(민 16:25-35)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지진"은 신(神)의 진노가 임하는 상황을 묘사할 때 자주 사용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도 지진이 일어난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신의 심판 때나 일어날 만한 그러한 대 자연의 진동(震動) 현상 속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고 신의 계시(啓示)도 들어 있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불"은 히브리어로는 "에쉬"(??)인데, 이 "불"은 호렙산 불꽃 떨기 신(神) 계시(啓示) 때,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야훼; Tetragrammaton)을 계시하는 계시(啓示)의 수단으로써 사용하셨던 것이다. 또한 동시에, 갈멜산에서 예언자 엘리야가 바알 예언자들과 더불어 야훼와 바알 중 누가 참 신(神)이냐 하는 것을 판가름하는 대(大) 결전의 때에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여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가 참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시려고 엘리야의 제단 위에 쏟아 내린 "불"도 바로 이 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여기서는 그 불 속에도!! 야훼 하나님께서는 계시지 않았고 하나님의 계시(啓示)도 거기엔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증언인가? "불"도 아니라면! 즉 "불"도 하나님이 거기 계시는 진정한 "계시"(啓示)의 수단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이 증언이 말하려는 성서의 의도는 과연 무엇인가?

 

성서의 대답은 이것이다: 불 후(後)의 세미(細微)한 소리(??? ???? ???; 콜. 떠마마. 닥카, 왕상 19:12) 속에 하나님께서 현존하시고 계시(啓示)활동을 하셨다.

 

"세미한 소리"란 무엇인가? "소리"도 자연현상의 일종이 아닌가? 특히, "소리"(ql)를 신(神)의 음성으로 믿는 가나안 종교의 영향이 여기에 작용하였다면, "폭풍의 신"을 신앙하는 가나안의 종교에서처럼, 하나님의 계시(啓示)도 또한 폭풍, 천둥, 번개의 자연현상을 통하여 계시(啓示)되신다는 말인가? 그러나, "소리"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콜"(???)의 신학적 의미에 대한 본인의 연구에 의하면, 히브리어 "콜"은 구약에서는 대부분 "음성" 또는 "말씀"을 의미하고 이 히브리어 "콜"의 복수형, "콜롯"(?????)은 "뇌성" "천둥" "번개"를 의미하였다(특히 출애굽기 연구를 통하여; 김이곤, 『구약성서의 고난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989, pp.472-492 참조).

 

말하자면, 여기서 말하는 "세미한 소리"는 "세미한 음성으로서, 말씀하시는 분의 그 말씀"을 의미하였다. 즉 "말씀 안에만! 하나님이 계시고, 말씀을 통해서만 진정한 하나님의 계시(啓示)가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강한 바람도 아니(??)!, 지진도 아니(??)!, 불도 아니(??)!, 오직 "세미한 말씀" 만이 참 계시(啓示)의 자리이며,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이다. 엘리야는 이 사실을 증언한 첫 번째 예언자이며, 이것은 신명기 신학의 중심사상이기도 하다. 예언자의 영성(靈性)은 말씀의 영성일 뿐이다. 말씀만을 증언하고 말씀 안에서만 살 따름이다. 그 어떠한 화려하고 장엄한 초자연적 종교현상도 하나님의 계시(啓示)의 장소는 아니며, 하나님의 현존의 장소도 아니다. 단지,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 이스라엘 예언자의 기본 주장이다. 이것이 예언자의 영성(靈性)이다.

 

3. 예언자적 "말씀영성"의 핵심 내용

 

이스라엘 예언자들이 생사(生死)를 걸고 강조하는 하나님의 그 "말씀"의 핵심 내용은 무엇일까? 예언자들이 전한 신언(神言)은 매우 다양한 문학형식을 빌려서 표현되었고 또 매우 다양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선포되었다. 그러므로, 그 내용을 요약하여 정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말씀의 세부적, 그리고 그 시대적 구체성은 비록 통합하여 체계화할 수는 없으나, 그러나, 그 구체성과 그 시대성을 초월하는 그 말씀영성의 기본 핵심은 말할 수 있다. 그 말씀영성의 핵심은 결코 미래 운명의 행, 불행의 내용은 결단코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우리 인간이 실천하여야 할 행동규범 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언자들의 말씀영성을 이해하기 위하여, 예언자들의 신탁(信託)들이 지닌 핵심사상을 발췌해 내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가장 확실하게 그리고 가장 분명하게 도와주는 곳은 분명, 기원전 8세기의 예언자들의 메시지에서부터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원전 8세기의 예언자들의 메시지가 이스라엘 정신사(精神史)를 대변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기원전 8세기의 예언사상을 가장 분명하게 요약 정리한 곳은 역시 미가서 6장 6절로부터 8절까지이다. 기원전 8세기의 끝에서 미가는 그와 동일 세기의 선배 예언자들인 아모스, 호세아, 그리고 이사야(사1-39)의 중심 메세지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야훼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일년된 송아지 변제물을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NO!)

야훼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NO!)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NO!)

사람아, 주께서 선(善)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야훼께서 내게 요구하시는 것이 오직 (1)공의를 행하며, (2)인자(헷세드; ???)를 사랑하며, (3)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아니냐? (YES!)

 

예언자들의 말씀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영성(靈性)은 위에서 미가가 정리한 세가지의 영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공의(公義)의 영성: 공의로운 판단에 근거한 삶을 사는 것이 공의의 영성이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바의 "공의"는 결코 시비(是非)를 정확히 가려내는 행위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의 이야기는 이 사실을 웅변적으로 역설(逆說)하고 있다. 다말은 유다 가문을 일으키기 위하여 가나안 신전 여인(커데샤;????)으로 변장하고 시아버지 유다를 창녀처럼 유혹하여 유다 가문의 후사를 임신, 출산한 후 그 아들 "베레스"로 하여금 유다 가문을 일으키게 하고 또 감히 그로 하여금 후일 다윗 왕조와 영원한 메시아 예수를 탄생한 조상이 되게 하였다 (창 38:29; 마 1:3 cf. 눅 3:33).

 

놀라운 것은, 창세기 기자가 유다의 대표적 조상인 유다의 입을 빌려 다말의 행위를 "의"(義; 체다카; ????)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미가 예언자가 말하는 "공의"(미슈파트; ????)와 유다가 말하는 "의"(義)가 동일한 개념은 아니다. 그러나, 마가에 의해서 발췌된 아모스의 "공의"(미슈파트)는 아모스 5장 24절에서 "의[정의]"(체다카)와 정황이 "동의평행"(同意平行)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이 두 이념언어를 여기서는 동질의 개념으로 이해하여도 무방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예언자가 지향하는 가장 첫째 되는 영성은 "구원을 목표하고 도모하는 공의 또는 정의"의 추구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실로, 정의 없는 영성을 말하는 것은 넌쎈스라고 하겠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정의 또는 공의는 구원을 목표한다는 것을 반드시 먼저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2)인자(仁慈; 헷세드; ???)는 계약개념이다, 특히 이 용어는 호세아 예언자가 신학화한 전문 용어로서 계약의 맥락 안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헷세드"는 단순히 "자비" "사랑" "인휼" 등의 의미로만 이해될 수 없다. 이 말은 오히려, "계약적 신의"(信義)를 바탕으로 한 "인지, 사랑, 자비"의 의미를 가진다. 이웃을 절대적 신의(信義)를 가지고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라는 것이다. 결코 배신하지 않고 끝까지 신의를 지켜 사랑하는 것 즉 "헷세드"를 사랑하고 실천하는 것이 또한 예언자들이 추구한 영성이었다. 일시적 사랑이 아니라 변함없는 영속적 사랑, 일시적 자비가 아닌 중단되지 않는 지속적 자비를 추구하는 것이 예언자의 영성이었다. 예언자 호세아가 모범을 보여 주었듯이, 끝없이 배신하는 음녀도 끝까지 신의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여 그 사랑을 기어이 완성하는 그런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 예언자가 추구하는 영성이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사랑이 바로 이러한 사랑이었다고 하겠다.

 

(3)겸손한 임마누엘의 믿음은 예언자의 중심적 외침이었다. 임마누엘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나와/우리와 함께 해 주신다는 믿음"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어떠한 힘의 논리에도 굴하지 않고 그 어떠한 것도 두려워하는 일없이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신앙을 가리킨다. 칼과 창, 군마와 군병, 그 어떠한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힘도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삶의 유일한 지표(指標)로 삼고 자신의 생(生)을 살아가는 신앙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앙은 겸손을 동반한다. 왜냐하면, 이 신앙의 세계에서는 의지의 대상을 결코 자신 안에서 찾지는 않기 때문이다.

 

도출(導出)

 

예언자의 영성은 결코 운명론적, 결정론적 영성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예언자들은 미래의 비밀을 미리 알아내려고 하지는 않는다. 예언자들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현재적으로 시립(侍立)하여 서서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받아 전달하여 미래를 새로운 구원(救援)으로 창조하려고 쉼없이 노력하는 자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영성은 운명론적이거나 도식적이거나 하여 교조적으로 굳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들은 정의, 사랑(인애), 임마누엘 신앙을 영성생활의 최선 최대의 기초라고 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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