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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현대 한,일 무교회의 특징 - 김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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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일 무교회의 특징

 

김영남(연구소 비상임연구원)

 

Ⅰ. 서 론

 

동아시아에서 성립한 기독교회 가운데 한국은 교세가 가장 크게 늘고 있는 나라 중 하나이다. 이에 반해, 동아시아에서 기독교의 교세가 가장 약하다고 일컬어지고 있는 나라가 일본이다. 동아시아의 이웃나라인 양국의 현재의 기독교 포교 상황은 극단의 길을 걷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까닭으로 한일의 기독교를 둘러싼 비교 교류를 생각할 때, 현재의 연구 중심은 아무래도 양자의 차이에 관심이 가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반면에 기독교를 둘러싸고 양국에 깊은 교류가 있고, 특히 일본에서 한국에 영향을 준 예도 있다. '무교회'가 바로 그 드문 예이다.

 

우치무라(內村鑑三)는 무교회를 "교회가 없는 자의 교회……집이 없는 자의 합숙소"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일본 제자는 무교회를 "우치무라에 의해 창시된 복음적 기독교의 일본적 전개이고, 이미 1세기 가깝게 존재하는 신앙의 집단으로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독자적인 지반(地盤)을 차지한다"라고 그 위상을 부여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적 전개'라고 정의되는 무교회사상이 일본제국의 지배에 의해 조국의 자유?평화?재산?인권까지 수탈된 식민지시대의 근대조선에, 그것도 한 사람의 민족주의자인 김교신에 의해 시작되어 그 영향이 현재의 한국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일본의 무교회가 기독교와 일본적 상황이라고 하는 만남에서 생겨났다고 한다면, 한국의 무교회는 기독교와 일본의 무교회와 한국적 상황이라고 하는 삼자의 만남에서 생겨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 생겨난 기독교사상이긴 하지만 동아시아라고 하는 문화권에 있으면서도 다른 문화적 토양을 갖는 한국에서는 또 다른 정착이나 성장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된다. 한국 무교회는 기독교와 동아시아 문화와의 만남이라고 하는 면에서 일본 무교회와 공통성을 지니지만, 기독교를 둘러싼 한일의 관계나 역사?문화의 차이라고 하는 면에서는 서로 입장을 달리하고 있다. 이처럼 기독교를 둘러싼 다양한 만남의 상황을 의식하면서 한국과 일본 양국 무교회의 사상이 어떻게 다른가를 고찰하는 것이 본 소론의 과제이다. 이를 위해 한국과 일본의 무교회 신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지를 중심으로 현대의 양국 무교회 신자들에게 놓여져 있는 상황이나 자기인식에 대해서 비교 분석하고자 한다. 다만, 신앙이나 종교적 요소와 같은 심리적 측면을 객관적으로 측정하기에는 설문분석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면접(interview research)과 참여관찰(field research)도 병행해서 분석하고자 한다.

 

본 연구에 사용된 설문지는 1970년대 일본 무교회를 연구한 카를로의〈내촌감삼과 무교회〉논문에서 사용한 설문지를 참조하면서, 한국의 상황에 맞게 재편집한 것이다. 설문조사는 1997년 12월 31일부터 행해진 3박 4일간의 동계 한국 무교회 전국성서강습회에 함께 참가해서 한국 무교회 신자들의 사상과 가치관을 파악하고 분위기를 체험하면서, 모임 인도자들의 협조를 얻어 실시했다. 1997년 동계 전국성서강습회에 참가한 사람은 아이들을 제외하고 60인이었고, 그 가운데 40인이 앙케이트에 응답해 주었다. 또한 집회에 직접 참가하거나 우편으로 배포한 앙케이트에서 26부가 회수되었다. 이렇게 해서 얻은 도합 66부의 회답을 중심으로, 필요에 따라 면접에 의한 발언과 필자의 참여관찰을 혼합해서 한국 무교회의 현상파악을 시도했다. 한국 무교회는 실체면에서는 미약하고, 무교회 특성상 외적으로 나타난 통계도 없기 때문에, 무교회 신앙을 소유한 사람을 파악하는 데에는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한국 무교회의 공식적인 집회인 전국성서강습회와 각 지역의 일요집회에 직접 혹은 우편으로 4차에 걸쳐서 앙케이트의 협력을 구했지만, 공식적 집회 밖에 있는 무교회 신자들을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회답수가 66부밖에 되지 않았다. 또한, 필자가 참여한 공식적 집회에서도 회답대상자는 그 이외에도 있었지만, 무교회 신앙을 계량화할 수 없다고 하는 이유로 앙케이트 회답을 회피했다.

 

이와 대비하여 일본 무교회 신자에게 발송한 설문지는 한국 무교회 신자들에게 사용했던 설문지를 일본 무교회에 맞게 재편집했기 때문에, 한국 무교회에 실시했던 앙케이트 항목보다 내용이 작다. 설문지의 배포는《일본기독교연감》(1998년판)에 나오는 일본 무교회의 전국 72개 집회 인도자에게 편지를 보내, 집회원들에게 소개를 부탁하는 방법과 아는 사람의 소개 등에 의해서 총 329부의 설문지를 배포했다. 그 가운데 223부가 도착되었고, 별도로 사망이나 주소불명으로 14부가 되돌아왔다.

 

이하에서는 도착한 설문응답을 기초로 다른 자료에 의해서 얻어진 지견(知見)을 병행하면서, 현대 한?일 무교회에 관해서 그 본연의 모습?특징?내포하고 있는 문제점?상호의 차이 등을 보다 일반적인 형태로 고찰하고자 한다.

 

Ⅱ. 무교회의 기본 성격

 

1. 종교개혁운동으로서의 무교회

 

무교회사상은 현재는 우치무라 이후 한국과 일본에 나타난 기독교운동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교회 신앙 내에서도 보여진 사고이지만, 보다 일반적으로는 오늘날의 기독교 신앙에도 나타나고 있고 2000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도 등장한 신앙의 어떤 경향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기독교 신앙을 철저히 인정하면서도 외형적인 형식이나 조직, 그리고 제도를 부정하는 주의는 종래부터 현재까지 기독교사 속에 고동치고 있기 때문이다. 무교회사상이란 이처럼 신앙에 대한 집중과 형식부정 운동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무교회 내부에서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세례?성찬의 의식을 남긴 것 때문에 종교개혁을 철저히 이루어내지 못했다고 보고, 이것을 극복하는 의미에서 우치무라의 무교회를 제2의 종교개혁으로서 위치시키고 있다. 일본 무교회의 나카자와(中澤洽樹)는 "무교회주의는 교회의 전통을 배척하고 종교개혁자들을 넘어서 원시기독교, 아니 예수 그리스도 자신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 형식이 고정되려고 할 때 끊임없이 그것을 타파하고 진정한 교회(에클레시아) 형성을 지향한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무교회가 지향하는 것은 신앙중심주의를 내건 종교적 개혁이고, 이른바 종교개혁자들까지 뛰어넘어 끊임없이 개혁하려고 하는 주체적인 개혁 정신이 무교회라고 할 수 있다.

 

설문 응답결과를 통해서 볼 때, 한일 무교회는 종교개혁적 성격을 강하게 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명혁은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원리로서 "오직 성경만, 오직 믿음만, 오직 은혜만, 오직 하나님께 영광, 만인 제사장주의"를 들고 있다.

 

이 종교개혁의 원리 다섯 가지에 비추어서, 현대 한국?일본무교회를 분석해 보면 무교회 자체의 특징과 유사하다.

 

첫째로, '성서중심주의'다. 그들은 오직 성서연구에 모든 관심을 기울인다. 이를 위해서는 어떤 조직이나 제도 등도 거부한다. 심지어 성서연구를 위해서 한 평생 자신의 모든 인생을 드리는 사람도 있다. 또한 설문 응답결과를 통해서 볼 때도, 한국?일본 무교회 신자들은 성서연구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높다.

 

둘째로, '은혜중심주의'이다. 1998년 4월 20일 송두용 승천기념집회에서, 무교회의 초기사상가인 송두용의 인생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다. 그들은 소감 발표를 통해서, 오늘의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설문응답 결과에서도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는 생활을 강조하고 있다.

 

셋째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모든 관심을 두고 있다. 신앙의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이 바로 무교회라고 할 수 있다. 무교회라고 하는 것은 유형의 교회가 아닌 무형의 교회, 참된 에클레시아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신뢰한다라고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넷째로, '하나님 중심주의'이다. 이 부분은 다른 네 가지 요소에 비해서 조금은 약할지 모르지만, 평신도로서 삶 속에서 신앙을 실천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데 그들은 인생의 목표를 두고 있다. 설문응답결과나 인터뷰를 통한 답변을 통해서 볼 때도 이러한 결과를 볼 수 있다.

 

다섯째로, '만인 제사장주의'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성직자를 배격하고, 오직 평신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서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한국 무교회의 어떤 일요집회에서는 그 집회 참가자 전원이 그 주 예배의 성서부분을 준비해 와서 서로 나누는 형태의 만인사제주의를 철저히 실현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신에 그들이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성직자를 완전히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 부분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면 탈교회주의로 갈 수 있다고 김명혁은 그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 한국 무교회는 김씨의 지적대로 만인사제주의에 따라 결국 '탈교회주의'라고도 할 수 있는 무교회주의 신앙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어떤 무교회 신자가 말하는 대로 "무교회는 작은 무리이지만 교회의 부정적인 부분에 계속해서 도전해서 정화시키는 노력, 여기에 무교회의 의의가 있다"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무교회의 한국기독교사적 의의는 종교개혁적 정신을 기초로 기성교회 비판과 신앙의 순화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배타주의적 교회비판은 오히려 무교회 자신이 하나의 섹트화할 가능성을 낳는다. 이것은 이미 일본 무교회 내부에서 츠가모토(塚本虎二)가 받았던 비판과도 통한다. 그러나 한국 무교회의 젊은 세대들의 인터뷰 결과에서는 교회에 대한 배타적인 견해보다는 무교회의 사명, 즉 올바른 신앙의 길을 유지해 가려고 하는 의지가 무엇보다도 강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교회 사람들은 종교개혁자들 가운데서도 칼뱅보다 루터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양자의 교회관의 차이에서 온다. "루터가 교회를 주관적으로 성도의 모임으로서 파악하는 것과 달리, 칼뱅은 교회를 성도의 모임인 동시에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으로서 파악해 성도의 모임이라고 하는 개념보다는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이라고 하는 개념이 선행한다." 루터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반발로서 교회를 주관적으로 파악했던 것에 비해, 칼뱅은 교회를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으로 파악함으로써 교회의 권위를 암시하고, 목사?교사?장로?집사의 조직이나 제도를 체계화했던 것이다. 또한 칼뱅이나 개혁주의 신앙 고백에서는 '만인사제주의'라고 하는 문구는 거의 없고, 그 대신에 목사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무교회사상의 종교개혁적 기반이 신앙고백이나 예배서를 작성하고 교회조직이나 제도를 정리한 칼뱅보다 가톨릭의 교권주의에 반대해서 개혁을 일으킨 루터 쪽에 두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일 것이다.

 

2. 조직

 

교회구조는 어떠해야만 하는가? 하는 논의는, 예수 이후의 기독교회에 남겨진 근본적 과제였다. 즉, 교회는 조직을 가져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조직은 어쩔 수 없는 필요악인가? 그로 인해 신앙이 얼마나 유지되고, 전도가 얼마나 행해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한국과 일본 무교회는 무교회사상 자체에서 오는 특징에 의해서 형태를 갖는 외적 조직에 대해서 강한 거부반응을 갖는다. 그러므로 양국 무교회는 유형화된 조직도 제도도 없다. 그러나 무교회의 이 같은 유형조직 거부주의에 대한 비판도 있다. 서정민은 우치무라의 유형의 조직거부에 대한 역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그(內村)는 제도와 조직을 반대했고, 많은 그의 추종자들도 그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어떠한 교회 전통의 권위나 성직의 역할마저도 부인했다. 이론적으로 볼 때 합당하고 순수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것을 주창하는 그들끼리의 집단화와 조직화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 안에서 특정인의 카리스마스적 권위와 그에 대한 복종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들 간의 반목과 분열은 무엇으로 극복하여야 하는가하는 점들이다." 서정민은 우치무라의 조직이나 제도반대와 교회전통의 권위나 성직을 부인한 것은 이상적이었어도, 현실적으로는 그들도 똑같이 집단화?조직화되어 특정인의 권위화나 분열 등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하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송길섭도 무교회주의가 그렇게 존중하는 성서도 교회와 수도원을 통해서 보존?전수되기 시작해 우리들의 손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고, 교회의 조직화가 없었다면 초대교회가 그 무서운 박해와 이단을 물리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봐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계속해서 그는 그 조직이 부패했을 때는 확실히 개혁을 통해서 갱신해 가야만 하지만, 그 부패가 싫다고 해서 그 조직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보다 큰 새로운 문제를 야기시킨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유형조직의 거부로 인해 가장 어려움이 발생하는 것은 아마도 목회, 즉 전도일 것이다. 김영한은 90년대 이후 성장의 둔화를 보이고 있는 한국교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내실있는 신자양성을 위한 양육프로그램, 케리그마(선포), 코이노니아(친교), 디다케(교육)와 디아코니아(봉사)가 필요시된다.……교회성장이란 단지 한 불신자를 회개시키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를 교회로 인도하여 교제에 참여케 하고 훈련시켜 교회의 지체가 되고 이웃과 사회를 향한 봉사에 참여케 하는 것이다. 영혼의 구원이라는 의미인 복음화에서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 이웃에 대한 봉사와 헌신이라는 의미인 제자화를 말한다. 이를 위하여 신자의 제자화 프로그램, 영성개발, 성서공부, 평신도 신학강좌가 필요하다. 교회가 사랑방 공동체의 역할을 회복하도록 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다가오는 고도의 후기 산업사회를 준비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요청된다." 그는 교회의 내실 있는 성장을 위해 신자양육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의 필요성을 강하게 호소하고 있다. 이 같은 대안은 조직이나 제도가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측면이 많다. 즉, 조직부재로는 선포까지는 간다고 해도, 목회 측면에서는 신장되지 않는 면이 있고 사람이 재생산되지 않으므로 노령화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즉, 설문분석에서도 보여진 것처럼, 한일 무교회는 젊은 계층보다 나이든 계층비율이 많다. 한국 무교회에 비해서 일본 무교회의 집회 쪽이 연령분포가 더욱 노령화되어 있다. 그래서, 일본 무교회에서는 전도에 대한 문제의식이 강조되어지고 있다. 다카하시(高橋三郞)는 무교회의 반성점으로서 "가정 전도, 젊은이 전도, 독립전도자의 부족"을 들고 있고, 그 중에서도 젊은이의 전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무교회에는 청년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지는 않는가? 무교회 가정의 신앙이 당대에 끝나버린 예는 너무나도 많다. 젊은이에 대한 전도에 대해서 무교회는 교회에 더욱 배워야 하지 않을까"라고. 또한 독립전도자의 부족에 대해서는 "우치무라 이후 '2대째'의 사람들이 계속해서 일어나 전도에 매진했던 그 불타는 열정이 지금은 있는가? 진정으로 은혜가 충만한 집회인도를 행할 수 있는 전도자의 양육훈련이 행해지고 있는가? 소명은 결여되어 있지 않는가? 신학이 너무나도 전문화되어 있고, 성서학의 뒤얽힘에 의해 복음의 진리가 묻혀버릴 염려도 있고, 전도자가 나오지 않으면 무교회는 소멸한다"라고 그는 전도의 소극성으로 초래될 장래의 일본 무교회에 대한 우려를 강하게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도의 문제나 이로 인한 집회노령화의 대안도 일본 무교회에서는 고려되어지고 있다. 집회를 해산하는 문제도 "집회참석 정년자를 두어, 일정의 기간이 되면 각자의 소집회를 이루는 것이 필요하다"라는 논의도 있다. 독립전도자가 나오지 않는 것은 경제적인 자립이 어려운 데 문제의 원인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수입의 10분의 1을 정했던 것처럼, 무교회주의자들은 무교회주의자로서 각자가 자신의 수입에 맞는 개인부담액을 정해 전도를 포함해서 경제적으로 유지해 가기 어려운 일을 위해 투자나 기부나 헌금할 책임을 자각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제안도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집회에서 한 사람의 전도자를 돕게 되면 그것에 의해서 일본을 변화시키고, 세계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하고 독립전도자가 계속적으로 나오게 하는 방책이 실제로 필요하다고 하는 인식도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논의의 흐름은, 일본 무교회 내에서는 단지 무교회라고 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 사고가 있다고 하는 의미에서 세키네(關根正雄)가 말하는 변증법을 통한 자기부정의 정신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무교회 일각에서는 무교회의 근본적 문제로서 "에클레시아론의 결여"를 지적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개인이 하나님께 직접 연결된다고 하는 것은 틀리지는 않지만, 신앙의 세계는 개인신앙이 전부는 아니다. 또한 에클레시아론의 결여는 선생의 권위가 우선시되어 후술하는 지도자중심주의와도 깊은 관계가 있고, 예배나 목회의 결여에도 관련되어 있다. 이는 무교회가 종래부터 예언을 중시한 나머지 제사적인 것을 등한시해, 목회나 예배론의 결여가 일어났다고 생각되어지기 때문에 제기된 것이다. 물론, 무교회에서 집회라고 불리는 에클레시아는 제도적으로 법을 갖는 '교회'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관계로서의 평등한 사귐을 가리킨다. 즉, 무교회적 영적 공동체, 바꿔 말하면 제도없는 공동체는 어떻게 해서 성립하고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 무교회주의는 이 세상에서는 현실 불가능한 것일까라는 문제가 고려되어지고 있다.

 

그와 같은 교회가 실현 가능할지 어떨지는 차치하고, 어쨌든 이와 같은 반성적 고찰 자체에는 조직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를 지적하고 대안을 탐색하려고 애쓰는 자세가 보여진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일본 무교회 측이 강하고, 한국 무교회 측에서는 오히려 무교회사상의 변질이라고 비판한다. 대표적인 것으로서 노평구는 1991년 일본여행을 다녀온 후, "최근의 무교회주의가 신학이나 문화적 경향으로 흘러가면서 교회주의 세례나 성찬 등에 추파를 보내고, 전도의 부진을 유급전도에 의해서 해결하려고 하고, 인류의 위기현상에 대해서 종말신앙을 강조하고, 무교회가 antinomism에 빠졌을 리도 없는데 계명 준수에 역점을 두는 것 등은 신앙생활을 율법적으로 이끌 우려가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여러 측면에서 변혁을 모색하고 있는 일본 무교회에 대해서 우려와 비판을 보이고 있다.

이같이 한국 무교회는 변함없이 종래의 무교회 정신을 지키는 것에 보다 강한 관심을 갖고 있다. 아마도 한국 무교회가 일본 무교회에 비해 집회의 규모가 작고 게다가 본격적으로 신학을 하는 학자들이 없기 때문에 폐쇄적 성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한 한국무교회에서는 진정한 에클레시아를 신앙의 순수성에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더 현저하기 때문에 그러한 노력에 관심을 두지 않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열정적인 신앙공동체가 현실로 실제화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상과 같은 조직 거부는 "기구화된 교회제도에 반발한 측은 대체로 종말론적 성향과 자기중심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라는 지적에도 있듯이, 다음 항과 같은 신앙상의 특징을 가져온다.

 

3. 신앙

 

무교회사상의 종교개혁적 성격과 조직 거부의 사고 때문에, 무교회 신자들은 삶 속에서 신앙의 일치를 강조하게 된다. 그들은 개인신앙중심의 경향이 강하고, 더욱이 개인을 통해서 사회를 개혁하려고 하는 특징이 있다.

 

첫째로, 삶과 신앙의 일치에 대해서인데, 한일 무교회는 삶과 신앙의 일치, 즉 신앙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 무교회 신자들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신앙이 삶 속에서 행동으로 나타나도록 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모두 평신도로서 직업을 갖고 있다. 한국 무교회의 초기사상가인 김교신도 선생으로서 직업을 갖고 성서연구를 간행했다. 또한 인터뷰의 결과 대부분의 무교회 신자들은 직업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삶을 통해서 전도를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 무교회의 경우도 삶 속에서 신앙을 실천하려고 하는 의식이 강하다. 설문응답 결과에서는 세대계승이 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현 직업의 비율은 낮게 나타났지만, 평신도로서 세상의 실제 생활 속에서 신앙을 중시하고 있는 점은 역시 다르지 않다. 이들 평신도 생활의 중시는 그들의 '만인사제주의'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옥한흠 목사는 평신도 신학의 중요성을 들고 있다. 본래 종교개혁의 의미는 성서를 평신도의 손에 되돌리는 것에 목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이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종교개혁의 뿌리를 놓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무교회주의가 평신도의 소명의식을 재강조한 것은 높이 평가할 수 있지만, 평신도만의 선교와 목회에는 한계가 있다고 하는 지적도 있다. 송길섭은 "무교회는 성직자와 평신도와의 관계를 대립?종속관계로서 보고 있는 것 같지만, 양자의 관계는 보충관계에 있고 더욱 목회신학의 부재로는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평신도의 훈련과 참여를 활성화시킬 수 없다"고 지적한다. 즉, 그의 주장은 평신도운동을 지향해야 하지만, 그를 위해서 평신도의 훈련자가 필요하게 되고 목회신학의 부재시는 장기적으로 한계가 있다고 하는 지적이다. 목회신학의 부재는 앞에서 (2)「조직」항목에서도 서술한 것처럼, 조직 거부에 의해서 발생될 수 있다. 실제로, 일본 무교회의 경우, 집회 인도자의 사후 집회의 존속여부의 문제가 발생하고, 집회 유지의 곤란함이 내부에서 논의가 되는 것도 적지 않다.

 

둘째로, 무교회사상은 개인적인 신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성서중심주의, 만인사제주의적인 특징은 개인신앙적인 흐름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특히 만인사제주의적인 특징은 개신교회의 본질적인 성격으로서 신앙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이 개개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독존적으로 서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면에서는 큰 장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에 의해서 단점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양국 무교회 설문응답을 분석해 볼 때, 지나친 신앙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것 때문에 기성교회와의 관계에서 분리적인 경향이 나타난다. 또한 무교회신자들 사이의 교류도 드물어지는 경향이 무교회 내부에서도 지적된다. 집회의 역동성은 기성교회에 비해서 약하다고 할 수 있다. 무교회 신자들은 설문응답결과를 보면 확실히 개인신앙 중심주의를 띄고 있다. 집회가 개인중심적이 되어 가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은 무교회 내부에서도 갖고 있었다. 하나의 예로 다카하시의 다음과 같은 지적이 있다. "무교회에서는 만인사제주의, 혹은 만인목사주의라고 하는 것이 표방되어져 신도 모두가 전도한다고 하는 것이 무교회의 본래의 취지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고 전도는 소수의 전도자의 손에 맡기고, 자신은 단지 자신의 신앙을 몰래 지키는 예가 널리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지적은 무교회의 본래의 정신인 '만인사제'에 반해서, 실제로는 '소수의 예외자'만 전도하고 있다라고 하는 무교회의 개인신앙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 같은 경향이 발생하는 원인은, 앞에서 (1)「종교개혁운동으로서의 무교회」항목에서도 지적한 대로 그들의 신앙적 모델이 칼뱅보다는 루터 쪽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김명혁은 종교개혁의 원리 중에서 루터와 칼뱅의 차이를 개인신앙중심주의인가, 하나님 중심주의인가에 있다고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루터를 비판하려고 한다면 루터는 자기 구원중심이다. 그러나 칼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구원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궁극적인 성도의 생의 목적이라고 강조하는 입장이다"라고. 또한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무교회는 성직자에 종속된 평신도를 본래의 하나님의 교회로 만드는 것을 중시하고 있다. 그래서 개인의 성서연구와 개인의 신생을 강조한다. 특히,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서 각 개인이 하나님의 교회로서 서게 된 점을 중시한다. 따라서, 무교회의 사명은 만인사제주의를 철저하게 실현하는 것에 사명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진정한 교회를 위해서는 각인이 모든 외적인 형식과 제도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독단자로서 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의 공동체로서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에 대한 자각이 희박해지는 현상이 발생하고, 결국에는 오로지 개인신앙만 지향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셋째로, 이같은 개인신앙에 중점을 두는 특성 때문에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관점도 개인의 변화를 통해서 사회변화를 달성할 수 있다는 입장이 된다. 무교회사상은 개인의 직접적인 성서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서는 역시 개인을 사회에 앞세우는 사고를 갖는다. 이것은 한국과 일본 무교회 신자들의 공통특성이었다. 양국의 무교회 신자들은 사회참가에 대해서 부정적이지는 않았지만, 개인의 변화를 통한 개인적인 사회참가, 즉 직장이나 교육 등을 통한 복음전파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 점은 현대에 들어와서도 양국 무교회 신자들이 똑같은 인식을 갖는 점이고, 현대무교회 전반에 흐르고 있는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각 개인의 신앙만을 너무나도 중시하는 교회관은 비판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 교회관의 핵심은 역시 그리스도를 매개로 한 공동체 교회관이다. 그 점에서 개인신앙중심의 교회관은 약점을 갖기 쉬운 것이다.

 

4. 예배

 

한국 무교회를 기독교의 한국적 상황화?주체화의 한 유형으로서 보면, 그들의 예배에는 상황화하는 부분이 잘 나타나 있다. 박근연은 "기독교 예배의 한국 무교회적 표현"이라고 하는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피조물 인간들이 어느 시대 어디에 사는 사람이냐에 의해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다르고, '응답'하는 방식도 다르다. 토착화된 예배를 위해서는 두 가지 노력에 힘을 기울여야만 한다. 그 하나는 기독교의 예배내용 가운데 변할 수 없는 틀에 대한 이해이고, 또 하나는 오늘날의 우리들의 상황문화에의 적응이다. 한국 무교회 예배의 본연의 모습도 이 같은 의미에서의 서구의 예배형식을 그대로 받아들인 기성교회의 예배와는 달리 토착화된 예배의 상황적 모습으로서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설문응답 결과를 분석해 볼 때, 한국 무교회 집회에서는 형식과 장소에 관계없이 성서중심의 예배를 하고 있다. 또한 무형식에 의해서 본래의 예배 취지에 따라 각 개인이 살아 있는 신앙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가려고 하는 특징이 있다. 모든 형식을 배제하고 단지 성서의 강해에 힘쓰고, 더욱이 매주 똑같은 형식의 예배가 아닌 간증의 형태를 취한 예배와 전후 2강으로 나누어서 이루어지는 예배의 구성은 기성교회에서는 보여지지 않는 무교회만의 독특한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특히 서구교회의 영향에서 벗어난 무교회적 특성이다.

 

일본 무교회도 설문응답 결과를 볼 때, 예배가 성서연구중심이고 서구교회의 예배형식을 답습하지 않는 면에서 한국 무교회와 비슷하다. 이것은 무교회 자체가 갖는 서구의 제도적이고 교파적인 특색에 대한 반발과 동양적인 상황화?주체화의 한일 공통된 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양자간에 차이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 무교회의 예배에서는 성서연구를 더욱 더 개인의 삶 속에서 체험한 것을 강조하고 일주간의 각 개인의 경험을 순서대로 발표하고, 이것을 통해서 산 신앙을 집회 안에서 나누는 예가 많다. 이와 같은 한국 무교회의 예배 모습은 신앙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한국 무교회 성격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일 무교회는 조직의 형태로서는 큰 집회의 몇 개를 제하면 대체로 가족적인 소집회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양국의 설문응답을 분석해 볼 때도 가족중심적 예배와 신앙생활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것은 물론 규모가 작기 때문이지만, 무교회의 조직 부정에서 나타난 자연스러운 결과이기도 하다. 이러한 조직의 특성 때문에 한국 무교회에서는 한국의 거대한 기성교회가 안고 있는 부정적인 여러 문제에 빠지지 않았다. 가족 단위의 공동체에서는 제도화될 위험도 없고, 형식화되지 않는 서로의 관계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무교회의 특징은 이 같은 작은 가족적 교회라고 하는 색채에 의해, 교회의 급속한 성장에 따른 문제를 최대한 배제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한국 무교회에서는 집회에 실제로 가족이 전부 참가하는 등 집회가 갖는 글자 그대로 가족적 공동성이 일본보다도 한층 색채가 농후하고, 또한 한국 기독교계에서의 거대조직의 모습과 현저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삶의 체험을 중시하려고 하는 한국 무교회의 지향이 한국교회의 현상적 상황에 대한 반발과 함께 현저하게 표현되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Ⅲ. 상황 속에서 양국 무교회

 

이상과 같이, 무교회사상은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기본적으로는 공통적인 흐름을 갖고 있지만, 양국에 놓여진 상황에 의해서 다른 특성도 띄고 있다. 이 차이점에 대해서는, 서론에서도 언급한 대로 한국과 일본이라고 하는 사회문화적?역사적 상황의 차나 양국 기독교사의 차이도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이하에서는, 이 상황 차이로 발생하는 문제를 몇 개로 나누어서 논의해 보고자 한다.

 

1. 신학

 

무교회에서는 모든 제도적인 부분을 배제하기 위해서, 제도나 조직, 그리고 세례와 성찬 등을 부인할 뿐만이 아니라 신학적인 연구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이 강하다. 설문 응답결과에 의하면 많은 무교회 신자들은 신학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한국 무교회 사상가 송두용도 '신앙만의 신앙'을 강조하고, 그것이 자신의 신학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무교회는 성서를 개인적으로 연구하는 것에는 집중하지만, 신학적인 연구는 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한국 무교회에서는 그러한 경향이 보다 강하고, 집회의 인도자들이 어느 정도 원전성서연구나 주석을 참고로 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 점 때문에, 일본의 설문응답 중에는 한국 무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비신학적이라고 지적한 사람도 있었다. 그 지적은 한국 무교회는 일본 무교회보다 더 폐쇄적이라는 의미도 될 것이다.

 

일본 무교회에서도 초기에는 비신학적이라고 하는 비판을 받았다. 도히(土肥昭夫)는 1962년《내촌감삼》(內村鑑三)이라고 하는 저서에서 우치무라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그(內村)의 기독교 신자로서 일본에 대한 올바른 관계는 그의 파토스 정열적 표현이나 예언자적 직관에 있어서는 보여지고 있지만, 아직 신학적인 사고방법으로는 확립되어 있지 않는 것이다. 거기에 한해서 그가 예수와 일본을 사랑하는 심정은 소박한 자연적 발로이고, 올바른 대결이라든가 극복이라고 하는 문제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보여진다." 일본 무교회는 이 같은 비판이 어느 정도 수위를 넘어서자 무교회의 논리를 보다 실증하려고 하는 의식에서, 또한 때로는 지적 상황이 성숙함에 따라서 우치무라이후 신학에 점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전쟁 후 일본 무교회에 대해서 기타모리(北森嘉藏)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교회주의에서 또 하나 발생된 변모는 제3세대라고 할까, 신학을 하는 젊은 무교회주의 지도자가 점차로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겠지요. 세키네(關根正雄), 마에다(前田護朗), 나카자와(中澤洽樹), 그 외 젊은 유능한 사람들이 나타났던 것이 하나의 장래를 보장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즉, 일본 무교회에서는 한국 무교회와는 다른 특징으로서 교회사나 기독교사상 혹은 교회론 등 신학을 연구하게 된 것이다. 이 변화에는 일본 무교회의 역사의 오래됨이나 폭, 지적 엘리트가 많은 것 등이 조건으로서 관련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체적으로는 무교회의 본질을 분명히 하려고 하는 변증법적인 의도가 거기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키네는 교회가 무교회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필연성을 지적한다. "무교회가 살아 있는 개인의 진정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기부정과 자기건설의 작업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교회 신자는 기존의 형식으로부터 독립한 우치무라의 전통에 따라, 이 전통에 만족해서 그대로 순응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전통에 따른다면 결국 새로운 형태에 빠지는 영적생활을 낳게 된다"라고 한다.

 

이 같이 일본 무교회는 끊임없이 대화 속에서 자기를 변증하려고 한다. 1963년 3월에 행해진「내촌감삼 선생 기념 기독교 강연회」에서도 나카자와는 다음과 같이 교회나 무교회 상호간의 대화의 필요성을 호소하고 있다. "우리들이 진정한 에클레시아를 지향하는 것이라면, 우리들의 눈은 자기를 응시함과 동시에 밖으로 우리들의 외부에 있는 자를 향해 열려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회나 교회의 움직임에 대해서 단지 반발한다든지 무관심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소재를 잘 관찰한 후에 적절한 반응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같은 사고 때문에 일본 무교회는 한국 무교회와는 달리 신학연구에도 열심인 것이다. 공통의 로고스 없이는 자기를 변증할 수 없다. 신학적인 자기비판이 무교회 자신의 장래를 위해 필요하다고 일본 무교회는 보았던 것이다. 물론, 이 같은 태도 때문에 거기에 기성교회적인 요소가 들어가 무교회정신이 상실되어버린다고 하는 내부에서의 비판도 있다. 그러나 무교회가 진정한 에클레시아를 추구하기 위해, 가령 신학적인 논의를 매개로 하는 것이라고 해도 기성교회와의 대화를 제외시킨 채 무교회의 본질을 추구하게 되면 오히려 독단에 빠지기 쉽다. 이 같은 의미에서, 변증법을 내건 현대 일본 무교회의 목소리는 상황변혁적 성격이 한국 무교회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2. 기성교회와의 관계

 

무교회는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는 외적인 형식이나 제도에 대해서 날카롭게 비판한다. 이 같은 특징은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한 기성의 것에 대한 반동적인 반응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도 개혁의 뒤에는 기성의 것에 대한 반동은 필연적으로 따르게 마련이다. 루터나 칼뱅 등의 종교개혁자들은 당시의 기성종교세력이었던 가톨릭의 기득권세력에 대해 신앙의 불순수를 비판하고 신앙개혁을 요구했다. 무교회도 이 같은 종교개혁적인 흐름을 계승하는 입장 때문에 기성교회에 대한 반동은 당연한 현상인 것이다.

 

한국 무교회의 경우 기성교회와의 관계는 처음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한국 무교회 초기 사상가인 김교신은 조선기독교의 현상에 대한 비판 때문에 기성교회와 많은 갈등이 있었다. 이 같은 현상은 현대 한국 무교회에서도 그대로 남아 있다. 현대 한국 무교회를 이끌고 있는 노평구의 글에도 교회에 대한 비판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특성이 치우쳐 극단적으로 나타날 때 귀중한 본질적인 부분을 놓치는 것도 있다. 즉,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대로 교회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도 기독교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서는 중요할 것이다. 맹용길은 무교회의 교회 비판은 교회당에 대한 오해에서 나온 것으로 예배당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구원을 교회당 안에만 한정시키려고 하기보다는, 그 예배당 안에서 구원이 선포되어지고 그 목적을 위해 모든 행사가 행해진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필요하다."

 

무교회의 이 같은 경향은 기독교사에서 보면 재세례파(Anabaptist)적이다. 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무시하는 경향은 일본보다 한국 무교회 쪽이 더욱 강하다. 재세례파는 교회의 전통이나 제도를 거부하고, 단지 성서만을 추구했다. 그들은 극단적인 신앙순수주의자로서, 당시에는 개신교와 가톨릭 양쪽으로부터 이단적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실제, 한국의 현대 무교회도 이 같은 요소 때문에, 일부에서는 이단적인 요소가 있다고 하는 소리도 있다. 이 의미에서도 한국 무교회의 경우는 한층 분리?대립적인 측면이 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같은 분리적 요소는 자칫하면 근본주의와 같이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극단으로 구분하는 것에 의해서 복음과 세상의 단절이라고 하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한국 무교회는 1930년대에 사상적 뿌리를 내렸지만, 그 이후 더 이상 확대되지 않는 결과도 이 같은 단절의 사상적 경향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판단은 무교회 외부에서의 판단이고, 무교회 내부에서는 오히려 한국 무교회가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으로 발생되는 많은 폐해를 비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예언자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강했다. 한국교회는 폭발적인 양적인 성장에 의해서,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말하듯이 부정적인 면도 발생해서, 그것이 지금의 한국교회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요소 때문에 그만큼 한국 무교회의 의의는 오히려 높아지는 것이 되기도 한다.

 

다른 한편, 일본 무교회의 경우는 기성교회에 대한 분리적인 경향은 한국 무교회처럼 그렇게 강하지는 않다. 더구나, 현대에 와서 일본 무교회 내부에서는 변화의 움직임-외부나 타자와 더욱 대화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또한, 현대일본 무교회 신자들의 기성교회에 대한 앙케이트 답변에서도, 일본 무교회 신자들은 한국무교회 신자들과 같이 기성교회에 대해서 부정적이기보다는 기성교회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본다든지, 솔직이 '모른다'라고 하는 의견이 많았다. 세례와 성찬과 같은 의견에서도 형식주의로 흐르지 않는 한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각 사람의 자유에 맡긴다고 하는 견해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 같은 경향은 한국과 일본의 기독교의 상황 차에서 오는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 기독교는 양적으로는 전 인구의 25%가 기독교인인 것에 반해서, 일본 기독교인은 1%에도 못 미친다고 하는 절대적인 기독교인의 수적인 차가 있다. 그래서 한국 무교회 신자들은 기독교의 양적인 성장에 따른 부작용적인 요소를 보다 많이 인식하고 있다. 그 때문에, 기성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경향이 더 강했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 무교회 신자의 응답에서는 한국 기독교인이 25%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단지 부럽다고 하는 의견이 많았다. 오히려 일본내에서의 기독교 확장에 대한 기대가 포함되어 있고, 그 때문에 기성교회에 대한 비판이 적었다고 보여진다.

 

다른 한편, 일본 무교회에서는 집회의 해체에 대해서 새롭게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무교회의 창시자인 우치무라는 무교회정신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집회 인도자가 죽으면 자연히 집회를 해체하도록 했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인도자가 죽었을 때, 집회를 해체하는 것이 좋은지 어떤지 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에클레시아의 영원성이라고 하는 과제가 고려되어지고 있다. 오카노 유키오(岡野)는 "집회가 지도자의 사적 소유물?재산 같은 것이면 그러한 결과도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집회라고 하는 것을 공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고 그것에 대한 책임이라고 하는 관점에 서서 생각하면 그러한 처치라고 하는 것이 인정될 수 있는지 어떨지 크게 의문스러워집니다"라고 한다. 실제로 현대 일본 무교회의 대표적 지도자의 한 사람인 세키노는 집회를 해체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 같이 집회 인도자의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 집회를 유지하게 될 때, 집회는 당연히 기성교회의 제도적 영속성과 닮은 꼴을 갖게 된다.

 

3. 지도자관

 

사토(佐藤全弘)는 다카하시가 주장하고 있는 '무교회의 반성'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무교회는 공동의 에클레시아가 아니라 혈연적 공동체로 타락할 위험이 있다.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보다도 '선생'에 대한 개인숭배에 빠질 위험은 충분하다. 신앙의 지도자의 능력이 크고, 그 인격이 고결한 만큼 그 위험은 강하다." 위의 발언은 무교회가 선생을 기초로 성립하는 공동체라고 하는 성질을 띄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계속해서 다카하시는 "집회의 '선생'이 죽으면 집회는 해산되어 나뉘어지는 것이 많지만, 그것을 정리하는 것이 진리의 전진이 아니고 '선생'의 추억이라고 한다면 회고적이 된다. 회고적 집회는 추억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을 받아들일 여지가 없다. 거기에서 집회는 퇴보하게 되고 발전성은 결핍되어 당연 노령화하고 이윽고 소멸해버린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선생이 너무나도 중시되어질 때 일어나기 쉬운 문제를 지적했던 것이다. 실제로 일본 무교회에서는 유력한 지도자가 있는 동경의 집회와 지방집회와의 차가 크다. 동경의 세키네(關根) 집회나 다카하시(高橋) 집회는 참석자가 70~100명에도 이르는 반면, 지방집회는 10~20명이었다. 더욱이 지방에서 동경의 집회에 참가하는 신자도 필자는 알고 있다. 그런데 지방쪽으로 가면 집회의 규모가 작아진다. 이것은 집회의 인도자에 의해서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시사하는 현상일 것이다. 즉, 일본 무교회는 유명한 선생을 중심으로 집회가 성립한다고 하는 특징이 있고, 동경에는 그 특징이 아직 남아서 발휘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도히도 무교회의 사제관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內村)의 주변에 일본적인 사제관계가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의 무교회주의 정신에 의하면 비극이고, 짓궂은 현상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이 같은 지도자 중심의 사고는 집회의 지도자가 죽으면 집회가 해산하는 것으로 더한층 조장되어져 왔다고 생각되어진다. 개인과 선생이 너무나도 강하게 연결되는 것으로 횡의 관계, 즉 집회원들 상호간의 사랑이 그다지 강조되지 않는 경향이 거기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전술한 대로 신주쿠(新宿) 집회를 인도하고 있는 세키노는 집회를 해산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고, 1997년 6월에는 이렇게도 서술하고 있다. "앞으로는 선생 중심에서 에클레시아 중심으로 전환한다." 위의 발언에 제자인 하카리(量義治)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이 발언을 중대한 것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결코 과장됨이 없이, 이것은 무교회에서 말하자면 혁명선언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떨었습니다. 선생 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집회의 주권은 선생에 있다고 하는 것으로, 따라서 집회의 의사결정은 선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반해 에클레시아 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에클레시아의 주권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집회원에 있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일본 무교회의 일부에서는 '혁명선언'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선생 중심주의에서 탈피해, 에클레시아 중심의 새로운 무교회를 전개해 가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서 일본 무교회 내부에서는 당연히 찬반논쟁이 행해지고, 거기에서 또한 나뉘어지게 될 것이다. 찬반논쟁은 별도로 치더라도, 이 같이 일본 무교회는 선생 중심주의 의식이 내부에서도 강하고, 이 문제를 극복해 가려고 하는 혁명의 움직임은 앞으로도 나타날 것이다.

 

이에 비해, 한국 무교회에서는 이 같은 지도자 의존현상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한국 무교회의 대표적 리더인 노평구 집회의 사람수는 약 7인 정도이다. 또한, 집회별 교류도 예사롭게 이루어지고 있고 서로 협력하는 면이 강하다. 예를 들면, 송두용은 1964년 마사이케진(政池仁)의 초청을 위해 반년 이상 걸려 준비할 때도, 노평구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노형은 김교신 신앙문집의 출판 관계에 대단히 바쁜 중에서도, 이것(마사이케의 초청)을 위해 나보다 훨씬 더 고생을 했다"고 회상하고 있다. 이러한 횡의 협력관계는 한국 무교회가 규모면에서 작은 것과 해방 후 한국 무교회의 큰 행사나 전국적인 모임을 지도한 인물이 송두용과 노평구에 한정되어 있는 면 때문에 당연히 발생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송두용의 사후 현재는 노평구의 지도가 무엇보다 강하고 무교회론에 대해서도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도 없기 때문에, 종래의 무교회사상에서 분화하는 것 없이 이것에 따라 가는 움직임이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한국 무교회 신자의 상호관계는 수평적이고, 종으로 나뉘어져 있지 않다. 필자가 동계 전국집회에 갔을 때도 신자들은 각자가 어디의 집회에 참가하는지 전혀 신경쓰지 않고, 필자도 알아챌 수가 없었다. 즉, 일본 무교회에서는 지도자에 대한 사고가 절대적 내지 의존적이고, 지도자가 많은 중에서 분열도 많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한국 무교회에서는 지도자가 작은 중에서 분열의 정도도 작다. 사람들은 지도자에 의존하는 면이 적고, 비교적 각자가 독립해서 다른 사람과 서로 협력하고 있다.

 

4. 한일 무교회의 교류

 

일본 무교회 신자들의 설문응답결과, '한국 무교회와의 교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거의 95% 이상이 '필요하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본 무교회에서는 한국 무교회에 대해서 일부를 제외하고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반면에, 한국 무교회 신자들은 일본 무교회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 이유는 무교회사상의 기원이 일본이고, 일본의 무교회 사상가의 저작은 한국어로 많이 번역되어져 있기 때문에 읽을 기회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일제시대에 일본어 학습이 강제되어졌기 때문에, 일본의 무교회 사상가의 저작이나 잡지에 접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이유중의 하나일 것이다. 우치무라나 구로자키(黑崎)의 성서주석이나 저작은 한국어로 번역되어져 읽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1976년 8월 8일에는 마사이케(政池仁)의 제안으로 송두용과 협의한 후에 오류문고가 설치되고, 일본 무교회에 대한 책들이 소개되어지게 되었다. 오류문고의 설치 취지는 일본이 한국에 대한 사죄의 표시로서 일본 무교회주의 신앙서적을 중심으로 기독교 서적을 기증하는 것이었다. 일본 무교회측에서는 스키야마(杉山直)를 실무책임자로 해서 후원회를 조직하여 일본 전국무교회의 협력을 얻어 무교회 서적을 중심으로 기독교 서적을 한국에 보냈고, 한국 무교회 측에서는 이진구를 실무책임자로서 오류문고를 설치 운영하도록 하였다. 우치무라 전집을 비롯한 무교회 서적이 구비되었지만, 한국의 일본어 세대의 격감에 의해서 일부의 제한된 사람만이 읽는다는 점과 무교회에 대한 홍보나 인지부족 등의 원인에 의해서 문고의 이용률은 저하되고, 1995년 3월 오류문고후원회는 해산함과 동시에 새롭게 한일청년우화회가 발족했다. 후원회는 해산되었지만, 오류문고는 지금도 계속해서 한국무교회의 자료센터 역할을 다하고 있다.

 

한일청년우화회에서는 한국 무교회 신자를 2명씩 매년 일본으로 초청해 친선여행을 시키고, 1998년으로 제4회를 마쳤다. 또한 일본에서는 매년 전국 무교회 성서강습회가 행해지지만, 그 때 일본의 초청에 의해서 한국 무교회에서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 초청되어지고 있다. 일본 무교회의 무교회계 학교인 독립학원과 한국의 풀무학교와는 자매결연이 맺어져, 독립학원의 학생들이 수학여행으로 한국에 와서 교류를 갖고 있다. 덧붙여, 어떤 연구에서 한국교회에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일본인 기독교인은 우치무라이지만, 그 이유 가운데는 "그의 책이 비교적 많이 출판되어지고 있는 것,〈성서지연구〉를 통한 문서전도를 했기 때문에 바다를 건너서도 읽을 수 있는 점, 그의 신앙이 보수정통으로 한국교회에 받아들여진 점"이 열거되어지고 있다.

 

이상과 같이 한일간에는 이해에 '격차'가 있다. 일부에서의 친선교류 움직임과 더불어 일본 무교회 사상은 어느 정도 한국에 알려져 있지만, 한국 무교회에 대해서 일본 무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3)에서 언급한 일본 무교회의 '다테사회'(縱社會 : 겉과 속이 다른 이중사회)적이고 상호관계가 얇다고 하는 특징도 관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일본 무교회의 신자들이 일반적으로 지도자를 중간에 세우지 않는 한 다른 무교회의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면, 하물며 한국 무교회와의 상호교류는 좀처럼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교류 자체는 애당초 다양한 교류를 인위적으로 만들기보다도, "교류도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라고 하는 자연적 발로를 더 바라는 무교회적 성향에 의해서 활발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5. 종교문화?민족?기독교사적 상황

 

김정환?심일섭은 김교신에 대해서 한국신앙인의 고고한 선비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언급하고, 한국 무교회 내부에 흐르고 있는 종교적 배경에는 한국 신앙인의 고고한 유교적인 선비사상이 들어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양국 무교회는 문화적?역사적 상황의 차이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을까?

양국 무교회 신자들의 상당수는 설문응답에서 한국 무교회와 일본 무교회의 차이를 한국 무교회는 유교적인 성격이 강하고, 일본 무교회는 무사도 정신과 불교적 요소가 강하다고 썼다. 도히도 우치무라의 무교회 사상에 내재하고 있는 사고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치무라의 '무'교회가 선종의 절대 '무'의 경지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는 그 많은 저작 가운데 이 같은 문제를 논하고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의 심성 속에 동화된 선종적인 사고방식이 내촌이라고 하는 일본인의 사고방법에 의해서, 무교회주의라고 하는 사고방식 속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기에는 너무나도 양자의 '형식'관이 유사하지 않을까?" 즉, 우치무라에게는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의 속에 내재하고 있는 '선종적 사고방식'이 있고, 무교회 사상에도 그것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있다라고 하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 무교회 신자들의 설문 결과에 서도, 무교회에 참가하기 전의 종교적 배경에 대한 질문에서 기독교에 접한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중에서, 불교적 배경을 갖고 있는 사람이 30%나 되었다. 아마도 근현대의 일본 무교회 신자들 가운데 유형 무형의 불교적 영향이 있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또한 양국 무교회 사상의 계승의 차이는 다음과 같은 한국의 종교적 특질로부터도 해석할 수 있다. 한국의 어떤 사회학자는 한국의 종교사에 나타난 종교문화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첫째로 종교발상지에서는 이미 사라졌다든지, 왜곡된 문화의 특질을 보존하려고 하는 '보수적' 경향이다. 둘째로 유교적인 공간 상징 속에서 추출한 단순한 '이분화된 세계관'의 지배이다. 종교적 근본주의와 각종의 천년왕국운동이 나타나는 배경이 되는 이 같은 단순한 세계관에서 귄위주의적?투쟁적?분파적 이데올로기와 극단주의가 나타난다." 즉, 무교회의 발상지인 일본은 무교회사상을 그 시대에 맞게 변화시켜 가려고 하는 변혁적이고 융통성이 있는 움직임이 이미 서술한 대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 무교회의 다카하시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양국의 계승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선생의 언동을 그대로 맹종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 하나님과 나만이라고 하는 입장으로 되돌아 가는 것을 통해서 스승이 발견한 진리를 재해석하고 다시 씹으려고 할 때 그것은 단순한 반복으로 끝나지 않는다." 다카하시가 말하는 '재해석하고 다시 씹는' 것은 주체성을 갖고 변혁해 가려고 하는 사상으로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 무교회는 무교회의 정신, 즉 우치무라의 정신을 고수하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것은 한국이 "종교발상지에서는 사라졌다든지, 왜곡된 문화의 특질을 보존하려고 하는 '보수적'" 경향을 갖는 한 예라고 생각할 수 있고, 거기에서 이러한 양국의 계승의 특성이 나타났다고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이원규는 한국인의 종교문화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들고, 이 점이 한국교회 성장의 요인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용적이고 적극적인 면은 세계에서 새벽과 철야기도회를 하는 유일한 교회가 되게 하고, 감정적이고 열정적인 면은 열광주의, 부흥운동, 성령강림운동 등이 한국교회에서 크게 호응을 얻게 했다. 분명히 지성적이고 이성적인 종교성보다는 감정적이고 열광적 종교성이 교회성장에는 효과가 있다. 또한 조화적 성격을 띄고 있는 면은 기독교인에게서도 유교적?무교적?불교적 혼합주의 종교성을 만들어냈다." 특히 두 번째로 들고 있는 감정적이고 열광적인 한국의 종교문화는 이성적인 성서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무교회 신앙과 큰 대비를 이룬다. 이 같은 감정보다 이성을 중시하는 경향은 무교회가 외적 실체면에서 성장하지 않았던 요인이 된다고도 할 수 있다.

 

양국 민족의 역사적으로 형성된 에토스의 차이도 들 수가 있다. 비교문화론에서는 자주 한국인들은 감정적인 성향이 더욱 강하지만,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감정이나 본 마음을 나타내지 않는 속성이 있다고 일컬어진다. 미국의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어린 시절, 일본인은 자신의 행위를 관찰하고, 타인이 무엇이라고 말할까라고 하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그 시비를 판단하도록 철저하게 훈련받는다.……그들은 단지 타인이 어떤 판단을 내릴까 하는 것을 추측하고, 그 판단을 기준으로 해서 자신의 행동방침을 결정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같은 민족의 성향 차이에 의해서 양국 무교회 집회의 성격도 다른 면이 있다. 단적인 일례로서, 한국 무교회 신자들은 집회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무교회 진리와 다르다고 생각할 때,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격렬한 논쟁을 한다든지 한다. 반면에, 일본 무교회 특징으로서 "일본인의 자연스런 감정 속에서 예의를 중시한다"라고 하는 일본인 신자의 회답이 있었다. 실제로 필자가 집회에 참가했을 때도 한국 집회에서는 사람들이 솔직하고, 일본 집회에서는 내향적이라고 하는 인상을 받은 적이 많다. 이 점은 양국간의 민족성의 차이에서 오는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양국의 기독교사적 상황 차이에서도 양국 무교회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도 있다. 한국기독교는 서구의 제국주의가 아니라 일본의 제국주의라고 하는 상황에 놓여져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는 오히려 기존의 한국문화에 반하지 않고 화합할 수 있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1945년 이후 기독교가 양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틀이 되기도 하였다. 한국적인 상황에서는 일반적으로 서구문화를 동반한 기독교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일본으로부터 전래된 무교회 기독교는 일본기독교의 아류라고 하는 비판 속에서 소외되었다. 일반적인 한국 기독교사의 서술에서도, 전체 인구의 25%를 넘는 기독교인의 비율 중에서 한국 무교회는 완전히 소외된 신앙운동으로 보여져 그다지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무교회는 기존의 기성교회사의 흐름과 달리, 독자적인 신앙의 순수성을 추구하는 분리적인 경향이 보다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에도시대에 크리스천을 반사회적인 것으로 강하게 배제?박해한 역사적 전통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신도?불교?유교를 비롯한 복합적인 종교나 윤리가 뿌리 깊게 형성되어져 있었다. 근대가 되어서 서구문화를 받아들일 때에도 적어도 종교의 차원(기독교)은 일부의 지식인을 제외하고, 일반에게는 긍정적?수용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반해, 우치무라의 일본 무교회는 서구문화의 지배에 굴복하지 않는다고 하는 주체성을 강조하는 점에서 일본사회나 그 내셔널리즘에 동조하는 측면도 있었던 것이지만, 세상의 비기독교적인 풍조에 대해서는 극히 분리적?독립적이었다. 하지만 이 분리성은 일본 무교회가 역사와 세대를 거듭해서 지식인층에 계승되어져 가는 사이에, 점차로 보다 희미해지고 혹은 내향화되어 갔던 것으로 보여진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일본 무교회는 일면으로는 세상의 상황으로부터 독립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태도 자체는 비교적 다른 것에 동조적이고 유연한 에토스가 되고 있다고 필자는 느낀다. 그 의미에서, 세상과 대항한 초기 일본무교회의 모습은 오히려 정반대의 형태로 기성 기독교에 대항해서 예언자적이고 순수한 신앙을 내건 한국 무교회의 모습 속에 자취를 남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상, 한국 무교회와 일본 무교회에 대해서 종교문화?민족?기독교사적 상황의 차이를 중심으로 고찰을 덧붙였다.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에서 우리들은 다양한 상황(context)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무교회와 일본 무교회는 똑같은 사상적 배경이나 특성을 갖고 있지만, 다른 각자의 상황과 교차해 가면서 각자의 독특한 기독교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을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현대 한일 무교회 특징 비교

Ⅳ. 결 론

 

본 연구는 기독교와 상황과의 만남이라고 하는 문제의식에서, 한일 양국 무교회 기독교의 사상에 대해 몇 가지 측면에서 분석을 시도했다. 무교회 사상은 기독교가 그 보편성을 지키면서도 동양 혹은 한국?일본이라고 하는 사회?문화?민족?역사적으로 다른 상황 속에 전개된 예로서, 단순히 타협적이지 않은 상황화?주체화를 시도한 예로서, 특필할 만한 것이다. 무교회 사상의 검토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기독교의 보편성과 문화의 특수성은 함께 인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무교회 사상은 한편으로, 기독교 사상의 본질?보편성을 순화시켜 철저하게 파악하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나라?문화?역사 등의 상황 속에서, 그리고 개개인의 구체적인 삶 속에 뿌리내린 것이라 할 수 있다. 무교회는 그 양면적인 긴장과 그것에 의한 변용의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뉴비긴은《서구문화와 기독교》에서 "상황화의 가치는 과거가 형성되고, 미래를 바라보는 어떤 특정한 기간에 문화의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복음의 위치를 정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뉴비긴은 기독교의 보편성만을 일방적으로 추구하는 것에 의해서 생기는 선교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가 역사와 문화라고 하는 상황과 만날 때, 본 연구에서 고찰한 것처럼 긴장관계가 발생하게 된다. 왜냐하면, 기독교 자체는 보편성을 갖고 있지만, 기독교가 놓여진 토양의 상황은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기독교와 상황 사이의 긴장관계에 의해서, 서구 기독교는 서구를 제외한 동양 및 제3세계국가들에서 보편적 종교로 받아들여지기보다 문화침탈의 도구가 된다든지, 그와 유사하게 보여진 면이 많다.

 

기독교가 상황에 초대되었을 때, 결국 어떤 특정한 사람이 그 매개의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다. 지금까지는 그 역할을 서구의 선교사들이 주로 담당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전달과정에서 서구의 선교사들이 반드시 순수하게 기독교의 보편적 복음만을 전달했다고는 볼 수 없는 중대한 문제가 생긴다. 동양에 전달되어진 기독교는 필연적으로 서구화되어버리는 것이다. 기독교 복음의 전달자가 바로 기독교 복음의 전달지인 서구문화 속에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본 연구에서 살펴본 무교회는 서구의 기독교가 동양이라고 하는 상황에 주체적으로 전달되어진 모델로서 나타나고 있다. 즉, 한국과 일본의 무교회는 서구의 선교사들이 전달해 준 기독교가 아니라, 오히려 동양이라고 하는 상황 속에 놓여진 자신들 손에 의해서 보편적 복음을 소화하려고 한 예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입장을 기초로 해서, 기독교와 문화의 만남이라는 상황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어느 만큼 그 지역의 문화적 상황을 중요시했는가라고 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그 지역의 문화에 이식될 때, 그 문화의 중심을 구성하는 것은 언어이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는 사물을 인식하고,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 표현되어지는 수단이다. 이 언어를 중심으로 사람들은 음악적인 예술이나 기술?법, 그리고 정치사회조직 등을 만든다. 그리고 어떤 문화라도 근본적인 것이지만, 삶에 형태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 즉, 궁극적 충절을 요구하는 사물의 궁극적 본성에 대해 인간이 파악해서 표현하려고 하는 노력의 결과로서의 신앙?경험?실천이라고 하는 일련의 것은 문화 속에 포함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들 모두가 언어로 농축되어져 있고, 그 언어를 통해서 전달되어진다. 그 같은 의미에서, 그 지역의 언어로 변환되지 않는 서구의 기독교는 제국주의적 문화침탈과 다르지 않게 된다. 무교회는 이 같은 스스로의 언어로 변환되지 않은 서구의 기독교에 대한 반동이고, 그 스스로의 언어로의 변환과정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이 같은 변환과정에서 자기 문화주의에 빠질 때, 언어의 변환과정은 실패하고 하나의 문화혼합주의나 문화배타주의로 전락하게 된다.

 

또한 언어와 더불어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은 상황의 절대적 부분을 차지하는 민족이라고 하는 문제이다. 기독교가 보편주의라면, 민족은 그 지역적 특수성을 포함하는 것이다. 특별히 아시아 지역이나 제3세계 국가에서 민족기독교론에 대한 연구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서구의 기독교 복음을 이해할 때, 어떤 민족이 기독교를 얼마나 이해하고 실천했는가라고 하는 관점이다. 예를 들면, 일제시대의 3?1운동과 1920~30년대의 사회참여운동은 한국기독교 신자들이 상황을 재인식하고 창조적으로 재해석해서 실천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이나 일본을 비롯한 동양이나 제3세계국가 등의 실천적 관점에서 보면, 서구 기독교의 재해석은 상황의 객관적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같은 맥락에서 한국에서는 1980년대 이후 들어서 민족과 민중의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활발히 전개되어지고 있다. 한국의 민중신학도 서구의 기독교를 한국이라고 하는 상황에 주체적으로 수용하려고 한 좋은 예이다. 그러나 민중신학과 무교회운동의 성격은 주체적으로 기독교를 수용하려고 하는 면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변혁의 관점에서 볼 때 완전히 다른 성격을 띄게 된다. 문제 해결의 뿌리를 민중신학은 남미의 해방신학같이 사회전체의 구조적 악에 두지만, 무교회운동은 기독교 정통주의 입장처럼 개인의 악에 둔다고 하는 차이를 갖고 있다. 이 같은 면에서, 무교회운동은 기존 기독교의 주체적 수용과는 다른 의의가 있다. 빈곤이나 신분차별과 같은 사회적?경제적 문제해결을 위해 서구의 기독교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려고 하는 노력은 다양하게 보여졌지만, 기독교 자체를 어디까지나 그 내면성이나 신앙적 본질에서 추구하면서, 더욱이 자신의 상황 속에서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노력은 많지 않았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한국과 일본의 무교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상황이나 주체의 차이를 인정하는 속에서 기독교의 본질을 추구하려고 하는, 어렵지만 중요한 길을 걷고 있다고 하는 점이다. 결국, 기독교는 그 복음을 지키면서, 과거?현재?미래라고 하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문화의 전체적 맥락을 고려하면서 전개되어질 때야말로 올바르게 세상 속에 위치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과 일본 양국에 전개되어지고 있는 무교회사상은 기독교와 동아시아 상황과의 긴장과 이를 뛰어넘는 올바른 만남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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