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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한국교회의 예배변화와 예전의 문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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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예배변화와 예전의 문제성

 

정 일 웅*

 

 

서 언

 

최근 한국교회의 예배는 그 실제적인 모습에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구체적으로는 전통적인 설교중심예배에다 음악적인 요소들과 문화적인 도구들을 대폭 도입하여 예배형식을 새롭게 바꾸어 놓고 있다. 특히 예배공간에 자리 잡은 대형 스피커의 등장 과 대중악기들의 동반, 빈번한 복음송의 사용, 몸 찬양을 동반한 찬송리더들의 활동들은 기독교 예배를 TV쇼 프로그램과 같은 관람거리를 만드는 일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모습이다. 더욱이 영상미디어활용은 예배공간의 장식과 함께 현대적인 문화감각을 더해주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그러한 예배분위기에 동화되면, 긍정적으로 예배는 매우 동적이며, 살아있는 모습을 느끼게 되는 반면, 부정적으로는 대중화되고 현대화된 예배행위는 자유스런 감정표현의 지나침으로 인하여 매우 소란스러우며, 예배의 진지함이나, 거룩함이 결여된 모습으로 예배의 역사와 전통과도 거의 단절된 모습으로 여겨진다.

 

필자는 이러한 급변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예배실제를 경험하면서, 예배의 이러한 변화가 과연 정당한 것인지, 예배형식이 이렇게 변화해도 문제는 없는 것인지, 질문된다. 그리고 비록 한국교회의 예배변화가 이 시대의 변화와 흐름에 상응한 모습이라 할지라도, 기독교 본래의 예전의 의미와 관련하여 생각하며, 분명히 문제점을 가진 것으로 인지된다. 그렇다면, 그 문제점들이 어떤 것들인지, 필자는 해명해 보기를 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배신학의 관점과 성경적이며, 역사적인 관점에서 한국교회의 예배변화실제를 주목하고, 그 실제에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제기하고, 신학적으로 올바르게 견지되어야 할 바람직한 예배형태는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인지를 밝혀보려고 한다.

 

 

I. 예배의 신학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여기서 필자는 예배의 신학적인 근거를 다루어보게 될 것이다. 경배의 대상과 섬김의 방법에 관한 성경적이며, 역사적인 관점에서 이해된 예배신학을 소개해 보려고 한다.

1) 예배는 하나님이 원하신 일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의 형상으로 만드신 것은 다만 모든 피조물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에던 동산에서 창조주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며, 창조주의 뜻을 헤아리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영적인 인격적 교제를 위한 것이었다(창3:8-10). 그것이 바로 예배를 위함이었다고 본다. 그러한 예배하는 행위는 아담이 불순종으로 인한 타락의 사건 이후, 족장시대에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은 짐승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모습으로 구체화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제사행위를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과의 만남, 교제, 의사소통의 나눔을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족장의 제사가운데서도 가장 드라마틱한 예배는 역시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그의 아들을 제물로 하나님께 제사하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창조주가 확인(시험)하였던 사건으로 이해된다.

 

하나님이 인간을 통한 예배를 원하셨던 모습은 역시 출애굽사건과 그 역사에서 확연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것은 모세에게 구체적인 경배를 원하시는 모습을 요구하신 계명에서이다. 10가지 계명 가운데서 제1-2계명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요구라고 할 수 있는 그분만의 섬김에 대한 절대명령이었다. “나 외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섬기지 말라”(출 20:3-5). 그리고 하나님은 레위기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통하여 예물드림의 규례가 어떠해야 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서 얼마나 경배받기를 원하셨던 지를 짐작케 한다.

 

이러한 예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역시 예루살렘 성전을 통하여 실현된다. 성전건축은 다윗이 그 설계도를 하나님에게서 계시 받았지만(역상22:1-5; 28:11-19), 솔로몬의 시대에 이르러 성취되었고(역하3:1-5:1), 장엄하고 영광스런 성전봉헌식이 거행되었다(역하 7:1-10). 그리고 하나님은 그 집에 거하시며, 그의 백성들은 언제나 하나님께 나아와 경배와 찬양으로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속죄의 제사로서 짐승을 제물로, 피 흘려 제사하는 희생제사가 구체적으로 실천되었던 것이다(레4; 호6:6; 사1:10-17).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분열왕국시대 이르러 제물제사의 형식적인 모습에 분노하고, 탄식하는 것을 보며, 형식화되고 거짓 된 제물제사를 거절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사1:10-17). 호세아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는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새롭게 제시되고 있음을 본다. 즉 제사를 원치 않고, 인애와 자비를 원하신다는 말씀에서이다(호6:6). 역사적으로는 바벨론 포로생활 이후의 정황으로 성전붕괴와 함께, 이스라엘의 유대교는 제물이 아닌 토라와 기도중심의 새로운 예배를 드리게 된다(막11:15-17). 그리고 에스겔과 예레미아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은 새 언약의 관점에서 새로운 자기 백성을 찾으시며(렘 31:31-33;36:22-28:), 새로운 예배의 요구가 제시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히10:1-18).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이제 새 언약에 근거하여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택하신 새로운 백성을 찾으시면서, 그들에 의하여 역시 새로운 방식의 예배가 요구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요4:21-26). 특별히 요한은 23절에서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와 같이 지금도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는 분이시며, 영광과 찬양을 기대하시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예배는 요한계시록 4장에서는 천상에서 천사들과 함께 이루어지는 찬양과 경배의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것은 장차 하늘에서 천군천사들에 의하여 이루어질 예배에 대한 예언의 말씀인 것이다(계4:8-11). 기독교는 이와 같이 예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근거하여 행하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2) 예배는 삼위일체 신학에 근거한다.

기독교가 믿고 섬기는 경배의 주인은 천지만물의 주인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기독교의 예배는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기독교의 예배는 실제로 교회역사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초대교회 사도들은 처음부터 예배의 구조를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형성되어야 하는 것으로 만들어 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신관은 후에 니케아 종교회의(325)와 콘스탄티노풀 종교회의(381)를 통하여 기독교의 하나님으로 확정하였다. 그리고 벌써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기독교의 예배가 바로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섬김을 중심한 것임을 예배실제의 행위를 통하여 증거 해 주고 있다고 본다. 그 가장 대표적인 성경적 근거는 역시 바울서신 가운데 에베소서를 들 수가 있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하나님을 향하여 어떻게 경배하며, 그를 섬겨야 할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엡2:8절은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고, 엡3:12절에서도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했으며, 엡3:20-21절에서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시기를 원하노라 아멘”이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을 높이고 그에게 경배하는 예배, 즉 찬양의 한 대목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찬양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 아버지 인 것이다(엡3:16). 여기서 경배의 대상은 하나님이며, 그에게 나아가는 일에 중보자는 역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히4:14; 히9:14), 성령은 그 일의 보증자로서 그 일이 가능하도록 돕는 하나님이심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사도의 증거에 따르면 기독교의 예배는 처음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해에 기초하여 행하여진 예배였으며, 하나님은 경배의 대상이셨으며, 찬양을 받으시는 주인이셨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인간들이 하나님께 나아가 경배와 찬양을 드리게 하는 중보자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것이다. 또한 성령은 하나님과 그 아들에게서 나아온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예배에 함께 하시어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시는 분이시며, 동시에 보혜사 성령으로서 그의 아들을 통하여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깨닫게 하시며, 예배를 영화롭게 하시면서 또한 예배하는 자들을 영화롭게 해 주시는 분이신 것이다.

3)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에 근거한다.

중요한 것은 역시 기독교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에 의존 된 것임을 알게 된다. 먼저 초대교회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예배의 중심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기독교예배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는 장이며, 확인하는 시간으로 이해된다. 그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는 초대교회 설교의 중심적인 내용이었는데, 그것은 그에게서 이루어진 구원의 은혜를 알리고, 전하는 것이 또한 설교의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은 기독교의 세례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고 보는데, 기독교로 개종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된 것이다.

 

초대교회는 공동체로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모였으며, 예수는 그들 모임 가운데 함께 있었다.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의 모임이해는 성찬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언약의 피로 전제되었고, 주님의 만찬으로 부르며 거행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만찬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하나님의 복음 선포와 같은 것이었다(고전1:17-26).

 

역시 기도하는 일에도 예수의 이름이 적용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가 기도를 가르치는 선생이었을 뿐 아니라, 우리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복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기도의 중보자였다. 요한은 기도와 관련하여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였다(요14:13).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역시 경배의 대상으로 칭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를 주님으로 부르면서 경배의 대상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도마가 부활한 주님을 만난 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것은 경배의 모습을 보여준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예수라는 이름으로 경배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아니었다.

 

거룩한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신적인 것이었는데,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언제나 성령은 그 인격성에 대하여 질문되었다. 요한의 증거에 따르면 성령은 보혜사, 또는 위로자로 불려졌다(요14:16).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며, 사람들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인격적인 분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성령은 역시 주님으로서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계시며, 주님으로서 아버지에게서 나아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되었으며, 영화롭게 되었다고 고백함으로 아들과의 관계에서 거룩한 신적인 존재로 불려 졌던 것이다.

4) 예전은 삼위일체의 구도 안에서 실제화 되었다.

기독교의 예전은 모두 세 가지 종류로 발전하였다. 그것은 세례, 설교, 성찬이다. 그리고 그러한 세 가지 형태의 기독교 예전은 언제나 삼위일체의 구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전으로 시행되었다. 첫째, 설교는 내용뿐 아니라, 사건으로서 삼위적인 역할과 관계되었다. 즉 초대교회에서부터 복음 선포는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계획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는 역사를 설명하며, 도래하는 심판과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을 전망하면서 성령의 새롭게 하는 은혜의 선물을 제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복음전파와 그 전파에 대한 인간의 응답도 모두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일이었다. 복음선포로 인하여 믿음이 생겨나고,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희망을 갖는 신앙적인 삶은 전적으로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에게 달렸으며,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자요, 부활하신 자인 것이다(고전1:18-2:16; 갈2:20; 골1:27).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의 이름으로 설교되며, 믿는 자들이 그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또한 전적으로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에 의한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감사의 예전에 충만하게 된다(고후4:5이하).

 

둘째, 세례는 사도시대 이래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시행되었다(마28:19). 그것은 세례의 주인이신 세 인격 각각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한 일이며, 수세 자에게 ‘내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너에게 세례를 주노라’는 말로 언급하면서 세례를 베풀었던 것이다. 세례의 의미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으로 거듭남의 표시이며, 아버지의 가족으로 양자됨의 표시이며(갈4:4),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이며(롬6:1-11), 그의 몸에 지체됨의 표시 인 것이다. 또한 그의 의로 새 옷을 갈아입는 일이요(골3:9이하), 성령을 통한 중생과 새롭게 됨과 기름부음과 봉인의 표시인 것이다(요3:5; 딛 3:5이하; 고후1:22; 엡4:30).

 

셋째, 성만찬은 또한 예전 가운데서 찬미의 제사로 이해된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복음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으로써 사도의 제사장적인 섬김에서 생겨나는 주님께로 돌아와 자신을 드리는 이방인의 헌신된 제물을 뜻한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시며, 성령을 통하여 거룩하게 하신 것이다(롬15:16). 그것은 복음전파에서 귀결되는 주님께 감사를 찬양하는 찬양대의 확대인 셈이다(고후 4:13이하). 그리고 이러한 찬미의 제물(히13:15)은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란 말라기 1:11절의 성취로 이해한다. 그리고 그 백성들에 의하여 해 뜨는 때부터 시작하여 해 지는 시간까지 봉헌된 순수한 제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주니이 행하신 구원의 은혜는 이제 주님의 만찬 가운데서 성례의 표시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성례의 축하행위에는 아버지에 대한 거대한 감사의 기도가 나타나며, 창조와 구원을 이루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과 변화의 신적인 창시자이신 성령을 부르는 관계로 시행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찬에서의 감사기도는 삼위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끝을 맺게 되는 것이다. 또한 성찬에 함께 하신 성령은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아버지의 나라에서 맛보게 될 잔치의 선취적인 행위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원기를 거기서 회복하도록 역사하게 되는 것이다.

5) 예배는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구원계시에 근거한 일이었다.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구원의 계시를 결합하여 사용한 중요한 언어가 ‘뮈스테리온’(μυστηριον )이란 말이다. 뮈스테리온은 세상을 위한 창조주 아버지의 계획을 말하거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하시고, 수행하시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면서 성령에 의하여 완성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말해 주는 것이다(막 4:11; 롬 11:25; 16:25; 엡 1:9이하; 3:1-12; 6:19; 골 1:25; 딤전 3:16; 계 10:7). 그리고 이러한 이해와 함께 그리스도는 스스로 신적인 비밀의 구현(具顯)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구체화(具體化)가 그리스도에게 합치되었기 때문에 교회가 바로 거기에 포함하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러한 신비는 이제 교회에 맡긴 사역과 결합되어 그리스도의 복음이 곳곳에 전파될 때, 그것은 이러한 신비를 맡아 섬기는 일이 되는 것이다(고전 4:1). 또한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모든 교회의 행위들을 이러한 신비(뮈스테리온)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교회는 의식과 여러 축제행사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거대한 신비를 세상에 알리고, 축하하는 일을 돕는 뜻에서 신비라는 말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예전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실현과 그 실현의 결과이며, 또한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를 전제할 때, 기독교예배는 구원역사의 3단계인 창조, 구원, 완성의 과정과 그 과정에 개입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깊이 관련된 사건이라고 본다.

(1)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예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서 제1문고 그 대답에서 우리는 기독교예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즉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이 무엇인지를 물었고, 그 대답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예배의 성격과 그 본질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가 있다. 즉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일이다. 인간의 존재와 삶은 예배생활에 결부되어 있으며,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경배하며, 찬양하는 일에서만 인간이 진정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원래 예수님의 사역은 이러한 하나님의 신비를 들어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중심적 과제로 삼았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나의 음식이라고 하였고(요4:32), 그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며, 아버지는 또한 그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신다고 하였다(요17:1-5). 이러한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화롭게 되는 일은 이제 예배를 통하여 실현된다. 그리고 성령은 주의 영광을 바라보거나, 그 영광을 드러내는 예배 자들과 예배가운데 참여한 모든 자들이 영화롭게 되는 은혜를 예배를 통하여 경험하도록 돕는다(고후3:18). 그 외에도 예수의 제자 된 자들의 이웃을 향한 사랑(섬김)의 삶(삶의 예배)을 통하여 하나님의 더 큰 영화로움은 확대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일에 섬기는 자들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배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을 살아 있게 만들어 주며, 인간의 삶은 역시 하나님을 직시하는 관계 속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전통적인 하나님의 형상의 해석은 첫째 의사소통의 자질로 이해되며, 둘째, 창조사역의 보존과 관리의 책임성으로 이해되며, 셋째,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을 반영하고 나누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질로 본다. 이 세 가지는 역시 예전에서 의식적인 표현을 찾는 관계로 나타나며, 기독교예배의 체계적인 이해를 위하여 중요한 의미를 제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먼저 의사소통은 예배 가운데서 성경의 낭독과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일로 진행된다. 예배참여자는 그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에 찬동하며 기쁨으로 감사와 찬송과 기도로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뜻을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예전은 이러한 방식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대화를 구체적으로 인지하도록 엮어준다. 그리고 그 대화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기쁨으로서 인류의 존재목적에 속한 일이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창조사역의 보존과 관리의 책임성에 대한 것으로, 이것은 인간의 노동과 일을 통하여 자연을 가꾸고 경작하는 사역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그 일들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은 인간에게 신적인 축복을 느끼도록 해 주며, 인간은 감사로써 창조주 하나님께 대답하게 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세계의 한가운데서 이러한 다스림의 왕적인 성직을 수행하게 되었는데, 자연의 다스림, 먹을 것을 주심, 악마를 몰아냄, 질병을 치유하는 일 등에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으로써 성직수행의 성례전적인 표시는 이제 세례(물과 기름), 성찬(떡과 잔)을 통한 교회의 예전의식에서 진행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형상은 삼위하나님의 본질(사랑)을 나타내는 사회성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사랑의 자질인데,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는 방향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롬12:10; 살전4:9이하; 벧전3:8).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은 형제와 자매일수 있는 이웃과 적을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해야 하는 능력으로 요구된다. 그것은 실제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시험일 수 있는 것이다(요일3:10, 14-18; 4:20). 그리고 그러한 성도들과의 사랑의 교제는 내적인 삼위의 신적인 공동체성을 반영하는 모습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러한 뜻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정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인류의 화해를 위한 신적인 중재가 이루어지며, 궁극적으로는 신적인 구원계획의 완성을 위하여 인간의 구원과 새롭게 함이 하나님께 요구되었다. 바울의 증거에 따르면 인간의 타락은 예전적인 표현들 가운데서 이해된다. 즉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에게 감사하는 대신에 인간들은 하나님의 참된 것을 거짓으로 바꾸고, 피조물을 경배하게 되었으며,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섬기는 우를 범하게 된 것으로 지적된다(롬 1:18-25). 창조주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일이 우상을 섬김으로 더 악하게 되었고, 예배는 우상숭배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기독교 신앙으로 오는 것은 이러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뜻하며, 살아계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뜻하며, 죽음에서 일으키시고, 미래의 진로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리는 것을 뜻한다(살전1:9이하). 요한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17:3)고 하였다. 세상에는 여전히 많은 신들과 주인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가 섬기는 신은 한 분 하나님 아버지시오, 한분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신 것이다.

 

기독교 세례는 이러한 타락에서 그리스도에게로 되돌아오는 회개와 개종의 표시이며, 그 의식은 사탄에 대한 거절과 그리스도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의식적인 표현을 찾는 모습이다. 아직도 인간은 사람의 모습을 죽을 때까지 지니고 있기 때문에 역시 죄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게 된다. 그 때문에 죄에 대한 고백은 기독교 예배와 예전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행위인 것이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 깨끗하게 되도록 예전의 시작에서 행하거나, 예배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인간은 의인임과 동시에 죄인임이 고백될 수 있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구속사와 예배

20세기의 예전학자들은 초대교회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이 유대교의 유월절의 신비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확인해 주고 있다. 그리고 초대교회는 부활절에 그리스도의 유월절 행사를 기억하고, 매년 축하하게 된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를 기억함이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기간에 세례가 베풀어졌고, 오순절 때까지 금식하는 풍습을 가지게 되었다. 그 이유는 오순절은 부활이 가져다 준 그리스도의 부활과 새로운 생명의 축제와 함께 도처에서 기뻐하는 기간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예배가 얼마나 기독론과 관계된 일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삼위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의미를 잘 드러내 준다고 본다. 성탄절은 이 세상의 권세자들을 십자가에 매달게 하는 영광의 주님이 현현하신 날로서, 죽음에서 그의 부활로 확인된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일로 보았던 것이다. 오순절은 복음의 전파를 통하여 땅의 모습을 새롭게 하려고, 아버지가 아들의 간구에 따라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신 부활에 대한 보증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다.

 

기독교예배는 이러한 성령의 이해와 함께 인간구원과 모든 만물의 완성(종말)사이에서 새롭게 함을 전하고 보여주며 경험하게 하는 교회의 모습을 특징짓게 해 준다. 그리고 예전은 이러한 십자가 사건에 대한 기억(anamnese)이면서, 동시에 성령임재의 요청의 기도(epiklese)인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완성된 역사를 기억함이며(고전11:24이하), 또한 새롭게 함의 신적인 창시자이신 성령의 부르심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딛3:5이하). 그런 뜻에서 기독론과 성령론은 서로 조건적인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성령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을 취하고, 전파하게 하기 때문이며(요14:26; 16:14이하), 예전은 그 예전이 아버지의 나라를 선취하는 한, 미리 맛보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는 이러한 구속사 안에서 은혜를 통하여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인 그것을 축하하며, 축하하는 그것을 전하며, 전하는 그것을 계속하여 보여주는 순환관계에 있는 것이다.

(3) 창조의 완성과 예배

기독교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사건에 근거하여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약속된 재림을 바라보면서 역사 속에서 행하는 교회의 경배이다. 또한 초대교회의 예배에서 행한 ‘마라나타’의 기도 소리는 주님이 여기에 임재 해 계신 것처럼, 이미 역사 속에 오셨던 것을 확인하는 일로서, 그리고 그 주님이 지금 이 예배에 오신다는 전갈로서, 그리고 마지막 심판 날에 주님께서 오시기를 간절히 요청하는 뜻으로 이해되는 기도였다. 그러나 요한 계시록 22:20절의 말씀을 생각할 때, 마지막 날에 심판의 주님으로 오시기를 요청하는 기도로 더 이해된다.

 

그런 뜻에서 성찬은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전파하는 것이며, 떡을 뗌에서 부활하신 자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며,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 시행하는 복음의 선포적 행위로 이해된다(고전11:23-26). 그리고 기독교 예배는 이와 같은 종말론적인 전망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아직도 불신자들이 존재하고 있는 한 설교가 필요하며(마24:14),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의 시작을 표하기 위하여 세례가 필요하게 된다. 그리고 반복적인 회개와 죄 용서도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믿는 자들이 다시 은혜에서 떨어지거나, 아직도 완전히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완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까지 호소와 간구와 도고가 필요한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교회는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주님의 기도를 항상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종말론적인 사건과 관련하여 기독교의 예배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 것으로 이해한다. 첫째, 지상의 예배가 천상의 예배와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역사 속에서 거룩, 거룩, 거룩을 노래한다면, 그것들은 벌써 천사들과 하늘의 전 무리와 함께 결합된다는 것이다. 둘째, 역사적인 예전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의 식사에서 미리 맛본 사건으로 이해하였다. 그 때문에 떡과 포도주로 여겨진 지금 교회의 성찬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삼위하나님과 나누게 될 교제의 언약의 담보로 여겨졌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과 완성을 향한 준비와 선취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앞서 수행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미 구원받았으며, 새롭게 된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창조세계의 한 복판에서 삼위의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며, 그 하나님으로부터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사람들은 완전한 하나님의 일 가운데서 그들의 왕적인 자유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II. 한국교회의 예배변화에 나타난 문제점

 

지금 한국교회의 예배는 이전의 역사적이며, 전통적인 예배경험에서 보면 매우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그 변화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면 왜 한국교회의 예배는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는가? 이러한 물음의 대답은 간단하게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추리해보면 전통적인 예배가 새로운 세대의 사람들에게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문제제기와 함께 새로운 예배형식의 변화와 도입이 주장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예배형식의 변화에 대한 요구는 교회의 역사에서 각 시대마다 있어왔던 일이며, 또한 기독교의 예배역사는 그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예배변화는 당연한 것으로 수용될 수 있으며, 겪어야 할 불가피성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의 관심은 이러한 한국교회의 예배변화가 예배신학적인 관점에서 얼마나 정당한 것인지, 또는 그러한 변화에서 예배의 본질을 놓치거나, 왜곡시키는 것은 없는지를 살펴보려는데 있다. 여기서 필자는 이러한 문제제기를 위하여 한국교회의 예배변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큰 두 가지 요인을 전제하려고 한다. 첫째는 한국교회의 예배가 아직도 종교개혁의 전통에 충실한 예배와 예전으로 정착되지 않았다는 것이며, 둘째는 한국교회의 예배가 지극히 미국 자유교회의 예배형태로부터 지나친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생각하면 한국교회의 예배는 원래 선교사들에 의하여 전해진 지극히 전도중심의 예배였으며, 그것은 후에 설교중심의 예배로 정착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예배는 불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전도사역과 연결된 예배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의 예배는 한국교회의 주일예배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 것으로 이해하는데, 그것은 처음부터 예전중심의 예배가 아니라, 복음전도에 적합한 집회형태의 예배가 쉽게 수용되었고, 역시 설교에 중점을 둔 예배가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도 집회스타일의 예배와 설교중심의 예배는 이제 산업후기사회로 전환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지극히 단조로워진 기존예배의 한계를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역시 다수의 대중적 참여를 이끌고, 참여한 회중들이 예배에서 더 큰 은혜의 감동을 경험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고, 그것이 새로운 세대가 즐겨 이용하고 있는 음악적 도구와 새로운 찬송들에서 발견한 것으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지금 한국교회의 예배는 지극히 감성을 자극하는 찬양중심의 예배로 전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업후기사회에 이르러 문화의 다양성을 경험하면서, 또한 삶의 자유로움을 경험하면서, 한국교회의 예배는 더욱 이 시대의 사회적 경향을 반영한 모습으로 전환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면 이러한 예배변화에서 보여 지는 한국교회예배는 과연 어떤 문제를 지니게 되었는가?

 

1) 예배의 주도권 문제

한국교회의 예배는 예배의 주도권이 하나님보다 사람에게 더 두고 있는 모습이다. 왜냐하면 주님을 향한 예배의 표현에서 회중의 노력과 행위가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배의 주도권은 어디까지나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말에서 예배(禮拜)는 예를 갖추어 절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태도를 잘 표현한 말인데, 그러나 구미교회가 사용하는 예배개념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즉 영어로 예배는 ‘God's Worship-Service로, 독일어는 ‘Gottesdienst’로 표현된다. 그 뜻은 ‘하나님의 경배-봉사’이며, 독일어에서도 역시 ‘하나님의 봉사’로 이해된다. 예배를 왜, 신을 섬기는 인간의 일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인간을 섬기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봉사’라고 하는 것일까? 그 대답은 예배가 하나님과 인간 양쪽이 각각 서로를 섬기는 행위로 이해될 수 있지만, 그 섬김의 주도권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으로는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봉사’(Gottes dienst/God's Service)란 표현은 소유격용법에서 소유주격으로 이해하여 신학적으로 예배는 하나님의 섬김이 우선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을 섬겨주신 ‘하나님의 일’(Opus Dei)의 구체적인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바로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신 일이며, 그의 십자가를 통하여 속죄와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 일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 예배에 성령으로 임재하신 주님은 회중으로 하여금 그 일을 기억하게 하며,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확인하게 하며, 은혜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일이 가능하도록 역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일을 경험하는 하나님의 활동의 장(場)인 셈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지금 하나님의 활동(일)이신 예배에 참여하여 거룩한 하나님과 대면하고, 그와 교제하며, 대화하는 가운데서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하나님역시 회중의 자신을 향한 마음(믿음)을 헤아리게 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은 예배인도자를 통하여 설교와 성찬의 모습으로 자신의 뜻(약속과 사랑)을 나타내 보이며, 인간은 그 일에 감사와 찬양과 기도와 예물드림으로 하나님께 사랑하는 마음(믿음)을 표하며, 그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은혜)에 대하여 인간이 반응하는 모습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인간의 반응까지도 하나님의 활동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예배는 지금 이러한 하나님의 일이 전제되고 예배에서 표현되며, 강조되기보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깊이 있게 음미하여 나타나는 반응보다는 그 차원을 뛰어 넘어 예배자의 감성을 지나치게 자극하고, 호소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는 인간적인 노력과 행위가 요구되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이해되어, 예배의 주도권이 마치나 인간에게 있는 것처럼 해석되고 있는 것은 문제라는 점이다.

 

이러한 인간적인 행동의 요구와 강조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는 요4:24절의 말씀을 들고 나온다. 여기 ‘신령은’ 인간의 영(spiritus hominis)으로 해석되고, 예배는 인간이 온 힘과 정성을 들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하는 열광적인 행동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여기 신령을 인간의 영으로 이해하는 것은 본문의 왜곡이며 옳지 않은 해석이다. 그러면 여기 신령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가?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영’(Holy spirit)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보아야 한다. 최근에 발행된 성경 새 번역은 다행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말로 바로 잡아 놓았기에, 그러한 오해는 교정될 수 있을 것을 기대한다. 그리고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말은 본문전체(요4:21-26)의 맥락을 보면, 더욱 분명한 이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본문의 내용은 수가성 여인이 예배장소에 대하여 질문할 때, 예수님이 대답한 것인데, 예배의 중요성은 예배장소가 아니라, 경배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고 예배하는 것이어야 함을 강조하였고(22),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예배할 때가 이르게 될 것을 언급하면서, 곧 이때라고 하였고,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는 것은 반복하여 강조하였고(23-24), 또한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하였다(23). 그리고 메시아가 오시면 그러한 사실을 알려줄 것이라고 이 여인이 고백할 때, 예수님은 바로 자신이 메시아(구원의 중보자)란 사실을 밝히게 된다(26). 이러한 대화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이시며, 구속의 주(중보자)가 되신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으로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께 예배해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옛 언약에 근거했던 구약의 성전제물제사는 폐지되었고, 이제 새 언약에 근거한 새로운 예배방식(원리)을 보여주신 중요한 사건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오직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믿음으로 나아가면 그것이 바로 예배의 절대충분조건이며, 그 어떤 인간적인 노력과 특별한 행위가 예배 시에 요구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강조한다면, 회중은 지금 예배가운데 임하여 활동하시는 주의 성령이 회중 각자의 마음에 역사하도록 오직 마음 문을 활짝 열어 놓고, 그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으로 예배에 임한다면 충분한 행동이요, 태도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배방식을 무시하고, 예배에서 지나친 인간의 노력과 과도한 행동이 요구되는 것처럼 강조한다면, 그 예배는 기독교의 예배가 아니라, 유대교의 제물제사나, 이방종교의 제사와 같은 모습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적 위주로 인간을 평가하는 세속적 가치관의 작용인 ‘신 공로주의’(Neo-Meritorimus)의 부추김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2) 교회의 수적성장의 도구로 이용되는 예배의 문제점

예배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를 높이며, 그에게 경배하는 믿는 자들의 일이다. 그러나 실제로 예배에서 일하시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예배공간에서 인간의 활동은 오직 그의 은혜아래에서 반응하는 모습일 뿐인 것이다. 그러한 반응은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의 뜻에 순종하는 일인 것이다. 이러한 모습 외에 다른 목적으로 예배는 존재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예배가 교회를 부흥케 하고 수적으로 성장하게 하는 도구로 인식하는 경향에 빠져있는 모습이다. 참여한 회중(또는 새 신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감동을 받고, 그들이 회심에 이르게 해야 할 것인지? 복음을 전하려는 의도를 전제한 예배를 지향하고 실현하고 있는 모습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한국교회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지금 음악적인 도구와 방법들을 도입하여 참여한 회중들이 감동적인 상태를 경험하도록 찬양중심의 예배에로 전환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예배는 사람들이 쉽게 감동되고, 교회에 대한 호감을 가지며, 새 신자들이 교회에 쉽게 접근하고, 교회 인이 될 수 있는 수단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지금 경배와 찬양의 예배, 또는 열린 예배가 보여주는 예배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리고 소수의 몇몇 교회들(지방이나, 서울)은 그러한 형태로의 예배전환을 통하여 사람을 많이 모우는 일에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난 것으로 보여 진다. 하지만 실제는 그러한 예배를 구사하는 교회와 그렇지 못한 교회 사이에서 발생하는 교인들의 수평이동의 결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점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90년대에 이르면서 한국교회 예배갱신의 열풍과 함께 시작된 미국의 자유교회예배형식의 도입은 ‘경배와 찬양’, ‘빈야드 예배’, ‘열린예배’(구도자예배)등으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렇게 예배변화를 주도하는 일이 교회의 수적인 성장에 도움을 주는 일임을 강조하고, 예배변화를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한국교회는 지난 10년 전부터 예배형식 바꾸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2006년 5월 국가통계청의 발표는 한국교회가 수적으로 성장되기는커녕 -1.6%의 성장이란 마이너스 성장통계를 제시함으로써 예배변화가 실제로 아무런 성장에 변화를 초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 셈이 되었다. 특히 교회성장의 수단으로 예배 바꾸기를 주장하던 분들은 현재 모두 침묵하고 있는 모습으로 이해될 뿐이다.

3) 설교요소 하나만의 극대화로 인한 문제점

설교요소 하나만을 극대화 한 한국교회예배는 지금 그 한계를 직면하고 있는 모습이다. 종교개혁의 역사는 오랜 논쟁을 통하여 두 가지 은혜의 수단인 ‘성경말씀’과 ‘성례(세례와 성찬)’를 예배구성의 기본요소로 삼았었다. 이것은 초대교회와 로마교회로 오면서 이미 확정되었던 일이다. 그렇지만 중세로마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되어야 하는 방식을 간과함으로써 종교개혁은 이 방식을 회복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종교개혁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복음)의 전파라는 대 전제에서 그 전파의 두 가지 방식인 설교와 성찬을 예배의 기본요소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이 이점에 있어서 통일된 입장을 견지하지 못하고 분리시키는 전통을 남겨주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역시 루터와 쯔빙글리의 예배이해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때문에 한국교회의 다수는 이 두 가지 요소를 균형 있게 사용하는 예전을 아직도 예배에서 실천하지 못하고 있으며, 설교(말씀)하나만을 중심한 예배를 항상 반복하는 전통을 따르고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현재 설교하나만의 요소를 극대화하는 한국교회의 예배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매스미디어의 활용(녹화나, 동영상, 또는 인터넷)을 통하여 지역공동체의 예배에 출석할 필요 없이 가정에서나 개인적인 공간에서의 예배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한계의 극복으로서 새로운 예배요소로 이해되는 음악적 요소를 대폭 도입하여 예배의 형태를 새롭게 전환시키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예배변화의 근본원인들은 설교요소하나만을 예배의 전부로 극대화했던 결과로 이해되며, 설교요소의 단조로움을 목회자 스스로가 현재 인정하고 있는 모습이라 할 수 있으며, 쉽게 음악적 요소의 도입과 새로운 찬송들의 도입, 그리고 찬송리더들의 활동으로 대체하고 있는 모습에서 확인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이러한 한 가지 예배요소의 단조로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필자의 생각은 예배참여자들의 마음을 자극하고, 쉽게 대중의 마음을 감성적으로 움직이려는 소비자중심의 예배형태로의 전환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그 일을 깊이 있게 음미하여 반응하게 하는 관계를 더욱 살아 있는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종교개혁자들이 새롭게 확인했던 하나님말씀전달의 또 다른 방식인 ‘성례’(Sacrament)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예배에 중요한 요소로 설교와 함께 적용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결코 과학기술의 발전에 의한 매스미디어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면서도, 가장 회중의 신앙적인 감성을 자극하며, 실제적인 주님의 임재를 가시적으로 경험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성찬의 사용인 것이다. 루터는 성례의 가치를 인식하면서 세례는 물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주님의 만찬은 약속의 말씀(verba testamenti)을 펼쳐 보이는 일로 인식하였으며, 칼빈 역시 주님의 만찬을 주님이 제정한 가시적 말씀(verba visivilia)의 표지(標識)로 이해한 어그스틴의 생각을 그대로 수용하여 설교와 성찬이 함께 있기를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성례, 특히 성찬의 예전적인 가치에 대해서 필자는 뒤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하게 될 것이다.

 

4) 음악적 도구와 찬송리더의 활용을 극대화한 찬양중심예배의 문제점

한국교회예배갱신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시 음악적 도구의 활용과 새로운 찬양의 도입에 있었다는 것을 필자는 앞에서 여러 방식으로 언급하였다. 큰 교회들은 주일 예배에 오케스트라가 동원되고, 가장 경건한 음악을 들려주는 클래식한 악기들이 사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음악적 도구의 도입과 적용은 한국교회의 예배를 더욱 동적이며, 감성적이며, 미학적인 의미가 풍미하도록 해 주고 있음을 부인할 길이 없다고 본다. 그러나 그러한 음악적 도구와 예배찬송의 과도한 이용이 예배의 의미를 더욱 풍성하게 해 주는 반면, 문제점을 함께 지니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로 문제가 되는 것은 찬송 리더들의 역할에서이다. 그들은 회중 앞에서 온 몸을 흔들면서 회중의 찬송을 압도하고 리드한다. 그리고 회중을 향하여 찬송을 인도하는 중에 엄청난 멘트를 던진다. 여기 ‘엄청난 멘트’란 이전에 설교자나, 부흥사가 전도 집회 중에 회중을 향하여 회개를 촉구하기 위하여 던져지던 언어적 표현들로써, 그들의 입에서 서슴없이 흘러나오며, 또한 리더 중의 대표는 공중의 기도를 직접 인도하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날의 예배순서에는 이미 대표기도 자가 따로 명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설교자를 위한 기도와 은혜받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행하며, 또한 통성기도를 요청하는 일을 서슴없이 행한다. 교회의 담임목사님은 이러한 찬송리더들의 행동에 대하여 전혀 간섭하지 않는 모습이다. 오히려 리더들의 멘트에 반응하는 성도들의 태도에 만족하고 반기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이러한 찬송 리더들의 멘트는 찬송 중에 성령의 임재를 느끼도록 강조하는 것을 보게 된다. 찬송을 부르면 지금 ‘성령께서 각자의 마음에 임재 하신다’는 주장이 CCM을 전공한 분들에 의하여 공공연히 주장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주장이 정당한지는 역시 신학적인 검토가 요망되는 일이다. 대체로 지금까지 예배가운데서 행하는 찬송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의 순서로서 감사의 표현에 한정되었지, 그 차원을 뛰어 넘어 성령임재의 수단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의 평신도와 청년들의 주님을 향한 강한 영성은 감정의 느낌과 표현의 민주(자유)화 시대를 맞이하면서, 그러한 찬송 부르기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마음을 표현하는 도구로써의 의미를 넘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경험(체험)하려는 수단으로 확대된 느낌이다. 물론 젊은 세대들은 이전의 기성성도들이 즐겨 부르던 예배찬송에 만족하지 않으며, 새로운 찬송으로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려는 예배의 속성을 지니고 있음은 결코 평가절하 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현재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찬양중심의 예배는 예배를 지나치게 감정의존적인 예배로 이끌어가는 모습이며, 더욱이 하나님의 임재경험의 수단으로 이해하려는 관점은 아무래도 예배의 근본원리에 맞지 않는 태도이며, 가능한 지양하는 것이 더 나은 올바른 예배태도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찬송과 악기들은 예배를 돕는 도구와 수단들이지, 예배의 주체가 아니라는 점에서이다. 그리고 현재 예배에 적용된 과도한 악기사용과 찬양중심의 예배는 기독교의 예배를 엔터테인 하는 쇼 프로그램으로 오해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예배가 일시적으로 회중들의 마음을 감동되게 하여 사로잡는 일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아닌, 소비자중심의 예배라는 문제점을 안게 될 것이다.

5) 영상매체 활용의 문제점

예배 공간에서 교회는 왜 멀티미디어를 사용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큰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마이크로폰의 이용이 그렇고, 대형영상매체의 활용이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영상미디어의 유용성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예배에서 필수적인 도구로 이해되고 있는 모습이다. 특별히 찬송 가사를 영상에 띄워줌으로써 회중은 쉽게 찬송을 부를 수가 있다. 또한 설교할 성경본문을 명시하거나, 설교 내용의 간략한 주제제시가 가능하며, 커뮤니케이션의 도구의 의미는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도구사용이 초래하는 역기능은 외면될 수 없을 것이다. 즉 예배공간에서 미디어사용은 대형화된 큰 교회들에서 가능한 일이며, 소규모의 회중을 가진 소형교회에서는 가능하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영상 앞에서 예배하는 일이 영적체험이나, 하나님의 만남을 가능케 하는 것처럼 인식된다면 그것은 큰 문제가 될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커뮤니케이션의 도구이지, 예배에서 그 어떤 의미를 생산하는 주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영상미디의 사용은 언제나 실체의 전달이 조작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특히 예배의 의사소통을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로 이끌기보다는 영상에 의하여 조작될 수 있는 간접경험이란 면에서 사용의 신중성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현재 예배 공간에서 영상매체의 사용은 하나님과 주님의 일을 생각하고 그분의 은혜를 각인시키는 일보다, 사람인 설교자의 이미지가 지나치게 각인되는 위험은 아무래도 미디어 사용의 근본문제라고 본다면 지나친 기우일까? 질문된다.

 

6) 성찬을 망각하고 있는 한국교회 예배의 문제점

성찬을 자주행하지 않는 한국교회의 예배는 역시 문제이다. 한국교회는 성찬을 거의 잊고 있는 모습이다. 왜 성찬을 자주 행하지 않을까? 어떤 이들은 가톨릭교회의 유산으로 오해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개신교는 원래 가톨릭교회의 성찬중심의 예배를 설교중심의 예배로 개혁한 것이 아닌가? 오히려 반문한다. 그러한 설명은 모두 교회의 역사에 대한 무지 때문으로 보인다. 어떤 목사님은 교인수가 많아서 매우 번거롭고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성찬은 자주 시행할 수 없다고 변명한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생긴다. 성찬을 거행할 수 없을 정도로 왜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모았나? 필자는 성찬이 그 만큼 중요한 예배의 요소라는 사실에 대하여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강조해 본다.

 

교회 역사를 보면, 초대교회에서부터 하나님이 행하신 일(구원)을 기억하고, 영으로 함께 하시는 주님을 경험하고 확인하기 위하여 적용한 가장 중요한 방식이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이신 인류 사랑의 극치였다. 그 때문에 교회공동체가 모여 식사시간을 이용하여 유월절최후의 만찬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약속대로 떡과 잔을 가지고 그의 죽으심을 기념하면서(memoria),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확인하고 경험하였던 것이다(epiklese). 사실 예배는 그리스도의 언약에 의한 구속사건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려고 설교(설명)가 필요했으며, 그 믿음이 견고해 지도록 성찬은 하나님사랑을 경험하고 확인하는 가시적 은혜로 여겼던 것이다. 그 때문에 어그스틴도, 칼빈도 성찬을 성령이 함께한 은혜의 수단으로 인정하고 ‘가시적 말씀’(visible word), 또는 ‘가시적 은혜’(visible grace)로 불렀던 것이 아닌가? 한국장로교회 예배모범에도 성찬은 몇 회를 하든지 당회가 교회의 유익한대로 결정하여 시행할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 년에 한두 번 거행하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예전의 모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설교하나의 요소만을 극대화함으로써 설교 잘하는 사람을 따라서만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이상한 신앙스타일을 가진 기독인을 한국교회는 생산하게 되었고, 설교우열은 결국 교회공동체를 분리시키는 교회공동체의 아픈 상처를 생산하는 일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한국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의 참된 코이노니아를 경험하지 못하는 공동체의 문제를 가지게 되었다고 본다,

 

III. 한국교회의 바람직한 예배와 예전의 방향은?

 

필자는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예배와 예전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6가지 관점의 문제점들을 지적해 보았다. 이러한 문제들의 근본원인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교회의 예배와 예전이 지나치게 미국 소수의 자유교회들의 예배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리고 예배의 성경적이며, 역사적인 전통과 관련시키지 않았던 것에서 그 근본이유를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한국교회의 예배가 설교요소하나에만 전적으로 의존된 예배를 실천한 것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본다. 그러면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예배신학을 바르게 견지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설교중심의 예배는 불가피 한 모습이지만, 말씀에 근거한 예전적인 예매로 전환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본다. 필자는 미래적으로 한국교회의 바람직한 예배와 예전의 실천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예배개선의 방법과 방향을 제시해 보려고 한다.

 

1) 하나님은 교회공동체의 예배뿐 아니라 삶의 예배를 원하신다.

그것은 십계명에서 확인되는 일인데,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일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역시 예수님에게서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나타난다(마22:34-40). 그러한 두 가지 종류의 사랑은 구체적으로 주일에 지역 교회공동체로 모여서 준비된 예배의식에 따라 행하는 공동체의 예배이며, 다른 하나는 신자 각자가 자신의 삶에서 이웃과 사회를 향하여 섬기는 삶의 예배라고 할 수 있다. 십계명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예배는 삶의 예배로서 6일 동안 사회적 삶의 공간에서 이웃을 향하여 실천해야 하는 의와 평화의 실현의 의미를 가진 예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예배가 어떻게 실천되어야 할 것인지는 “너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롬12:1-2; 롬6:13)는 말씀에서 확인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일에 공동체의 의식을 중심한 예배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각자가 삶에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예배에 대해서는 분리해서 생각한다. 실제로 공동체의 예배와 개인의 삶의 예배는 서로 다른 예배가 아니고, 하나의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공동체의 모임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듯이 각자의 삶에서 이웃에 대하여 하나님의 경배가 그대로 연결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대한 바리새인들과 논쟁하신 사건에서 교훈을 받는다. ‘하나님은 인애와 자비를 원하신다’는 호세아6:6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았더라면 무죄한자를 죄인으로 몰아붙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로 바리새인들의 율법의 문자적 이해를 예수님은 지적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임을 밝히면서, 안식일에 고난에 처한 이웃을 돕는 일이 곧 안식일 지킴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교훈한다(마12:1-8).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의식 중심의 예배와 각자의 삶에서 이웃을 돕는 사랑의 행위가 동일하게 중요한 예배의 의미를 가진 일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사야(사1:10-17)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의 뜻은 형제의 고난과 이웃사랑을 성전에서의 제물제사보다 더 귀한 것으로 여긴 것 같은 이해를 얻게 된다. 그러나 그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경배는 공동체의 모임과 각자의 삶과 연결된 하나의 예배생활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2) 예배와 예전양식의 기본적인 통일성이 견지되어야 한다.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원래 다양한 예배양식을 만드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 이유는 역사적으로 종교개혁의 3대 지도자들(루터 쯔빙글리, 칼빈)이 예전의 통일된 전통을 남겨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쯔빙글리는 루터와의 성만찬논쟁에서 성례를 은혜의 수단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성찬은 년 중 4회 정도에서 만족하게 하였던 것이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매 주일 설교와 성찬이 함께 있는 예배를 원했지만, 쯔빙글리의 영향을 더 많이 받고 있었던 제네바의 시의회 위원들의 반대로 뜻을 실현하지 못하고, 년 4회의 실행전통을 남기게 되었다. 하지만 1542년 그가 제시한 기도모범서는 설교와 성찬이 함께 진행되는 예전의 형식을 그대로 남겨주었다. 그리고 비록 루터의 성찬신학에 쯔빙글리도, 칼빈도 동의하지 않았지만, 루터는 설교와 성찬이 매주일 함께 시행되는 예배전통을 남기게 되었다.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통일되지 않은 예전형식의 전통 때문에 개신교 내에서는 항상 예전양식의 통일성에 대한 질문과 과제가 남아 있게 되었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예배형식의 표현에 있어서는 자유성을 인정하고 있지만, 예전형식의 통일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질문되고 있으며, 필자 역시 풀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현대 예배신학자들은 특히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분리된 예배요소를 하나의 통합된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리려는 시도가 1982년 WCC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 당시 WCC는 남미지역 페루의 수도 리마(Lima)에서 ‘세례, 성찬, 직제’라는 주제의 신학적인 토론을 거친 후, 새로운 통일된 예전서로서 ‘리마예전서’(Liturgie of Lima)라는 것을 만들어 실천하도록 제안하였다. 그것은 분리된 설교와 성찬의 예배요소를 하나의 통합된 예배형식으로 형성하여 제시했던 것이다. 물론 그 일은 개신교의 어느 그룹에서도 수용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성공한 일은 아니지만, 통일된 개신교의 예전형식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예배의 역사적 사건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독일의 개혁주의 예배신학자 랑게(E. Lange)의 제안에 따르면, 그는 기독교예배를 ‘언약갱신의 축제’(Fest der Budeserneurung)라고 명명하였고, 언약과의 관계에서 기독교 예배를 이해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예배의 구성은 ‘참회와 용서’ (absolutio), ‘언약의 청취’(promissio)와 성취, ‘세상으로의 파송’(missio)이란 세 단계구조로 형성되어야 함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흐름을 따라 그 전.후 관계에서 다른 부수적인 순서들을 연결하도록 하는 방법으로 이해된다. 물론 랑게는 ‘증거’(설교)와 ‘고백’(성찬)이란 이름으로 분리된 설교와 성찬중심의 두 종류의 예배를 통합하였고, ‘의식으로서의 주일 공 예배’(증거/설교)와 ‘일상의 삶으로서의 예배’의 연결도 강조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주일예배는 삶의 예배를 성취하기 위한 영적능력을 충전하는 예배로 이해된다(롬12:1). 그리고 교회는 이러한 예배구성은 전통적인 설교중심의 예배가 아니라, ‘말씀중심예배’로서의 특징을 보인다. 즉 말씀중심예배는 전통적인 설교중심예배가 예배의 모든 순서들을 설교순서하나에다 종속시켜, 설교를 절대화하는데 반하여, 설교와 성례를 연결하며, 동시에 예배의 모든 순서들이 각각 은혜의 독립된 수단으로써의 기능적 역할을 드러내게 하여, 궁극적으로 예배의 모든 요소와 순서가 성경말씀에 통합되게 해 주는 모델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예배신학자 폰알멘도 같은 맥락에서 말씀중심예배의 가치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모든 예배의 순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직접적인 표현이거나, 간접적인 표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직접적인 것은 묵도(성경인용), 성시교독, 주기도문, 성경낭독, 설교, 성례, 축도(고후13:13)등이며, 간접적인 것은 사도신경, 찬송, 기도 등으로 보았다. 그리고 ‘말씀중심예배’는 하나님과의 대화와 의사소통이 충분히 이루어지도록 언어적 표현을 새롭게 해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예배에서 각각의 순서진행은 하나님과 회중사이에 교환되어야 할 대화와 의사소통수단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부르심(말씀과 설교, 성찬, 축복)과 인간의 응답(기도, 찬송, 신앙고백, 헌금)은 서로의 마음을 표현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기독교의 예배의 표준과 통일성은 어디까지나, 설교와 성찬이 함께 시행되는 예배에서 찾아야 하며, 그것은 동일한 말씀중심의 예전이기 때문에 절대로 필요 되는 일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외의 반응관계는 다양한 모습이 첨부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한국교회 예배는 이 두 가지 기본요소가 예배의 중심에서 실천되는 말씀중심의 예전으로 전환해 가야 한다고 본다.

3) 예배의 인간학적인 목표는 믿음, 소망, 사랑의 신앙본질 회복에 있다.

예배는 회중과 하나님 사이에 서로의 마음과 생각을 나누는 대화의 과정이며, 의사소통의 과정이다. 대화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회중의 마음은 서로 교환된다. 회중은 그 날의 선포되는 설교말씀과 성찬시행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뜻)이 어떠했으며, 어떠한지를 알게 되고, 하나님은 예배에서 표현되는 죄고백과 기도와 찬송과 예물드림의 순서를 통하여 회중의 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이 예배에서 회중이 경험하는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복이다. 생각하면 예배의 진행과정에 참여한 회중은 대부분 삶의 긴장 가운데서 흔들린 믿음(신앙)의 상태로 하나님께 나아온다. 그리고 예배시작에서부터 인도자의 기도는 회중의 마음이 주님을 바라보게 하며, 각 순서진행에서 표현되는 언어적 내용들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용서와 임재하심을 느끼게 해 준다. 그리고 이러한 예배순서의 진행가운데서 긴장된 모습으로 예배진행을 따르게 된다. 역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예배 가운데서 진행되는 설교와 성찬에서 나타나며, 회중의 마음은 역시 죄고백, 찬송, 기도, 예물드림의 순서에서 표현된다. 그리고 회중의 경배하는 마음은 역시 믿음, 소망, 사랑으로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경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대체로 예배형식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회중의 응답의 관계로 엮어가게 된다.

 

이러한 예배진행에서 중요한 것은 예배인도자, 설교자, 대표기도자 또는 찬송인도자의 역할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임재와 그의 뜻, 그의 사랑을 나타내는 일과 회중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은 오직 예배에서 역할 자들의 언어적 표현을 통하여서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순서를 맡은 자들은 각각의 역할이 진지하고, 신중하며, 감동적이어야 하며, 품위 있는 언어로 잘 표현하여, 회중의 참여된 마음이 일치감을 갖도록 해야 한다.즉 그들의 모든 언어적 표현들은 회중들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호소하며, 탄원하고 싶은 내용을 헤아려 잘 표현함으로써 회중들과 한 마음이 되도록 할 때, 참여한 회중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어 그들의 모든 신앙적인 포현들을 수납하신다는 느낌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 반대는 회중을 실망시키며, 성령으로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느낌에서 멀어지는 감정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설교자의 역할도 동일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잘 준비되어야 한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준비하여, 충실한 내용으로 성실한 자세로 진지하게, 설득력 있는 합당하고 충족한 언어표현이 된 설교를 하게 될 때, 회중은 하나님의 뜻을 그 설교의 표현에서 쉽게 헤아리며, 각자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거기서 듣게 되는 것이다. 그 반대는 회중의 마음을 참담하게 만들며, 예배시간에 대한 시험을 갖게 할 뿐이다. 그리고 성찬의 집례에 있어서도 목사는 그 표현의 양식을 진지하게 전개시켜야 할 것이다. 성찬은 적어도, 그 의미의 해석에 있어서 3가지 차원이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골고다의 십자가의 사건의 구속사의 의미이다(속죄, 화해, 구원). 둘째, 현재 이 만찬에 임재하신 부활의 주님과 직접 살과 피를 나누는 참여와 교제의 의미이다. 셋째, 영원한 만찬의 선취적인 의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헌신적 사랑의 경험이요, 확인의 시간이며, 하나 됨의 확인의 의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세상과 이웃을 향한 화목의 복음을 위하여 자신을 헌신함이다. 단순한 십자가 사건을 기념의 의미를 뛰어 넘어, 주님의 헌신에 감사하며, 다시 자기를 주님을 위하여 내어 놓는 결단이 촉구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예배에서 표현되는 예배인도자의 여러 축복의 기도와 멘트들 또한 신중하고, 진지하게 표현되어야 하며, 감동적인 수사로 표현할 때, 역시 영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거기서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회중은 죄고백과 찬송과 기도와 예물드림의 경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 예배에 임하신 성령은 역시 경배하는 자들이 또한 영화롭게 되도록 은혜를 풍성하게 하실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성에의 참여이며,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하는 일이다.

 

그리고 회중이 예배의 전 과정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은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확인하는 새로움의 은혜이다. 그것은 복음의 진수를 다시 깨닫는 일이며, 실존적인 인간의 삶과 관계된 복음의 가치를 확인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즉 모든 인간들이 찾고, 확인하려는 존재근거의 밝힘으로써 믿고 의지해야할 인생의 참 주인이 누구인 지를 깨닫는 일이며(믿음), 그리스도에게서 무엇을 더 인내하며 기대하고 기다려야 할 것인지를 알게 되는 일이며(유일한 소망), 그리고 세상과 이웃과의 관계에서 예수 제자의 삶이 어떠해야 할 것인지(사랑)를 확신하게 되는 일이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통하여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깨달은 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으로, 실존적으로는 땅의 삶에서 어떤 일을 실천하고 살아야 가장 보람되고 행복한 일일 것인지를 찾는 물음의 대답이라고 본다(하나님과 이웃사랑).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지만, 인간학적으로는 일상의 삶에서 흔들린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신앙)의 정체성을 새롭게 회복하는 일이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과 열망을 풍성히 표현함으로써 마음의 새로움을 얻고, 참된 삶의 방향을 찾으며, 믿음, 소망, 사랑의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게 되는 일이라 할 것이다. 그 때문에 인간의 감성만을 지나치게 자극하는 예배가 아니어야 하며, 그렇다고 인간의 이성적 차원만을 지나치게 자극하는 예배도 아니어야 할 것이다. 예배의 전 과정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청각과 시각과 후각과 촉각과 미각 등의 오감사용을 통하여 경험하고 확인하며, 그러한 하나님의 일에 깊은 감사와 찬양으로 신앙의 감성을 표현하며, 이성과 감성이 교차하는 균형 활동에 따라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은혜 안에서 새로운 삶의 결단을 가지고 세상으로 흩어지는 회중들이 된다. 그것이 온전한 경배이며, 예배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회중들이 이러한 신앙적 경험과 모습을 견지하는 일에 얼마나 상응한 예배모습인지를 되돌아보고, 참된 은혜가 경험되는 예배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4) 예배의 공동성이 회복되도록 힘써야 한다.

기독교의 예배는 둘 이상이 모여, 행하는 공동체의 행위이다. 예배가 시작되면 개인적인 행동은 유보하고, 예배인도자의 안내에 따라 진지한 태도로 예배에 임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예배는 지금 이러한 공동성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개인적인 행동이 예배가운데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그 행동이 견지되어야 할 예배의 공동성을 방해하는 모습으로까지 여겨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예배인도자는 예배를 진행시키면서도, 회중과 함께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하는 자의 모습을 견지해야 한다. 그러나 인도자는 대부분 그러한 태도를 초월하고 있는 모습으로 비쳐진다. 실제로 예배순서에는 ‘다 같이’ 찬송을 부르도록 되어 있지만, 마이크를 혼자 사용하는 인도자는 회중의 찬송소리를 압도할 만큼 소리 내어 찬송을 부른다. 찬송의 공동성은 불균형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예배시간에 회중의 참여가 늦어지는 모습도, 예배가 끝나기 전에 예배자리를 떠나는 모습도, 모두 예배의 공동성을 방해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예배 중에 부교역자나, 전도사가 이층으로 오르내리면서 예배참석자들의 수를 헤아리는 모습도 공동성을 깨뜨리는 태도에 속한 행위이다. 옆 사람과 인사하고, 말을 건네는 개인적인 행위도 공동성에 합당하지 않은 모습이다. 요즈음은 예배 중에 성도의 교제라는 이름으로 인사말이 주문되어 서로에게 반가움을 표현하는 인사를 주고받게 한다, 그러한 행동이 예배분위기를 쇄신하는 일에 영향을 미칠지 모르나, 경배 중에 그렇게 하는 모습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공동성에 반하는 행동으로 여겨질 뿐이다. 그러한 인사말은 예배시작 전에 하든지, 예배를 다 끝마친 후에 해도 되지 않을까? 성가대가 찬양을 마치면,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요구하면서 일제히 회중이 박수치는 일도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아무래도 성가대원들을 격려(칭찬)하는 모습으로 여겨질 뿐이다. 이러한 예배의 모습은 대중적이며, 세속적이며,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너무 많이 조작해 내는 인간적인 예배행위로 여겨질 뿐이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진지함과 거룩함은 감소되며, 인간중심의 예배를 보여줄 뿐으로 여겨진다. 예배 중에 교회소식을 나누는 일과 새 신자를 환영하는 일, 서로 서로에게 인사하는 일 등은 모두 예배를 끝마친 후 회중이 다시 자리에 앉게 하여 교제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모습일 것으로 판단한다.

 

 

결 론

 

우리는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예배변화에서 나타나는 예배의 문제점들을 제기하고, 그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도 제시해 보았다. 무엇보다 먼저 한국교회는 초기 선교사들이 전해준 복음전도중심의 예배를 되돌아보아야 하며, 동시에 미국의 소수대형교회들이 보여준 예배형태의 의존적 상태에서 탈출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의 예배전통과 정신을 이어받아 설교와 성찬이 중심이 되는 말씀중심예전의 실천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예배의 주도권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지금의 감성을 자극하는 지나친 인간적인 노력으로 이해된 예배이해에서 벗어나, 오직 삼위 하나님을 향하여 열린 마음과 믿음으로 나아가, 죄를 고백하며, 감사와 찬양과 기도로 경배하는 거룩한 예배를 실현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또한 비록 예배를 수단화해서라도 75%이상이 비기독인들인 우리 국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전도의 사명은 중요하지만, 전도 집회로서의 예배와 말씀중심의 예전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하며, 그런 뜻에서 한국교회의 예배는 ‘찬양중심예배’에서 ‘말씀중심예전’으로의 전환이 시급하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건강하고, 진리에 합당한 올바른 예배의 실천은 그 자체가 이 민족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 구원으로 인도하게 되는 하나님의 방법임을 기억하고 실천되기를 기대한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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