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본 훼퍼의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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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훼퍼의 순종
1930년대 독일에서 나치 독일의 등장과 함께 숱한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은
정치적이고 정신적인 고뇌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히틀러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따를 것인가의 선택이었습니다.
이때 제3의 길은 없을까를 생각하던 한 젊은 신학자요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디히트리히 본 훼퍼’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그가 뉴욕 유니온 신학교의 교수로 초빙 받게 되자
그는 한 일년간을 미국에 건너가 조국의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고
1939년 여름 6월 2일에 미국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그가 미국에 도착한 다음 순간부터 기도시간마다 주님은 그에게
그가 있어야 할 곳은 독일이라고 말씀하시자
마침내 그는 어느 아침 기도 후 조국으로의 귀향을 결단합니다.
유명한 라인홀드 니이버 교수에게 편지 한 장을 남기고 7월 8일 한 달 만에
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는 위험천만한 독일로 배를 타고 돌아옵니다.
“주님은 이 어려운 시기를 내가 조국의 백성들과 함께 보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들과 이 고난의 시기를 함께 하지 않는다면
나는 전후 교회의 재건에 참여할 특권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나는 기독교 문명의 존속을 위해 조국의 패배를 소원할 것인지,
아니면 조국의 승리를 위해 기독교 문명을 포기해야 할 것인지를 선택할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귀국하자마자 1940년 목사로서 모든 설교와 출판을 금지당하고
1943년 반체제 음모자로 체포되어 1945년 4월 9일 39세를 일기로
플로센불그 교도소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교수대에서 이슬로 사라져 갔습니다.
1930년대 독일에서 나치 독일의 등장과 함께 숱한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은
정치적이고 정신적인 고뇌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히틀러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따를 것인가의 선택이었습니다.
이때 제3의 길은 없을까를 생각하던 한 젊은 신학자요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디히트리히 본 훼퍼’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그가 뉴욕 유니온 신학교의 교수로 초빙 받게 되자
그는 한 일년간을 미국에 건너가 조국의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고
1939년 여름 6월 2일에 미국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그가 미국에 도착한 다음 순간부터 기도시간마다 주님은 그에게
그가 있어야 할 곳은 독일이라고 말씀하시자
마침내 그는 어느 아침 기도 후 조국으로의 귀향을 결단합니다.
유명한 라인홀드 니이버 교수에게 편지 한 장을 남기고 7월 8일 한 달 만에
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는 위험천만한 독일로 배를 타고 돌아옵니다.
“주님은 이 어려운 시기를 내가 조국의 백성들과 함께 보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들과 이 고난의 시기를 함께 하지 않는다면
나는 전후 교회의 재건에 참여할 특권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나는 기독교 문명의 존속을 위해 조국의 패배를 소원할 것인지,
아니면 조국의 승리를 위해 기독교 문명을 포기해야 할 것인지를 선택할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귀국하자마자 1940년 목사로서 모든 설교와 출판을 금지당하고
1943년 반체제 음모자로 체포되어 1945년 4월 9일 39세를 일기로
플로센불그 교도소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교수대에서 이슬로 사라져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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