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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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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槪觀)

 

21-324.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여호수아 14장부터 19장까지를 보면 각 지파별로 가나안 땅을 분배할 때 제비를 뽑아서 분배를 했는데, 제비를 뽑는 것이 자기의 운수대로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제비를 뽑게 하는 것은 제비를 뽑는 방편으로 누구든지 가타부타 이유와 변명이 붙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다. 제비를 뽑지 않고 하나님께서 너는 이걸 가지고, 너는 이걸 가져라라고 할 수도 있는 거지만 제비를 뽑는 것은 하나님은 공평하시다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사람으로 변명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뜻이 있는 거다. 그러니까 제비를 뽑는 것은 하나님의 공평성의 발로이기도 한 거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들이 제비를 뽑던 안 뽑던 각 사람의 복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각자 가지고 가는 거지 남이 가져가는 게 아니다.

 

그리고 두 지파 반은 이미 가나안 동편에 기업을 얻었고, 각 지파별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았는데 아직 일곱 지파는 분배를 받지 못했다. 이에 땅을 분배받지 못한 지파들에게 여호수아가 하는 말이 너희가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취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너희는 매 지파에 삼인씩 선정하라. 내가 그들을 보내리니 그들은 일어나서 그 땅에 두루 다니며 그 기업에 상당하게 그려가지고 내게로 돌아올 것이라라고 했는데, 이런 지시를 한 것이 우리에게 주는 뜻이 무엇인가?

 

아직 기업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미 기업을 얻은 사람을 볼 때 어떤 소원성이 있는 거다. 그리고 기업을 얻은 사람들은 그것을 정복해서 자기 것이 되게 하려면 정복을 할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 ‘그 기업에 상당하게 그려가지고 내게로 돌아올 것이라라고 한 것은 각 지파마다 소원성이 있으니 그 소원성을 그려오라는 거다.

 

마음에 뭘 원하는지? 어떤 장소를 원하는지? 가령 대표자가 우리 지파는 농사를 지어야 되겠다라고 하면 농사하기에 좋은 넓고 기름진 땅을 선택할 거고, ‘우리 지파는 임업을 해야 되겠다라고 하면 임업에 적당한 곳을 선택할 거고, ‘우리 지파는 어업을 해야 되겠다라고 하면 이에 적당한 곳을 선택하게 되는 거다. 그래서 자기들이 원하는 곳을 자기들이 그려온 대로 받는 거니까 이 역시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공평성이요, 그래서 여기에도 뒷말이 없는 거다.

 

교인들을 보면 각자가 마음속에 천국을 생각하며 구원적으로 그 천국을 생각하는 그림이 있다. 이게 성도들이 다 같지는 않다. 이렇게 각자가 생각하는 그림대로 그 천국을 위해 믿음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니, 그 결과대로 장차 천국을 누리게 되는 거다. 따라서 천국을 누리는 면이 성도 각자가 차이가 있겠지만 모든 성도에게 천국을 준다는 면과, 천국을 누릴 수 있다는 면에서는 차이가 없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자기가 가나안 땅을 그려온 대로 그곳을 기업으로 받는 것과 같은 거다.

 

이 세상을 보면 실력이 있는 사람은 위치와 신분이 높다. 높으니만큼 소득이 많다. 다스림도 넓다. 만나는 사람도 많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만나는 만큼 기쁨도 다양하다. 같은 기술자라도 실력이 낮으면 만나는 사람도 적고, 그러면 활동성도 그만큼 적다. 같은 종류, 같은 기술이라도 이렇게 차이가 있다. 이처럼 세상을 질적으로도 보고, 양적으로도 보고, 존귀 영광적으로도 보면 이 세상은 단순한 게 아니라 각자의 실력에 따라 차등이 있고 차이가 있듯이 천국에서도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갈고 닦은 영능의 실력에 따라 누림과 쾌락에 차등이 있다는 것을 성경이 말을 하고 있다.

 

그러면 천국에 갔을 때 누림이 적은 사람은 자기보다 천국을 더 많이 누리는 사람을 보고 부럽거나 마음이 상하지 않을까? 천국은 그런 곳이 아니다. 첫째로 천국에 들어갈 때는 미움이나 시기나 죄적인 성분이 부활 때 다 빠져버리고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으로 된 성분만 가지고 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이고, 또한 천국은 각자의 영능의 실력만큼만 누리되 그 실력대로 극치의 쾌락을 맛보는 곳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기 스스로 자기 만족으로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린아이는 자기의 나이에 맞게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있다. 이걸 가지고 놀아야 최고로 즐거운 거지 복잡한 장난감을 주면 재미가 없는 것과 같다.

 

그리고 천국은 이 땅에서 닦은 영능의 실력대로 누림의 세계이지 실력을 연마하는 곳이 아니다. 따라서 성도는 천국에 가기 전에 그 천국을 다스리고 통치하고 누릴 수 있는 영능의 실력을 닦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보면 자기의 노력의 범위 내에서 숙달이 되면서 점차적으로 커진다. 안 커지면 거기에서 스톱이 돼버린다. 이러면 그것만 붙들고 살다 가는 거다.

 

이 세상은 선생이 있어서 간섭하고 가르쳐서 키워나간다. 선생이 없으면 어디 가서 누구에게 배우느냐? 마찬가지로 성도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성령님의 감화 감동을 받은 주의 종들로부터 천국의 정신 사상을 깨닫기도 하고, 권고 권면을 받기도 하고, 또는 징계도 받으면서 양육을 받으며 천국을 통치하고 다스리고 누릴 수 있는 실력인 영적인 면이 성장하는 거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고 속아서 기브온 족속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어떻게 보면 이들이 하나님을 속인 것인데 여호수아가 왜 이들을 살린 건가?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을 속이든지, 때리든지 어떻게 하더라도 선악과를 먹은 차원이다. 아예 저주 아래 사는 자들이다. 따라서 이들이 아무리 이스라엘을 속이고 어쩌고 할지라도 문제는 이런 자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이스라엘이 문제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묻지를 않았다는 것은 큰 실수이니, 이스라엘이라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매사에 하나님께 물어야 하고, 거짓 것에 속지를 말아야 하는 게 원칙인데 그러지를 않아서 속아 넘어간 거다.

 

그러면 왜 그들에게 속어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기브온 족속들이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불쌍한 모습을 하고 나타났고, 먼 곳에서 온 듯한 물건들을 보여주니까 인간의 생각으로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이려니 하고 속은 거다. 그러니까 속인 그들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기준이 아닌 인간의 지식과 기준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속아 넘어간 것이 문제가 심각한 거다.

 

이래서 기브온 족속들을 해하지 않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속을 하고 이스라엘의 종노릇을 하게 했는데, 얼마 안 가서 알고 보니 이들이 가까운 가나안 땅에 사는 족속들로 밝혀졌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에 이들을 죽이지 않고 장작도 패고 농사도 짓게 했다.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는 것이 어떤 사건이 있을 때마다 무당이나 점쟁이에게 가서 묻듯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물론 기도를 안 했다는 말도 되는 거지만 하나님 기준이 아닌 인간의 기준과 지식으로 판단을 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은 세상으로 나갔던 정신이 말씀으로 돌아와서 진리이치대로 구원거리를 생각을 하는 걸 말한다.

 

자기들의 종이 되겠다고 하는 기브온 족속을 죽이지 않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속을 했고, 그 약속대로 이들을 살려서 이스라엘의 종노릇을 하게 했으니까 이스라엘로서는 인간기준으로 판단한 것을 철저히 회개를 하고 구원을 이뤄가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런가 하면 기브온 족속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과 살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본받고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된다면 그들로서는 종노릇을 하게 된 것이 오히려 큰 복이 되는 거다.

 

그런데 그 이후에 이들을 누가 죽였느냐? 사울이 죽였다. 하나님 앞에 된 약속을 깨버리고 이들을 죽인 것에서 사울이 신앙의 성질이 나오는 거다. 그 결과로 그 가문에 재앙이 내렸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실수로 한 약속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을 것은 물론 실수를 안 하면 좋겠지만 그럼에도 실수를 했다면 재범을 하지 않도록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하고, 그 다음에 이룰구원 면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실수를 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지식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세상에는 지식이 둘이다. 근본적으로 본질로 믿는 사람은 생명과를 먹지만 안 믿는 사람들은 선악과를 먹는다. 자기가 생명과를 먹는다면 그 사상, 인격, 사고방식, 이해타산이 생명과의 지식 위에 놓여진다. 그러나 안 믿는 사람은 선악과의 지식으로 산다.

 

본문

 

2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천지와 만물하게 되면 물질세계의 하늘과 땅을 말한다. 우리가 이 천지와 만물 안을 하나하나 짚어보면 기후도 나오고, 존재적 조건도 나오고, 존재가 살려면 조건이 맞아야 한다. 그 다음에 먹이조건, 환경조건, 거처조건, 하늘의 천체의 법칙조건, 지상의 존재들이 사는 법칙조건, 다음에 존재조건에서 모든 산 자의 생태계의 조건, 동식물의 조건 등이 있다.

 

일 년 열두 달 사계절이 각 존재들에게 다 맞게 되어있으니 어떤 것은 추운 데서 사는데 북극곰이 따뜻한 아프리카 쪽으로 내려오면 안 될까? 이것들은 왜 그렇게 추운 데서 사는 거냐? 북극곰은 신체적 조건이 추운 데서 살도록 되어있는 거다. 다른 모든 것도 각자가 각 처소에서 살기 좋도록 된 조건에서 살고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존재와 사물을 이들에게 맞도록 생태계의 조건이나 각 존재의 조건, 그리고 사시사철 등을 법칙적으로 정해놓으셨는데,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을 다 만드신 후에 이것들을 아무리 돌아보아도 두 번 다시 손이 갈 일이 없이 완벽하게 창조를 한 거냐, 다시 손을 볼 게 있는 거냐?

 

내 눈이 아주 작은데, 하나님께서 내 눈을 작게 만들어 놓고 아이, 좀 더 커야 하겠는데하며 손을 안 봐도 될까?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찢어지면 찢어진 대로 만들어 놓고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되는 거다. 그 증거가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 양심으로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 눈을 왜 크게 안 만들었을까?’ 하며 원망한 적이 없다. 아무리 눈이 작아도 눈이 큰 사람이 보는 걸 다 본다. 속눈썹이 많은 사람이나 적은 사람이나 다 같이 보이는 거지 속눈썹이 많은 사람은 그 속눈썹이 눈앞을 기둥처럼 가리느냐? 그렇지를 않다. 그러나 사람이 만들어서 붙인 속눈썹은 눈앞을 가릴 것 같다. 그래서 그 눈썹을 고데기로 자꾸 치켜 올리는 거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할 때 인간의 구원에 필요한 것을 다 만들어 놓은 줄 알았는데 수천 년이 흘러서 마지막 때 가서 보니 그 때서야 , 이것이 빠졌구나. 내가 이것을 몰랐네.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얼마나 애를 먹었을까? 진작 알고 만들어 놨으면 사람들에게 마음대로 쓰임이 됐을 텐데 내가 이걸 만들어 놓지 않아서 사람들이 이렇게 불편했구나. 내가 실수를 했구나이게 있을까?

 

하나님께서 만물을 만들어 놓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는 것은 당신 보시기에 인간구원에 있어서 모든 게 완벽하다는 거다. 혹 우리 인간 편에서 볼 때 저 모기는 없었으면 좋겠다. 저 뱀은 없었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거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이런 것들도 다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것이니 보시기에 좋은 거다.

 

그런데 지렁이를 보면 눈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눈이 없는 지렁이를 만들어 놓고 이 지렁이 사방으로 큰 바위를 만들어 놓아서 지렁이가 그곳에서 나갈 수 없게 해 놓았다고 하면 이 지렁이가 하나님께 할 말이 없을까? 분명히 할 말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뭐라고 말을 할까? ‘나에게 눈을 안 만들어 놓을 것 같으면 사방에 바위를 만들어 놓지 말아야 내가 땅이 있는 곳으로 기어가서 살 수 있지 않습니까?’ 라는 말이 안 나올까?

 

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께서 하나하나를 다 만들어 놓고 아무리 되돌아봐도 내가 참 잘 했다. 보기에 참 좋다라고 해야 만이 그 다음에 일곱째 날에 안식이 되는 거다.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으면 자꾸 염려 걱정 근심이 되기 때문에 안식이 안 된다. 당신이 만든 모든 것이 우리가 구원을 이루기에 완벽해야 만이 당신이 안식이 된다. 이 안식이란 마음이 편하고 기쁜 것을 말한다.

 

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안식일 날은 복을 받는 날이라고 한다. 뭐가 복이냐? 하나님의 것을 받는 것, 물질세계를 다스리고 통치할 수 있는 것을 받는 것. 하나님의 것을 받는 것이 복된 사람이다. 이걸 알아야 한다.

 

4-6: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안개로 땅을 적셨으니 그 땅이 얼마나 기름질까? ‘네 마음대로 농사를 지어봐라.’ 그러니 얼마나 자유로울까?

 

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그냥 흙이 아닌 흙 중에 최고로 좋은 흙으로 사람을 지었다.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사람이 생령이 됐다. 사람은 몸과 마음과 생령의 존재다. 짐승은 생령이 없다. 하나님을 알고 교제할 수 있는 생령을 가진 인간이 타락을 함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세계에 대해 미련할 정도로 모른다. 정말 어둡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 중에 흙으로 지으신 우리 인간에게만 코에다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 ‘이 생기가 영이냐, 혼이냐?’ 하기 이전에 숨을 쉬어야 살 수 있는 사람의 코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 넣었으니 이는 인간아, 너는 하나님의 입김으로 사는 존재다이런 의미가 있는 거다. 인간은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다. 우리 기독자들은 그냥 보면 지상의 공기로 사는 것 같으나 하나님의 생기로 사는 존재다. 안 믿는 사람은 이걸 모른다.

 

인간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숨을 쉬어야 살 수 있는데, 만일 인간이 물에 빠졌을 때 물고기가 쉬는 숨을 물속에 있는 사람의 코에 불어넣으면 물속에서도 계속 사는 거냐? 그리고 사람의 코를 곰이나 늑대의 코에 맞대고 숨을 쉬면 곰이나 늑대의 콧바람으로 계속 사는 거냐? 우리 인간이 숨을 쉬며 산다는 게 뭐라고 표현을 할 수 없는 신비로운 거다. 텔레비전에서 보니 어떤 사람이 오염이 안 된 높은 산의 흙을 가져다가 그 흙을 이용해서 공기청정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흙에는 몸에 좋은 성분이 있는데 이것을 과학적으로 이용해서 사람이 마시도록 해서 몸에 좋도록 한 거라고 한다.

 

8-9: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에덴동산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마련하신 특수한 장소다. 이 에덴동산에는 먹기 좋고 아름다운 과일이 다 있고, 동산 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도 있다.

 

10-14;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이 네 강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위치나 지형적으로 어디고, 어떻다하고 말들을 하지만 지도를 놓고 이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위치적으로나 지형적으로 맞지를 않는다. 그러니까 이건 사람의 정신과 사상을 말해주는 거다. 그래서 이 네 강을 영적 정신과 사상적으로 보면 맞는다.

 

이 강들은 모두가 생명과가 있는 에덴동산에서 발원이 되어 흐르는 것이니, 생명과를 먹으면 축복의 발원지가 되어서 내려가고, 선악과를 먹으면 저주의 발원지로서 저주가 내려가는 것을 말해준다. 시간적으로 종족적으로 이런 게 있는 거다.

 

그리고 각 강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좋은 것은 말씀을 했는데, 호마노도 나오고 뭣도 나오고 말씀을 한 이것은 특수한 장소를 마련해서 주신 에덴동산에서 생명과를 먹으면 그곳을 발원으로 해서 흐르는 네 강에서 모든 좋은 보화를 다 얻을 수 있다는 거다. 금을 캘 때 강에서 흘러 내려오는 모래 등을 체로 받쳐서 금을 얻기도 하는데, 강은 영적으로 보면 시간이고 세월을 말하니까 우리가 이 세상의 흐르는 시간 속에 살면서 자타가 겪는 사건 환경 가운데서 구원거리를 채취해서 구원을 잘 이뤄가야 한다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생명과를 먹는 사람은 시간과 세월 속에서 이룰구원의 보화를 많이 건질 수 있는 거다.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사람으로 에덴동산을 다스리게 하셨는데,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란 자타가 구원을 이룰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을 말한다.

 

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에덴동산을 다스리면서 다른 과일은 다 먹어도 되지만 먹으면 정령 죽는 선악과만은 먹지 말라고 했다. 선악과란 인간기준, 자기 기준을 말한다. 앞에서 여호수아서를 말할 때 여호수아가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판단을 내렸는데, 이것도 선악과다.

 

이 세상에는 표현방법만 다르다 뿐이지 생명과와 선악과밖에 없다. 지식도 생명과를 기준으로 한 지식과, 선악과를 기준으로 한 지식 두 가지밖에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사람을 대해야 한다. 안 믿는 사람이 생명과를 먹는 법은 없다. 그런데 믿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생명과를 먹어야 하는 건데 정신 사상적으로 세상에 속한 것을 목적으로 하고 사는 사람이 있으니 이건 선악과를 먹는 거다. 이런 사람은 안 믿는 사람들의 마음과 똑같은 거다.

 

18-19: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 말을 누가 한 거냐? 하나님이 내가 가라사대그런 거냐, 기록자가 한 말이냐? 기록자가 한 말이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돕는 배필로 여자를 만들어서 남자에게 주려고 마음을 먹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짐승의 이름을 다 지었다. 이 때 여자는 아직 안 만들었다.

 

20-22: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사람이 깊이 잠이 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해서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취해서 여자를 만들어서 아담에게 데리고 왔다. 그러니 깊은 잠을 자고 난 아담이 자기 앞에 있는 여자가 어디서 온 것인지 모를 게 아니냐?

 

우리들도 자기 남편이나 아내에게 네가 어디서 왔느냐라고 물어봐라. 부부를 보면 서로가 어디에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 채 각기 살고 있었는데 어찌어찌 만나서 부부가 되었으니 이렇게 부부가 되기 전에는 서로가 어디에 살고 있었는지 알았느냐? 모른다. 이걸 생각해 보면 참 신비롭다.

 

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게 비유이지만 아담이 여자를 처음으로 만났는데도 그렇게 예쁘고 기쁘다. 그래서 남자가 하는 말이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게 무슨 말이냐? ‘너는 나보다 더 좋다이 말이다. 나보다 너에게 더 사랑이 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아담이 하와를 보고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라고 했는데, 깊이 잠이 들었던 아담이 하와를 자기 뼈로 만든 것인 줄을 알까? 깊이 잠이 들었다는 것은 하와를 자기의 갈비뼈로 만들었다는 것을 감쪽같이 모른다는 거다. 그런 것처럼 자기의 아내나 남편이 바닷가나 벽촌에 살고 있었는데 서로가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 준 것이니 이제는 둘이서 가정을 이루어 구원운동을 해 나가야 한다. 이게 부부로 짝지어 주신 하나님의 뜻이다.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나가서 따로 살아라. 그래야 번식도 되고 개척도 된다.

 

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서로가 흉을 볼 게 전혀 없다는 거다. 다른 말로 하면 정말 깨끗하다. 죄가 없다. 이때는 선악과를 따먹기 전이니까.

 

3.

 

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뱀이 가장 간교하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이 뱀을 간교하게 만든 거냐, 뱀 자기가 간교하게 된 거냐? 그리고 뱀은 혀가 둘로 갈라졌는데, 이건 하나님이 가른 거냐, 뱀 자기가 가른 거냐? 뱀이 갈라진 혀를 놀리는 것을 보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우리가 이것을 보면서 영적으로 뭔가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뱀을 그렇게 만드신 건데, 그 이유는 우리로 뱀의 모양이나 생태를 보고 구원도리와 이치를 깨달으라는 거다.

 

그러면 이 뱀은 우리의 구원에 이용을 당한 후에는 지옥에 가는 거냐? 그게 아니다. 뱀은 생겨먹기를 그런 거고, 그걸로 통해서 인간이 영적인 면에서 뱀처럼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것에 속지 말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든 것일 뿐이지 뱀은 도덕성이 없기 때문에 지옥에 가지를 않는다. 다른 짐승들도 마찬가지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뱀이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한 말과 뭐가 다르냐? 먼저 생명나무가 빠졌다. 물론 선악과도 빠졌지만 결정적으로 생명나무가 빠졌다. 뱀이 만일 생명나무는 먹어도 되지만이라고 말을 했다면 여자로서는 들은 말도 있고 해서 정신이 번쩍할 텐데 뱀이 이걸 알고 생명나무에 관한 말은 쏙 빼버린 채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라고 물었다. 이건 하와의 그 다음의 말이 어떻게 나오나?’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즉 하와의 허점이 어디에 있나를 알기 위해서 한 번 찔러보는 거다.

 

2-3: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와가 뱀의 말에 대답을 한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뭐가 다르냐? 생명나무도 빠졌고, 선악과도 빠졌고, 그리고 하와는 하나님께서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먹지도 말라는 말씀은 하셨으나 만지지도 말라는 말씀은 안 하셨다. 그러니까 만지지도 말라는 말을 덧붙인 거다.

 

그러니까 뱀의 수법에 빠진 하와가 생명과도 빠졌고 선악과도 빠진 말을 했으니 이는 곧 생명과도 모르고 선악과도 모르는 상태로구나. 그러니 그의 모든 후손들이 하와처럼 생명과도 선악과도 모르는 상태로 그냥 내려오고 있는 거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아느냐? 혹 말은 할지라도 그 뜻은 모른다. 이게 참 묘한 거다. 그러면 지금도 이 두 지식과 사상이 흘러오고 있다는 것을 오늘날 기독교가 아느냐? 모른다. 참 희한한 거다. ‘예수 믿으면 산다이것뿐이지 자기가 믿는 사상의 근거가 생명나무인지 선악과인지를 모른다.

 

4-5: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뱀이 하는 말이 너희들이 하나님처럼 될까 싶어서 생명과를 못 먹게 했다고 한다.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마귀의 말을 듣고서 선악과를 쳐다보니 먹음직 보암직 탐스럽게 보여서 그걸 따서 자기도 먹고 남편에게도 주어서 먹게 했다.

 

선악과를 먹으면 어떻게 되느냐? 모든 게 인간 자기 기준에 보암직 먹음직 탐스러운 것을 목적하고 취하게 된다. 그러니까 자기의 눈에 보이는 것이 자기의 기준이다. 이게 타락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으면 정령 죽는다고 하셨는데 신령한 천국의 것은 안 보이고 자기 눈에 보이는 세상을 소원 목적하며 사는 것이 선악과를 먹는 거다.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선악과를 먹고 나니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었으니 눈이 어두워졌다거나 멀었다고 한다면 이해가 되겠는데 눈이 밝아졌다고 한다. 그러면 선악과를 계속 더 따먹으면 어느 정도까지 밝아지는 거냐? 이게 뭘 말하는 거냐?

 

생명과를 먹으면 신령계를 보게 되는데 이건 눈이 밝은 거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으면 영적인 신령계를 보는 눈이 어두워지는 대신 자기 죄는 못 보고 남의 죄를 보는 눈이 밝아진다. 내가 잘못한 것은 안 보이고 상대가 잘못하는 게 자꾸 크게 보인다. 이 면으로 눈이 밝아진 걸 말한다. 그러니 상대를 보고 헐뜯고 흉을 보고 꼬집어 뜯고 한다.

 

이 일이 있는 이후로 모든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은 그 정신이 유전이 되어서 지금도 그렇고 세상 마지막 날까지 온 인간이 서로 싸우는 거다. 이렇게 서로 싸우는 것은 서로가 자기의 죄는 못 보고 남의 흉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싸우는 부부는 선악과를 먹은 거다.

 

우리가 살면서 남의 죄가 자꾸 보이면 뭐라고 기도해야 하겠느냐? 기도는커녕 대부분 하나님이 저 놈을 빨리 안 데리고 가나?’ 라고 하면서 저주를 한다. 부부 같으면 저주를 하면서 농약을 타서 먹이기도 한다. 그러면 남의 죄가 자꾸 크게 보이면 누가 괴롭겠느냐? 바로 자기 자신이 괴롭다. 말하자면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자기 자신이 잠을 못 자고, 괴롭고, 병들고, 미쳐버린다. 우리는 이런 일이 있을 때 저에게 주님의 아가페 사랑의 마음을 주옵소서. 내 눈의 들보부터 뽑아주옵소서라고 기도를 하라.

 

자기 눈에 들보가 있으면 누구부터 안 보이는 거냐? 자기부터 안 보인다. 자기 눈에 들보만한 티가 있으면 남이 안 보이는 것은 나중 얘기고 자기 눈부터 고통스럽고 아픈 거다. 성경은 이런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다.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무화과나무 잎 하나로 가리는 것이나 열 개를 줄줄 엮어서 가리는 것이나 그 잎이 마르면 다 부서져 버린다.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만든 옷은 일 년 열두 달 입을 수 있는 게 아니다.

 

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전에 날이 서늘하다고 하는 것이 누구의 느낌이냐? 사람 자기의 느낌이다. 그러니까 날씨가 서늘하다기보다 자기들이 행한 것이 있어서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이로 인해 그 마음에 느끼는 서늘함을 말하는 거다.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무 사이에 숨었다. 사람은 죄를 지으면 이상하게 숨고 변명을 하는 게 있다. 인생이 거의가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죄도 아닌데 숨기고 싶은 것도 있다. 실질적으로 죄는 아닌데 자기의 분수나 위치를 벗어난 일을 하면 자기 마음에서 속임이 나온다. 어릴 때 죄도 안 지었는데 순경이 저기서 오면 마음이 오싹하면서 날 잡으러 오나?’ 하는 생각을 한다.

 

9-10: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네가 어디 있느냐?’ ‘내가 벗었으므로 숨었습니다.’ 말은 바른 말을 했다.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11-13: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이 하와에게 핑계를 대는 게 나오고, 하와가 뱀에게 핑계를 대는 게 나온다. 죄를 지으면 핑계가 나오는구나.

 

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뱀에게 저주를 하면서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라고 했다.

 

사람이 뱀의 말을 듣고 저주를 받고, 뱀도 이로 인해 저주를 받아 이 모양이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뱀에게 왜 이런 저주를 하셨는지 사람이 알아들어야 한다. 즉 안 믿는 사람들은 배로 다니는 거다. 죽을 때까지 흙에서 나오는 소산, 땅의 소원 목적으로 산다.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뱀이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한다. 그리고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 또한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뒤꿈치를 문다. 발뒤꿈치를 물면 사람이 뒤를 돌아보게 되는데, 뒤를 보게 한다는 것은 세상을 보게 하는 거고, 모든 이해타산 사고방식이 세상위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을 말한다.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그 다음에 잉태의 고통이 나오는데, 수고하고 자식을 낳는다고 한다. 그리고 여자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여자를 다스릴 것이라고 했다. 이 모든 게 타락으로 인해서 온 고통들인데, 저주 된 정신으로 여자를 다스린다는 것이니 여자 입장에서 얼마나 마음에 고통이 있겠느냐?

 

그런데 이걸 영적인 면으로 좋은 뜻으로 바꿔서 아내를 성도로 보게 되면 성도가 신랑이신 예수님을 사모하면 예수님은 너를 다스린다는 말이 된다. 이게 진리통치를 받는 거요 생명과를 먹는 것인데 생명과가 아닌 선악과를 먹었으니 저주의 결과가 온 거다.

 

17-19: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으므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는다. 또한 땅은 엉겅퀴를 내고, 먹을 것은 채소가 되고,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결국은 흙으로 돌아간다. 이게 선악과를 따먹고 육의 사람이 된 자가 받는 저주다.

 

사실 이런 것은 일반적으로 되는 일들인데 우리가 성경을 놓고 영 기준으로 이 말씀을 보니까 이런 영적인 면이 보이는 거다. 그래서 영의 사람들은 땅은 엉겅퀴를 낼 것이라는 말씀을 보고 자기의 마음 밭을 가는 거다. 노력을 해야 자기 마음 밭이 좋은 흙이 되는 거다.

 

20-21: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 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아담이 하와를 산 자의 어미라고 했다. 산 자의 어미는 죽은 자의 어미보다 낫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가죽옷은 오래 간다. 이건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서 우리에게 입혀주시는 의의 옷을 비유적으로 말하는 거다.

 

22-25: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선악과를 따먹은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어보내서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했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로 도는 화염검을 두어서 이들이 다시는 에덴동산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생명과를 먹지 못하게 했다.

 

사람이 일단 저주받을 짓을 하면 하나님의 생명권 통치 안에 있지를 못한다. 있어봐야 계속 죄를 짓게 된다. 그래서 다시는 생명과를 먹을 수 없도록 쫓아낸다. 이런 상태에서 그리스도로 통한 회개가 안 되면 생명과는 허락이 안 된다. 이걸 현실의 삶에 적용해 보면 예수 믿는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정신과 사상이 세상으로 나가면 이건 진리통치 밖에 있는 거다. 성도는 진리통치 안에 있어야 은혜를 받겠는데 밖에 있기 때문에 은혜를 못 받는다. 하나님으로부터 허락이 안 된다. 이런 상태의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목사가 복 받아라. 성령을 받아라한다면 이게 될 말이냐? 귀신같은 소리일 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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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이상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로 통한 인간을 창조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진리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분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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