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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눈 속에 피는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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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속에 피는 장미”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은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 1499년 1월 29일~1552년 12월 20일)의 생애에 대한 책이었습니다.  카타리나 폰 보라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부인입니다. 카타리나 폰 보라는 1499. 1. 29일,  독일의 립펜도르프에서 태어나 10살이 되었을 때, 베네딕트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브레나에 위치한 수도원 학교에 들어가 공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외가 친척 아주머니가 원장 수녀로 있고, 고모가 수녀로 있는 님쉔의 마리엔트론 시토회 수녀원에 들어가 16살에 서원하고 수녀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1517년 비텐베르그 대학의 마르틴 루터 교수가 95개 조문의 토론의제를 내걸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 카타리나(캐테)의 나이 18살이었습니다.  카타리나를 부를 때, 축약하여 캐테라고 불렀습니다.  수녀원에 있으면서 캐테도 루터의 가르침에 대하여 듣게 되었습니다. 캐테를 비롯한 9명의 수녀들도 루터의 가르침이야말로, 성경적임을 확신하고 수녀원을 함께 떠날 것을 결심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평생 수녀로 서원하였고, 굳게 닫힌 수녀원을 나온다는 것을 연약한 여자로서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높은 담을 넘을 수 있는 것도 아니요, 굳게 닫힌 정문을 열고서 나오는 것은 생각 할 수가 없었습니다.   

루터는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카타리나 폰 보라라는 수녀한테서 온 편지였습니다.   

“존경하는 루터 선생님, 저희들은 수녀원의 수녀들입니다. 저희들은 일생 동안 이곳에 묶여 독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과연 옳은지 오랫동안 번민해 왔습니다. 일찍이 선생님께서도 믿음의 근원은 성경이며, 신부나 수녀도 결혼할 수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저희들은 이곳을 탈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엄격한 규율을 강요하는 수녀원이 아니더라도 어디서든 하나님의 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겠습니다. 제발 저희들의 탈출을 도와주소서. 아멘.”  

1523. 4 4 부활절 전야에 수녀원에 물고기를 대주는 장사꾼 레온하르트 코페(Kopp)라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물고기를 담는 통에 들어가 숨어서 9명의 수녀들이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토르가우르로 향하였고, 며칠 후 종교개혁의 중심지 비텐베르그에 도착하였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수녀들에게 살 길을 마련해주었고 남자를 소개하여 결혼시켜주었습니다.  이 캐테는 뉘른베르그 출신인 히에로니무스 바움게르트너와 결혼을 약속하였지만, 소식조차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루터는 그에게 편지를 보내 결혼하지 않는 연유를 물었지만, 그는 부잣집 여자와 결혼하고 말았습니다.   

카타리나는 몹시 낙심하였습니다.  루터는 카타리나를 자기 친구와 맺어 주려 했습니다.  카타리나는 거절하면서, 루터라면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루터는 망설였습니다. 그 역시 카타리나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성직자의 결혼을 지지해왔지만, 막상 자신의 결혼은 선뜻 결정하기 어려웠습니다.  

1525년 6월, 카타리나가 수녀원에서 나온 지 2년, 루터는 42세, 카타리나의 27세 때였습니다.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려야 정식 부부로 인정받을 수 있었지만 파문당한 성직자 루터와 도망친 수녀 카타리나는 교회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형식보다 양심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한 때문이었습니다.  

캐테는 얼마나 성실하였든지, 일 년이 지난 후 루터는 친구에게 캐티에 대하여 자기에게 과분할 정도로 기쁨이 되었다고 자랑하였습니다.  그녀는 책임성이 강하여 가난한 학생들을 먹이고 입히며 루터를 내조하였습니다.  남편 루터가 종교개혁에 전념할 수 있도록 6명의 자녀를 돌아보며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남은 고아들 12명을 양육하고 수십 명의 대학생들을 먹이면서 독일 가정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루터가 건강이 악화되어 힘들어할 때에도 캐티는 정성어린 간호로 루터에게 위안이 되고, 회복할 수 있게 했습니다.  캐티는 남편 루터가 죽은 후 6년 동안 자녀들과 고아들을 돌보면 교회를 봉사하다가 주님 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흑사병이 여러 차례 발병하면서 비텐베르그를 떠나 토르가우로 가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었고, 그 길로 회복되지 못하고 1552. 12. 20일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카타리나 폰 보라는 기독교 최초의 목회자 부인으로 기록된 인물이요, 독일이 자랑하는 사모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일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정성스럽게 살고, 생명을 다하면서 신앙을 지켜가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마르틴 루터가 수녀 출신인 카타리나와 결혼하는 것은 전 유럽 사회를 경악시킨 전대미문의 사건이었고, 불가능해보였던 사랑의 결실이었습니다.  카타리나는 복음에 충실한 신앙인이었고, 루터를 진심으로 사랑한 여인이었고, 억센 생활력으로 가정을 이끌어갔으며, 교회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봉사한 헌신하신 성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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