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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장엄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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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신문기자의 블로그에 어떤 목사님을 소개하는 글을 읽고 좀 놀라웠습니다. 
‘기자가 어떻게 목사를 칭찬할 수가 있지?’ 

기자는 천기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목사를 ‘장엄한 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그를 소개하였습니다. 
  
천목사는 저처럼 한 교회를 담임하는 평범한 목사가 아니라 
중국에서 탈북자들을 돕는 사역을 감당하는 분이었는데, 
그는 참으로 극적인 이력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원래 그는 목사가 아니라 사업가였는데,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러 중국에 갔다가 그의 인생의 진로를 바꾸어 놓는 결정적인 일을 겪게 됩니다. 

그는 북경을 거쳐서 두만 강가에 있는 도문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사진을 찍으려 하는 데 강물에서 무슨 신발 같은 것이 떠내려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그것은 신발이 아니라 사람의 시체였습니다. 
깜짝 놀라서 물어보니 ‘그것은 북한 사람의 시체인데 심심치 않게 떠내려 온다.’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북한과 접경한 몇몇 도시들을 다니면서 말로는 옮기기 힘든 북한 사람들, 
특히 여성들과 아이들이 겪는 수치스러운 광경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런 참혹한 광경을 목격한 그는 이런 곳에는 다시는 오지 않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이듬해 가족들의 간청을 견디다 못한 그는 사업을 접고 목회자 수업을 쌓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는 4년 후인 1999년 목사가 된 그는 다시 중국을 방문합니다. 
선교지를 탐방하기 위해서였는데, 연길을 방문했다가 그 곳에서 그가 4년 전에 보았던 
참혹한 북한주민이 겪는 고통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결국 <두리하나선교회>라고 하는 선교단체를 조직하게 됩니다. 
북한 동포들의 탈북을 도와주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직접 탈북자들 12명을 인솔해서 중국과 몽골 국경을 넘다가 
중국 공안에게 붙잡히고 맙니다. 
2001년 12월의 일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또 다른 고생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영하 50인 추운 날씨 가운데서 차디찬 감옥에서 고생을 해야만 했습니다.  
검사는 그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습니다. 
"시킨 자가 누군가." 
"아무도 시키지 않았다. 내 민족이 마음 아파 돕는 것이다. 
 당신이 서울에서 대만 거지를 봤다고 하자. 그냥 지나치나? 도우면 죄가 되나?" 
"비법월경자 납치죄, 3국 도피 방조죄, 불법종교활동죄! 장난하지 마라. 
 돕겠다는 마음? 믿지 않는다. 교사(敎唆)한 자가 누군가." 
"신(神)이 교사했다." 

중국 검사와 천 목사는 꼬박 6개월 동안을 이와 같은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검사는 천 목사를 찾아 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제 털어놔라. 진짜 누가 시켰나." 
"진짜다. 신이다." 
"어떻게 시켰나?" 
"성경책에 적혀 있다. 고아, 과부, 나그네를 도우라고 돼있다. 
 탈북자들이 다 고아고 과부고 나그네다." 
"나도 그 책 읽어볼 수 있나?" 

순간 천 목사는 머리카락이 곤두섰습니다. 
"이 사람이 불법종교활동 함정 수사를 하는 것은 아닌가?" 

한참 고민하다가 그러라고 했습니다. 

다행히 함정은 아니었고, 검사는 그에게 
"You, good man" 이라며 악수를 청하곤 헤어졌습니다. 

죄수는 검사에게 명함 한 장을 인사치레로 건넸고, 
그로부터 보름 후에 천 목사는 수갑을 차고 한국으로 추방되었습니다. 
  
그런데 2002년 12월에 중국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나 그 검사입니다..." 
한국에 갈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천 목사는 그를 자기 집으로 오게 하여서 한 주일을 함께 지냈습니다. 
2003년 4월에 그가 다시 연락을 했습니다. 
뉴질랜드로 유학을 가고 싶은데 좀 도와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 목사는 "한국도 좋은 데 뭐하러 뉴질랜드로 가려 하느냐"며 충고를 하였습니다. 
결국 그 검사는 고려대학교에 입학을 하였고 2년 내내 천 목사의 집에서 생활을 하면서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천 목사의 딸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반드시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약속을 하고 결혼을 승낙했는데, 
이 점에서는 사위가 자신을 속였다고 천목사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2012년까지는 중국에 들어 갈 수가 없게 되었지만, 
지금도 두리하나선교회를 통해서 여전히 탈북자를 돕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1999년부터 지금까지 약 700명의 탈북자를 중국과 러시아로부터 탈출시키는데 성공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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